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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한국의 마을신앙 현장조사 보고서 360
1. 마을개관
조리(造里)마을이 있는 두구동은 과거에는 동래구에 속한 지역이었다.
지금의 동래가 자리 잡기 전에 동래부사가 지나가다가 두구동을 보고
산수가 좋아 동래부를 이곳에 세우려 하였으나,
세울만한 곳이 또 있는지 두고 보자 하여 남쪽으로 내려가 다른 곳을 둘러 보다
지금의 안락동에 동래부를 세우게 되었다. 동래부를 이곳에 세우지 않고
“두구(두고) 보자”라고 해서 두구동이라 지명이 지어졌다 한다.
두구동 6통을 조리마을이라 부르는데 조씨가 처음으로 정착했다고 하여
조리(趙里)마을이라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조씨가 거의 살고 있지 않고
다양한 성씨들이 정착하여 거주하며 명칭도 조리(造里)로 변경되었다.
조리마을은 부산이 광역시가 되면서 경상남도 기장군에서
부산광역시 금정구 두구동으로 편입되었다.
부산 북동쪽에 끝에 위치해 있고, 부산~울산 간 7번 국도를 타고
부산에서 5분 정도 울산 방면으로 나가다 보면 오른편에 조리마을로 이어지는
간선도로가 있다. 7번 국도에서 조리마을까지는 3분 정도가 소요된다.
마을의 주 교통수단인 마을버스가 40분 간격으로 운행하고 있고,
지하철이 1호선 종점인 노포동역을 기점으로 조리마을까지 순환 운행한다.
조리마을은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환경을 가지고 있다.
마을 동쪽으로 공덕산이 위치해 있고 서쪽에는 북에서 남동 방향으로 흐르는
수영강 상류와 지류가 마을을 가로지르고 있다.
마을은 공덕산 서쪽 자락, 수영강 상류 동쪽과 지류 남쪽 사이 평지에
위치해 있다. 수영강변 쪽으로 평지가 넓어 벼농사를 하며
공덕산 쪽 언덕에서는 밭농사와 비닐하우스 농업을 한다.
수영강 상류를 건너는 다리를 지나면 부산의 옛 중심지였던
동래 방향으로 향하는 7번 국도와 연결된다.
마을이 최초 형성된 시기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며
그에 대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마을에는 임진왜란 당시에 조씨와 강씨가 피난을 와서
강씨는 지금의 5통에 정착했고
조씨는 지금의 조리마을인 6통에 정착했다는 말이 전한다.
공식적인 조직으로 조리마을 부녀회가 조직되어 있고
두구동 전체에 두구동청년회가 조직되어 있다.
최근까지 마을 대동회가 있었는데
현재는 젊은층이 적고 농사를 주업으로 하는 인구가
줄어들어 대동회를 하지 않은 지 오래 되었다.
마을회의는 통장 및 부녀회를 중심으로 필요할 때마다 열어
간이상수도 정비, 동제, 비닐하우스 설치 같이 마을 대소사를 논의한다.
과거에는 품앗이나 계 같은 조직도 있었으나
지금은 활성화 되어 있지 않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부산에서 직장생활을 한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일부 있으나 영세하고 작은 규모이다.
조리마을에는 대략 90호에 193세대가 거주하고 있으며
주택은 대부분 단층 개량 슬레이트 집이다.
다른 농촌과 마찬가지로 주로 노·중년층이 거주하나
중등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을 가진 사람이 많아
연령층에 비해 높은 교육수준을 보인다.
특별한 문화재는 없으나 두구동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당산제당이 조리마을에 있다.
2. 동제의 내용
1) 제당의 명칭과 형태
정월 대보름에 지내는 동제에 대한 특별한 명칭은 없고 동제 또는 당산제라 부른다.
동제당도 특별히 따로 부르는 명칭은 없이 당산제당이라 칭한다.
동제당은 조리마을 정동쪽으로 50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으며
서쪽으로 수령 300년 정도 된 팽나무가 있다.
제당 동쪽 담 옆에 당산나무로 추정되는 나무가 있는데
3미터 정도 높이부터 줄기째 잘려 있다.
제당이 언제 건립되었는 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마을 어른들에 의하면 300년 정도 되었다고 한다.
상량문에는 1931에 상량되었다고 적혀있으나,
이는 지붕을 새로 올리면서 상량된 글이라 한다.
동제당은 가로 2.4미터, 세로 2.4미터, 높이 2.8미터 정도 규모로 팔자지붕의 한옥이다.
제당을 둘러싼 담은 오랫동안 방치되어 동쪽 벽이 약간 허물어졌다.
이 담은 직사각형 모양으로 각 모서리가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다.
이 제당에서는 산령(산신령)을 모시며 신체는 흰색 도료로 칠해진
직사각형 나무 위패 2개이다.
위패는 가로 14.5센티미터, 세로 80센티미터로
‘堂社之神位’와‘山靈之位’가 쓰여 있다.
당산 내부는 아래와 같다.
제를 지낼 때‘당산할매 제사 지낸다’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당산신은 여신으로 추정된다.
제단 밑의 제기(祭器) 보관함에 놋쇠 제기가 보관되어 있으나,
관리가 어려워 현재는 사용하지 않고 일회용 그릇을 사용한다.
제당을 청소하는 날은 특별히 없다.
동제 하루 전에 제관들이 청소하고 잡인들의 출입을 금하고
부정을 타지 않기 위해 동제당 앞문에 금줄을 친다.
2) 동제의 준비
조리마을 사람들은 특별한 목적으로 동제를 지내는 것은 아니며
다만 지금까지 동제를 잘 지냄으로써 아무 탈 없이 모든 일이 잘 마무리되었다는
믿음으로 제를 지낸다. 마을에 홍수가 난다든지 흉년이 들거나 도둑이 들면
그해에 동제를 잘못 지내서 그런 것이라고 원망을 듣는다.
그래서 동제를 나서서 모시려고 하는 사람들은 없으나
안 모실 수도 없어 동제를 지낸다.
동제는 일 년에 한 번, 정월 열나흗날 자정에 지낸다.
이 제사를 마을이 생긴 이후로 지금까지 매년 지내 왔다.
(1) 제관(祭官) 선정
제관을 선정하기 위한 특별한 방식은 없다.
매년 각 반에서 돌아가며 지내며 동제를 맡은 반 주민들 중
가장 깨끗한 사람을 제관으로 추대한다.
대부분 연장자 순으로 남자들이 제관이 된다.
따라서 제관 선정일 역시 정해져 있지 않다.
다만 마을회의에서 제관을 선정하는데 연임하지 않으며
그 반에서 제일 깨끗한(윤리적인) 사람이 제관의 책임을 맡는다.
제관의 자격은‘깨끗한 사람’으로 대단히 막연하다.
제관이 되기 위해 자격이나 제한을 두면 까다롭다고 서로 하지 않으려 하기에
특별한 금기나 자격을 두지 않는다.
제관은 당산제관으로 불리며 (당산)헌관, (당산)축, 산령축, 집례 각 1명씩과
집사 2명으로 총 5명을 선정한다. 제복(祭服)은 한복 위에 도포를 입는데
당산헌관만 도포를 입고 머리에 유건을 쓰며 나머지 제관들은
평상복 차림을 한다. 매해 정월 초이튿날에 마을합동세배를 하고
제관을 선정하는 날짜를 정하는데 2005년에는 초이렛날로 정하였다.
제관으로 선정된 뒤에는 3개월 정도 길흉사에 나가지 않는다는 금기가 있다.
(2) 제비(祭費)와 제물(祭物)
제비는 동제를 지내기로 한 반의 사람들이 갹출해서 마련한다.
동제비에 대한 특별한 이름은 없고 각 호당 1만 원 정도 걷는다.
혹시 남거나 부족할 수도 있는데 많으면 많은 대로 제물을 구입하고
적으면 적은 대로 구입해 제비를 남기지 않는다.
제물은 제관과 반 사람들 몇 명이 제일 하루 전에 시장에서 구입한다.
제물의 종류와 수량도 일반 제사와 크게 다르지 않으며,
각종 나물, 과일(사과, 배, 밤, 감, 대추), 나물(고사리, 콩나물, 무),
고기(육류, 생선), 포, 시루떡, 돼지고기를 놓는다.
제물을 구입할 때의 특별한 금기는 없고 물건값을 깎거나 흥정하지 않는다.
(3) 제수(祭需) 준비
예전에는 제물을 조리하는 사람이 있었으나 지금은 준비하기 번거롭고 바쁘다는 이유로
조리된 음식을 사서 준비한다. 만들어진 음식을 구입하기 때문에 제물을 준비할 때
지켜야 할 금기도 사라져 버렸다.
제기도 일회용을 사용하고 제당에 있는 놋쇠 제기는 사용하지 않는다.
진설 방법은 일반 제사와 동일하다.
3) 동제의 진행
제 지내기 하루 전에 제당과 노제(거리제)를 지낼 곳에 금줄을 친다.
정월 열나흘 자시(子時) 초(23시)에 제관이 제에 참석할 사람들을
돌아다니며 소집한다.
사람들이 모이면 제물을 잘 포장해서 당산제당으로 간다.
누구나 제사에 참석할 수 있으나 보통 5명 내외가 참여한다.
제단에는 시루떡, 생선, 생선포, 과일, 나물, 산적(조개, 문어, 쇠고기),
두부, 명태전, 탕국이 진설된다. 자정이 되면 당산제를 올린다.
초헌(初獻), 절[三拜], 재헌(再獻), 축문 낭독, 절, 종헌(終獻), 절, 음복 순으로
진행되며 제가 끝나면 소지한다. 소지를 할 때는 불교에서 제를 지낼때
흔히 사용하는 소지종이를 구입해서 사용한다.
소지를 한 후 남은 재로 점을 치지는 않고 다만 소지 후
종이가 다 타서 완전히 재가 되면 좋은 징조라 생각한다.
제관들과 참관자들은 당산제당 안에서 음복하고 자리를 옮겨 거리제를 한다.
거리제는 마을을 관통하는 길이 시작되는 지점,
즉 마을의 서편 논이 잘 보이는 삼거리에 있는 나무 앞에서 한다.
나무에는 미리 금줄이 쳐져 있다.
제를 지내는 절차는 당산제와 동일하다.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동제를 전후해
마을 전체가 지켜야 할 금기는 없다.
(2) 축문(祝文)
축문은 산신령인 당산할매가 마을을 위해 힘써준 노고에 감사하고
앞으로 일 년 동안 마을의 무사안일을 구한다는 내용이다.
維
歲次乙酉一月甲子朔十五日戊寅
幼學敢昭告于
孔德識馬山靈堂社神靈
歲遷一祭禮有中制履玆上元之日
謹以淸的庶羞祗薦歲事尙
饗
4) 동제의 운영과 결산
동제 운영은 보통 통장이 중심이 되고 부녀회가 보조한다.
조리마을의 각 반에서 매년 돌아가면서 동제를 주재하고 운영한다.
동제에 관한 제반 사항은 부녀회와 청년회 회의를 통해 결정된다.
동제를 지낸 후 결산을 하거나 따로 동제와 관련된 모임을 갖지는 않는다.
다만 제를 지낸 저녁에 제를 지낸 사람들이모여 음복하며 덕담을 주고받는다.
3. 동제의 특징
조리마을 동제가 어떤 원형을 가지고 있었고 어떻게 변화하고 전승되어 왔는지는
분명치 않다. 과거의 동제를 기억하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고
마을 구성원도 원래 살던 조씨 일가가 아닌 외지인들로 바뀌어 있다.
조리마을 동제는 전통적인 양식과 모습을 보전하기보다는 현실 생활과
괴리되지 않는 실용적인 모습으로 변화되었다.
제물을 준비하는 과정이나 제관 선정 같은 절차가 삶의 현실에 맞추어져
보다 편리한 방향으로 수정되었다.
조리마을 사람들의 대부분이 외지인들이기에 동제를 지내는 데에 따른
책임감이나 동제를 지내면서 지켜야할 금기가 없다.
동제를 지낸다는 사실조차 20대 이하 젊은사람들은 모른다.
몇몇 어른과 통장을 중심으로 하는 부녀회에서 준비하고
지내야 하는 그들만의 동제가 된 것이다.
[출처 : http://www.nfm.go.kr:8060/downfile/book_mag/383/1-05.pdf ]
첫댓글 "제보자 = 강윤기" ☞ 강종욱 아버지 아닌가? 맞을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