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제 눈에 안경'으로 세상 보기
문학 작품에서 조선조 제6대 임금 단종과 그의 숙부인 제7대 수양대군을 두고 다룬 소설 두 편을 비교해 보자. 먼저 이광수의 <단종애사(端宗哀史)>.
왕은 삼문에게서 국새를 받으시와 수양에게 전하신다. (중략)
수양대군은 이마를 조아려 세 번 사양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일어나 옥좌 앞에 꿇어앉아 왕의 손에서 국새를 받아 들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다시 부복하였다. 수양대군도 마음이 설레고 눈물이라도 흘리고 싶었으나 조금도 슬프지 아니하였다. 손에 오랫동안 바라고 바라던 옥새가 있지 아니하냐. 이것은 꿈이 아니라야 한다.
밑줄 그은 부분을 보면 이 작가가 수양대군을 어떤 사람으로 보고 있는가가 드러난다. 왕이 되기 위해서 일을 꾸미고 저질렀던 사람이라는 것을 서술자의 말인 듯 수양의 말인 듯 일부러 그런 것처럼 구분을 흐릿하게 하면서 서술하고 있다.
이에 비해 김동인이 쓴 <대수양(大首陽)>은 다르다. 옥새를 넘겨받는 장면에서도 그런 암시를 하지만 즉위식 대목에서 이렇게 서술한다.
내가 못할 일을 했는가? 신왕은 몇 번을 속으로 자문하였다.
그러나 거기 대한 대답은 명료히 그의 마음에 일었다.
-- 아니로다. 천상천하 아무데를 내놓을지라도 추호 부끄러운 데 없다. 다만 조카님의 부탁과 같이 이 백성을 네 힘으로 넉넉히 안락 되게 하며, 이 땅을 기름지게 키우는 데 성공하겠느냐 못하겠느냐 하는 문제뿐이로다.
온 힘을 다 쓰자. 뼈를 부수고 몸을 갈아서라도 조카님의 뜻에 봉답하고 또 어린 마음에 고통을 받으시며 물러서신 조카님을 이후 마음과 몸이 아울러 평안하시도록 온 힘을 다 쓰자.
신왕은 굳게 마음에 결심하였다.
이 대목에서 드러나는 수양은 야심에 찬 사람이라기보다는 책임감에 투철한 사람이다. 그러한 평가는 이 두 작품의 제목에서 이미 암시되어 있기도 하다.
<단종애사>는 '애사'라는 말을 씀으로 해서 단종의 슬픈 처지를 제목부터 강조하고 있고, <대수양>이라는 제목에 붙은 '대'라는 표현부터가 그 인물의 걸출함을 은연중에 암시하고 있다.
이 두 작품은 다 같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쓴 소설이다. 그런데 이만큼 다르다. 무엇 때문인가. 두말할 나위도 없이 관점의 차이 때문이다. <단종애사>가 나온 직후에 <대수양>이 씌어졌다는 사실은 이 두 작가의 보이지 않는 암투를 말해 주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한들 이것이 억지소리라면 소설이 될 수도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누가 읽어 줄 리도 만무하다. 그러나 당대의 정치적 상황으로 보건대 수양은 인륜을 배반한 인간으로 볼 수도 있고, 또 명석한 판단력의 소유자로 볼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세상만사가 지닌 여러 가지의 의미며, 그것을 어떻게 판단하느냐 하는 것을 관점의 문제가 된다. 이른바 '제 눈의 안경'으로 세상을 바라보기다.
문학이 이처럼 세상만사를 '제 눈의 안경'으로 새로이 바라보는 데서 이루어진다는 말도 가능하다. 이렇게 새롭되 '참된'을 지니고 있어야 하고, 누구나 구개를 끄덕일 만한 '그럴듯함'을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 이를 두고 문학의 '개별성과 보편성'이라는 말을 써서 설명하기도 하지만, 어려운 용어는 몰라도 그만이다. 그러나 문학의 새로움과 진리성은 문학을 가능하게 하는 생명이라는 점만은 기억해 두자.
5) 삼라만상의 다의성(多義性)
문학은 제 눈에 안경으로 세상을 새롭게 보는 것이라고 하면서 문학의 개별성과 보편성을 들먹였는데, 그런 일이 어째서 필요하며 가능한지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이 세상의 삼라만상 세상만사가 그 어느 것이나 다양한 뜻을 지니지 않은 것이 없다.
예를 들어, 같은 구름을 바라보더라도 그것이 얼마나 달리 보일 수 있는지를 살피기 위해 우선 헤세(H. Hesse)의 시 <흰 구름>을 읽어 보자.
오- 우러러 보시오. 흰 구름이 또
잊어버린 아름다운 노래의
가냘픈 멜로디와도 같이
푸른 하늘을 흘러갑니다.
기나긴 방랑 끝에
나그네의 슬픔과 기쁨을
한결같이 맛본 사람이 아니면
저 구름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태양과 바다와 바람과 같은
하이얗고 정처 없는 것을 사랑합니다.
그것들은 고향을 떠난 나그네들의
자매이며 천사이기 때문입니다.
헤세를 방랑자의 서정을 지녔던 시인이라고 말하지만, 이 시가 바라보는 구름이 어떤 뜻을 지녔는지는 쉽게 이해된다. 흘러가는 한 조각 구름에서 나그네의 정처 없는 모습을 보는 것은 앞의 <인간적 삶과 문학적 감동> 장 -<탈무드>의 두 소년 이야기-에서 말한 '대상에 의한 자기 발견'에 해당한다는 점이 분명하게 이해될 것이다.
우리 인생 또한 구름처럼 떠도는 나그네가 아니던가. 마음의 고향, 진리의 고향, 삶의 고향을 찾아서 영원히 떠도는 것이 우리의 삶인 것을 헤세의 시를 읽으며 알아차리게 된다.
그러나 구름이 그런 속성만을 지닌 것은 아니다. 흘러가는 구름을 보았으되 전혀 다른 뜻으로 해석되는 이항복의 시조를 보자.
철령 높은 곳에 쉬어 넘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孤臣寃淚)를 비 삼아 띄워다가
임 계신 구중심처(九重深處)에 부려 본들 어떠리
구름에 동서양의 차이가 있을 까닭이 없다. 그러나 이 시조가 본 구름은 '비를 뿌리는 것'이고, 그러기에 가슴에 한이 많은 사람이 그 시름을 실어 보기도 하는 대상이다.
그러나 가람 이병기의 시조를 보면 구름의 또 다른 뜻이 드러난다.
새벽 동쪽 하늘 저녁은 서쪽 하늘
피어나는 구름 그 빛과 그 모양을
꽃이란 꽃이라 한들 그와 같이 고우리
해 뜰 무렵, 혹은 해가 질 무렵, 화려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오묘한 빛을 띠는 구름을 눈여겨 본 적이 있다면 이 시조는 쉽게 이해된다.
그저 아름다운 빛과 형체…, 그 선연하면서도 형언 못할 아름다움을 지닌 존재가 구름이 아닌가.
그러나 구름에서 전혀 다른 것을 본 이 시는 어떤가.
삶이란 한 조각 뜬구름이 생겨나는 것이요 (生也一片浮雲起)
죽음은 한 조각 뜬구름이 스러지는 것이라 (死也一片浮雲滅)
뜬구름 자체는 본디 그 실상이 없는 것이니 (浮雲自體本無實)
생사의 오고감이 또한 이와 같도다 (生死去來亦如然)
이 구절은 불교에서 흔히 인용하는 법구(法句)기도 한데, 구름은 생기고 스러짐이 무상한 물체요 거기서 인생의 모습을 알아차리게 하는 의미를 지닌 것이다. 다시 말해 구름이 본디 지니고 있는 무상(無常)의 모습을 생각하면 그것이 구름의 한 의미며, 거기서 인생의 모습을 발견한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문학은 종교와 흡사한 데가 있다. 문학이나 종교나 모두 한 가지로 삼라만상의 다양한 뜻과 참뜻을 찾아 헤매는 구도의 길이라는 점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6) 동상이몽(同床異夢)과 이상동몽(異床同夢)
삼라만상이 달리 보이는 것은 사람마다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왜 관점이 달라지는 것일까?
그것은 사람마다 삶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 생각이 다르고 그 생각이 다름은 사는 것이 다른 데서 비롯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동상이몽도 여기서 비롯된다.
여기서 우스갯소리 하나를 예로 들어 보자.
설명을 듣고 단어를 알아맞히기 게임을 하는데, 젊은 남자가 자기 애인에게 '극장'이라는 단어를 설명하면서 '우리가 만나면 자주 가는 곳' 그러니까 여자가 냉큼 한다는 대답이 '모텔'이라고 했다는 하자. 왜 이런 어이없는 대답이 가능한가? 그것은 생각의 차이 때문이다. '둘이서 만나면'이라는 단서가 달려 있으니까 체험을 함께 한 부분을 연상하라는 전제는 충분하다.
그런데도 대답의 차이가 생기는 것은 각자에게 기억되고 연상되는 대상에 차이가 있다는 뜻이 된다. 쉽게 말해서 남자 쪽에는 '극장'의 인상이 강렬하게 작용하고 있는 반면에 여자 쪽에는 '모텔'의 인상이 두드러지게 남아 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이 점에서 같은 체험이라도 그 비중이 다르며, 바로 그 차이 때문에 연상 혹은 상상가지가 달라짐은 당연하다.
똑 같은 체험을 가졌을 경우에도 이러하거늘 저마다의 삶이 다르고 바라보기가 다른 인간에게 동일한 삼라만상이라 한들 같은 의미로 해석될 수 있겠는가.
이해의 도움을 얻기 위해서 김수영의 <푸른 하늘을>이라는 시를 보자.
푸른 하늘을 제압(制壓)하는
노고지리가 자유(自由)로웠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詩人)의 말은 수정(修正)되어야 한다
비상(飛翔)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自由)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革命)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革命)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로 시작하는 시조를 노래한 사람이 본 노고지리는 날이 밝으면 부지런히 일을 시작할 줄 아는 새였지만, 그 시조가 분명 보지 못했던 노고지리의 본성을 김수영은 노래하고 있다. 그것은 '자유를 위한 비상'이며 '고독한 울음'이다. 이것을 알아차리는 능력은 그것을 아는 삶을 지녔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문학은 삼라만상의 숨겨진 의미를 찾고 진리를 찾는 일이다. 훌륭한 작가나 시인이 되기 위해서는 글 쓰는 연습보다 바르고 풍성한 삶을 지니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말이 이래서 가능하다.
그래야만 같은 세상을 살고 동일한 삼라만상을 보면서도 여느 사람은 알아차리지 못하는 진리를 찾아내는 동상이몽과 같은 깨달음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 동상이몽은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가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진리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점에서 이상동몽이라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처지가 제아무리 다르더라도 그 해석된 의미에 공감할 수 있을 때 그것은 비로소 훌륭한 문학 작품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첫댓글 삼라만상이 다의성을 가지고 있음을 다시 한번 가슴에 새기며 어젠 소금강을 다녀오면서 물의 흐름을 다시
삶에 가르침으로 받아 드리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 좋은 강의를 많은 사람들이 작가 희망생들과 작가들이 다시금
가다듬는 시간이 되어 감사합니다. 건강하시길;;;;;
문학의 개별성과 보편성을 인정한다면 그 속에 깃들어 있는 다의성과 다양성 또한 인정해야 합니다.
그게 바로 문학의 개별성이자 다의성이고 다양성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뜬구름이 삶이고 죽음이고 무상이라는 이치와 같습니다.
저도 어느 이른 겨울 날, 소금강 계곡을 찾았다가 개구리 울음소리에 놀라 도망쳐 나온 적이 있답니다. 욕심이 생겨 문학강의랍시고 시작하고 보니, 수강생들이 시들해 하시는 것 같습니다. 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