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한의원
이당의 가족은 예천군 감천면 유동에서 해방 후 영주시 장수면 성곡으로 다시 이사를 오게 된다.
그때 지역주민들이 모두 와서 이사짐을 운반하여 주며 도와주었는데 지고, 이고,
소에 싣고한 사람들이 예천 유동에서 성곡(배태)까지 이어져 있었다.
- 이당이 사용하던 연. 한약재를 갈던 돌. -
이때 이당의 가족이 이사 온 집은 성곡의 정중학씨의 상∙하채 목조집과 대지가 300평이나 되는 좋은 집이었다.
이당은 유동에 일신서당을 설립하여 교장으로 활동하며 신약판매업 허가를 얻어서
손수 신약을 조제하여 약을 지어 주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 약을 지어먹고 병이 완쾌되었다.
처음 이당은 성곡에서 교사로 근무하면서 시간이 날 때 마다 열심히 한의서(韓醫書)를 읽으면서
한의학(韓醫學)에 대한 공부에 몰입했다.
- 한의원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있는 이당. 그는 늘 겸손하고 검소했다. -
그는 피나는 노력 끝에 한의사 국가고시에 당당히 합격했다.
김진영 전 영주시장의 부친 고 김화선 원장과 대동한의원 고 권중기 원장과 함께 합격하였던 것이다.
이당이 성곡에 장수한의원을 개원한 후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고 병(炳)이 나면
이당을 찾아와 약을 지어가곤 했었다.
잠깐 사이에 이당의 명성(名聲)이 널리 알려져 중풍 등 난치병을 위시하여 부인과와
소아과 및 아들 못 낳는 부인들을 진찰하고 치료와 처방을 해주었다.
이당이 지어준 약을 복용한 사람들이 이후 아들을 낳아가지고 애기돌 때 찾아와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이가 많았다.
- 영주한의사회 결성기념. 아랫줄 오른쪽 첫번째가 이당,
중앙이 김진영 전영주시장의 부친 김화선 원장, 왼쪽 두번째가 대동한의원 권중기 원장 -
이당은 손님이 많이 와서 당일에 약을 다 짓지 못하면 이틀 안에는 약을 반드시 지어 주었다.
또한 이당은 당시 점심 식사 등 끼니까지도 걸러가면서 찾아오는 환자들을 자신의 가족처럼 대해주었으며,
특히 생활이 곤궁하고 어려운 환자들이나 인근의 노인분들에게는 무료로 약을 지어주는 등
자신이 배우고 익힌 의술(醫術)을 어려운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며 선행을 베풀었다.
또한 그는 한의원(韓醫院)을 찾아온 손님들의 점심식사까지 대접하였으며,
먼 곳에서 온 사람들에게는 차비를 손에 쥐어주며 문밖까지 나와서 배웅을 하며 인사를 하는 등
손님들에게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했다.
- 이당의 부인 송태령 여사. 항상 이당의 뒤에서 남몰래 내조를 했다. -
이당의 이런 봉사활동은 부인 송태령 여사의 내조(內助)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송 여사는 잔정이 많고 고운 자태를 지니고 있었는데 젊어서는 물론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교회에 출입할때는 항상 곱게 차려입고 다니곤 했었다.
자녀와 손자들이 옷을 자주 사드렸으나 송 여사는 그것이 아까워서 골고루 입지 않고
늘 입던 옷을 즐겨 입었는데 돌아가신 후 그 동안 입지 않고 쌓아둔 옷이 100여벌 이상이나 될 정도였다.
이에 김 박사(손자, 김덕호)는 어머니를 설득하여
새것은 동네와 주위에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나 어려운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녀는 평생 바깥 출입은 교회외에 가까운 밭에 나가는 것 말고는 주로 실내에서 생활했는데,
이당이 한의원을 경영할 당시 진료를 받으러 오는 이들이 자신을 찾아오거나 점심때가 되면
손님들과 자상하게 담소를 나누기도 하였으며 그들에게 식사대접을 맡아서 했다.
- 이당의 한의사 합격 증서 -
송 여사는 비록 고기반찬은 아니었으나 환자들에게 보리 혼식이라도 정성껏 상을 차려 대접해 주었다.
당시 이런 대접을 받은 이들은 6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또한 그녀에게 수양 딸이 많은 것도 아마 그녀의 이런 고운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이당은 이후 유동으로 이사를 갔다가 다시 성곡으로 돌아오는데
그때 성곡의 화산 이씨들이 봉화 창평에서 벌목을 하여 지은 금계포란형(錦鷄抱卵形)의
입구(口)자 기와집인 이근용씨의 집에 이사한 후 그곳에 한의원을 열었는데 그때부터 손님이 끊이질 않았다.
- 이당이 직접 쓴 처방전 -
하지만 이당은 성곡이 교통 등이 불편하여 환자들이 내왕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보고
1964년 다시 장수면 소재지인 반구로 한의원을 옮겨 환자들을 맞이했는데
이때부터 그의 명성과 봉사정신 그리고 친절하고 정성스런 치료가 전국에 널리 알려져
장수한의원은 연일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루었다.
예부터 “의술(醫術)은 유자(儒者)의 일사(日事)”라 할 정도로 선비로서
사친효양(事親孝養)의 도리를 다하고자 했던 사람은 어느 정도의 의학지식을 갖추고 있어야 했다.
이당 또한 효를 삶의 근본으로 삼은 까닭에 의학서를 읽고 한의학에 능통할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 이당의 한의사면허증(좌)과 대한한의사협회 회원증(우) -
의(醫)는 생사에 관여하는 중대사이므로 시탕(시탕)하는 경우에
웃사람이나 부모의 간병은 자신이 맡아서 해야 했으며, 시약의 경우에도 특별히 유념했다.
“의불삼년(醫不三年)이면 불복기약(不服其藥)”이라 했다.
즉 3대째 의원을 하지 않은 사람의 약은 쓰지 말라고 해서 약으로 인한 사고를 줄이고자 했다.
이당에 의해 이룩된 장수한의원이 그 장남 김기진 장로와 함께 지금의 손자인
김덕호 박사에게 이어져 오면서 인애가한방병원으로 거듭나 명실공히 이제 3대째 한의원을 운영하는
전국에서 몇 안되는 한방병원으로 그 명성을 드높이고 있다.
- 이당이 수여받은 표창장 일부. 유실된 것도 많다. -
지금의 인애가한방병원과 김덕호 박사가 있기까지에는
이당 김성환의 병마와 사람의 삶을 살리는 인술(仁術)의 바탕위에 김기진 장로의
정성스런 환자에 대한 사랑이 큰 실천으로 이어져
인애가한방병원의 역사를 일구어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의도(醫道)의 근본을 천명으로 알고 살아온 이당 김성환의 삶은 지역사회에 아직도 꺼지지 않는 등불로 타오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