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제1부 폭풍전야
제1장 유신과 저항
5.민청학련사건
대규모 학생조직 결성 유신폭압 항거
'가담자 최고 사형' 긴급조치 4호 발동
전남대 [반독재]노선 점차 이념.조직화
윤보선.지학순.이철등 군재회부... 대중 투쟁 확산
[데모학생 사형까지...관련학교 폐교]
[민청학련학생총연맹 활동금지]
74년 4월3일 밤 光州의 석간 [전남매일신문]경우도 살벌한 제목을 달아 호외로 시내 전역에 뿌려진다.
긴급조치 4호가 발동된것이다. 이에앞서 청와대 대변인 김성진은 TV를 통해 그이유를 발표한다.
[공산주의자들의 배후 조종을 받은 민청학련이 화염병과 각목으로 시민폭동을 유발, 정부를 뒤엎고 노농정권을 수립하려는 국가변란을 기도했다.]
이어 3개월만인 6월25일 비상보통군법회의에 단일 사건으로는 사상최대규모의 조사피의자 1천24명중 2백53명이 회부된다. 이들에게는 사형(14명)부터 무기징역, 징역20년, 최하 징역5년까지가 구형된다. 이사건에 관계한 서울대생은
이철(국회의원. 민주)
유인태(')
제정탁(')
황인성(전국연합집행위원장)
정찬용(광주 YMCA 총무부장)등.
또 광주출신으로는
나상기(농민문제연구소장. 당시 KSCF)
박석률(서강대 배후조정)
김경남(목사. 당시 한산대책)등.
전남대생은
윤한봉(5.18마지막 수배자로 미국망명중 최근해제)
김상윤(하심의료기구대표)
김정길(광주. 전남민주연합집행위원장)
윤강옥(민주당 광주시지부 사무처장)
이강(수산무역대표)등 18명.
이중에는
윤보선 전대통령,
지학순주교,
김찬국교수,
김지하시인,
인혁당재건관련자 21명,
일본인2명도 포함된다.
한편 인혁당 관계자등 8명은 대법원의 사형확정판결을 받은 바로 그 다음날인 75년 4월8일 때마침 황사현상이 심하게 이는 가운데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징역 형량만 모두 합해도 수백년이 넘고 데모를 기도해 국민은 물론이고 전세계에 까지 엄청난 충격을 던지고 만다.
박정희 유신독재의 상상을 초월한 이같은 국대대탄압은
전태일분신사건(70년)
광주대단지사건(71년)등
확산되는 민중의 생존권 투쟁과 학생 지식인중심의 반독재투쟁이 급속히 결합돼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날수밖에 없는 박정권의 위기돌파책이랄까.
광주지역 민청관련자들의 증언을 종합한다. 광주지역 민청사건의 전개과정은 이렇다.
6.3사태(64년)
한일회담 반대시위(65년)
월남파병반대시위(')
3선개헌반대시위(69년) 등
이슈에 따라 비조직적으로 시위를 해온 전남대학생운동은
71년 교련반대시위와
부정선거규탄시위를 거치면서 제적생과 무기정학생이 속출하고 점차 이념화 조직화돼간다.
71년 정상용(법대) 이양현(사학) 김정길(경영) 등이 주도해 [민족사회연구회]라는 본격적인 사회과학 서클도 생긴다. 72년 10월17일 전대미문의 폭압통치인 유신이 선포되고 [암흑의 시대]는 시작된다.
바로 그해 12월 5일 유신선포후 폭압에 항거하는 전남대 전남주(영문4) 이강(법2) 김정길(경영2) 박석무(법대졸. 고창고교사)등에 의해 지펴진다.
이른바 [함성고발지]사건으로 유신체제를 극렬히 비난한 이 유인물은 교내로 살포되고 서울로 운송도중 소화물속에서 발견된다.
이어 73년 8월 김대중납치사건으로 박정권의 야수성이 또다시 드러나면서10월 2일 [반유신]의 기폭제가 된 서울대문리대 시위가 폭발한다.
전국의 각 대학는 시위와 동맹휴학이 확산되고 재야인사와 종교계인사들의 인권선언 언론인들의 언론자유수호선언 등이 발표되면서 박정권의 뿌리는 점차 흔들리기 시작한다.
12월 4일 장준하 등 재야원로는 [개원청원 1백만인 서명운동]에 돌입하고 위협을 느낀 정부는 74년 1월 8일 유신헌법을 고수키 위한 [긴급조치 1호]선포와 비상군법회의를 설치해 무단통치에 들어간다.
바로 이틀뒤 서중석 유인태 이철 나병식(풀빛출판사 대표)등 73년 10월 서울대 문리대 시위 핵심들은 반유신시위를 계속 준비해 가기로 모의한다. 나중에 이것은 민청학련결성일로 수사에 기록된다.
이같은 분위기는 이미 행동을 개시한 각지역도 마찬가지. 전남대도 박형선등 학사징계자와 김정길등 [함성지]관련자들이 감옥에서 풀려나고 광주일고 동문 서울대 제적생 나병식 정찬용등과 접촉한다.
여기에 윤한봉(축3) 김상윤(국문2) 등이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해 [뉴페이스]로 가세한다.
두사람은 착실한 학구파였으나 유신을 계기로 방향을 전환한 대표적 케이스. 두사람은 민청학련 복역후 출소해 다른 민청세대와 함께 광주지역 사회운동의 뿌리를 내리면서 80년 5.18주동자로 몰린다.
[한봉이형은 공부밖에 몰랐다. 농대교실에서 공불할 때 깡통을 갖다놓고 오줌을 쌀정도였다. 73년 9월 교양독서회(민족사회연구회가 개칭됨)회원 환영식에서 처음으로 만났는데 눈이 반짝 빛났다. 곧바로 의기 투합했다.] 73년 11월께 광주에 온 이철에게 드러나지 않은 윤한봉을 전남지역 총책으로 천거한 김정길의 말이다.
김은 한달뒤 당시 동신다방(현 충장로 4가)에서 윤에게 [전남책을 맡아달라]고 어렵게 말한다. 이윽고 [유신뒤로 연필 공책 다던져 버렸다. 목숨을 걸고 싸우겠다.]는 윤의 승낙을 얻는다. 윤은 곧바로 송정민(영문4. 현전남대 신방과교수) 위상복(' 철학과교수) 등과 [문리대 3총사]로 통하면서 역시 드러나지 않은 김상윤에게 위를 통해 접근, 문리대등을 중심으로 한 조직을 권유한다.
군에서 유신을 맞았던 김은 그때 꼬박꼬박 쓰던 일기까지 중단함은 물론, 복학후 제적생 복학운동등을 시도하는 중이 아닌가. [[복학이 문제가 아니고 유신체제가 문제다]며 한봉이형이 하도 간곡히 부탁해서 [그러면 해봅니다]하고 학비를 벌던 학원강의까지 때려치우고 조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는 김은 문리대를 비롯 의대 , 조선대의대까지 넘나들며 분주해진다.
조직이 무르익어 가던 12월말 이철 나병식 황인성이 또 광주로 내려와 당시 조직된 사람들과 재접촉이 이뤄진다.
이어 다음해 1월 전국상황을 함께 점검하는 자리가 속리산에서 시도된다.
이미 조직이 정보부의 감시를 받고 있다고 감지한 민청전국조직책들은 조치원에서 만나 통행금지가 없었던 속리산으로 유람객을 가장해 자리를 마련한다.
전남대에서 윤한봉 김상윤이,
서울대에서 황인성(독문4) 전홍표(철학4),
경북대에서 임규영등이 모였다.
[전국에서 동시에 일시에 궐기하기 위해 3월에 마지막 점검을 하자]고 약속한대로 3월에 부산구포구에서 만난 전국조직책들은 시내에서 역사적인 작업에 들어간다.
서울의 황인성, 경북대 이강철 황철식, 전남대 김상윤등은 이자리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선언문을 작성, 장기표가 작성한 [민중의 소리]를 함께 소지하고 귀향한다.
[서울쪽은 보안유지가 매우 어려워 빨리 시위를 진행해야 한다. 4월초순은 넘기지 않기로 한다. 조직이름도 정식조직이 아니니까 이름을 밝히지 않으며 선언문도 미리 사용치 말고 데모 전날 일제히 뿌리기로 한다.] 그러나 계획은 사전에 누설되고 지도부가 수사기관의 추적을 받기 시작, 공동연합시위는 무산된다.
4월 3일 서울 주요대학에서 소규모시위가 터져나오고 민청학련 이름으로 된[민중.민족.민주선언]과 [민중의 소리]등의 유인물이 배포된다.
오늘 우리의 궐기는 진정한 자유와 평등을 대변하고 이땅에 진정한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민중적.민족적.민주적운동이다....(선언문 일부) 이날 민총학련사건과 긴급조치 4호가 발표된다.
4월8일까지의 자수기간중 안잡히면 9일 데모후 잡혀가자고 결의한 전남쪽은 8일 저녁당시 불로동 2층 술집 블론디에서 모인다. 김상윤은 김정순(당시 국문과 여학생)과 애인으로 가장해 자신의 학동자취방 벽장에 숨겨 놓았던 유인물(윤한봉이 작성한것. 민청유인물은 사건이 발표돼버려 사용안함)을 가져와 배부한다.
9일 윤한봉 김상윤 박형선 최철(농1)은 사직공원 팔각정에서 만나 당시 스쿨버스정류장이 있던 계림동으로 가서 차안에서부터 유인물을 뿌리면서 살포하다 대기중인 경찰에 연행된다.
이들은 나중에 검거된 김정길등과 함께 도경 공작실(현 도청앞)에서 3개월간 고초속에 조사를 받고 서울구치소로 이감돼 군사재판을 받는다.
이들은 1심뒤 [이따위 재판은 인정할 수 없다]고 항고도 포기, 인혁당사건 관련자와 반공법위반자 일부를 제외하고 사건발생 10개월만이 75년 2월 15일 모두 석방된다.
사면초가의 궁지에 빠진 박정권이 일시 굴복한 것이다. 이로써 튼튼한 이론으로 무장된 엄청난 숫자의 사회운동가가 일시에 양산되면서 각 부문에서 활약하는 이들에 의해 유신은 종말을 가속화한다.
광주 민청세대는 석방 2개월 후 [구속자협의회]를 조직하고 본격적인 사회운동을 시작한다.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에 투신, 노조조직등 기층 민중운동 확산에 노력한다.
사회과학 서클을 조직, 의식있는 후배들을 배출하고 종교계.학계등 광범위한 세력과의 연대활동에도 주력한다.
또 남민전 등 혁신계 전위운동에 참여도 한다.
마침내 민청세대는 긴급조치 9호세대와 큰 줄기를 이뤄 80년 5월을 맞이하게 된다.
<김선출차장>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푸른솔님 감사 합니다.
매일1편이상 올려 100편으로 마무리 할 계획 입니다..
자주 방문하여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