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가 나온 고등학교는 서울에 있는 상업고등학교인
덕수상고 였습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대한민국에서 제일 좋은 상고(商高)였다고 자부는 합니다.
암튼 수재들이 무척 많았죠(가난해서 대학 못 가는 그런 친구들이 많이 왔죠)
독일에 계신 다은이 아빠께선 선린상고 나오셨는데...두 학교가 실력이 비슷비슷 했습니다.
라이벌이었죠.
아래 김동연이란 친구는 지금
기획재정부 예산실장(차관보)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아래 글은
신동아 2011년 4월호에 그 친구가 올린 것입니다.
Bucket-list 라는 칼럼에다.
영어로 죽다=Kick the backet에서 유래된 말로
죽기 전에 꼭 할 일이란 뜻입니다.
올 봄 청명(淸明)일
아버님 산소 성묘 때
아버님 앞에서
형제들이 저마다 느낄 감정을 대변하는 글 같아서 올렸습니다.
저는 불행하게도
아버님을 직접 뵙지는 못했지만....
漢學(한문)을 사랑하시는 아버님께서 살아게셨더라면
저와 대화도 잘 통하고,
서로 좋은 스승과 제자가 되었을텐데....
제 친구 말대로
오늘부터라도 아버님과 무언의 대화를 시도 해 볼랍니다.
책을 보다가 막힐 때면....
아버님을 조용히 불러보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애들이 이 글을 읽고
좀....반성도 하고
마음의 다짐도 새롭게 하는
좋은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대화
김 동 연
항상 꿈을 꾸었다.
그 많던 꿈 중에서 실현이 불가능한, 그래서 더욱 절실한 꿈이 하나 있었다.
나의 버킷리스트 중에서 늘 앞자리를 차지했지만 이룰 수 없는 소망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바로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대화’였다.
아버지는 서른 셋 젊은 나이에, 당신보다 한 살 어린 젊은 아내와 네 자식을 두고 돌아가셨다.
나는 장남이었고 당시 11살이었다.
사업을 제법 크게 하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살던 큰 집에서 쫓기듯 청계천 무허가 판자집으로 이사했다.
그 판자집은 몇 년 뒤 강제 철거되어
우리 가족은 구 성남지역으로 강제이주하게 됐고 한동안 천막에서 살아야만 했다.
망해도 그렇게 망할 수가 없었다.
학업는 물론 때로는 끼니도 걱정이었다.
나는 인문계 고교에 입학하기를 원했으나 가정 형편상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됐고 졸업하기 몇 달 전부터는 열일곱 어린 나이에 은행에 취직을 해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할머니와 어머니, 세 동생을 부양하는 가장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어렵게 공부하고 일찍 직장생활 하면서 나는 비교적 빨리 철이 들었던 것 같다.
그렇게 철이 들면서 내 마음속에 늘 자리하고 있었던 가슴에 사무친 꿈 하나는 바로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대화였다. 단 하루, 아버지와 철든 남자대 남자로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내 수명을 일 년쯤 단축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무의식중에 이 꿈에 대한 기도를 수십년 했을 것이다. 이룰 수 없는 꿈이라는 것을 잘 알았지만 그 소망이 너무도 간절해서 이 생각을 할 때마다 항상 코끝이 찡했다.
만약 아버지와 대화를 할 수 있다면 처음에는 아버지를 원망하리라 생각했다. 뭐가 그리 급해서 젊디 젊은 아내와 네 자식들을 두고 그리 빨리 가셨냐고. 장남인 제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시냐고. 제 좁은 어깨에 너무 많은 짐을 얹어서 힘에 겹다고. 왜 이렇게 우리 가족을 고생시키냐고.
한참 뒤에는 도대체 아버지가 어떤 분이었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아버지란 사람에 대해 궁금했다.
공부가 짧았지만 젊어서 사업을 크게 일으켰던 분.
어려운 사람 도와주길 좋아하셨던 분.
수해가 나면 늘 어린 나를 앞세워 모 신문사에 가서 수재의연금을 내곤 하시던 분.
아버지의 누나에 따르면 혼자되신 할아버지를 어린 나이 때부터 극진히 모신 더없는 효자라는 분.
내가 학교에서 일등을 하지 못하면 어김없이 회초리를 들 정도로 엄했던 분.
그런 그 분이 어느 몹시 추운 날 등굣길 너무 추워하는 내게 “춥지? 춥지않게 해줄게” 하며 불러줬던 ‘꽃집의 아가씨는 예뻐요 그렇게 예쁠 수가 없어요’라는 노래. 돌아가신 뒤 발견한 일기장에서 본 젊은 아버지의 고민들. 그 분을 만나면 나는 묻고 싶었다. 도대체 아버지는 어떤 분이었냐고. 어떤 꿈을 가지고 계셨냐고
.
또 한참 뒤에는 아버지에게 자랑하고 싶은 일들을 이야기 해드리고 싶었다.
어린 나이에 직장생활하면서 가족들을 최선을 다해 돌보고 있다고.
은행 다니며 야간대학에도 진학했다고.
죽도록 공부해서 행정고시와 입법고시에 합격했다고.
경제기획원을 시작으로 공무원 생활하고 있다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 국비와 풀브라이트(Fulbright) 장학금을 받아 미국에서 박사까지 공부했다고.
남 못지않게 직장에서 승진도 하면서 점점 비중있는 일을 하게 됐다고.
자리나 승진보다는 하는 일이 더 중요하고 ‘사회 변화에 대한 기여’를 신조로 공직생활을 하고 있다고. 아버지가 그렇게 하고 싶어 하셨던 本貫이 잘못 기재된 호적도 정정 했다고.
동생 셋을 다 시집 장가 보내 가정을 이루게 했다고.
늙어가는 어머니 잘 모시려고 애쓰고 있다고.
그리고 그보다 한참 뒤에는 다른 이야기가 하고 싶었다.
인생을 이야기하고 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담담하게, 사는 이야기와 죽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이제는 그 어떤 사진속에서도 나보다는 20년 이상이 젊은 그 준수하게 생긴 젊은 청년과 지난 이야기 뿐 아니라 인생을 관조(觀照)하며 할 수 있는 이야기,
앞으로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25년 되던 해 고향에 있던 산소를 이장하게 되었다.
길이 확장되면서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 산소를 부득불 이장하게 되었다.
산소 자리를 구하는 것부터 이장하는 작업을 하는 동안 이루 말할 수 없는 정성을 기울였다.
주초부터 시작한 작업은 금요일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고 금요일 이른 오후 산소 세 基를 파묘하며 유골을 수습하게 되었다. 봉분을 어느 정도 허문 뒤 일하는 사람들을 물리치고 동생과 나는 직접 손으로 땅을 파며 유골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일하는 사람들이 연장으로 땅을 파다가 유골이 손상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내가 직접 손으로 그 작업을 하고 싶었다.
작업을 다 마치고 준비한 깨끗한 상자에 유골을 모셨다. 그런데 세 분의 유골을 당일로 새로 준비한 산소에 옮겨 모시기에는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에 다음 날 오후 1시에 입관하기로 했다. 그날 오후 나는 세 분의 유골을 차에 모시고 당시 내 임시 거처였던 친척 형님 댁으로 가게 되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유골은 뒷자리에, 아버지 유골은 조수석에 모셨다. 조금 떨어진 거처로 바로 가지 않고 아버지가 총각 때부터 오래 사셨던 동네와 집을 돌아 보는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천천히 차를 몰면서 옆에 모신 아버지 유골을 보며 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버지 이제 아버지 사셨던 집 쪽으로 갑니다. 25년만이시지요. 그동안 많이 바뀌었습니다.” 나는 갑자기 어떤 생각에 눈물을 왈칵 쏟았다. 내 꿈이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내 수명이 일 년 단축되더라도 단 하루 아버지와 대화를 했으면 했던 꿈. 오래 전부터 마음속에 간절히 가지고 있었지만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그 꿈을 이루고 있지 않는가. 나는 그 시간부터 다음 날 점심 무렵까지 아버지를 곁에 모셨다. 그 하루 대부분 시간 내내 나는 소리죽여 눈물을 흘리며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드렸다. 아버지는 무언 중에 무슨 말씀을 하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아버지는 25년 만에 햇빛을 보셨고 나는 아버지와 만 하루를 지낼 수 있었다. 불가능하리라 생각되었던 내 버킷리스트 중 하나는 그렇게 이루어졌다.
나는 어릴 적부터 꿈이 많았다. 남보다 어려웠던 젊은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던 것 같다. 늘 두 가지에 감사하고 있다.
그 어려움들은 ‘위장된 축복’이었고 그 덕분에 오늘의 내가 있다는 점을 감사한다.
그리고 그 때 그 때 내 처지에서는 달성하기 불가능해 보였던 많은 꿈들이 이루어진 것에 또한 감사한다. 이러한 감사는 버킷리스트에 새로운 한 줄을 추가 시켰다.
감사할 줄 알고, 물러설 때를 아는 공직자가 되고 싶다.
몇 해 전 개인 싸이월드에 글을 쓴 적이 있었다.
스스로 공직생활에서 물러나야할 때에 대한 경구(警句)의 글이었다.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거나 또는 스스로 비전이 없어지면. 일에 대한 열정을 느끼지 못하고 문득 무사안일에 빠지자는 유혹에 굴하면. 문제를 알면서도 침묵하면. 문제의 해결방안을 엉뚱한 곳에서 찾는 무능력을,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노안(老眼)처럼 느끼게 되면. 잘못된 정책을 국민을 위한 것인 줄 알고 고집하는 확신범이란 생각이 들면. 언제든 공직에서 물러나서는 인생의 새 장(章)을 ‘자유인’으로 살고 싶다. 진정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찾고 그 일을 하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으로 살고 싶다.
이제는 오랫동안 가졌던 ‘아버지와의 대화’의 꿈을 거꾸로 가져 본다.
두 아들의 아버지로서 자식들과 철든 남자 대 남자로서 대화하고 싶다는 소망을 내 버킷 리스트의 맨 윗줄에 올린다. 나는 누구였고 무슨 꿈을 가지고 있었는지 이야기 하고 싶다. 또 두 아들은 어떤 청년들이고 무슨 꿈들을 가지고 있는지 듣고 싶다. 인생과 사랑을 이야기 하고 싶고 신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싶다. 내가 아버지와 하고 싶고 듣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두 아들과 하고 싶다. 그리고 돌아가신 아버지와는 하지 못했던 뜨거운 허그(hug)를 이야기의 끝자락마다 나누고 싶다. 아, 아마도 돌아가신 아버지도 웬지 그 대화의 장(場) 어디에선가 계실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풀브라이트로 얻었던 인생에서의 가장 큰 교훈
김 동 연
앤 아버(Ann Arbor)에서의 첫 학기. 현직 공무원으로 최초 풀브라이트 장학생이라는 부담. 공부를 마치면 다시 경제기획원 사무관으로 복귀해야 하는 의무. 한국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신 할머니, 어머니 등 부양가족들. 공부를 빨리 끝내야 하는 이유가 온통 넘치도록 있었다.
그러나 첫 학기의 현실은 글자 그대로 ‘survival game’ 이었다. 당장의 생존이 문제였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아야 했다. 학위는 둘째 문제고 첫 학기를 잘 넘겨야했다. 잠자는 시간을 줄이고 생활을 단순화했다. 대학 다니면서, 고시공부 준비하면서 닦았던 성적 잘 받는 모든 노하우가 동원됐다. 그렇게 정신없이 보낸 첫 학기, 성적만 놓고 볼 때는 대성공이었다. 빙고. 실력이 좋아서가 아니라 한국에서 갈고 닦은 ‘시험공부’의 경험 때문에 성적을 잘 맞는 데는 상당한 비교우위가 있었던 탓이었다.
그러나 진짜 위기는 다음 학기에 찾아 왔다. 진짜 적은 안에 있다고 했던가. 이렇게 공부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내면 깊숙한 곳에서 뭉개구름처럼 피어나는 두 개의 질문에 도무지 답을 할 수 없었다. “왜 공부를 하는가? 무슨 공부를 하려 하는가?” 둘째 학기 내내 이 질문으로 고민했다. 성적은 답이 되지 못했고 나는 보다 근본적인 답이 필요했다. 이 갈증을 풀지 못하면 한국에서 공부하던 식대로 ‘시험 공부하는 기계’가 될 것 같은 위기감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얼마 뒤 시카고에서 세계 각국에서 온 풀브라이터들 모임이 있었다. 이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 거침없이 돌아오는 다양한 답들. 왜 나는 이 질문에 답을 찾지 못할까 고민하면서 몇 개월을 보냈다. 이 질문들은 결국 내가 이제껏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도록 했다. 왜 나는 공직을 택했을까. 왜 근무지로 경제기획원을 택했을까. 죽을 고생해서 오려고 했던 유학은 가슴에 박사라는 훈장을 하나 받기 위해서였나.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명쾌하기 찾지는 못했지만 치열한 고민을 통해 분명하게 깨달은 것이 하나 있었다. 이제껏 내가 원해서 택한 길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내가 원한 것이라기보다는 주위나 사회에서 원하는 길이었다는 것이었다. 주위나 사회에서 원하는 길을 내가 원하는 길로 착각하고 살아온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은 내게는 큰 충격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원했던 길은 무엇이었을까. 답을 찾기 어려웠다. 나이 삼십이 넘어, 적지 않게 사회생활까지 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미국에 유학까지 와서 그동안 내가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 또 지금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것은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었다.
문제는 공부보다 더 근본적인데 있었다. 그것은 가치관에 해당하는 것이었고 어떻게 보면 삶의 목표이자 살아가는 방법에 관한 문제였다. 당장 내가 바뀌어야 한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그래서 힘이 들더라도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 이제껏 해오던 ‘시험공부’하는 식으로 미국에서 공부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쉽게 말할 수 있지만 그 당시 내게는 소위 ‘paradigm shift’에 해당하는 엄청난 변화였다.
그 때부터 익숙한 습관들과 헤어지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한참 뒤 이기는 했지만 두 가지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우선 공부하는 태도와 방법이 바뀌었다. 성적 잘 받을 수 있는 과목보다는 하고 싶은 과목을 택했다. 논문을 빨리 끝내기 위해 생각했던 계량모델을 돌리는 방안을 접었다. 가장 흥미를 가졌던 주제를 파고들었다. 의사결정이론은 재미있는 주제였다. 그런데 의사결정 참여자간에 힘(power)의 차이가 있을 때 의사결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나에 대한 궁금증이 꼬리를 물고 생겼다. 특히 공공부문에서의 정책결정에서는 어떠할까 하는 것에 큰 호기심이 생겼다. 기존의 문헌에서 만족스러운 답을 찾지 못했던 나는 꿀 독에 빠진 개미처럼 파고들었다. 새로운 이론과 새 의사결정모델, 방법론으로의 게임이론(game theory), 그리고 실제 현실에서의 사례연구(case study)가 필요했다. 주위에서는 시간이 엄청 걸릴 거라고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당초 계량모델을 돌려 학위를 받으려 생각했던 시간보다 훨씬 빠른 시간 내에 학위를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소중했던 것은 하고 싶은 일을 신나게 하는 체험이었다. ‘시험공부’가 아닌 ‘학문’을 하는 재미였다.
두 번째 변화는 공부를 마치고 공직에 복귀해서 생겼다. 그 전에는 왜 공직을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늘 답이 궁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는 거창한 말은 낯을 간지럽게 했고 고시가 있어 시험을 보고 공무원이 됐다는 이유는 솔직은 했지만 남에게 이야기하기 부끄러웠다. 따지고 보면 역시 주위와 사회가 권한 길을 걸어온 것에 불과했다. 내가 택했던 공직이 애초 내가 원했던 길이 아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풀브라이터로서 공부할 때처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것이 필요했다. 그리고 나름대로 답을 찾았다. 그것은 ‘사회 변화에 대한 기여’였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면서 완전히 몰락한 家勢. 70대 초 청계천 무허가 판자집이 철거되면서 지금의 성남시로 강제 이주된 중학시절. 싫었지만 할 수없이 진학했던 상업학교. 채석장에서 무거운 돌을 나르고 노상에서 좌판까지 벌리며 네 남매를 키웠던 어머니. 고등학교 졸업하기도 전 들어간 첫 직장. 열일곱의 나이로 시작한 은행원 생활. 은행을 다니면서 병행했던 야간대학에서의 공부. 할머니와 어머니, 동생 셋을 부양해야 했던 家長으로 어쩔 수 없이 직장과 대학을 병행하며 했던 고시공부.
이런 배경 탓에 내 주위에서 늘 어렵고 힘든 사람들이 넘쳤다. 그 속에서 같이 뒹굴고 살을 부비고 살면서 없고 못 배운 사람들의 따뜻한 가슴도 알게 됐다. 이런 사람들이 사는 우리 사회를 조금이라도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키는데 작은 기여라도 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공직을 하는 의미라고 생각했다. 내가 근무했던 경제기획원, 재정경제원, 기획예산처, 대통령실에서 하는 일들은 이런 사람들이 사는 우리 사회에 영향을 주고 변화시키는 ‘정책’들로 가득 찼다. 정책결정론을 공부한 학자로서 현실 사회에서 개업한 practitioner 라고 생각하니 중앙의 정책부서는 ‘정책’이란 물고기로 가득 찬 황금어장이었다. 그것은 풀브라이터로 Ann Arbor에서 체험했던 ‘시험공부’가 아닌 ‘학문’을 하는 희열과 똑같은 차원의 희열을 사회생활 속에 옮겨 놓은 것과 같은 깨달음이었다.
이러한 생각들은 기대하지 않았던 축복을 내게 하나 더 주었다. 그것은 나에게 주어진 그토록 어렵고 힘들었던 환경들이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 알게 해준 것이었다. 젊은 시절 너무나 힘들어서 절망적이기까지 했던 것들조차 얼마나 감사해야 할 일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키우는 가장 전형적인 방법인 그 사람이 있는 자리를 흩트는 축복을 넘치게 받은 것이었다. 이런 어려움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나는 없었다. 그것은 글자 그대로 ‘위장된 축복’이었다.
풀브라이트는 나와 가족에게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많은 기회와 새로운 지평을 제공했다. 그것은 단순히 공부나 학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혜택 중에서도 가장 소중한 것 한 가지만 꼽으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젊은 시절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찾아야 한다는 고민을 치열하게 하도록 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 고민은 나를 어떤 도전에도 겁나지 않게 했고, 하는 일에 죽도록 헌신하도록 했으며 고난과 어려움이 사실은 위장된 축복이란 것을 몸으로 깨닫게 만들었다.
작년에 큰 애가 미국에 있는 대학원에 진학했다. 20년 전 내 모습이었다. 얼마 전 화상통화에서 큰 애는 아버지가 Ann Arbor에서 공부하던 것이 기억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 때 아버지는 괴물이었다고 했다. 나는 부정하지 않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큰 애가 대학원 진학하기 직전 내가 준 두 가지 충고를 상기시켰다. “네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라. 도전을 피하지 말고 오히려 적극 찾아 나서라.”
그것은 풀브라이트로 인해, 이제껏 살면서 얻은 교훈 중 가장 큰 교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