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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랴의 찬양
누가복음 1:67-80
사가랴는 엘리사벳이 아이를 출산 한후 친척들이 모여 아기의 아름을 지으려고 할 때까지도 벙어리인채 그대로 있었습니다. 친척들은 아이의 부친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고 이름을 지으려고 했으나, 엘리사벳은 요한이라 이름할 것을 주장하자 의아해했습니다. 할 수 없이 부친 사가랴의 의견을 물으니 사가랴는 서판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때까지 말 못하는 사가랴는 서판에 아이의 이름을 요한이라 썼습니다. 그 순간 사가랴의 입이 열리고 혀가 풀리어 말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이 일로 모든 삶들이 두려워하고 이 소문이 온 유대 산중에 퍼지게 됩니다. 사가랴가 성령이 충만하여 찬송한 찬양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1. 구원하시는 하나님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하여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이라”(1:67-71)
사가랴는 입이 열리자마자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을 합니다(67절). 사가랴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언을 합니다. 여기서 성령의 활동은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으며 지금까지 되어온 모든 일들이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아래에 진행되어 온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앞으로 되어질 모든 일들 역시 성령의 세밀하신 역사 아래 진행되어질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을 하였다는 것은 예언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것임을 강조하려는 누가의 의지를 엿보게 하는 구절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전개되는 사가랴의 찬양은 전반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사역과 역사하심을 구원론적 차원에서 제시하고 그것을 교훈과 예언의 형식을 빌려서 표현했습니다. 내용상 이를 두 부분으로 나눌 때 전반부는 메시야를 통해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이며, 후반부는 메시야의 선구자인 세례 요한을 소개하는 내용입니다. 또한 이 찬양은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성을 강조하며, 마리아의 찬양과 마찬가지로 구약 성경의 구절을 엮어 놓은 듯한 인상을 줍니다(시 105:8,9; 106:45; 111:9; 사 42:7; 렘 11:5; 겔 29:21).
사가랴는 “찬송하리로다”라는 말로 시작합니다(68절). 그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성령의 감동으로 깨달았습니다. ‘찬송하리로다’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의 선하심을 베푸신 사람에게 사용할 수 있으며 또 하나님의 선하심에 감사하는 우리가 하나님께 사용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사가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돌아보시고 속량하시기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돌아보십니다. “돌아보신다”는 말은 그들의 형편과 처지를 살피시고 그들의 어려운 곤경 가운데서 구원하실 뜻을 가지고 계심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이 주권적 개입으로 그 백성들을 돌아보사 그들을 은혜 가운데로 인도해 내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기 위하여 그 백성들을 방문하신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속량하신다”라는 말은 값을 주고 사신다는 말입니다. 종으로 팔려간 자를 돈을 주고 사서 그를 자유케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를 죄의 종에서 사시어 자유케 하신 하나님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속량’은 원래 '구속', '구원', '해방', '자유' 등의 뜻이며 ‘속량하다’는 '몸값을 치르고 놓아주다'는 뜻입니다. 신약 시대의 한 파피루스에서는 이 단어가 '속죄금을 치르다'는 전문적 법률 용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즉 한 특정인이 죄인의 죄값을 대신 지불해주고 그 사람을 풀어주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 말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께서 인생의 죄값을 십자가상의 저주로써 대신 치르시고 죄와 사망에서 인생을 구원해내신 것을 나타냅니다. 구속의 개념은 신, 구약을 통털어 성경 전체에 폭넓게 깔려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구약에서 '구속하다'는 말은 이스라엘 가운데서 장자의 속건(贖錢)으로 돈 지불을 요구할 때 사용했으며(출 13:2, 11-16),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된다는 뜻도 내포되어 있습니다(출 21:8). ‘속량하다’는 말은 주로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간 땅을 회복하는 것이나(레 25:26; 룻 4:4) 서원한 것을 도로 물리는 것을 말합니다(레 27:13).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켰다”(69절)는 말은 우리를 구원하여 주실 구원자, 권능자, 즉 메시야가 다윗의 가문에서 나실 것을 말합니다. 근동 지역에 사는 뿔가진 짐승들은 매우 강한 힘을 지닌 것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뿔은 흔히 힘을 상징하는 말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구약성경에서 뿔은 능력(왕상 22:11; 단 8:3)과 왕권(단 7:23; 8:20-22)을 상징하는 것이니 만큼 '구원의 뿔'은 구원의 능력을 지닌 구세주 곧 메시야를 가리킵니다. 사가랴는 이 구원을 일종의 힘으로 생각한듯하며, 구약적 개념을 빌어 표현함으로써 이 구원자가 구약에서 이미 예언되어온 바로 그 메시야임을 나타내고자 한 것 같습니다.
‘다윗의 집’에서 '집'이라는 표현은 구약과 신약에서 종종 '가족'과 '종족'으로서의 뜻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다윗의 집'은 27절과 2:4에서처럼 가문이나 자손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표현이 사가랴 당시에 유대 전역에 있던 메시야 사상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을 이방의 압제와 죄악 가운데서 구원하실 구세주가 이스라엘을 열방의 위협에서 건져내었던 다윗 왕가 중에서 나타난다는 사상이 유대 민족 사이에 팽배했었고 또한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종 다윗'이라는 표현은 오실 메시야의 선재성(先在性)을 암시하는 것이며 그처럼 위대했던 다윗도 그의 종이었음을 보아 그의 위대함과 놀라운 위치를 증거해 줍니다. 그리고 구원의 뿔을 다윗의 집에서 일으키셨다는 것은 시편 132:17의 말씀을 암시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며 메시야 사상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셨던 “그의 왕위가 영원히 계속되리라”함과 같이 다윗의 가문에서 영원한 왕으로 오시는 메시야가 나실 것을 말합니다.
이어서 사가랴는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 예언되었던” 말씀임을 말합니다(70절). 이 문구는 히브리서 1:1과 같이 예수님의 메시야 역활은 구약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구약의 지지를 받는 것임을 확실하게 해주고 있는 문구입니다. 구약의 메시야 예언은 율법서나 선지서, 시가서 등 구약성경 전체에 걸쳐 언급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구약성경 전체가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의 '선지자'라는 의미도 문자 그대로의 선지자라기보다 구약성경 전체를 의미하며, 구약의 선지자들이 메시야의 탄생에 대하여 계속 예언하여 온 것을 상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언되어진 대로 반드시 성취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원수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71절). 여기서 ‘원수’는 '적개심 있는', '미워하는'이란 뜻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메시야 대망이 대부분 민족적이고 정치적 성격이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사가랴는 원수라는 말을 로마 세력 혹은 로마의 사주를 받은 헤롯에 빗대어 사용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 찬양이 구속 역사의 진행 과정 중에 보여주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찬양하는 측면에서 전개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원수’는 곧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훼방하는 사단과 그 세력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마 13:39).
2. 언약을 기억하시는 하나님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맹세라. 우리로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1:72-75)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시고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습니다(72절). 여기서 하나님의 언약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긍휼이 언급된 사실에 유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의 긍휼이 없었다고 한다면 하나님과 그 백성간의 언약 관계는 그 백성의 범죄와 완악성으로 인하여 오래전에 이미 파기되고 말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언약은 73절에서 특별히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지칭한 것으로 규정되어 있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 외에도 아담(창 3:15), 노아(창 6:18), 이스라엘 백성(신 29:1-30:20), 다윗(삼하 7:5-16) 등과 더불어 구속사의 중요 시기마다 언약을 체결하시어 신앙적 삶의 방향을 설정해 주시고, 아울러 당신의 구원계획을 약속의 형태로 제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을 찾아 오셔서 “여인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창 3:15).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 갈대아 우르 땅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 12:1). 가나안으로 들어간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어 “네 씨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복을 얻으리라”(창 12: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윗 왕에게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삼하 7:16)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범죄로 이스라엘과 유다는 바벨론에게 멸망하고 그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 70년동안 포로생활을 했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과 약속하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남은 자 중에서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언약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통일되고 또한 성취되어졌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73절)는 창 22:16-18의 내용으로서 그의 후손들의 원수들이 정복될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 자신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온 세상이 축복을 받을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여기서의 구원은 단지 이스라엘이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되리라고 하는 정치적 해방을 가리킨다기보다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올무에서 벗어나게 될 소위 영적 이스라엘의 구원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진정한 아브라함의 후손은 혈통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신령한 믿음에 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절의 '맹세'는 72절의 '언약'과 더불어 교차 대구법적으로 구성된 본 축가의 중심 위치에 놓여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중요성과 그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충실하심을 강조하는 효과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약과 아브라함에 대한 맹세 때문에 이스라엘을 ‘원수의 손’에서 건지셨습니다(74절). 하나님께서는 헬라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헬라 세계의 불멸의 신들과 또 그들과는 대조되는 유한한 인간 존재들과 같이 존재론적 법칙들에 의해 제한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비하심에 따라(느 9:8), 자기 이름을 위하여(시 79:9), 그리고 그가 원하시는 대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십니다. 바로 그의 이름이 구원자이십니다(사 63:16). 본절과 75절 내용은 하나님이 그 신실하심과 긍휼히 여기심에 따라 언약을 주권적으로 성취시키시는 이유 혹은 목적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메시야의 선구자인 세례 요한의 사역의 목적 또한 주의 백성에게 구원을 알게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77절) 더욱 확연해집니다. 또한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임재하심 가운데에서의 보호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인간편에서의 믿음 혹은 신뢰가 요구됩니다(시 22:4,5; 34:19). 또한 하나님께서는 죄를 고백하는 자를 구원하시며 은혜와 긍휼을 아끼지 않으십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이스라엘로 귀환한 그 백성이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지 못하고, 그 결과 이스라엘은 여러나라의 지배를 받으며 고통 가운데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이스라엘을 건지시어 그들로 하여금 “평생 주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없이 섬기게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75절). ‘주의 앞에서’는 '주의 목전에서' 또는 '주의 면전에서'의 의미입니다. 이는 제의적인 용어로서 제사장적 섬김의 개념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든 사람들과 관련하여 사용된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들의 만인 제사장직에 대한 암시를 엿볼 수 있게 합니다.
‘성결과 의’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세로서, ‘성결’은 주로 구원받은 자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드러내는 경건성과 관련하여 쓰이며 신약성경에서 ‘거룩함과 의로움 안에서’라는 표현으로 2회 나타납니다. 본절에서 이 단어는 구원의 시대에 사는 신자들의 삶을 묘사하며, 엡 4:24에서는 중생으로 얻어진 새로운 본성을 가리킵니다. ‘의’는 70인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지킨다는 의미(사 5:7)로 사용되었으며, 랍비들에게 있어서는 특히 가장 많은 공로가 쌓이게 되는 행위들 중 하나로서의 자선행위를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이 단어는 주로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의로운 행위를 지칭하는데 사용됩니다. 하나님의 언약 성취는 이스라엘에게 새롭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즉 소극적으로는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기며, 적극적으로는 '성결과 의'로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시 105:8,9).
아브라함과 동일한 믿음을 가진 우리들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기억하시고 주님 앞에서 거룩하고 순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장차 오실 메시야를 믿음과 같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택하심을 받고 부르심을 얻어 하나님을 섬기게 하셨습니다.
3. 세례 요한에 대한 예언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예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1:76-77)
이제 사가랴는 요한에 대해서 예언을 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이’(76절)는 하나님의 또 다른 명칭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선지자' 세례 요한은 두 가지 면에서 선지자보다 큰 자(마 11:11) 혹은 가장 위대한 선지자였습니다. 첫째는 시대적인 위치의 면에서, 그는 신약과 구약의 가교적(架橋的)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동시대에 살면서 친히 예수님의 권능을 목격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위대한 선지자였습니다. 즉 그는 복음의 여명이 동터오는 것을 목격하였던 것입니다. 둘째로 사역의 내용면에서, 그는 메시야의 선구자였다는 점에서 위대한 선지자였습니다. 구약에 탁월한 선지자들이 많이 있었지만 메시야의 앞길을 평탄케 하는 사역을 직접 수행한 선지자는 세례 요한뿐이었습니다. 한편 예수님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로서 표현이 되고 요한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로서 표현이 되는 것은 현격한 신분적 차이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서로가 중요하고도 내밀한 상관관계를 갖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세례요한의 사역은 ‘주 앞에 가서 그 길을 예비하는 것’입니다(76절). 이 말씀은 이사야서 40:3; 말라기서 3:1;4:5 말씀의 성취이며, 이 구약 말씀과 비교할 때 누가는 요한을 엘리야와 연결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요한은 '엘리야의 심정과 능력'을 가진 자로서(1:17) 회개를 선포함으로써 가난하고 상한 심령을 주 앞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맡은 선구자였던 것입니다(눅 3:3-6; 마 3:1-6).
세례요한이 주 앞에 가서 그 길을 예비하는 사역은 ‘주의 백성들에게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77절). ‘주의 백성’은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단순히 혈육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인 유대인들을 의미하기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구원받은 백성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이방인 중에서도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포함되는 것입니다. ‘죄사함’은 죄의 '용서', 죄로부터 '해방', 죄값의 '탕감'의 뜻을 나타냅니다. 성경상에서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에게 큰 소망과 위로를 주는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곧 '죄사함'이라는 말입니다. 구약의 모든 희생제사는 예수님의 대속 죽으심을 예표한 것이므로 반복적으로 드려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흠없고 완전한 희생양이신 예수님은 단 한번의 희생을 통해 영원하고도 완전한 죄사함을 이루셨습니다(히 9:25,26). 또한 하나님은 아무리 큰 죄라 할지라도 용서하시고(사 1:18), 한번 용서한 죄는 기억치도 않으심으로써(사 43:25), 죄에 대한 앙금이나 미련을 갖지 않으시며 그 흔적을 조금도 남기시지 않으시며(시 103:12; 미 7:19), 완전하고도 무한한 죄사함을 이루십니다.
구원을 알기 위한 전제조건은 선행되어 나온 '죄사함'입니다. 즉 회개와 함께 죄사함을 받지 못한 사람은 구원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이 로마 제국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정치적 개념을 넘어선 보다 깊은 영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애당초 인간은 하나님과의 신령한 인격적 교제를 누리며 참 생명을 누리도록 창조되었으나 인간의 죄악된 행위가 둘 사이를 갈라놓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고 손을 내밀 때 하나님의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고 하나님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 가운데 죄악이 있기 때문입니다(사 59:1,2).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의 행위 가운데는 철저한 회개와 죄사함의 요청이 포함되어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후에 그 '죄사함'을 위한 회개의 세례를 베풀게 됩니다(눅 3:3).
4.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1:78-79)
장차 세례요한이 요단강가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풀 때, 하나님은 그의 긍휼하심을 인하여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78-79절). 캄캄한 어둠을 물리치고 동녘에서 떠오르는 태양에 관한 이미지는 이미 말라기서 4:2에 나오며 이사야서 9:2; 60:1에는 '빛'으로 그리고 민수기 24:17에는 야곱에게서 나온 한 '별'로 등장합니다. 이는 모두 흑암과 죽음을 몰아내고 의와 진리와 사랑으로 충만한 세계를 도래케 할 메시야에 관한 예언입니다. 메시야의 오심 그 자체가 곧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를 뜻합니다. 그때에 영광의 메시아의 빛은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칠 것입니다. 이것은 이사야서 9:2을 인용하고 있습니다(마 4:16). 이는 직접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말하지만 궁극적으로 이방인들을 제외하지는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그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되어 멸망의 나락으로 떨어져가는 비참한 인생들에게 진리와 생명의 빛을 비추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두움과 죽음 가운데 처해있는” 인생들에게 “의로운 태양 빛을” 비춰주시고(79절),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육신으로 보내시어 우리의 죄를 친히 담당하게 하시고 십자가에서 저주 가운데 죽게 하시고 제3일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게 하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자기의 죄 가운데서 구원함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하신 놀라운 구원의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79절). '평강'(에이레이)은 첫째 전쟁이나 투쟁에 반대되는 개념으로서의 평화(14:32; 행 12:20), 둘째 하나님과 인간간의 바른 관계의 회복을 뜻하는 화목(고후 5:19), 셋째 심령의 평화(골 3:15)등을 의미합니다. 이 평강은 신.구약을 통털어 풍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신학적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본절에서 메시야와 평강의 길은 밀접한 관계를 드러내 보입니다. 이사야서 9:6에서 메시야는 평강의 왕으로서 예언된 바 있으며, 사도 바울도 하나님 나라의 특징을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설명하였습니다(롬 14:17). 또한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은 영속적이고도 완전한 평안을 성도들에게 끼치노라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요 14:27).
‘인도하다’라는 말은 왜곡되고 잘못된 길을 바로 잡아 똑바로 가게 하는 것입니다. 밝은 빛 가운데서 길을 잘못 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 평강의 길은 주께서 가시는 길이며 그분께서 예비하신 길입니다. 구원의 빛이 길을 잘못 가지 않도록 우리의 앞을 비추어 평강의 길로 나가게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사가랴의 찬가는 첫말이 '찬송하리로다'로서 시작되어 '평강'이라는 말로 그 끝을 맺은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찬송'과 '평강'으로 특징지워지는 것을 반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찬송을 드림으로써 그분과 인격적 교류를 갖고 그의 구원의 계획 속에 참여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부여하시는 평강을 얻게 됩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찬송이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응답으로 주시는 것은 평강입니다.
5. 강건해지는 요한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으니라(1:80)
요한도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정상적인 성장 과정을 거쳤고 심령이 강하여졌습니다(80절). 요한은 신체적 성장과 아울러 영적으로도 함께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이 성장 과정은 예수님의 성장 과정과 흡사하고(2:40,52), 어린 사무엘이 성장할 때와도 유사합니다(삼상 2:26). 모든 일이 그렇듯이 어린아이의 자라나는 것 역시 하나님의 뜻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었습니다.’ 혹자는 요한이 사해(死海) 부근의 유대 광야 어느 곳에 있었던 에세네파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나 그것을 입증할 만한 별다른 자료가 발견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요한은 에세네파와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요한은 곧 오실 메시야의 도래를 전파하며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지만 에세네파는 그리스도와는 전혀 무관하게 행동했습니다. 또한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베풀면서 민족적 구원을 시도했지만 에세네파 사람들은 사회를 외면하고 고립된 생활을 지향했습니다. 아울러 요한이 민족적,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고 정의를 집행하려고 모든 노력을 다 기울였으나 에세네인들은 개인 구원의 수단과 방법에 집착해 철저한 금욕적 생활과 고립된 생활을 지향했습니다. 또한 쿰란 공동체와 세례 요한을 연결시키는 사람들도 있으나, 그와 관련이 있다는 아무런 증거는 없으며 또한 요한이 머물렀던 지역이 어느 곳인지도 정확히 확인되고 있지 않습니다. 여하튼 그는 광야에서 철저하게 자신의 사역을 준비했습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을 보면서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광야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준비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모세, 엘리야 등). 요한은 광야에서 외롭고 고독한 생활을 보낸 후에 회개의 복음을 외치며 그리스도께서 오심을 전파합니다.
적용: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
사가랴는 구약에 약속된 하나님의 구원의 성취가 메시아를 통해 이루어질 것을 믿고 확신하게 될 때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습니다. 이와 같이 누구나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의 확신을 갖는 성도는 하나님을 찬양을 하게 됩니다. 우리 조상 아담의 범죄로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 죄 가운데서 살다가 죽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고서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아야 할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다윗의 집에 영원한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자신의 몸을 친히 속죄 제물로 드리시고 성부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를 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은혜를 감사하며 찬양합니다. 우리에게 회개의 영을 부어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게 하시고 우리의 심령에 오시고 내주하시며 우리를 영원한 나라로 인도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교통하심을 감사하며 찬양합니다.
이러한 찬양의 삶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우리의 환경 때문에 근심하며 두려워하던 우리를 하나님만 온전히 바라보며 의뢰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시킵니다. 환난과 극심한 어려움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주님만 바라며 천국의 소망을 갖고 살게 합니다.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임재하셨던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 모세처럼,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기를 소망하면서, 매순간 주님과의 연합된 삶을 살기 위해 말씀 안에 거하고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길 힘쓰는 삶을 살게 합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복을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