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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파고(波高)
7
그는 자재창고에 불냈다는 어처구니없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근무한지 겨우 두 달 남짓 만에 태성고무에서 속절없이 쫓겨났다. 그도 처음엔 억울하다는 생각으로 자신의 결백을 회사 측에 주장했지만, 사전에 짜여진 각본대로 음모의 희생양으로 삼았던 그의 말이 회사 측에 먹혀들어갈 리 없었다. 그리고 그 역시 자재창고의 화재가 김 부장 일당이 자재를 빼돌리고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저질렀다는 것과 거기에 화재보험금을 타먹기 위한 사주의 음흉한 계교가 빚어낸 합작품이었음을 인지했기에 더 이상 그런 공장에 다닐 맘도 없었다.
그의 신분이 계약직도 아닌 일용직근로자나 다름없으니 퇴직금이나 해고수당 같은 그런 사치스런 전별금 따위가 있을 리 없고 그렇다고 일방적인 해고를 통보한 회사 측이 위로금이랍시고 몇 푼이나마 내어줄 리 없었다. 단지 5월 달에 들어 화재발생 직전까지 총 근무일수 17일에 일당 1백원씩 계상(計上)하여 그에 해당하는 1천7백원이 그가 태성고무를 쫓겨나오면서 받아 쥔 금액의 전부였다.
그는 태성고무에 취직을 시켜주고 하꼬방까지 얻어준 박만필 사장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일했다. 그런데 결과는 애꿎게 방화범으로 몰려 갖은 고초를 당하고 게다가 공장에서마저 강압적으로 쫓겨나다시피 했으니 대단한 기대를 걸고 시작한 첫 직장으로서는 참으로 허망한 끝맺음이었다.
그는 기력이 거의 탈진하여 열흘이 넘도록 넋을 놓고 자리에 누워 지냈다. 부모가 죽었을 때보다도 누이들이 모두 그의 곁을 떠났을 때보다도 더한 상실감이 엄습했던 것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몸을 추슬렀어도 한동안 두려운 생각과 허탈한 기분으로 두문불출하고 방안에서만 망연하게 지냈다.
수갑을 찬 채 방밖으로 끌려나왔을 때의 두려움과 수치감은 물론 방화범으로 몰려 경찰서에서 갖은 고문과 협박을 당했을 때 느꼈던 공포와 절망감을 좀처럼 떨쳐낼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앞으로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야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세상이 두렵고 세상이 그리 녹록하지 않다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된 것이다.
처음 부산에 왔을 때 노가다 판도 기웃거렸고 또 국제시장에서 지게질도 했다. 그 세계 사람들은 단순무식한 사람들이라 말투도 거칠고 아무것도 아닌 것에 괜히 흥분하고 또 폭력도 쉽사리 휘둘러댔지만 남을 모함하기는커녕 나름의 인정이란 것도 베풀 줄 알았다. 그런데 큰 회사라고 마냥 믿고 들어간 태성고무에서 겪은 부당한 일들은 도저히 납득할 수도 없겠거니와 그런 악랄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무사할 수 있는 그들이 용서되지 않았다.
‘나쁜 놈들…, 어떻게 지거들이 자재 빼돌린 걸 은폐하기 위해 저지른 방화를 내게 덮어씌울 수 있단 말여?’
그는 자신에게 그 같은 엄청난 누명을 씌워 회사에서 쫓아낸 신 부장이나 김 주임의 그 야비한 처사를 원망했고 또한 죄 없는 사람 경찰서로 끌고 가 사흘 밤낮을 꼬박 굶겨가며 갖은 고문으로 거짓자백을 강요한 경찰도 원망했다. 특히 자기네들이 원했던 바대로 ‘예, 지가 홧김에 불을 질렀씸다’라는 거짓자백까지 받아놓고도 나중엔 ‘없었던 일로 하겠다’라며 자신을 집으로 돌려보내준 경찰의 처사만큼은 아무리 이해하려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거대한 힘에 짓눌리어 아무리 발버둥 쳐도 헤어 나올 수없는 악몽의 연속이었다. 그런 현상은 낮이나 밤이나 깨어있을 때나 자고 있을 때나 경계가 모호하게 되풀이되었다.
“내가 이러다 참말로 미치려는갑따.”
정신 차려야 한다고 이대로 무너져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에게 묻고 대답하고 다짐하고 각오하길 수십, 수백 번 되풀이했다.
거의 한 달여 지속됐던 혼돈과 극한 상황으로 치닫던 혼미 속에서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야한다는 생존의 욕구가 되살아났다. 비로소 밖에서 들려오는 하꼬방 주민들의 부산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문밖을 부지런히 오가는 발자국 소리하며 달그락거리는 그릇 씻는 소리하며 저희들끼리 찧고 까부는 소리하며 금복주 영감의 ‘수돗물 애껴 써라’, ‘전깃불 애껴 써라’ 그리고 ‘똥뚜깐 청소 깨끗이 해라’라는 늘 해왔던 잔소리도 귀에 들려왔다.
그동안 변소를 다녀올 때나 물을 받거나 설거지할 때도 야심한 시각, 다른 사람들이 모두 깊은 잠에 빠져들었을 때 슬그머니 다녀왔기에 하꼬방 주민들은 그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는듯했다. 아마 그가 제 방에서 죽어 나자빠져있다 한들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그네들의 삶은 타인의 안위(安危)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을 만큼 각박했던 것이다.
오점례 생각도 문득문득 떠올리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간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녀 역시 자신의 존재를 까마득히 잊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긴 얘기 한두 번 주고받았다 하여 처녀가 총각 방을 들여다봐야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하물며 경찰이 쇠고랑 채워 끌고 가는 장면까지 목격했으니 오만 정도 다 떨어져 나갔으리라.
“그려, 그림에 떡인걸 뭐. 잊어삐자.”
기력이 얼추 회복되었어도 벌건 대낮에 문밖을 선뜻 나서기란 그의 입장에선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행여 마주치게 될 하꼬방 촌 주민들, 특히 오점례를 볼 면목이 없던 것이다. 무슨 큰 죄를 저지른 흉악범처럼 쇠고랑에 채여 질질 끌려가질 않았나, 공장에서 쫓겨났다는 것도 지금쯤 알 사람은 다 알 것이니 그것이 그리 창피했던 것이다. 그렇다하여 계속 방안에 숨어 지낼 수도 없는 것이 당장의 생계를 위해서라도 뭔가를 해야 한다는 절박감에 숨통이 조여 오는 것이다.
하꼬방 촌 주민들은 오전 7시 반쯤 되면 왁자지껄한 소음과 함께 썰물처럼 밀려나간다. 그리고 적막하리만큼 고요한 정적이 흐른다. 그런 한시적 정적은 특별한 변수가 없는 한 철야작업을 마치고 귀가하는 사람들로 인해 깨질 때까지 매일 어김없이 되풀이되고 거의 한 시간 가까이 지속되었다.
그는 주민들이 모두 빠져나간 틈을 엿보고 이때다 싶어 방을 나섰다. 그때가 1967년6월28일로 37일 만에 첫 외출을 시도한 것이다. 그날따라 날씨가 유난히 청명했다. 더구나 어두컴컴한 방에 틀어박혀 지낸지 한 달여 만의 외출이라 더욱 그리 느꼈던 것이다. 바람도 적당하게 불어 그의 옷깃을 서늘하게 적셨다. 기분이 날아갈듯 상쾌하다 여겨졌다. 어쨌든 세상은 그래도 살만하다 느껴진 것이다.
반쯤 삐딱하게 열려있던 대문을 ‘삐그덕’ 밀어젖히고 골목길로 나섰다. 꾸불꾸불 이어진 비좁은 골목길은 집집마다 길가에 내놓은 생활쓰레기들로 어수선했다. 겨울이 물러간 지 오래되었어도 아직도 쓰레기의 절반은 허옇게 뼈만 남은 연탄들이 차지했다.
골목길을 벗어나자 조금은 넓게 펼쳐진 간선도로가 나타났다. 태성고무를 출퇴근하면서 수십 번은 오갔을 길인데 왠지 조금은 낯설게 느껴졌다. 그렇다. 왁자한 사람들 사이에 휩쓸려 걷던 바쁜 길하고 한적하여 늘어지게 게을러 보이는 길하고는 느낌이 전혀 다른 것이다.
잡다한 물건들을 초입까지 진열해놓은 구멍가게가 보이고 이어 그 앞에 세워놓은 야채과일장수의 리어카가 눈에 들어왔다. 리어카 옆구리에 약간 삐딱하게 걸린 허름한 나무판대기에 ‘萬物靑果’라 쓰인 글자가 리어카에 비해 어울리지 않게 유독 크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 곁에선 리어카 주인인 듯싶은 50대 초로의 몸집 작은 사내가 불룩한 배를 보아 만삭임이 분명한 20대 초반의 여자에게 잔돈을 거슬러주고 있었다. 여자의 한손에 들려진 시장바구니에는 방금 야채장수로부터 구입한 듯 상치며 파단이며 약간의 토마토가 담겨있었다.
“에…, 씽씽한 토마토가… 있씸니다아…. 에…, 씽씽한 무배추가… 있씸니다아….”
사내는 돈을 거슬러주면서도 짬짬이 사람을 끌어 모으려는 듯 구성지게 느껴지는 가락을 뽑아냈다. 그때 가게 할망구가 뽀르르 쫓아 나와 사내에게 물을 끼얹는 모습이 보이고 이어 70대 할망구 목소리라곤 전혀 여겨지지 않는 크고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라이…, 쳐직일 쌍것아! 여그가 니 안빵이가? 푸딱 안갈끼가?”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생기려는가 싶어 걷던 걸음을 멈췄다. 그런데 난데없는 물벼락을 맞고도 사내는 화를 벌컥 내기는커녕 뿌리치려드는 할망구를 껴안고 그녀의 볼에 뽀뽀까지 하려드는 것이다.
“에그 징그러버 쌍놈아, 그 드러분 냄시나는 주뎅이부터 푸딱 안치울끼가?”
“할매, 알러비우.”
그 싸움인지 연애인지 도무지 구분할 수없는 그들만의 모습을 지켜보고는 웃지 않고 배길 수가 없었다. 즉흥적으로 우러난 웃음이라할지라도 참으로 오랜만에 웃어보는 웃음이었다. 가만 보아하니 그들의 하는 짓거리로 보아 이미 친숙해진 사이처럼 여겨졌다.
‘저런 리아까 장사를 할려면, 얼매나 들꼬?’
저런 장사가 보기엔 저래도 분명한 것은 공장이나 노가다 판의 일용직보단 수입이 많을 것이다. 그래도 명색이 자기사업인데 말이다.
‘먼저 리아까부텀 사얄낀데. 쌤삥은 아무리몬해도 5천원은 하지 않것나?’
5천원이란 돈은 태성고무에서 받던 월급으로 따진다면 한 달하고도 20일 일해 야 겨우 손에 쥘 수 있는 목돈이다. 그것도 한 푼도 안 쓰고 모아야 할 것이다.
‘중고라면 3천원…, 쪼매 더 몬한 걸로 사도 2천원은 줘야하지 않것나.’
중고리어카와 야채며 과일이며 내다 팔아야 할 물건 값까지 합치면 최소 5천원은 손에 쥐어야 가능할 것이란 계산을 해봤는데 그 돈을 마련하는 것도 꿈만 같지만 그보다 여자들 상대로 저런 장사를 하려면 비위가 여간 좋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따라서 그런 돈이 있다 하더라도 그런 비위가 없다면 그런 장사는 어림없는 짓이려니 여겼다.
그는 극히 내성적인데다 수줍은 성격이라 도통 말이 없는 사람이다. 따라서 남 보기에도 무뚝뚝해 뵈는 사람이다. 지나치게 고지식하기만 했지 우스갯소리나 객쩍은 농담 따위를 지껄이는 것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하물며 목통을 높여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며 여자들 비위나 맞춰야 하는 그런 장사가 가당키나 하겠는가. 그리고 그도 자신의 그런 성격을 잘 알겠기에 머리를 내저었다.
그의 발걸음은 구포 쪽으로 쭉 이어지는 복개천을 따라 옮겨졌다. 복개천 양쪽으로는 급조된 가건물들이 줄지어 늘어섰고 그 건물들에 입주한 공장들로부터는 대형 프레스 소리가 떡방아 찧는 소리처럼 ‘쿵더쿵… 쿵더쿵…’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한일보일러, 신일공업사, 대신주강, 일신산업, 동양프레스, 한국주철 등등 소규모 공장들의 간판들을 둘러보며 ‘저런 곳에서는 사람들을 안 뽑는가’ 궁금하게 여겼다.
공장 앞을 천천히 지나가며 공장 안을 기웃거렸다. 복개천 일대에 산재한 대부분 공장들의 내부는 시골 읍내에 있던 철공소와 아주 흡사했다. 비좁은 공간 안에 온갖 기계들이 들어차있고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통로만 겨우 남겨놓고는 잡다한 물건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대개의 공장들은 두어 명에서 많아봐야 열댓 명에 불과한 종업원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들 종업원들은 하나같이 낡고 다 헤어진, 그리고 기름때로 얼룩진 작업복을 입은 데다 얼굴은 땀과 기름 범벅으로 번들거렸다. 그런 꼬락서니를 보노라면 지게꾼이나 공사판 노가다만도 못할 것이라 여겨졌다.
그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발길 닿는 대로 공장 근처를 배회했다. 어느덧 태양이 중천에 떠있는 것이 확인되자 불현듯 시장기를 느껴 값싸고 양이 많을법한 그런 식당을 찾아 잠시 헤맸다. 마침 때가 점심시간인지 보이는 식당마다 그 앞에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그가 열댓 명쯤 길게 늘어선 줄을 따라 들어선 식당은 왕국밥, 대포국밥, 따로국밥 메뉴가 내걸린 ‘眞味食堂’이었다. 홀 안은 여섯 개의 나무식탁이 놓여있었는데 각기 식탁마다 여덟 개씩의 의자가 딸렸으나 모든 의자마다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식탁 두 곳은 인근 공장에서 단체로 온 듯 저희들끼리 밥 먹으며 시시덕거렸고 나머지 식탁들은 끼리끼리 또는 개별로 자리가 비는 순서대로 앉아먹는 듯했다. 그도 방금 전에 빈 의자에 걸터앉으며 벽에 붙은 뻔한 메뉴를 잠시 살폈다. 가격은 세 가지 모두 30원 균일했다. 따로국밥은 밥 따로 국 따로라 치고, 왕이나 대포나 같은 가격에 둘 다 ‘그릇이 크고 양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굳이 메뉴를 달리하여 팔아야 할 이유가 뭔가 궁금했다. 그렇다고 사람들로 바글거리고 일손이 바빠 보이는 식당아줌마한테 물어보기도 객쩍은 짓이라 여겨 잠시 망설이다가 왕국밥을 시켰다. 왠지 대포국밥보다는 왕국밥이 양이 더 많으리란 생각에서였다.
그를 포함하여 모두 여덟 명이 둘러앉아 먹는 식탁 가운데엔 커다란 양푼이에 따로따로 담긴 단무지와 파김치, 그리고 주둥이가 널찍한 작은 항아리에 따로따로 담긴 간장과 양념장이 반찬의 전부였다. 그걸 여덟 명이 함께 먹고 떨어질 만하면 주방을 오가며 서빙 하는 아줌마가 알아서 또 갖다 놓곤 했다. 양념장이며 반찬에 밥풀이 나뒹굴어도 누구하나 타박하는 이도 없었다.
과연 왕국밥은 싼 가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자를 붙일만했다. 커다란 토기그릇에 그득 담겨 나온 국밥은 우선 보기에도 푸짐하고 먹음직스러웠다. 돼지머리 눌린 고기와 내장, 그런 허접한 고기들이 팅팅 불은 밥과 섞여 나왔는데 먹어보니 진국이었다. 한 그릇을 거뜬히 비우고 나니 당장은 근심걱정이 사라지는듯했다.
한참 걷다보니 그의 발걸음은 구포역에 닿았다. 구포역 주변으로 때마침 5일장이 섰는데 여느 시골장과 다름없어 보였다. 비릿한 생선과 생활잡화부터 시골 노인들이나 사용할 것 같은 효자손이며 망건까지 그야말로 없는 것이 없었고 한쪽에선 엉터리 약을 파는 약장수의 각설이타령이 신명났다.
구포 역사 안으로 들어섰다. 완행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시장바닥만큼이나 역사 안도 시끌벅적했다. 보따리를 이고 쥔 장사꾼들과 통학하는 학생들 사이로 분홍빛 원피스를 곱게 차려입은 젊은 여자가 눈에 띄었다. 여자의 시선은 열차가 들어설 철로만 응시하고 있었다. 그도 여자의 시선을 따라 철로를 내다봤다. 그때 역사 안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열차가 들어온다는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승객 여러분, 잠시 후 대전행 1582 비둘기호 완행열차가 들어오겠습니다. 승객여러분께서는 순서를 지켜 개표를 하시고 열차승강장으로 나가주시기 바랍니다.”
역사 안의 사람들이 열을 지으려 움직이기 시작했다. 구포역 철도공무원이 나타나고 개찰구의 바리케이드가 치워졌다. ‘따각, 따각’ 승차권에 펀칭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사람들은 하나씩 둘씩 개찰구를 빠져나가 철로변으로 흩어졌다. 분홍빛 원피스의 젊은 여자도 다른 승객들과 마찬가지로 개찰구를 빠져나가 승강장 쪽으로 다가서는 모습이 보였다.
‘저 여잔 어데로 가는 걸까?’
발끝으로 무언가를 바닥에 연신 그리고 있는 젊은 여자를 보며 생각은 어느덧 그 자신을 고향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고향집에 있을 땐 부모가 돌아가셨어도 누이들이 모두 그의 곁을 떠나갔었어도 엉뚱한 곳에서 굶주리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그래도 나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당시에는 무료하다 못해 갑갑하여 죽을 맛이었고 보다 넓은 세상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이 고향집을 털고 무작정 가까운 도회지 부산으로 걸음을 옮기게 했다. ‘까짓, 젊은 놈이 혼자서 뭘 하든 못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렇지만 막상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고향이 어머니의 자궁만큼이나 여겨져 되돌아가고픈 충동이 솟구쳤다.
‘이럴 땐, 아부지라도 살아계셨드라면….’
한동안 잊고 지냈던 아버지 생각이 간절해졌다.
그의 부친 또한 자상함이라곤 약에 쓸래야 찾아볼 수 없는 그런 무뚝뚝한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부친의 눈에서 자신을 대하는 진면을 확인하곤 했었다. 그것은 표정으로는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따스함이었다. 부친은 여간해서는 웃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늘 뚱한 표정을 지었다. 어찌 보면 화난 사람의 표정이라 할 수 있었다.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 또한 거만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으로 모친이나 누이들한테 대하는 태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다못해 옥분이라도 곁에 있어줬더라면….’
그는 그보다 열세 살이나 더 나이가 많은 둘째 누이 김옥분을 떠올렸다. 여덟 명이나 되는 그 많은 누이들 가운데 유독 그녀가 보고 싶었던 것인데, 옥분이는 다른 누이들보다 그에게 유난히 살갑게 대해줬고 모친이 죽은 뒤로는 모친을 대신하여 그를 일일이 챙겨줬었다.
그의 부친 김태석(金泰碩)은 당시 시골사람 치곤 드물게 허우대가 크고 멀끔했다. 그러나 그런 겉모습과는 달리 사교적인 성격이라기보다는 배타적이고 저만 잘났다는 오만함으로 인해 마을사람들과도 잘 어울리려 들지 않았다. 처음 한동안 마을사람들은 그런 부친을 어려워하면서도 일견 경계를 했고 숱한 오해와 편견을 지녔다. 어디선가 몹쓸 짓을 저지르고 도망쳐왔겠거니 아니면 남의 빚을 피해 야반도주해왔겠거니 그런 추측들도 난무했다.
한번은 마을사람들 중 누군가가 그런 부친이 수상쩍다 여겨 신고를 했었던지 함안지소에서 일본인 순사와 한인 앞잡이가 부친을 연행해간 적도 있었으나 이틀 후에 멀쩡하게 풀려났던 것을 보면 독립운동을 했다거나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 다니던 것이 아님은 확인됐다.
부친의 그런 성격은 죽을 때까지 철저한 은둔생활로 이어졌다. 그가 태어나서 스무 살이 넘을 때까지도 친인척은 물론 친구랍시고 그 어느 누구도 찾아갔던 적이 없을뿐더러 꼭 한번 걸뱅이 같은 노인이 친척이라며 찾아왔던 것 외엔 찾아왔던 이도 없었다. 그렇다고 부친이 그를 비롯한 자식들에게 조상이나 친인척들에 대해 얘기한 적도 없었다. 오히려 자식들이 ‘왜, 우린 친척이 없냐’란 질문이라도 할라치면 부친은 ‘친척을 찾아 뭣하냐’라며 크게 역정을 냈기에 더 이상 묻지도 못했다.
그는 부친이 조상이나 친인척, 그리고 부친 자신의 과거행적에 대해서도 함구했기에 언젠가 마을 어른들이 주고받던 얘기 가운데서 흘려들은 얘기나 또는 언젠가 동냥삼아 찾아온 먼 친척이라는 늙은이를 통해 조부가 어떻고 증조부가 어떻고 그 외에 친척들에 대한 얘기를 얼핏 주워들은 게 전부였다.
마을노인들로부터 들었던 얘기를 종합해보면, 부친은 그가 태어나기 훨씬 전인 1932년 가을 한창 수확기를 앞둔 시기에 어디에서 뭘 하다 왔는지는 알 수 없어도 마누라와 어린 두 딸을 데리고 함안읍으로 흘러들어왔다고 했다. 무언가에 쫓겨 급하게 도망쳐 나온 사람들처럼 살림이라곤 그가 짊어진 나무궤짝 하나와 여편네가 머리에 이고 온 이불보따리가 전부였다. 그러나 부친의 헌칠한 키와 잘생긴 용모는 당연히 마을 사람들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부친은 자신과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땅딸막하고 못생긴 여자를 마누라라고 데리고 나타났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엔 제법 입방아가 떠돌길 끊이질 않았다. 물론 그런 소문은 진의가 확인되지 않은 헛소문에 불과했지만 정작 본인은 그런 소문 따위엔 관심도 없고 또한 그에 대해서도 묵묵부답이었기에 어떤 소문은 사실처럼 굳어지기까지 했다.
“있잖여, 금분네…. 거시기 도망나왔나벼. 뭐라카드라? 응, 빚이 엄청 많았거들랑. 그려서 야간도주라카든가? 그려…, 야반도주해설랑 이곳엘 왔다 카등가?”
“맞다, 맞어. 내도 들은 적 있다 아이가.”
“사내놈은 엄청 잘 생겼다야. 근디, 마누라란게 꼭 종년같다야. 안 그러나?”
“니… 참말로 엉뚱한 생각 하는갑따.”
“아니, 이게… 누굴 놀려?”
“그기 아이고…, 어찌 둘이 영 안 어울리제?”
“근디, 우찌 만났을까?”
“모르제. 둘 다 남의 집 종으루 있을 때 주인이 맺어줬을라나?”
“나이 차이는 디게 많은갑더라.”
“모르긴혀도 아마… 스무살 정돈 날끼여.”
그렇듯 마을 아낙네들은 빨래터에 모이기만하면 뜬소문을 부풀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200자 원고지 51매>
- 제8회에서 계속 이어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