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전으로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었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은 잠시 이고, 남한과 북한에는 미군과 소련군이 주둔하고, 국토가 분단되기에 이르렀다. 강원도에 미군정이 실시된 것은 9월 20일이다. 초대 군정관은 즈비만 중령, 내무·재무·학무·보건 등 각부에 소령급 고문관이 배치되어 행정을 관리 감독했다. 또 자문기관으로 자치위(自治委)와 건준(建準)등에서 활약한 인사 가운데 지역실정을 고려하여 한 군에 한 명씩의 비율로 위촉된 고문들로 구성된 고문회를 두었다. 군정(軍政) 후 최초의 한국인 지사는 박건원이었다.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영·소 3국 외상회의는 한국문제에 대해 미·소 공동위의 설치와 5년간의 신탁통치를 결정했다. 이에 남한에서는 즉각 반탁운동이 일어났으며, 강원도에서도 반탁운동이 일어나 좌·우익 간의 충돌로 유혈사태가 많이 빚어졌다. 분단 후 남과 북을 이어준 것은 대남송전과 남북교역이었다. 북한 측은 남한에 전기를 보내 주는 대가로 기계, 전기용품, 생활물자를 받아갔다. 또 남북 간의 물물교환 형식인 물자교환은 해방직후부터 1949년 초까지 약 3년 남짓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몰래 작은 규모로 이루어지다가 미군정 당국의 묵인 아래 공식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다가 결국 단절되었는데, 강원도의 경우 춘천지방 사북의 38경계선상과 인제 관대리 부근, 주문진 등이 대표적이었다. 춘천·인제 두 곳에서는 육상 루트를 통해서, 주문진에서는 해상루트를 통해 선박으로 물자교환이 이루어졌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1948년 8월 15일에 남한만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초대 대통령에는 이승만, 부통령에 이시영이 선출되었다. 정부수립 후 첫 강원도지사에는 이종현(李宗鉉)이 부임했다. 이 기간 동안 38선 부근에서는 크고 작은 총격사건이 끊이지 않았는데, 결국 1950년 6월 25일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한국전쟁에서 춘천에서의 전투는 戰史에서 기록될 만한 일이다.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적인 공격으로 한국군은 허를 찔려 거의 모든 전선에서 무너지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춘천을 지키던 국군 제6사단은 북한 인민군의 제2군단을 맞아 적은 병력으로 잘 싸웠다. 북한 인민군의 제2군단은 춘천을 점령한 후 가평을 경유하여 수원까지 약 150km에 달하는 장거리를 대우회기동해야 하는 부대였다. 6사단은 2개 연대를 전방에, 1개 연대를 예비로 하는 지역방어를 실시하여 춘천 정면에 7연대를 배치하였다. 제7연대는 1949년 5월에 춘천 지역에 배치된 이후 13개월 동안 이 지역을 방어하며 지형의 숙지를 잘 하고 있었다. 따라서 인원이나 장비 면에서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적에게 막심한 타격을 주었고, 전사에 남을 춘천 전투를 기록했다.
한국전쟁이 시작된 후 1951년 4월 15일 1·4 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을 갔던 강원 도청은 전세 호전으로 원주읍 일산동에 강원 도청 임시사무소를 개설했다. 이 임시사무소는 1953년 7월 30일 강원 도청이 춘천으로 정식 수복할 때까지 도청의 모든 기능을 수행했다. 피난 도정(道政)의 역점은 난민구호와 교육, 전재복구 등 세 부분에 집중되었다. 춘천은 한국전쟁 중의 격렬한 전투로 폐허가 되다시피 하였다. 따라서 수복 후에는 전재복구와 난민구호에 역점을 두었다.
식민지에서 해방된 지 5년 만에 발발하여 3년 동안 진행된 한국전쟁으로 전국이 피해가 극심하였지만 강원도는 특히 북부 강원도가 북한에 속하게 되어 분단을 겪는 피해를 입었다. 또한 춘천은 최전방으로 앞에서 살펴보았던 한국전쟁 개전 초기에 겪었던 전투와 같이 이 지역에서 주목할 만한 큰 전투가 끊이지 않았기 때문에 피해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전쟁복구와 난민구호에 앞장서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1960년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에 항거하는 4·19혁명이 일어났고, 이에 춘천지역에서도 4월 25일에 불붙기 시작하였고, 원주 등 다른 지역에 파급되기도 하였으나 4월 26일에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를 발표하여 시위는 중단되었다. 또한 시위도 대부분 평화적이어서 이 과정에서 희생자는 없었다. 그러나 4·19 혁명은 5·16 군사쿠데타로 다시 한 번 혁명 정신이 좌절을 겪는다
. 군사정부는 공약으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해 나갔는데, 이 과정에서 우선적으로 추진한 것이 춘천수력발전소 건설공사였다. 이 공사는 순수한 우리 기술에 의해 처음으로 추진되었다는 점에서 당시 전국적으로 관심을 끌었다. 현재 춘천시 신북읍 용산리와 서면 오월리를 가로지르는 이 공사는 1961년 9월 21일 착공, 3년 5개월만인 1965년 2월 10일에 준공 되었다. 이후 춘천-서울간 경춘국도의 국도포장공사와 춘천-원주의 춘원국도 포장 공사, 의암댐 완공 등으로 춘천이 면모를 일신하게 되었다. 특히 의암댐의 완공으로 호반의 도시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춘천으로서 또 하나의 획기적인 것은 1973년에 동양 최대의 사력댐인 소양강 다목적댐이 준공된 것이다. 이렇게 북한강의 수계를 이용한 수력발전소 건설로 춘천 주변에는 화천댐, 춘천댐, 의암댐, 소양댐 등이 들어서 춘천은 이 댐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소양댐의 경우 댐의 규모가 동양최대였던 만큼 이 댐 공사를 위하여 춘천 사북면 일대의 많은 선사유적이 수몰되었을 뿐 아니라 이 지역에서 오랫동안 살아왔던 삶의 터가 수몰되어 ''수몰민''이라는 용어가 생겨나게 되기도 하였다.
춘천이 도청소재지로서 강원도의 다른 시·군에 비해 발전한 것은 사실이지만 전국적인 상황에서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만은 없었다. 우선 춘천의 인구 증가율이 낮고 분단이전만 하더라도 북한강 수계에 의존한 교통루트가 있었으나, 분단이후 교통이 불편하여 발전에 많은 한계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1995년 이후 지방자치제가 실시되면서 춘천은 새로운 모색을 시도하고 있다.
* 강원도, 1995, 『강원도사』 현대편
* 유병용, 1996, 「8·15광복과 춘천」『춘천백년사』
* 유병용, 1996, 「6·25전쟁과 춘천」『춘천백년사』
* 전종순, 2000, 「한국전쟁사를 바꾼 춘천벌의 승전고」『춘천대첩, 무엇을 남겼나?』, 강원대학교·육군쌍용부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