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이 유창한 말빨을 가진 시들을 비평해 보실 분들은 안계신가요? 계란으로 바위치기가 될 수도 있죠. 하지만 자신감이 생길 수도 있고, 또는 자만해 질 수도 있죠. 무슨 말인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97년이면 지금 부터 불과 5년전이네요. 역시 소재가 다 독특하고 한참을 뒤졌을 것들입니다. 이건 공모에 내려고 작정한 시들인거죠. 한번 감상해보세요.
TV에서 본 <스타트랙>이라는 영화, 몇 세기 후라던가? 물체나 사람이(혹은 그냥 생명체)
원반에 올라 스위치를 누르면 원자분해되어 어디론가 전송되었다. 그리고 목적된 곳엣 적확
하게 재결합되어 나타났다. 지옥이라도 상관하지 않았다.
1
나는 자주 꿈을 꾼다
의식의 미세한 입자들이 신비로운 곳을 향해 날아간다
환상 속 연인과 동침을 하며 춤을 춘다
때때로 예언자처럼 먼 미래에 미리 가보곤 고개를 끄덕인다
내 꿈의 성능은 엉망이어서
변질된 모습을 드러낼 때가 더 많다
스핑크스 형상으로 사막의 모래바람에서 우우거리거나
털 없는 늑대가 되어 붉은 달을 물어뜯는다
암흑의 전당포에 들러 추억을 저당잡히고 새로운 길을 산다
흘러나간 그림자 모두 거친 발톱을 세운다
그러자 앙상한 뼈와 해골을 뒤집어쓴 내가 뒤척인다
그곳에서 여러 모양의 사람들을 구경한다
단세포 같은, 벌레 같은, 바람 같은, 짐승 같은, 로봇 같은 석탑 같은, 공룡 같은, 괴물 같
은...
검은 석실에 갇혀 바둥거린다, 나는 겁에 질린
영혼을 꺼내 짓이기면서 사나운 울음소리를 낸다
출구 없는 꿈을 벗어나려고
의식의 뿌리를 송두리째 흔들어댄다.
오, 꿈은 이토록 견고한 공포을 향해 나를 보냈던가
어쩌려고 내 생은 한동안 꿈의 의식을 건설했던가
잠자리에 누워 해 걷히지 않은 비명의 메아리를 토한다
나는 절망의 입자로 재결합된다
몸 밖으로 증발되는 무수한 물기, 꿈의 증거를 말리고 있다
2
내 몸 안에서 무언가 끝없이 전송된다
호흡이, 시선이, 소리가, 체온이, 청춘이, 눈물이, 생각이, 생각 속 상상이 전송되고, 지친 희
망들이 전송되고, 엄청난 양의 기억들이 날마다 미래를 향하여 전송되고, 내가 가진 자그마
한 종교가 두려움 또는 가벼운 신앙으로 전송된다. 그리고,
흑백의 내 생이 천천히 두꺼운 무덤을 향해 전송되고 있다.
1997 국제신문 - 방패연 <윤 혁>
내 갈비뼈가 다듬어질 때부터
나는 한낱 광대로 운명지어졌다
남사당 같은 분장을 하고
하늘에다 광댓줄을 걸쳐서
신명나게 줄타기를 시켰다
바람이 곱지 않게 부는 날
힘겹게 전신을 비틀면
구경꾼들은 신이 나서 손뼉을 쳤다
나는 두려움 하나 없이
익숙하게 하늘을 잡아당겼다
문득 내려다보면 관객이 빈 초가와
용이 되려는 샛강의 몸부림이 보였다
샛강의 거뭇한 피부는 굳어 있고
허공에서 외줄을 타는 질긴 순간
텅빈 가슴은 시리기만 하였다
매서운 북풍이 몰아칠 때는
둥글게 뚫린 구멍으로
하염없이 잡념을 쏟아 버려라
호통치는 할아버지의 고함소리와
매를 휘두르는 모습에 겁을 먹었다
끝없는 하늘을 나는 새가 되는 등판 위에
묶인 생명줄이 나의 나태함을 일깨워주었다
가슴이 없는 삶으로 치솟다가
아득히 북치는 소리에 마음을 가다듬으면
긴 그림자로 하늘을 우러르며
이무기가 된 버드나무 가지에 걸린
슬픈 친구들의 잔해가 보였다
나는 한사코 앙칼진 대추나무 손끝을 비켜가면서
바람이 부는 먼 나라를 갈망하였다
1997 문화일보 - 지하역 <이기와>
지하 30미터,
한때는 만개한 꽃처럼
구김없는 선명한 모양의 화석들이 이곳 어디엔가
오랜 비밀로 박혀 있었음직도 한,
수천 수만년 동안 지하 어둠의 사슬에 묶여
미동도 없던 영혼들이
길이 뚫리고 빛이 스며들면서 하나 둘
마법에서 풀려나 지금은 내가 서 있는 언저리를
휙휙 날아다닐 것도 같은,
지하역, 아직 콘크리트로 덮이지 않은 시간이
벽과 천장의 구석진 곳에 은밀히 흐르고 있다.
(열차가 도착하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안전선 안으로
한걸음 물러나주시기 바랍니다)
육체 없이 영혼만 타고 내리는 열차도 있을까?
요즘들어 내 영혼보다 비대해진
몸뚱어리가 거추장스럽다
공복의 허전함으로 비롯된 심약한 생각의 끈을 자르고
안전선 안으로 한 걸음 물러선다
총족되지 못한 뱃속의 허기처럼
보호구역 안에서도 능 불안함을 느끼는,
206개의 뼈마디로는 지탱하기 힘든 지상의 무게가
선론 위에 앉은 빛 한줌까지 파르르 떨게 한다
희끗희끗 색이 바랜 벽화의 인물처럼
창백한 얼굴들이 승차구에 모여든다
어쩌다가 땅 속까지 추방당한 아침
거추장스러운 그림자를 하나씩 끌고,
언젠가 화석으로 남을 시간들을 등에 지고,
깜깜한 터널 속을 유심히 실피고 있는 저 눈동자들
어둠의 틈새로 열차의 헤드라이트가 번쩍이는 순간
닫혀 있던 마음의 동공이 환히 열린다
언젠가는 출구 없는 지하역에서 영원히 맴돌지라도
아직은 살아 지상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1997 서울신문 - 폐차장 근처 <박남희>
이곳에 있는 바퀴들은 이미 속도를 잃었다
나는 이곳에서 비로소 자유롭다
나를 속박하던 이름도 광택도
이곳에는 없다
졸이어도 눈 감을 수 없었던 내 눈꺼풀
지금 내 눈꺼풀은
꿈꾸기 위해 있다
나는 비로소 지상의 화려한 불을 끄고
내 옆의 해바라기는
꿈같은 지하의 불을 길어올린다
비로소 자유로운 내 오장육부
내 육체 위에 풀들이 자란다
내 육체가 키우는 풀들은
내가 꿈꾸는 공기의 질량만큼 무성하다
풀들은 말이 없다
말 없음의 풀들 위에서
풀벌레들이 운다
풀벌레들은 울면서
내가 떠나온 도시의 소음과 무작정의 질주를
하나씩 지운다
이제 내 속의 공기는 자유롭다
그 공기 속의 내 꿈도 자유롭다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저 흙들처럼
죽음은 결국
또 다른 삶을 기약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곳에서 모처럼 맑은 햇살에게 인사한다
햇살은 나에게
세상의 어떤 무게도 짐지우지 않고
바람은 내 속에
절망하지 않는 새로운 씨앗을 묻는다
1997 세계일보 - 정동진 역 <김영남>
겨울이 다른 곳보다 일찍 도착하는 바닷가
그 마을에 가면
정동진이라는 억새꽃 같은 간이역이 있다.
계절마다 쓸쓸한 꽃들과 벤치를 내려놓고
가끔 두 칸 열차 가득
조개껍질이 되어버린 몸들을 싣고 떠나는 역.
여기에는 혼자 뒹굴기에 좋은 모래사장이 있고,
해안선을 잡아넣고 끓이는 라면집과
파도를 의자에 앉혀놓고
잔을 주고받기 좋은 소주집이 있다.
그리고 밤이 되면
외로운 방들 위에 영롱한 불빛을 다는
아름다운 천장도 볼 수 있다.
강릉에서 20분, 7번국도를 따라가면
바닷바람에 철로 쪽으로 휘어진 소나무 한 그루와
푸른 깃발로 열차를 세우는 역사(驛舍),
같은 그녀를 만날 수 있다.
1997 조선일보 - 220번지 첫 번째 길가 7호
안에서는 도무지 날씨를 짐작할 수
없었다. 창틈에는 평행한 세로 줄 위에 하트 모양이 붙어 있는 쇠창살이
있었고 먼지들 안쪽에 난시의 창문이
자기 눈알의 크기만큼 위로 오르는 철계단을 사선으로 잘라
보여주었다 그것들 사이로 그을 수 있는 몇 개의 직선 위에 시신경을
올려놓고 우산이 지나가는지 살펴보았다 언제나
한 개의 형광등과 두 개의 백열들과 또 한 개의 할로겐 등을
같은 채널의 라디오와 함께 켜놓았고 그것들은 밤새
흰색 벽에서 신음 소리를 내며 가내 수공업으로 거미줄을 짰지만 감각은
입자들과 파동들 사이에 있었다 아래쪽에서 발목을 울리는
소리가 났고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바닥이 조금씩
높아졌다 천장에서 당황한 발자국이 자정의 정수리를
가로질러갔다 한달에 한번쯤 등이 구부정한 사내가 주름이 가득 한 얼굴로
문을 두드렸다 살충제라고 흰 마스크가
말했다 분무기를 짊어진 사내는 구둣발로 걸어들어와 후미진 곳 곳곳에
살색의 약을 뿌렸다 생각날 때마다
벤자민 화분에 반 컵의 수돗물을 주었다 그것은 천천히
어린 잎들부터 말라죽어가고 있었고 물을 그대로 흘려보냈다 화분이
놓인 창들은 내내 축축했고 그곳으로 잠깐 늦은 오후의 햇빛이
예리한 각도로 쓰러졌다 멀리 갔다온 날이면
썩는 냄새에 빨리 잠들었다 인기척에 깨어 나가보면
낮익은 벌레의 알들이 문가에 버려져 있었다
1997 영남일보 - 빨랫줄과 사계 <이은림>
장마
며칠째 빨랫줄은 그냥 쉬고 있습니다
마르지 않는 빗방울들만
빨랫줄 끝에 옹기종기 앉아서
생각의 뿌리를 키우고 잘라내고 키우고....
그래도 하루는 쉬 저물고, 굴뚝연기들은
어디론가 자꾸 달아나려 합니다
젖은 머리카락 끌고 허우적대며
세상 끝 어디쯤 화살처럼 박혀 버리고 싶은지
입추
지난밤 몰래 마을까지 내려왔던 산길이 개울을 거너 제 자릴 돌아가는 아침, 빨랫줄마다 햇
살은 가지런히 널리고 나무들은 꽃과 열매를 바꾸어 달고 있습니다. 산불 같은 울음은 산등
성이마다 고여서 도무지 흐를 줄 모르고 단풍잎들은 저마다 다른 이야기들로 소란스럽습니
다 억새꽃 속의 바람과 바람이 서로 악수할 때 강을 따라 흐르던 풀들이 낡아가는 손수건
흔들며 달리고요, 꿋꿋한 바지랑대 위에서 날개 쉬던 새들도 제 그림자 떨치며 제일 높은
하늘의 층계로 날아갑니다
겨울 편지
거칠 것 없어 잘도 달려옵니다 무거웠던 이름들 다 떼어내고 생선가시처럼 잘 발려진 숲 지
나, 숨어버린 풀꽃들이 모가지 딛고 달려온 바람의 발목은 이때쯤 더욱 실합니다 빨랫줄 아
래 서성대던 넝쿨 식물들은 입동 지나자 바지랑대 동여매고 서서 잘 여문 꽃씨들을 못다한
말처럼 뱉어내고 있습니다 꾹 다문 입술의 빨래집게들은 사람들의 구겨진 팔과 다리를 후후
불고 있지만 처음부터 얼어 버린 그들의 기억은 저녁이 되어도 쉽게 녹을 것 같지 않습니다
지붕 하나 없어도 언 몸 서로 부벼가며 녹이는 강물의 이야기를 아시는지, 깊은 곳일수록
따뜻한 입김 불어 가라앉히는 물길은 왼통 붉은 발자국들 뿐일 테지요
기일 (忌日)
무덤 하나 더 생기고
그렇게 몸은 왔습니다
갈래갈래 찢긴 길들은 지워진 손 흔들며
언덕을 넘고, 절벽을 곤두박질 치고,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빈 빨랫줄에는
바람의 빈 발자국만 제 무게를 가늠해 보곤
종소리처럼 멀어져 갔습니다
서녘 하늘엔 실신한 구름들
빨래마냥 야위어가고 기다림의 빨랫줄에는
한 가닥씩 두 가닥씩 저녁 노을이 와서 걸립니다
제비꽃 얹힌 무덤 하나 더 만들며
그렇게 봄은 와서 웅크리고 앉았습니다
1997 경향신문 - 외출 <김창진>
이른 봄, 나는 외출을 하였다
겨울에 익숙한 외투로
아직 한쪽은 겨울로 남은 몸을 감추고
봄길로 나서면 봄햇살에
콘크리트 벽들도 금세 싹을 틔울 것만 같다.
내 몸의 어디에서도 살갗을 뚫고 무엇인가 돋는 듯하다.
길가엔 동시 상영 포스터와 선거 벽보들이
나란히 봄볕을 피해 긴 담을 따라
월장을 한참 준비중이다.
신축성없는 마분지 같은 얼굴들이
고미 끝에 모조하는 근엄한 미소들은
깨알 같은 자신의 약력 밑에 한 줄의 그것을 더하기 위해
이 낯선 곳으로 애마부인 7과 외유를 나왔다.
난 그 앞에서 문맹이 되고픈 충동을 느낀다.
귀중하다는 나의 한 표 행사를 고민해야 할 걱정에 싸였다가
딴전 피듯 파란 하늘을 본다.
봄볕을 받고
개나리와 아지랑이가 출마를 하였으면
노랑나비가 빨리 봄을 노래하였으면
나도 아직 일부가 차가운 몸을 안고 봄으로 간다.
봄이 공천하는 많은 새 생명이 돋는 곳으로
나는 외출을 한다.
봄날은 우리에게 공약한다.
가난한 이들에게
따뜻한 햇살을.
1997 전남일보 - 예당기행 <이수인>
기차에 오르며
멀리 흰 종이꽃 눈물처럼 달고 가는
아침 상여를 보았다.
아직 길 떠나기에는 이른 새벽,
서둘러 길으 f나선 저 서운 생애는
또 무엇이 되려고 어디로 가는 것일까.
강물처럼 출렁이는 기차,
기차처럼 흔들리는 강물에
늦가을 마른 풀잎 같은 나를 싣고 예당 가는 길
남평, 앵남, 증주 그리고 삭정, 이양 …
들꽃 이름을 닳은 마을들을 스쳐
덩치 큰 미루나무 줄지어 선 보성을 지나
예당에 이르면
빗장 풀린 그리움들 확 쏟아져
흐린 안개되어 길을 막는다.
기차는
철길을 놓으며 떠나고
말없이 먼 길 따라오던 산맥들 바라보며
나는 문득,
산 같고 강물 같던 그 사내,
찔레꽃처럼 수줍고 아린
스무살 어귀의 내 첫사랑을 생각했다
그리움은 언제나
제 가슴 태우며 번지는 들불처럼
먼 길 떠나와 이젠 아득해져 버린 벌판 위에
나를 혼자 세워두곤 하고,
키 작은 옥수수밭 지나
찬찬히 길 내어주며 이루는 숲 위로
소쩍새며 뻐꾸기들
손풍금 소리처럼 쓸쓸하게 울며 날아가는데,
지독한 안개로도 다 지우지 못한 지나간 시간들
나는 작은 배에 실어 떠나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