|
기독교와 경영
조장 : 도시부동산학과 윤성일 20052633
조원 : 생활체육과 정연창 20013332
경영학과 김소영 20071620
기독교학과 권태웅 20063196
서론
우리는 지금 고도로 집약되어지고 다양한 문화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수십억 명의 인류는 그들의 생존을 위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삶의 가치를 추구하고 있다.
이러한 육체적 정신적 가치는 현재를 살고 있는 인류의 기본적인 삶의 지표가 되며 당시의 사회를 지배하는 하나의 철학적 사조라고 설명할수 잇다.
수세기동안 수많은 철학자들은 인간 삶의 원천을 찾아 연구 했으며 그러한 이론을 바탕으로 인류를 상대로 한 많은 실험들이 감행되어져 왔다. 희랍시대의 우주를 기원으로 하는 철학을 지나 중세의 신의 계시를 중시하는 인간의 삶을 지나 근대 철학의 아버지 테카르트에 이르러 모든 세상의 중심이 인간에게 돌아왔다.
철학이란 그 당시의 사회를 움직이는 기본 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으로 볼때
경영의 사회적 의미는 당시의 철학적 사조를 따라갈 수밖에 없다. 희랍시대와 중세시대에는 우주와 절대자를 중심으로 한 철학으로 경영 또 한 인간이 알 수 없는 절대자의 뜻을 따랐지만 근대의 인간중심의 사회에서는 좀 더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경영을 추구하게 되었다.
경영이란 일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인적 , 물적 자원을 결합한 조직 또는 그 활동을 뜻한다. 그렇다면 과연 신에게서 인간으로 전환되어진 인류의 목적이란 과연 인간에게 유용한 것일까? 인간의 목적은 정신적 육체적인 이윤의 추구이다. 그렇다면 신의 목적은 무엇인가? 신의 목적은 인류의 구원이며 곧 이것은 사랑으로 집약 될 수 있다.
기독교적 경영이란 것은 두가지 목적의 충돌이다. 최대의 이윤의 추구와같은 공리주의와 모든이들의 사랑하는 신의 섭리가 과연 조화할수 있을까?
한국사회에는 기독교와 경영의 깃발을 들고 있는 기업이 상당수 있다. 대표적으로 과거 유한양행의 고유일한회장 께 선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경영으로 사회에 큰 공헌을 하였다. 하지만 원천적으로 존재하는 기독교와 경영의 모순은 사회의 혼란에 힘입어 크게 부각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이랜드의 비정규식 사태를 예로 들수 있다. 이랜드 사태란 2003년 7월에 시행된 비정규직 보호법이 비정규직을 보호하고 정규직으로 전환하기 위한 법의 시행을 앞두고 사측이 정규직 전환과 관련하여 비정규직 계약을 3,6,9개월 심지워 0개월 까지 근로자에게 강요하였으여 이에 반대하는 근로자를 해고시킨데 대하여 사측과 노조의 대립이 심화되면서 공권력이 투입되어 일어난 사건이다. 대표적인 이랜드 그룹의 경영 효율성을 위한 이러한 조치는 기독교의 나눔의 정신에 위배되는 사건으로 사회 전반에 걸쳐 이랜드 기업 만의 문제가 아닌 기독교 전체의 문제로서 대두대고 있다.
이랜드의 이같은 처사는 인간을 경영의 도구로 여긴 것으로서 자본주의 자체가 인간이 존재함으로써 공생하는 것이 아닌 자본주의 자체가 인간을 소유하고 소비함으로써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적 경제 원칙인 진정한 섬김과 거룩성에 상반되는 것이다. 따라서 본 발표에서는 최근 심화되고 있는 기독교 경영에 대한 올바른 의미를 파악하고 현재 발생하고 있는 여러 문제들에 대하서 원론적인 입장에서 그 대안을 찾고 과연 기독교 경영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본론
A 사장이 경영하는 K 기업은 성경에 입각하여 운영하는 정직한 기업으로 유명하다. A 사장은 무늬만 크리스천 기업가와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그는 물건을 살 때에도, 팔 때에도 정직하였으며 그외 기업을 운영하는 여러가지 과정, 예를 들어 직원을 채용할 때에나 해고할 때, 세금을 납부할 때, 마케팅, 재무관리에 이르기까지 성경의 원리에 입각하여 기업을 운영하였다. 그러나 얼마전 K 기업은 부도가 나서 문을 닫게 되었다. 세금을 정직하게 납부하며 거래처와의 정직한 거래, 인격적인 고객과의 관계형성 만으로는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1) 현대 경영의 긍정적 및 부정적 요소
산업화 시대 이후 기업만큼 사회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조직은 없을 것이다. 기업은 수많은 일거리를 창출하며, 생활패턴을 주도하며, 가치관에 영향을 미치는 조직으로 변천되어 왔고, 이러한 기업을 운영하기 위한 경영기법은 단순히 영리기업뿐 아니라 학교, 공익법인, 교회, 시민단체 등 각종 비영리단체의 경영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인류의 복지증진에 막대하게 기여했음에도 불구하고 각종 부작용이 속출하고 있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예를 들어, 비록 경영 (Management) 그 자체의 문제점은 아닐지라도 경영의 대상인 영리.비영리를 포함하여, 기업들의 부적절한 상행위는 사회적 지탄이 되고 있다. 고객을 속이거나 종업원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문제, 거래처에 대한 횡포와 환경을 파괴하는 문제, 자원을 낭비하는 문제, 각종 분식회계로 인한 사기 및 탈세, 경영자들의 도덕적 해이 등 끝이 없다.
특히 이러한 상황속에서 크리스천 경영자가 대면하는 갈등은 매우 심각하다. 소위 세상적 방법에 의해서 사업을 경영하여도 성공할 가능성이 매우 낮은 경쟁시대에, 성경적 경영기법-만약 있다면-을 도입할 경우, 과연 성공할 가능성은 있는가? 그에 따른 번민과 불확실은 어떤 것들인가? 만일 성경적 기업경영방법을 도입하면 세상적 기업경영의 문제점을 해결하고 한계점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2) 대안으로서의 기독경영
일반경영에 따른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기독경영이 중요한 대안으로 대두되고 있다. 이를 위해 일부 기관들1은 성경적 경영에 대해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있으며 실제로 이와 같은 원칙에 의거하여 사업을 영위하는 크리스천 기업들이 최근에 많이 생기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기독경영을 논의하기가 어려운 이유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첫째, 기독경영에 대한 정확한 정의 내리기가 어렵다.
둘째, 기독경영에 의해 사업하여 성공한 사례를 찾기가 어렵다.
셋째, 기독경영과 일반경영 사이의 차이가 분명하지 않다. 혹은 많은 영역에서 중복되고 있다.
넷째, 기독경영에 의했을 경우, 그 성공여부를 판단한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 이윤이 극대화되면 성공한 것인가? 고객이 만족하면 성공한 것인가? 정직과 정의를 실현하면 성공한 것인가? 종업원 혹은 지역사회에 봉사를 잘 할 수 있으면 성공한 것인가? 어떤 기준이 기독경영의 성공여부를 판단하여 줄 것인가?
다섯째, 학문으로서의 기독경영 연구에도 많은 문제점이 있다. 이것은 단순히 기독경영학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며 일반학문과 기독학문과의 연계를 시도하는 모든 학문에 공통적으로 발생한 것으로, 성경이 근본적으로 경영학이라는 학문을 위해 쓰여진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2 나아가 성경해석상의 문제는 기독경영학을 연구하는데 극복해야 하는 또 다른 과제다. ‘성경 본문과 올바른 윤리적 판단 사이를 오가는 방법에 대해 일관성 있는 설명을 할 수 있기 전에는, 성경의 권위에 호소하는 것은 공허할 뿐 아니라 신뢰를 얻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헤이스)3
3) 해결책으로서의 기독경영
위와 같은 기독경영실제와 그에 따른 연구상의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일반경영철학 및 제도로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경험을 통해서 확인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대안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그 대안으로서 제시되는 것이 기독경영이다. 이 경영은 성경의 원리에 기초한 것으로 그 역사도 짧고 연구도 미진하지만 성경의 권위와 능력으로 인해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제시하고 있다. 비록 현재로써는 완전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는 없다 하여도 성경을 통하여 기독경영의 원리를 도출하고 그의 실행방안을 시행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는 현재의 일반경영이 내포하고 있는 문제점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2. 기독경영을 접근하는 방법 및 범위
일반경영 역시 학문적 역사가 길지 않지만 기독경영은 초기단계이므로 특정의 접근방법에 대해 합의된 바가 없다. 단지 본 논의에서는 필자의 체계에 의해 문제에 접근하고자 한다.
1) 출발점과 방향
기독경영을 접근하기 위해서는 성경에서 시작하여 경영을 조망하는 방법과 이와는 다르게 각각의 경영현상을 설명하거나 방안을 제시하기 위해 성경을 참조하는 방법 두가지를 고려해 볼 수 있다. 첫째, 성경을 출발점으로 하는 방법이란, 성경을 전반적으로 검토하고 이해한 후, 일정한 원리를 도출하고 이를 토대로 경영에 접목 혹은 적용하는 접근방법이다. 이러한 접근방법의 최대장점은 성경을 전체 차원에서 조망하기 때문에 한 두 구절에 근거하여 특정상황에만 적용하는 오류를 피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실제적으로 매우 어렵다. 이는 성경을 깊게 이해하고 전반적으로 검토할 수 있는 통찰력을 전제로 한다. 특히, 성경이 단순히 기업경영을 위해 쓰여진 책이 아니기 때문에 수많은 기업 활동의 해답을 구체적으로 찾기가 어렵다. 또한, 이러한 접근방법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신학자와 경영학자와의 협력이 필수적이다.
둘째, 일반경영에서 출발하여 필요에 따라 필요한 성경구절을 찾아 해석하고 적용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일차적인 출발점이 사회 통념상 적용되는 가치관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기업경영에 따른 갈등이 적을 수 있다. 필요시에만 성경을 참조하기 때문에 성경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 혹은 전문적 식견이 부족하여도 필요를 충족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큰 단점은 기독경영이라는 전체적인 틀을 제공하는데 어려움이 따르며 그로 인해 일관성이 없거나 총체적이지 못하다. 혹은, 일반경영과 기독경영의 기본가정은 판이하게 다르지만 겉으로 나타난 현상이 같음으로 두 가치체계상의 충돌을 가져올 수 있다. 예를 들어, 일반경영에서 뿐 아니라 기독경영에서도 ‘인간 사랑’ 이라는 경영철학을 언급한다. 같은 용어를 쓰지만 인간에 대한 이해는 판이하게 다르다. 전자는 수익을 창출하기 위한 수단일 수 있지만 후자는 인간사랑 자체가 기독경영의 목적이 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를 구분하기 위해 기독교 세계관을 분명히 이해해야 하며, 일반경영의 배후에 있는 세계관과의 차이를 분명히 해야 한다.
셋째, 이 두가지 접근방법을 통합하는 것이다. 즉, 전체적인 틀을 제공하고 일반적인 기독경영의 원리 도출을 위해서는 성경에서 시작하고, 매우 구체적이고 실무적인 경영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일반 경영에서 접근을 시작하되, 이 둘의 통합노력을 계속적으로 경주하는 것이다. 즉, 기독경영의 원리를 개발하되 기업경영의 현실에 맞도록 현장감있는 방법을 개발하고 (예를 들어, 사례연구 등), 개별적인 기업경영상의 문제점에 당면했을 때에는 전반전인 성경적 원리에서 조망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2) 실제 경영현장에서
위에서 제시하는 접근법에 의해 특정의 방안이 도출된다 하더라도 이 원리의 실제 경영현장에서의 적용은 또 다른 문제이다. 과연 성경의 원리는 어디까지 적용될 수 있는가. 예를 들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에서의 원수는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칭하는가. 또한 성경이 전체적으로 적용되지 않고, 선택적으로 적용되는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마 5:38‐45).
물론 위와 같은 질문에 정확하고 완벽한 해답을 제공할 수 없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성경은 전반적 방향설정과 우선순위 결정에 도움이 된다. 나아가 성경에 근거한 기독경영의 성공사례는 기독경영 뿐 아니라 일반경영에도 적절한 준거점을 제공한다. 현실적 한계를 인정하되 기독경영의 목적 및 철학만 분명히 설정되어 있어도 이미 상당한 문제를 해결한 것이나 다름없다. 대부분의 일반경영이 그 출발점에서부터 잘못된 가정에서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3) 기독경영인과 기독교적 경영
기독경영을 언급할 때 혼란스러운 것 중 하나는 기독경영인과 기독경영과의 구분이다. 결론적으로 기독경영인은 많으나 기독경영을 실천하는 기업은 매우 드물다. 즉, 매일같이 기업내에서 경건의 시간을 갖으며, 성직자를 초빙하여 설교를 듣고, 일요일에는 휴업을 하며, 대 사회봉사에 열심인 등, 외부에 드러난 모양으로만 판단하면 기독경영을 실천하는 것 같으나, 실상 기업경영의 현장에서는 전혀 기독교적인 세계관이 반영되지 않는 기업이 있다. 아무리 종교적 행위를 실시한다 하여도, 고객을 속이며, 뇌물을 수수하여 공정한 경쟁구도를 파괴하고, 그로 인해 사회전반에 비효율성을 창출해 내며, 탈세에 대한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는 기독경영인이 운영하는 기업이라면 여전히 기독경영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즉, 기독경영은 기독경영인의 존재가 필수조건이기는 하지만 충분조건은 되지 않는다. 아무리 교회 활동에 열심일지라도 종업원을 하나님이 보내주신 가족으로, 고객을 최선을 다하여 섬겨야 하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로 여겨, 사회의 다양한 이해 관계자 하나하나에 대한 배려가 없다면 여전히 기독경영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기독경영인은 많으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기독경영을 찾아보기가 힘든 이유이다.
3. 기독경영인의 역할
1) 하나님의 청지기
하나님은 인간 사회에 질서를 세우시고 오늘도 일하신다. 그리스도인은 인간사회에서 하나님의 질서에 참여하므로 하나님의 일을 함께 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인은 각자의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일에 하나님과 동역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직업은 거룩한 하나님의 일이 될 수 있다. 성직자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역자라면, 기독 경영인들도 같은 의미에서 사역자들이다.
그리스도인은 먼저 하나님을 섬기는 청지기로서 기업을 만드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에 나타난 기업의 목적은 창조명령을 회복하는 것, 에클레시아 명령(샬롬공동체 형성)을 순종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 나라 선교명령을 순종하는 일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다음으로, 그리스도인은 청지기로서 기업의 이해관계자집단을 섬겨야 할 책임이 있다. 기독 경영자는 고객, 종업원, 소유주, 경쟁자, 지역사회, 정부, 환경에 대하여 선한 청지기가 되어야 한다.
2) 탁월한 경영자로서의 모델
기독경영인이 사회적 책임을 수행한다는 것은 많은 추가적 비용을 수반하게 된다. 또한 시장에서 정의를 행한다는 것은 개인적인 희생과 동료들의 비난과 조직의 반대에 부딪칠 위험이 있다. 때로는 우리의 동료들이 우리를 미워하고 심지어 원수가 될 수도 있다. 그것은 우리들의 정의로운 행동이 그들에게 경제적 손실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 경영인들은 이 세대를 본받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기업세계가 죄악으로 물들고 캄캄할지라도 기독 경영인은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여야 할 것이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3) 하나님나라 선교사
기독 경영인은 하나님나라 선교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명령의 목적은 사람들을 회개시켜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하고 이 땅에 하나님나라가 임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궁극적인 질서에 따라 하나님, 인간, 자연 상호 간에 화해가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선교의 영역은 하나님이 창조한 전 우주를 포괄하는 것이다. 선교는 시대와 장소에 제한 받음이 없이 인간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삶의 영역에 그리고 모든 피조물과 우주에까지 복음이 선포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하는 것이다. 기업도 하나님의 선교 영역이다. 하나님은 경영자를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시고 기업에 파송 하셨다. 오늘날 기독 경영자를 기업에 두심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심이다.
그러나 기독경영인이 이런 역할을 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대부분의 경영자들은 한국 사회는 불의와 불법으로 가득하여 법대로, 도덕과 양심에 따라 사업하면 망한다고 믿고 있다. 이 같은 풍토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경영한다는 것은 좁은 길이요, 십자가를 지는 것과 같은 고난의 길이다. 그러나 이 길은 결코 고난으로만 끝나버리는 그런 길은 아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그의 권능이 함께 하는 길이기도 한 것이다. 고난은 반드시 영광이라는 열매를 가져오는 것이 하나님의 진리이다.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영광 그리고 다시 오셔서 만물을 심판하시고 통치하실 주님을 바라보고 기업을 경영하는 것은 참으로 복된 길이다.
4. 기독경영의 문제점 노출(이랜드 사태)
실패·결렬·중단·파행·난항·원점….
이랜드 노동조합과 회사의 교섭을 두고 나오는 말들이다.
'이랜드 사태'가 장기화되고 있는 가운데 노사간의 교섭은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 지난 6일 저녁 7시 20분께 시작된 이날 교섭도 마찬가지였다. 뉴코아 노사는 다음 교섭 일정을 잡지 못한 채 1시간 만에 끝났고, 홈에버(이랜드) 노사 역시 3시간 30분 협상이 끝이었다. 오는 8일 실무교섭을 열기로 합의는 했지만 핵심 쟁점에선 여전히 노사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외주화 철회] 회사 "10달 뒤에 시행"... 노조 "못 믿겠다"
우선 뉴코아와 홈에버 쪽은 핵심 쟁점부터 서로 다르다. 뉴코아의 가장 큰 요구사항은 '외주화 철회'다. 뉴코아 회사쪽은 지난 7월 비정규직법 시행을 앞두고 계산원 업무에 대해 외주화를 단행했다. 노조에 의하면 지난 4월부터 계산원 350여명(회사 쪽 주장은 223명)이 계약해지라는 이름으로 일터에서 쫓겨났다.
뉴코아 노조는 외주화 즉각 철회를 통해 계약해지된 비정규직의 원직 복귀를 요구하고 있다. 회사 쪽도 지난달 17일 서울지방노동청 관악지청에서 열린 교섭에서 '외주화 철회'를 받아들였다. 이상수 노동부 장관이 "외주화는 성급했고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등 회사 쪽을 압박했기 때문이다. 남은 문제는 철회 시기다. 현재 뉴코아 쪽은 "10개월 후 외주화를 전면 철회하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김연배 뉴코아 관리담당 이사는 "위약금 문제가 있기 때문에 도급 계약이 끝나는 10개월 뒤에 외주화를 철회하고 복직을 원하는 계약만료자 223명에 대해 모두 재계약을 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노조는 회사의 약속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외주화를 1개월 이내에 철회해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박양수 뉴코아 노조 위원장은 "즉각 철회하지 않는다면 비정규직의 원직 복귀가 이뤄질 지 알 수 없다"고 밝혔다. 교섭위원인 최영호 뉴코아 야탑점 지부장은 "사측이 '-100'을 만들어 놓고는 90을 들어주었다고 말하고 있다"면서 "우리는 요구한 게 없다, 원상회복은 당연한 것 아니냐"고 밝혔다. 노사가 '외주화 철회'라는 큰 틀에서 합의한 만큼 철회 시기에서도 곧 접점을 찾을 것이라는 의견도 많다. 노사는 '외주화 철회' 문제가 해결될 경우 ▲해고자의 복직과 고용보장 ▲정규직 전환배치 철회 ▲고소고발·손해배상·징계 철회 등의 쟁점도 쉽게 풀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회사 쪽이 '외주화 철회를 통한 계약만료자 전원 원직 복직'을 두고, 노조에 어떻게 신뢰를 주느냐가 교섭 타결의 관건인 셈이다.
[고용보장 대상] 회사 "3~18개월 비정규직? 더이상 양보 못해"
홈에버의 경우 '3개월 이상 18개월 미만 비정규직 고용보장'을 요구하는 노조의 주장에 회사 쪽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며 팽팽히 맞서고 있다. 홈에버 쪽은 현재 "'18개월 이상 고용보장'도 큰 양보를 한 것이다, 이제 노조가 양보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 노조는 "'18개월 이상 고용보장'은 단협에 나와 있는 내용이다"며 "회사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많은 노조원이 '3개월 이상 18개월 미만 비정규직 고용보장'에 해당되는데, 노조는 이와 관련해 쉽게 새로운 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회사 쪽 역시 비용 부담의 이유로 진전된 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특히 경총은 이 쟁점을를 양보할 경우 사회 전체적으로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일어날 것을 우려하고 있어 이랜드 그룹도 쉽게 패를 내놓을 수 없는 상황이다. 지난 3일 교섭에서 회사 쪽은 "계약 만료 후 1개월간의 유급 전직 기간을 주겠다"는 안을 내놓았지만 노조는 "고용보장과 관계없는 것으로 의미가 없다"며 거부했다.
뉴코아와 마찬가지로 홈에버 역시 노사간의 불신이 극에 달한 것도 교섭을 어렵게 하고 있다. 특히 지난 1일과 3일 교섭에서는 핵심 쟁점에 대한 이야기조차 나누지 못했다. 회사 쪽이 "과장급 노조원을 교섭위원으로 인정하지 못한다"는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노조는 "중앙노동위원회 판결까지 나왔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맞섰다. 홍윤경 이랜드일반노조 사무국장(위원장 대행)은 "사측이 갑자기 엉뚱한 걸 들고 나와 시간을 끌고 있다"며 "회사 쪽에서는 교섭 의지가 없는 것 아니냐"고 사측을 비판했다.
현재 뉴코아·이랜드 노조는 '일괄타결'을 주장하고 있어 한쪽이라도 교섭이 풀리지 않으면 '이랜드 사태' 해결에는 더 많은 시간이 걸릴 예정이다. 전문가들 "주요하고 상시적인 업무는 직접 고용해야"그렇다면 교섭 타결의 실타래는 어디서 뽑아야 할까? 전문가들은 대체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언급하며 회사의 양보를 우선적으로 주문했다. 은수미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뉴코아와 관련해 "계산원 업무에 대한 외주화는 불법은 아니지만 경쟁력·이미지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밝혔다. 이어 "특히 계산원 업무는 유통업에서 상시적이고 주요한 업무"라면서 "(노조의 주장대로) 18개월이 안되더라도 직접 고용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은 연구위원은 또한 "외국의 경우 일자리 창출을 위해 비정규직을 고용한다"며 "외국 특히 유럽에서는 이에 대해 절차·규모·방식 등 다양한 방법으로 규율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 문제가 제대로 해결 안돼) 제2·제3의 이랜드 사태가 발생하면 사회적으로 인력관리 규제가 심해질 수 없다"며 "밀려서 하는 것보다 교섭을 통해서 하면 비용이 저렴하다"고 강조했다. 노조에 대해서도 은 연구위원은 "직접고용에 상응하는 양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한 "정규직화에 따른 비용을 같이 부담해야 한다"며 "사측에서 '좀더 안 좋은 정규직'을 제안하더라도 검토할 수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은 연구위원은 마지막으로 "노사가 인내심을 가지고 협상을 해야 한다"면서 "교섭을 계속하고 있는 이랜드 노사 교섭은 다른 비정규직 분쟁에 비해 타결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정부에 대해서는 "정부는 싸움은 말리고 교섭을 붙이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주환 한국비정규노동센터 부소장은 "이 문제는 일반 노사관계처럼 덜 주고 더 주는 문제가 아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김 부소장은 "외주화 철회를 한다고 해서 문제가 끝나는 게 아니다"면서 "(궁극적으로) 비정규직에 대한 고용·처우문제가 해결돼야 한다"고 밝혔다.
5. 기독경영이란 무엇인가: 일반경영론과의 차이를 중심으로
기독경영과 일반경영의 차이를 구분하는 것은 결코 용이하지 않다. 각각의 특징을 쉽게 정의하기도 어렵지만 그 범위가 광범위하여 포괄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다만 기독경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반경영과의 차이를 밝히는 것이 기독경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므로 각각의 주제에 대해 간단하게 언급하고자 한다.
1) 기업관
(1) 일반경영론
일반적으로 기업관에 대해 두가지 서로 다른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다. 예를 들면, 기업의 목적을 주주 (stockholders)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라고 정의 내리는 입장이 있는가 하면4, 이해관계자 (stakeholders), 즉, 주주 뿐 아니라 경영자, 고객, 종업원,국가, 투자자, 지역사회 등의 복지를 극대화하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리기도 한다5. 이러한 차이는 일견 비슷하게 보이지만 세세한 의사결정에서는 판이한 결과를 초래한다. 예를 들어, 담배회사나 패스트푸드 기업이 그 상품을 청소년에게 판매해서 매출신장을 가져올 경우, 주주에게는 분명한 이익이므로 기업의 사명을 잘 수행한 것으로 평가되지만, 후자의 정의에 따르면 지역사회나 고객의 건강에 해를 끼치게 되므로 마땅히 지탄받을 수 있다.
그러나 설령 후자 즉, 이해관계자 입장을 택한다 하여도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각각의 이해관계자가 기업에게 요구하는 내용이 매우 상이하여 모두를 만족시키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예컨대, 투자자 혹은 주주는 기업의 수익성에 가장 많은 관심을 보이는 반면, 채권자는 대출한 금액의 회수가능성이 가장 큰 관심사다. 고객은 높은 품질의 상품을 저렴한 가격에 구입하기를 원하며 이에 비해 종업원은 높은 임금을 요구한다. 전문경영인은 실적을 높여 자신의 가치증대에 관심이 많으며, 정부는 법인세의 회수가 제일의 관심사이다. 즉, 이해관계자의 복지를 논한다 하여도 어느 집단에 가중치를 둘 것인지, 혹은 집단간의 갈등은 어떻게 조정해야 할 것인지가 또 다른 문제로 제시된다.
(2) 기독경영론
기독경영론이 일반경영론과 여러가지 면에서 다르지만 가장 뚜렷한 차이점은 기업경영의 목적에 대한 이해이다. 기독경영론에서는 기업의 주인은 주주라기 보다는 하나님이시다. 나아가, 기업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여 창세기 (창 2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창조명령을 구체적으로 구현하는 곳이다. 즉, 기업은 단순히 주주의 이익만을 대변하기 위해서 사업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펼치는 곳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사고, 즉, 하나님의 주권사상은 경영자의 임무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기독경영에서의 경영자는 단순히 주주의 이익을 대변하는 역할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명령을 대신하여 수행하는 하나님의 창조 파트너이며 하나님 나라의 자원을 관리하는 청지기이다.
이러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특히 기업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관계는 단순히 주식을 중심으로 사고 파는 계약적 관계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하나님과 그 백성사이에서 맺어진 언약관계로 이해된다. 이 언약적 관계는 계약적 관계보다 범위로는 더욱 포괄적이며 시간적으로는 영구적이다. 따라서 기독기업을 운영하는 일은 하나님이 크리스천에게 위임하신 위대한 일로 이해되어야 하며 그에 따른 자긍감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이해가 바탕이 되면 기업의 목적을 단순히 고객만족이나 고객창조, 혹은 기술혁신, 나아가 가치창조라는 좁은 의미에서 수립되기 보다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이라는 보다 넓의 의미로의 확대가 가능하며 이런 경우, 하나님의 시각으로 기업을 운영하기 때문에 기업이 잠시 실패할 때에도 그 실패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찾게 된다.
2) 신관
신관에서도 일반경영과 기독경영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일반경영에서는 신이 자리 할 아무런 공간이 없다. 일반 경영학에서는 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설령 존재한다 하여도 이를 증명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인간의 유한한 능력으로 무한이신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로 인해 더 이상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절대적 존재에 관심을 갖지 않으며 단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시장의 배분기능에 모든 것을 맡길 뿐이다.
이에 비해 기독경영에서는 철저히 하나님 중심이다. 하나님은 이 우주를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지금도 역사가운데 계셔서 섭리하고 계신다는 믿음에 기초한다. 모든 경영 곳곳에 하나님의 간섭과 손길이 닿는다고 고백하며 무한이신 하나님을 완전하게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할지라도, 인간에게 계시된 범위내에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다. 역사 가운데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오늘 이해되지 못하는 현상에 대해서도 인내로 그 결과를 기다린다. 기독경영이라 하여서 세상적 지식 (예를 들어, 경영학, 경제학, 심리학, 물리학 등)을 소홀히 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이러한 학문의 이해를 통해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목적과 해석이 다를 때에는 진리인 성경에 기초하여 판단하며 이러한 태도가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3) 인간관
인간관에 있어서도 일반경영과 기독경영의 차이는 확연하다. 일반 경영에서의 인간은 우연히 태어난 존재에 불과하다. 적자생존의 원리가 무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간은 더 이상 존재할 가치가 없게된다. 비록 인간의 권리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갈수록 높아 가고 있으나 여전히 세계 도처에서는 인간이 인간을 착취한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악한 존재로 정의되며 경영학 혹은 경제학의 많은 이론들은 바로 이에 가정하여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이에 비해 기독경영에서 의미하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들이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원하는 종교적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잘못을 판단할 수 있는 도덕심이 심겨있고, 다른 동료 인간과 함께 공동체의 복지를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소유한 존재로 이해된다. 그러나 아담 이후로 타락된 인간은 원래 지녔던 선한 특성들이 상실되었거나 뒤틀려져 스스로의 문제 해결이 불가능한 타락된 존재로 변질된다. 처음 창조 되었을 때의 하나님의 형상이 손상된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인간이해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부정과 타락으로 인해 멸망될 존재였지만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땅에 오시었고 손상된 형상은 다시 회복될 가능성이 열리게 되었다.
따라서 기독경영에서 보는 인간은 비록 타락되어 원래의 모습이 많이 손상되어 있으나 예수님으로 인해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존재이며, 창의성이 회복되며, 공동체 형성이 가능한 존재다. 종업원과 고객 및 거래처를 한 가족처럼 중요시해야 하는 기독경영의 원리는 이와 같은 인간관에서 출발한 것이다.
4) 노동관
노동에 대한 관점 역시 일반경영과 기독경영 사이에 커다란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노동에 대해서는 칼 막스, 자본주의 및 성경적 입장으로 나눌 수 있는데 우선 칼 막스의 주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막스에 의하면 노동은 인간의 자기 실현에 중요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출현으로 인해 자기실현보다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되었고, 그 결과 노동자는 하나의 상품처럼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의해 결정된 임금으로 연명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무시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노동자가 수단으로 전락되고, 소외를 가져오게 되며, 임금의 노예가 되어 최악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막스는 노동자 계급의 혁명을 주창하게 되었고 생산수단은 공동재산으로 공공선을 위해 쓰여져야 함을 강조하게 되었다. 물론 막스가 비판하는 자본주의에는 이와 같이 자본주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현상이 목격되기도 한다. 국가차원에서 이에 대한 시정을 시도하고 있지만 결코 쉽게 달성되지 않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편, 성경은 막스나 자본주의와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우선, 성경에 의하면 노동은 기쁨이다. 인간에게 맡겨진 최초의 과업은 (창 2장) 다스리는 것이었고, 인간은 결국 일을 하기 위해서 태어났다. 물론 인간은 저질은 죄로 인해 땀을 흘려야 살 수 있게 되었다. 노동의 착취현상이 발생하고 막스의 진단처럼 노동으로 인한 소외현상이 발생하였고, 노동은 고통스러운 것이므로 회피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노동의 기쁨은 회복되어야 하며 또한 회복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기독경영의 기본 신념이다. 인간은 성령의 도우심에 따라 노동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 수 있으며 이때 노동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수단이다.
6. 기독경영의 특징
기독경영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네가지 방향에서 설명될 수 있다. 이 방향은 하나님의 속성인 사랑과 정의의 두 기둥을 바탕으로 한 것이며 이에 더하여 믿음과 소망에 근거하여 설정된 것이다. 이를 기독경영의 용어로 재구성하면, 소망은 비전경영, 믿음은 신뢰의 경영, 사랑은 섬김의 경영, 그리고 정의는 정직의 경영으로 재구성될 수 있다.
1) 비전경영
비전 경영이란 밤길을 인도하는 불빛처럼 기업이 나아가야 할 목표와 방향을 제시하는 경영을 말한다. 아무리 좋은 사업계획이 있고 좋은 사람이 있다 하여도 그 기업이 추구하고자 하는 방향이 잘못되면 목표와는 갈수록 멀어질 것이므로 비전경영은 기업을 경영하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원리이다.
이 비전 경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크게 볼 수 있어야 한다.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고전 12:31). 하나님은 크신 분이시므로 기업의 목표도 크게 설정할 필요가 있다. 이 말은 재벌 되는 것을 목표로 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크신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이해해야 함을 의미한다. 또한 비전경영의 또 다른 특징은 멀리 보는 것이다. 기독경영에서의 푯대설정은 어떤 의미로는 속도를 내는 것보다 더욱 중요하다 (빌 3;14). 아무리 빨리 달린다 하여도 왜 달리는 지를 알지 못하고 어디로 달리는지를 알지 못하면 비전경영에서 이미 실패한 것이다. 비전경영의 또 다른 특징은 다시 보는 것이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책임경영을 의미하는 것으로 기업에게 지워진 책임을 끝까지 완수하는 것을 의미한다.
2) 섬김의 경영
섬김의 경영은 기독경영을 가장 특징적으로 묘사하는 경영철학이다. 지역사회를 섬기고, 주주를 섬기고, 종업원을 섬기며, 고객을 섬기는 경영이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 (마 22:39)을 실천하는 기업경영을 말하며 고객을 왕처럼, 종업원을 가족처럼, 지역사회를 내 직장처럼 여기는 경영철학이 이 원리에서 시작된다. 종업원이 맡은 바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고 창의력을 키우는 것도 바로 이 섬김의 경영에서 출발한다.
3) 신뢰의 경영
기독경영의 뿌리에 해당된다. 신뢰가 부족한 사회, 그런 기업은 더 이상 존재하기 힘든 것으로 신뢰경영은 기업전체를 받쳐주는 뿌리다. 분식회계, 무자료거래 등 우리나라 기업의 뿌리깊은 병폐는 고비용을 유발하여 글로벌 경쟁에서 불리하게 만든다. 7 신뢰경영은 회사의 정책, 직원, 경영진의 가치관에 이르기까지 침투되어야 하는 것으로 오랫동안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폐단이기도 하다.
4) 정직의 경영
정직하게 기업을 운영하면 망한다는 사고가 우리나라의 경영계를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경영은 이러한 관행에 도전한다. 정직의 경영을 실천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과업이지만 하나님이 정의로우시니 기업도 정직해야 한다. 정직은 수평적 관계뿐 아니라 수직적 관계에서도 요구된다. 남녀차별, 지역, 학력에 따른 차별을 없애고 부패 및 부정이 없는 기업경영을 의미한다. 주주에게 적정한 이윤을 돌려주고, 종업원에게는 적정한 임금을 보장하며, 국가에는 적정한 세금을 납부하고, 지역사회에 봉사할 때 정직의 원리가 실현되는 것이다.
5) 원리의 요약
지금까지 언급한 기독경영을 그림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기독경영은 공동체 안에서 공동체의 이익을 생각하며, 정의와 사랑의 기둥안에 섬김, 창의, 정직, 공평을 실현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기 위해 존재하는 경제조직이다.
7. 결 론
하나님의 말씀대로 기업을 경영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이해해 달라는 것이었다.
기독경영은 일반경영과 달리 개인 못지않게 공동체를 우선시한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기업을 경영하다 보면 고난이 따를 수 있다. 이것은 주님을 따르는 자에게는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도 바로 십자가의 고난 아래에서만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고난 가운데서 영원히 헤매이지 않는 이유는 우리에게는 종말과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기업경영은 영적 전투가 첨예하게 일어나고 있는 현장이다. 우리나라의 기업경영은 수많은 모순과 문제점으로 인해 해결할 자정 능력을 상실하지 오래다. 기독경영이 그 대안이 될 수 있으며 이런 점에서 보다 철저한 연구와 실천이 요구된다.
“또 가라사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꼬.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막 4:30‐32)
<기독교 물질관>
Christian material Reflection
1.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물질이란?
그리스도인들이 물질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대개 재물을 의미한다. 재물 중에서도 오늘날에 와서는 대개가 돈(현금)을 많이 나타낸다. 언제부터 물질이라는 일반명사를 ‘돈’을 나타내었는지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대대 돈돈 하게 되면 천해보이기에 물질이라고 표현했던 것이 아닌가한다. 그만큼 돈에 대해서 천박하게 생각하면서도 그 돈에 집착하는 것이 이율배반적인 셈이다.
한마디로 재물이나 물질은 죄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돈은 일만의 악의 뿌리라고 하여서 마치 돈 자체가 죄악의 상징처럼 생각해 왔다. 성경에서는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돈’이 일만 악의 뿌리가 아니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하였다. 돈은 불과 같아서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악도 되고 선도 될 수 있다. 이에 물질에 대한 긍정적인 면과 부정인 면을 조화시켜야 한다.
모든 물질은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은 만주의 주로서 만물이 다 그분의 것이다.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라고 하였다.(학2:8) 원래부터 내 것은 없으면 나는 그분의 청지기일 뿐이다. 가장 오래 동안 보호해봤자 잘해야 칠팔십년 갈 뿐이다. 지나친 소유욕은 결국에 죄악으로 이끌리게 되어 있고, 그 결과는 사망의 권세자에게 덜미만 잡히기 쉽다.
성경적인 물질관을 이루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모든 물질은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점이다.(학2:8,시50:11-12) 철저히 그분의 것을 인정하는 만큼 그분께서 우리의 것이라고 인정해줘야 한다. 그것이 바로 십일조다. 둘째는 모든 첫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점이다.(민18:15) 첫 것을 구별한다는 것은 이 후에 것도 확실하게 구별하는 비결이다. 셋째로 가장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점이다.(말1:6-10) 그분의 것을 그분께 돌릴진대 가장 좋은 것으로 구별해서 드려야 마땅하다.
2. 물질관리
창1:28 하나님은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를 다스리라 고 하셨다. 여기서 땅에 충만하여 정복하고 다스려야 할 것이 바로 물질관리 라고 할 수 있다. 즉 세상을 지배하고 정복하기 위해서는 이 물질관리가 필수적이다. 물질을 온전히 관리하기 위해서는 물질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물질에 대한 주도권을 잡고 지배해야 하는 것이다.
물질은 매우 작은 것이로되 세상이 이것에 의해서 돌아가고 있다. 그러기에 물질관리는 세상에 사는 우리 모두에게 매우 중요하다. 즉 주님의 명령대로 세상을 지배하고 정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물질을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
물질관리는 크게 물질을 사용하는 경우와 그 물질을 모으는 경우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이 두 경우에 공통적으로 대표적인 것이 바로 헌금이요 전자에는 구제요 후자에는 저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물질이 들어오는 것과 나가는 것을 관리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물질을 경영하는 것이요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이다. 물질을 사용할 때의 물질관리는 절제가 매우 중요하며, 물질을 모으는 차원에서 물질관리는 절약이 가장 중요하다.
물질을 잘 관리하는 것은 물질을 많이 모으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물질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잘 사용하는데 있다. 누구든지 물질의 씀씀이를 보면 그 사람의 믿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물질을 사용하되 그 중심이 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있어야 하며, 그 결과의 유익이 나의 것보다는 남의 것을 기대하여 사용해야 한다. 특히 물질의 중심을 나에게서 주님께로 옮겨놓는 것 중의 하나가 헌금이며, 하나님 중심으로 물질사용의 결과가 이웃의 유익을 구하는 것을 구제라고 할 수 있다.
구제는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기도와 금식과 함께 특별히 가르쳐 주었을 만큼 매우 중요한 것이다. 즉 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이(고전13:3) 은밀함과 성실함으로 빈궁한 자들 특히 성도(믿음의 가정)들에게 쓸 것을 공급하는 것이다.
3. 성도의 물질관
요6;1-13 우리가 내 마음대로 물질을 쓸 수 있다고 해서 우리가 물질의 주인이 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물질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신앙인의 물질관에서 첫 번째 중요한 사실은 물질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이같은 신앙의 대 명제 앞에 우리의 위치가 달라진다. 우리는 물질의 주인이 아니라 물질의 관리자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물질의 주인이시고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질을 맡기셨다는 개념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책임이 있다.
1)어떤 책임인가?
(1)관리자로서의 책임이다. 다른 말로 하면 청지기로서의 책임이다. 관리자, 즉 청지기로서의 책임은 다른 것이 아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내 마음대로 쓰는 것이 참된 청지기 일까? 아니다.
(2)하나님의 물질의 주관자요 주관자이신 하나님은 물질을 관리하는 우리를 보신다. 얼마나 주인의 뜻에 합당하게 사용 하는가 그것을 보신다. 그리고 그 물질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용되어 질 때 하나님은 더 많은 물리로 우리에게 맡기신다. 더 많은 물질을 우리에게 맡겨 주시는것 바로 이것이 물질의 축복이라 할 수 있다. 신앙인의 물질관에서 두 번째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용하면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 말씀속에서 예수님은 보리떡과 물고기를 사용하셨다. 주님은 하나님이시기에 보리떡과 물고기를 사용하지 않으셔도 얼마든지 이들을 먹일 수 있다. 그럼에도 왜 주님은 보리떡과 물고기를 사용하셨을까?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되는 물질은 기적을 일으키는 도구가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해서다."물질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될 때 그것은 기적을 일으키는 도구가 된다. 기적이 무엇일까? 저는 기적이 도저히 안되는 일이 되는 것 물론 그것을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만 그 이상의 것이라고 믿는다. 병자가 낫고 앉은 뱅이가 치유되고 다 기적이다. 그런데 이 기적의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생명을 살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적은 생명을 살리는 것이다. 우리가 물질을 하나님의 뜻대로 하용하면 그 물질은 생명을 사리는 도구가 된다.
4.결론
1)물질관이 변해야 한다
견물생심도 죄가 된다
당신은 길을 가다가 돈을 주워 본 적이 있는가? 저처럼 평생 가야 백 원짜리 하나 못 주워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유난히 길에서 뭘 잘 줍는 분들이 있다. 우리는 이럴 때 어떻게 하는가? 웬 떡이냐 싶어 좌우를 살핀 후 얼른 집어갈 것인가? 아니면 내 물건 아니다 싶어 그냥 두고 갈 것인가?
얼마 전 뉴스에 이런 기사가 났었다. 어떤 사람이 물건을 사면서 100만 원짜리 수표인 줄 알고 냈는데 실은 1억 원짜리 수표였다는 것이다. 수표를 받은 가게 주인도 그런가보다 무심코 받았는데 나중에 수표에 0이 왠지 너무 많이 붙은 것 같아 세어보니 0이 한 개도 아니고 2개나 더 붙어있더란다. 그 주인이 어떻게 했을까? 꿀꺽했다고 한다. 수표를 들고 달아났다가 구속되었다고 한다. 이 기사를 들으니 참 어리석은 사람이다, 안 들킬 줄 알았나 싶으면서도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 생각도 되었다. 백만 원도 아니고 천만 원도 아닌 1억이니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고 돈에 욕심이 생기면 사람이 모든 상식과 판단력을 잃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길에서 돈을 주웠을 때 내가 먼저 봤는데 아무도 모르게 주머니에 넣으면 무슨 죄가 되겠나 싶지만 우리나라 법에 엄연히 '점유 이탈물 횡령죄'로 1년 이하의 징역이나 3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게 되어 있다. 왜 죄가 되는가? 비록 내가 주웠고 지금 내 손에 있지만 그 돈은 내 돈이 아니기 때문이다. 엄연히 주인이 따로 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는 벌을 받게 되어 있다.
2.성령 충만한 돈
이렇게 돈을 보는 우리의 태도가 참 중요하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돈 앞에서는 어쩔 수 없다면, 그래서 여느 세상 사람들처럼 돈에 대한 욕심과 집착에 얽매인다면 그것은 단순히 돈 문제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 자체가 바르지 못하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즉, 예수를 믿고도 우리의 물질관, 돈에 대한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진정 거듭난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서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는 돈에 관한 말을 많이 남겼다. "사람만 거듭나는 것이 아니라 지갑도 거듭나야 한다." "당신의 지갑이 회개하지 않으면 당신은 진정으로 회개한 것이 아니다." "진짜 은혜는 지갑이 열려야 한다." 무슨 뜻일까? 여기서 지갑이란 우리가 가진 돈과 재물을 뜻한다. 어떤 사람의 돈 씀씀이를 보면 그 사람의 가치관과 성품과 신앙관까지 알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물질관, 돈에 관한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참된 신앙이라고 할 수 없기에 오늘 삶의 변화 시리즈 설교 중 물질관의 변화를 생각해 보려 한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비뚤어진 그리스도인의 물질관을 보여준다. 또한 그 비뚤어진 물질관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지도 똑똑히 보여주면서 우리에게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을 바로 이해하려면 몇 장 앞으로 넘겨 사도행전 2장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2장에 보면 오순절 성령강림사건 이후 예루살렘 초대교회가 생겨나는데 42절부터 보면 이 초대교회의 분위기가 어떠했는지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면서 떡을 떼고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다고 하는데 특이한 것은 44절부터 보면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었다는 사실이다.
모든 성도들이 자신의 사유재산을 팔아 사도에게 바쳐서 모든 성도가 필요에 따라 나누어 썼다는 것인데 어떤 사람은 이 구절을 보면서 무슨 사이비 집단 같다는 분도 있고, 또 어떤 분들은 "이게 무슨 공산주의냐? 어떻게 사유재산을 모두 바치고 필요에 따라 나누어 쓰냐?"는 분도 있다. 실제로 공산주의의 창시자인 칼 막스가 이 성경구절을 보고 공산주의를 착안했다고 한다. 그런데 비록 원리는 비슷한지 몰라도 초대교회와 공산주의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공산주의는 모든 사유재산을 법으로 강제로 바치게 하지만 초대교회는 누가 시킨 사람도 없고 누가 억지로 하게 한 사람도 없다. 모든 성도가 자발적으로 스스로 바친 것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성령강림사건 이후 성령 충만해지자 초대교회 성도들 사이에 영적인 좋은 분위기가 형성되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물질에 대한 욕심, 집착을 다 버리고 재산을 스스로 바친 것이다. 은혜를 받으니 물질관부터 바뀌고, 성령이 충만하니 지갑이 변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물질관도 성령 충만해야 바뀐다. 쉽게 말하면 돈 버는 데나 돈 쓰는 데도 모두 성령 충만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야 바르게 벌고 바르게 쓸 수 있지 사람의 이성이나 자제력 가지고는 절대 안 된다. 세상 그 누구도 인간적으로 돈 앞에 장사 없고, 돈을 보고 욕심 안 생기는 사람 없기 때문이다.
3)비뚤어진 의도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온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는 어땠는가? 본문 바로 앞 4:36~37에 보면 바나바도 자기 밭을 팔아 사도들에게 스스로 바친다. 바나바는 나중에 바울과 함께 안디옥교회에서 안수를 받고 선교사로 파송된 사람인데 본명은 요셉이고 바나바는 별명으로 그 뜻은 '위로의 아들'이다. 이런 별명이 붙은 것은 바나바가 교회에서 남을 잘 위로하고 격려하는 사람이었다는 뜻이다. 우리 성도들 가운데도 이런 은사를 받은 분이 있다. "저 권사님, 저 집사님은 유난히도 남을 잘 위로하고 격려해. 아무리 실망하고 힘든 사람도 저 분만 만나면 힘을 얻거든." 하는 분들 계시지 않는가? 바나바가 바로 그런 은사를 받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바나바가 자기 밭을 팔아 사도들에게 바친 것이다. 성도들 사이에 소문이 금세 쫙 퍼졌다. "어쩌면 저렇게 훌륭한 분이 있담? 바나바 집사님(편의 상 이렇게 붙임)이 평상시에도 남들 잘 위로하고 격려하는데 이번에는 조상한테 물려받은 비싼 부동산을 팔아 교회에 바쳤다지 뭐야?" 식의 소문이 나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이 소문을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도 들었던 모양이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들 부부도 초대교회에서 어느 정도 뿌리를 박고 신앙생활 하던 분들인 것 같다. 혹시 오늘날로 치면 권사님이나 집사님쯤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한 번 가정해보자. 예루살렘교회에 아나니아 안수집사님과 삽비라 권사님이 있었단 말이지요. "왜 하필 권사 안수집사야?" 하고 우리 권사님들 안수집사님들 언짢아하지는 마십시오.
그런데 이 아나니아 집사님과 삽비라 권사님이 바나바를 칭찬하는 소문을 들었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안 그래도 교회에 성령이 충만해서 성도들이 너도 나도 재산을 바치는 일이 많은데 이번에는 평상시에도 칭찬 받던 바나바까지 그렇게 했으니 꽤 부담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아깝기는 하지만 남들 다 하는데 우리가 그래도 안수집사 권사씩이나 되어서 안 할 수도 없고" 하는 생각이 들었을까요? 아니면 자신들도 바나바처럼 좋은 소문나기를 바랐는지도 모릅니다. 이유야 뭐든지 간에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가 땅을 팔아 교회에 바치기로 결정한 것은 성령 충만이 아닌 눈치 보기, 체면 차리기였습니다. 성령 충만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라 문제가 됩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눈치 안 봐도 되고 체면 안 차려도 됩니다. 남이 안 시켜도 즐거운 마음으로 스스로 하게 됩니다. 하지만 성령 충만이 아닌 체면이나 눈치 때문에, 혹은 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였다면 그것은 악한 생각입니다.
그래서 3절에 보면 베드로가 아나니아에게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다"고 지적한 것입니다.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심각한 얘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더라도 성령 충만하여 자발적으로 기쁜 마음으로 하지 않고 인간적인 동기로 눈치 보며 체면 차리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한다면 그것은 성령의 일이 아니라 사단의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행동이 왜 잘못 된 것인가? 첫째,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한 행동이 아니라 인간적인 의도, 아니 사단의 의도에 의해 한 행동이기 때문에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 부부처럼 잘 못된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돈에도 성령 충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벌 때도 쓸 때로 인간적인 욕심과 눈치, 체면, 자기를 과시하려는 마음을 가지면 반드시 죄를 짓습니다. 돈을 벌 때도 쓸 때도 성령 충만해서 성령의 의도대로,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르면 됩니다.
4)돈을 속임의 수단으로 사용
그러면 둘째,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의 행동은 왜 잘못된 것인가? 그것은 돈을 가지고 사람을 속이고 나아가 하나님을 속이고 성령을 기만했기 때문입니다.
돈이 선한 것일까?, 악한 것일까? 답은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다"이다. 돈이나 물질은 기본적으로 악한 것도 선한 것도 아닌 중립적인 존재이며 수단에 불과하다. 문제는 그 중립적인 돈을 쓰는 우리의 마음과 자세인데, 우리의 마음에 따라 돈은 선한 것이 될 수도 있고 악한 것도 될 수도 있다. 사람이 선한 마음을 가지고 선한 목적에 돈을 쓰면 그 돈은 너무도 귀하고 선한 돈이 된다, 반대로 사람이 악한 의도를 가지고 악한 목적에 돈을 쓰면 그 돈은 정말 더럽고 추악한 것이 되고 만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돈을 악한 목적에, 죄 짓는 일에 사용하는가? 오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돈을 어떻게 사용했는가? 돈을 가지고 사람을 속인다. 베드로와 사도들을 속인다. 나아가 이들은 사람만 속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속이고 성령님을 속인 것이다. 체면 때문인지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서인지 어쨌든 땅을 팔고 그 돈을 교회에 바치기로 했는데 막상 돈을 손에 쥐고 보니, 너무 아까운 생각이 든 모양이다. 우리도 이럴 때가 있다. 헌금을 하려고 마음먹었는데 막상 하려니 아까워 생각이 바뀔 때가 있다.
하지만 알아두라. 일단 하나님께 드리기로 결심한 재물은 결심한 순간 이미 하나님의 것이다. 내 손에서 떠나야 비로소 하나님 것이 되는 게 아니라 내가 결심하고 약속한 그 순간부터 이미 하나님 것이다. 그러므로 아까운 마음에 그 약속한 물질을 드리지 않으면 그것은 사람을 속이는 것만 아니요 하나님을 속이는 죄가 된다. 그러므로 오늘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는 돈이라는 수단을 가지고 아름답고 선하게 쓰지 못하고 욕심 때문에 사도를 속이고 교회를 속이고 결국 하나님과 성령님까지 속이는 성령 훼방죄, 악한 수단으로 돈을 사용했으므로 그 죄가 큰 것이다.
5)자유의 한계
세 번째,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의 잘못은 자유를 함부로 남용했다는 것이다. 기억하는가. 우리 손에 있는 돈을 내 마음대로 자유롭게 쓸 수 있지만 반드시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한다. 4절에 이런 말씀이 나온다.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돈과 재물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기에 기본적으로 우리 마음대로 쓸 수 있다. 하지만 이 자유를 죄 짓는 데 쓰느냐 복 받는 데 쓰느냐에 따라 결과가 완전히 달라진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돈을 주셨다. '내가 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맨 처음에 이것부터 인정해야 한다. 그런데 한 단계 더 나아가 '주신' 것이 아니라 '맡기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는 '청지기 정신'이다. 청지기란 큰집에서 가사를 책임지며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고 종들을 다스린 사람이다. 따라서 청지기가 관리하는 돈은 주인의 재산이지 자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돈을 주신 것은 내 마음대로 쓰라는 뜻이 아니라 잘 관리하라고 맡기신 것이다. 그러므로 청지기는 돈을 쓰더라도 내 마음대로 쓰면 안 됩니다. 반드시 '주인의 의도대로' 써야 한다. 지금은 내 마음대로 쓰지만 혹시라도 주인의 생각과 다르게 쓰면 나중에 반드시 책망을 받게 된다.
성경에도 청지기에게 맡긴 재산을 주인이 나중에 반드시 회계(정산)한다고 말씀한다. 그러므로 지금 내게 맡기신 돈을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잘 썼는지 나중에 반드시 평가하신다는 말이다.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는 바로 이 점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들에게 주어진 자유를 잘못 사용한다. 하나님이 맡기신 돈을 죄 짓는 일에 사용해서 결국 큰 벌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돈을 자유롭게 쓰되 책임을 가지고 쓰시기 바란다. 아무리 내 손에 있는 돈이요 내 재산이지만 반드시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말이다. 절대 잊지 말라.
6)부부 일심동체?
마지막으로,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는 일심동체(一心同體)가 되었기에 잘 못 된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일까? 일심동체, 부부가 몸과 마음이 하나 되면 좋은 것 아닌가? 그런데 일심동체라고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라 부부가 일심동체가 되어 어떤 일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부부가 일심동체 되어 부부 사기단이나 부부 도박단이 되면 큰일이지 않은가. 부부가 다 함께 망하고 같이 벌 받게 된다. 특별히 물질관, 즉 돈 벌고 쓰는 데도 일심동체가 중요하다.
절대 부부 중 하나가 내 마음대로 돈 쓰면 안 된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의논하지 않고 마음대로 재산을 쓰면 그 집은 망한다. 간혹 남편이 아내와 의논하지 않고 남에게 큰돈을 빌려준다. 아니면 마음대로 보증을 서준다. 그래서 잘못되는 집 얼마나 많은가? 절대 함부로 돈 빌려주거나 보증서지 말라. 혹시 정 해야겠다면 꼭 부부가 의논해서 결정하라. 그러면 나중에 문제가 생겨도 함께 극복할 수 있다. 왜냐? 돈은 없어도 다시 벌면 되지만 부부간의 신뢰감이 깨지면 다시는 회복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른 일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돈 문제는 반드시 부부가 의논하고 마음을 모아야 한다.
오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를 보니까 돈 문제에 있어 부부가 의논해서 일심동체 되었다. 그런데 일심동체 되어 거짓말을 하고 하나님의 돈을 떼어 먹는다. 그래서 9절에도 베드로가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고 책망한 것이다. 부부가 일심동체 되어 좋은 일 하고 귀한 일 한 게 아니라 함께 죄를 지었으니 함께 벌 받고 함께 죽게 되는 것이다.
물질관도, 모든 가정의 대소사도 부부가 한 마음이 되어야 하는데 오늘 예는 불행하게도 일심동체로 귀한 일 좋은 일 한 것이 아니라 죄 짓고 한 날 한 장소에서 죽은 최악의 경우다. 부부가 일심동체 되어 좋은 데 돈 쓰시고, 귀한 일을 하라. 그러면 혼자 하는 일보다 복을 몇 배로 받게 된다.
7.잘 벌고 잘 써야
그러면 오늘 결론이 뭔가? 한 마디로 돈 잘 벌고 잘 쓰라는 것이다. 내게 주신 돈을, 재산을 의미 있게 잘 쓰라고 말이다. 오늘 오신 부모님들, 어르신들 혹시 요즈음 유산문제 때문에 싸우는 집 많이 있다고 한다. 형제간에, 심지어 어머니와 자식들 간에 유산 소송이 엄청나게 많다. 얼마 전 포스코 이구택 회장께서 이런 말을 했다. "앞으로 우리나라 기업에도 재벌의 부자상속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되나? 상속세를 30% 이상 과세하면 된다는 것다.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더 좋은 방법이 있다. 자녀들에게 재산 안 물려주면 재벌의 부자상속 완전히 없어진다. 재벌 아니라도 좋으니 내 재산이 많고 적음을 떠나 물려주지 말라. 상속세가 무서워서 안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아예 세상 떠날 때 전 재산 다 쓰고 가라.
지난해 미국에서 기부금을 제일 많이 낸 사람은 토크쇼 사회자인 오프라 윈프리라는 여성입니다. 오프라 윈프리는 재산이 1조 4천억으로 흑인여성 중에는 최고 갑부인데 돈이 많아서 부자가 아니라 마음이 부자인 사람이다. 지난 1년간 우리 돈으로 약 580억 원을 기부했다고 한다. 하지만 부자만 기부하는 것이 아니다. 전체 미국인들의 98%가 어떤 형태로든지 기부를 하고 있다니 가히 미국은 기부문화가 생활화 된 사회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 제일 잘 하는 것은 평생토록 자녀들 위해 올인(all-in)하고, 자녀 위해 모든 것 희생하다가 세상 떠날 때도 자녀들에게 몽땅 물려주는 일이다. 우리나라 사람들 제일 못 하는 일이 기부하고 사회 위해 잘 쓰는 일이다. 바뀌어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부터 바뀌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쓰느냐? 서양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떠날 때 교회에 바쳐서 선교나 사회봉사에 쓰게 한다. 또 어떤 분들은 재산을 사회단체나 학교에 기부한다. 평생 호두과자 팔아서 교회를 10개 넘게 지은 호두과자 할머니가 있고, 평생 김밥 장사해서 모은 돈을 자신은 문턱에도 못 가본 대학에 장학금으로 내놓는 분이 있다.
뭘 알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것이다. 진짜 부자는 나눌 줄 아는 사람이라는 사실 말이다. 이들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돈을 잘 쓰는 것이 하나님께 복 받는 최고의 방법임을 터득한 분들이다. 진정한 행복은 돈을 많이 가진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돈을 잘 쓰는 데서 온다는 사실을 알고, 돈 쓰는 기쁨이 무엇인지 아는 분이다.
돈 열심히 벌라. 그리고 혼자만 부자로 끝나지 마시고 모든 사람을 위한 부자 되어 아름답게 나누고 사용하라. 그러면 재산이 성령 충만한 돈이 될 수 있다. 그래야 신앙이 진정 거듭난 신앙이 될 수 있다. 아무쪼록 장차 주님 앞에 섰을 때 "너는 세상에서만 부자가 아니라 진정 내 앞에 부자로구나."라는 칭찬 받게 되길 소망하자.
<참고자료>
*서 적-성경적 물질관(비전성서대학11)
*싸이트-네이버, 다음, 구글, (사)한국기독실업인회(CBMC)
기독교경영연구원
ppt용량이 커서 안올라가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