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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re is no doubt that the princess did become a queen, not only on the screen..one of the most loved, one of the most skillful, one of the most intelligent, one of the most sensitive, charming actresses and friends in my life.” - Gregory Peck
"공주가 여왕이 되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화면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내 인생에서 가장 사랑받고, 가장 능숙하고, 가장 지적이고, 가장 민감하고, 매력적인 여배우이자 친구들 중 한 명이다." - 그레고리 펙
“That unique lady… she’s the original, there are no more examples, and there never will be.” - Billy Wilder
"그 독특한 여성은... 그녀가 원조이고, 더 이상의 예는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 빌리 와일더
오드리 헵번
할리우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배우이며 가장 아름다운 여배우의 상징이자 아이콘이 된 만인의 연인
오드리 캐슬린 헵번(Audrey Kathleen Hepburn)은 캐서린 헵번과 베티 데이비스에 이어 AFI(미국영화협회) 선정 가장 위대한 여성 배우 3위에 선정되었고, 에미상, 그래미 어워드, 아카데미상, 토니상을 모두 수상한 미국 대중문화계의 그랜드슬램(EGOT) 수상자입니다.
<캐서린 헵번 전기 > 참고
오드리 헵번은 할리우드를 넘어서 클래식 시대의 막바지인 1950~60년대를 상징하는 아이콘이며 1950년대 초 프랭크 시나트라나 냇 킹 콜 등의 고전 스탠다드 팝 가수가 유행하던 시절 영화계에 등장했고, 1964년 비틀즈가 처음 등장하여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일으킬 때 그녀의 최전성기 후반부였고, 비틀즈가 사이키델릭 록, 블루스 록 등으로 장르를 바꾸며 60년대 말 헤비메탈 밴드들이 나와 본격적으로 현대적인 대중음악 체계가 형성되던 시기에 헵번의 전성기가 끝났는데 공교롭게도 헵번이 활동을 줄이기 시작한 1970년대부터 대중문화계는 완전히 현대로 넘어와서 헵번은 클래식 시대와 과도기의 아이콘으로 남게 되었고 말론 브란도, 비틀즈와 함께 60년대 대중문화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인물 중 하나이며 현재까지도 '만인의 연인'으로 칭송받고 있습니다.
<말론 브란도 전기> 참고
타고난 미모의 전세계 패션 리더이자 스타일의 아이콘 그리고 지방시
당대 최고의 미인 중 한 명으로 꼽히고 현재까지도 세기의 미녀라는 찬사를 받고 있으며 20세기 가장 아름다운 여배우를 꼽으라면 1위를 다툴 정도로 눈부신 외모를 가졌습니다.
헵번이 선보인 메이크업, 헤어 스타일, 옷차림은 현대에도 꾸준히 유행하고 있으며 트레이드마크였던 짙은 눈썹과 큰 눈을 강조한 메이크업은 지금 봐도 촌스럽지 않고, 데뷔작 <로마의 휴일>에서 선보인 단발 헤어컷 역시 '헵번 스타일'이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을 정도로 유명하며 헵번 스타일은 단순히, 의상, 화장 등뿐 아니라, 영화 속에서의 행동도 포함하는데
대표적으로 <로마의 휴일>에 나온 그레고리 펙과 건배하는 모습이나
<티파니에서 아침을>에 나온 창가에 앉아 'Moon River'를 부르는 모습 등은 상당한 멋스러움과 품격을 느낄 수 있습니다.
<로마의 휴일>이 프랑스에서는 아직 개봉전이어서 헵번은 무명인지라 패션 디자이너 '지방시' 외에는 의상협조에 나선 프랑스 업체가 없었는데 지방시도 이름이 비슷하다보니 캐서린 헵번인줄 알고 제안을 수락했다가 그녀를 만난 지방시는 크게 실망해서 기성품이나 쓰라고 했었지만 그녀가 옷과 액서사리 등을 고르는 모습과 말하는 모습 등에서 빛남을 느꼈고, 생각이 180도 바뀌어서 이후 그녀의 모든 영화에 의상협찬을 하였습니다.
영화 <사브리나>에서 지방시가 헵번에게 협찬한 옷과 스타일은 '사브리나 팬츠', '사브리나 플랫'이라고 불리는데 영화배우에게 특정 브랜드가 최초로 의상 협찬을 시작한 영화가 바로 <사브리나>이며,
지방시는 이때 얻은 광고효과로 인하여 매출이 급격히 늘어 큰이득을 보았고, 이후부터 오드리 헵번이 출연하는 영화에 적극적으로 의상협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헵번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입었던 검정색 블랙 드레스도 지방시의 브랜드인데 헵번은 협찬받은 옷은 모조리 촬영이 끝나면 반납했으니 영화, 드라마 협찬의 시초이자 시작입니다.
헵번은 '지방시'의 옷들을 입어서 '지방시'를 세계적인 패션 하우스로 격상시켰으며 영화배우로 활동한 시기의 오드리 헵번은 한마디로 유행의 선두주자였고 당대의 유명 패션 디자이너들에게 특히 사랑받은 배우였습니다.
이 둘은 친구가 되었고, 오드리가 죽기 직전 미국에서 스위스로 가는 걸 도운 것도 지방시였고 그녀가 암말기여서 스위스까지의 여행을 버텨내지 못 할 거라는 진단이 나오자 전용기에 의료장비까지 구비해서 그녀의 마지막 여행을 도와줍니다.
전쟁의 아픔과 슬픔을 함께 했던 유년 시절
벨기에 태생. 영국의 은행가인 아버지 조지프 앤서니 러스턴(Joseph Anthony Ruston, 1889-1980)과 네덜란드의 귀족인 어머니 엘라 판헤임스트라 여남작(Ella barones van Heemstra, 1900-1984)은 각각 이혼후 서로 사랑에 빠져 1926년 9월 24일에 두 번째 결혼을 했고 조지프는 영국의 '매클레인 왓슨 앤 컴퍼니' 사에서 일하면서 브뤼셀에 위치한 벨기에 지사로 발령을 받았고, 이곳에서 1929년에 딸 오드리를 낳았습니다.
자유분방한 성격의 아버지 조지프는 귀족 집안에서 자란 엄격한 성격의 어머니 엘라를 견디지 못하고, 1935년에 별거에 들어갔고 1939년 6월 24일자로 정식으로 이혼했는데 그 후에 오드리는 어머니와 함께 잉글랜드 켄트 주의 작은 마을인 엘험(Elham)으로 이주해 캔터베리와 도버 사이에 있는 이 시골에서 오드리는 조그만 지역 기숙학교에 다니며 발레 수업도 받고 자유로운 학창시절을 보냈고 별거 상태였던 아버지 조지프와도 가끔 만나며 관계를 이어갔으며 아버지 조지프가 1939년에 성을 러스턴에서 헵번러스턴(Hepburn-Ruston)으로 바꿨을 때 그대로 따라간 것도 지속된 관계를 보여줍니다.
오드리의 부모는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영국에서도 득세했던 파시즘 운동의 후원자였던 치명적인 약점 때문에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파시스트에 대한 국민 여론이 급격히 나빠지자, 어머니 엘라는 오드리를 데리고 네덜란드의 친정으로 피신합니다.
한편 영국에 남아있던 아버지 조지프는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파시스트란 이유로 체포되고 반역죄로 기소되어 수감되었으며, 전쟁 기간 내내 맨 섬에 억류되어 있었고 전쟁이 끝나고 석방된 뒤 아일랜드의 더블린으로 이주했고 전처 엘라와 딸 오드리 등 가족 및 지인들과도 소식을 끊고 은둔해버려서, 오드리는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아버지 조지프가 석방 후 사망한 줄로만 알았지만 1960년대 초에 오드리의 첫 남편인 멜 퍼러가 조지프의 행적을 수소문해 더블린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결국 두 부녀는 1964년 8월에 더블린의 쉘번 호텔에서 재회합니다.
이미 셀럽이 된 오드리로서는 파시스트에 대해 여전히 나쁜 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어 계속 아버지와의 관계를 비밀에 부쳐야만 했고 두 부녀는 은밀히 다정한 편지를 주고 받으며 아일랜드와 스위스에서 몇 차례 더 만났으며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조지프의 병세가 악화된 1980년 더블린에서의 일로, 이후 몇 달 지나지 않은 그해 10월에 조지프는 사망합니다.
1940년 외가로 피신한 오드리는 10대 시절 대부분을 네덜란드에서 보내게 되는데 그때 살던 곳이 바로 훗날 마켓 가든 작전으로 유명해진 아른험(Arnhem)이었고 외할아버지 아르나우트 판헤임스트라 남작은 1910년부터 1920년까지 이곳 아른험 시장을 역임할 정도로 지역의 명망 있는 귀족이었기 때문에 오드리가 로마의 휴일에서처럼 왕가의 공주까지는 아니었어도, 최소한 부유한 명문 귀족의 손녀였습니다.
하지만 1940년 5월 10일에 독일군이 네덜란드의 중립을 무시하고 네덜란드를 진격로로 삼아 프랑스 침공에 나서면서 이런 유복한 생활도 산산히 깨지자 외할아버지 판헤임스트라 남작은 1942년 가족들을 데리고 아른험 북동쪽 외곽의 펠프(Velp)로 거처를 옮겨 은거했습니다.
외가가 이처럼 반 나치 성향이었기 때문에, 오드리도 펠프에 거주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네덜란드 레지스탕스 조직 활동 일부를 돕기도 했는데 발레리나로서의 재능을 살려 위장한 레지스탕스 모임에서 위문차 몇 차례 발레 공연을 했고 피신하는 연합군 승무원들을 지하실에 숨겨줬으며, 오드리 본인도 의심을 덜 받는 어린이란 점을 이용해 레지스탕스 조직원들 사이의 물품 배달이나 메시지 전달 심부름을 하기도 했습니다.
종전 후 암스테르담으로 가서 네덜란드 발레의 선구자인 소니아 개스켈(Sonia Gaskell)과 러시아 교사 올가 타라소바(Olga Tarasova) 밑에서 발레를 배웠는데, 외가의 살림이 너무 어려워져서 어머니 엘라는 귀족임에도 불구하고 요리사와 가정부 일을 하면서 딸의 학비와 생활비를 대야 했고, 헵번은 당시 발레리나로도 유명해지기 시작했지만, 어려운 집안 사정과 키가 너무 커서(170cm) 결국 포기하게 됩니다.
세기의 공주가 된 신데렐라
오드리 헵번은 교육 여행 영화인 <더치 인 세븐 레슨 (Dutch in Seven Lessons, 1948)>에 스튜어디스 역으로 출연하여 처음으로 영화에 데뷔합니다.
1948년 말, 헵번은 당시 노팅힐에 기반을 둔 램버트 발레단(Ballet Rambert)의 장학금을 받고 영국으로 이주하지만 그녀의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전쟁 때 겪은 영양실조의 후유증으로 인한 키와 약한 체질로 인해 프리마 발레리나가 될 수 없을 것이라는 램버트의 말을 들은 후, 그녀는 연기에 집중하기로 결정했고
헵번은 웨스트엔드(West End) 뮤지컬 극장가에서 활동했고 그녀는 런던 히포드롬( London Hippodrome)에서 시사 풍자극 <하이버튼 슈즈(High Button Shoes, 1948)>
케임브리지 극장(Cambridge Theatre)에서 <세실 란데오의 타르타르 소스(Cecil Landeau's Sauce Tartare,1949)>와 <컨트 소스(Sauce Piquante, 1950)>에 코러스걸로 출연합니다.
헵번의 본격적인 스타덤은 1952년, 프랑스 작가 콜레트의 원작을 무대화한 뮤지컬 <지지> 초연에 캐스팅 되면서부터 시작됩니다.
이후 24세 때인 1953년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영화 <로마의 휴일 (Roman Holiday)>의 여주인공인 앤 공주 역에 오디션을 거친 후 발탁되었는데 이는 연극 배우로서 어느정도 인지도는 있었지만 영화계에서는 완전 무명이었던 오드리 헵번을 최종적으로 캐스팅하게 된 것입니다.
<로마의 휴일>은 상류층 여성이 평소의 일상에서 벗어나 평범한 남성과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는 이야기 구성의 원조로, 세계적으로 엄청난 히트를 치게되고 훗날에 만들어진 여러 영화나 방송물에 지대한 영향을 준 것으로도 유명한 작품입니다.
<로마의 휴일>은 오드리 헵번의 첫 주연작이지만 촬영 도중 헵번의 스타성을 직감한 그레고리 펙은 헵번의 이름도 자신의 이름과 같이 영화 제목 위에 올라가게 만들어달라고 에이전트에게 요청했는데 에이전트는 만류했지만 "헵번이 오스카를 탈 게 분명한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나 자신을 바보로 만드는 셈이다."라면서 그레고리 펙은 강경했고
그의 예상대로 헵번은 <로마의 휴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합니다.
눈부시게 화려하고 너무나도 아름다운 여배우
오드리 헵번은 빌리 와일더 감독의 1954년작인 <사브리나>에서 여주인공인 사브리나 페어차일드(Sabrina Fairchild)역을 훌륭하게 소화하며 제27회 아카데미상 여우주연 후보 지명 및 영국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으로 인지도를 점점 높혀갑니다.
오드리 헵번은 어릴적 겪은 상처때문에 평생 전쟁영화는 출연을 사양했는데 1956년 <전쟁과 평화>에 출연하기는 했으나, 전투 장면에는 출연하지는 않았습니다.
<사브리나> 출연 직후 헵번은 영화계 인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영화가 아니라 브로드웨이 연극인 <운디네 (Ondine)>에 물의 요정 역으로 출연, 연극의 아카데미상이라 할 수 있는 토니상의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연극 배우 출신으로서의 정체성과 단순히 예쁜 외모로만 뜬 배우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였습니다.
로맨틱 코미디 장르가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것이라는 점을 입증한 <하오의 연정> (1957)
1957년, 헵번은 전직 발레리나로서의 경험과 평소 특기였던 노래 실력을 살려서 뮤지컬 영화 <화니 페이스>에 출연하였는데 생전 헵번은 자신이 출연한 영화들 중 자신의 실제 성격과 가장 비슷한 영화로 <화니 페이스>를 뽑았습니다.
1959년에는 <파계>에서 수녀 역으로 출연해 오드리 헵번에겐 3번째 오스카 노미네이트를 안겨줬고
1960년에는 서부극인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는 인디안족 여인으로 출연했고
어린이들의 거짓말로 인해 삶이 파괴되는 두 여선생의 이야기인 <아이의 시간> (1961)
화려했던 50년대가 지난 후, 1961년. 블레이크 에드워즈 감독의 작품인 <티파니에서 아침을 (Breakfast at Tiffany's)>에서 주인공을 맡아 다시 한번 시대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합니다.
이른 아침에 검정색 선글라스 & 드레스를 입은 여주인공 홀리 고라이틀리(Holly Golightly)가 택시에서 내려 뉴욕 5번가에 위치한 티파니 보석상의 쇼윈도우 앞에서 커피를 들고 크루아상을 먹는 모습은 영화 역사상 불멸의 명장면으로 뽑힙니다.
1964년, 오드리 헵번은 두번째 뮤지컬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에 출연했지만 줄리 앤드류스가 <마이 페어 레이디>의 출연이 불발되고 출연한 <메리 포핀스>에 밀려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놓치는 바람에 헵번은 이 영화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컬트적인 요소가 가미된 로맨틱 코미디 <뜨거운 포옹> (1964)
<샤레이드> (1963) 에서는 남편의 죽음 뒤 음모에 시달리는 귀족 과부 역을,
오드리 헵번과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콤비로 완성된 또 하나의 로맨틱 코미디 <백만달러의 사랑> (1966),
<어두워질 때까지> (1967) 에서는 살해 위협에 처한 시각장애인을 연기하여 기존 이미지와는 다른 강렬한 연기를 선보였고
오드리 헵번의 원숙한 연기를 감상할 수 있는 <언제나 둘이서> (1967)
로빈후드 이야기를 코믹하게 그려낸 <로빈과 마리안> (1976)
가장 부유하며 화려한 상속인에 대한 살인 음모 <혈선> (1979)
그리고
스티븐 스필버그의 1989년작 <영혼은 그대곁에 (Always)>를 마지막으로 영화계를 떠납니다..
이 영화의 주연을 맏은 리처드 드레이퓨스가 스필버그에게 "누가 천사를 연기할 거지?"라고 물었는데 스필버그가 "오드리 헵번"이라고 대답하자, 드레이퓨스는 "그래, 그녀말고 누가 천사를 맡을 수 있을까!"라고 감탄했습니다.
<영혼은 그대곁에> 리뷰 참고
그녀는 이후 두 개의 엔터테인먼트 관련 다큐멘터리에만 출연했는데 하나는 1990년 봄과 여름에 7개 나라에서 촬영된 PBS 다큐멘터리 시리즈 <세계의 정원 (Gardens of the World with Audrey Hepburn)>이며 시리즈 자체는 그녀의 죽음 이후 방영되었고, 헵번은 사후 1993년 에미상 정보프로그램 부문 개인 공로상을 받았고
또 다른 프로젝트는 <오드리 헵번의 마법 이야기(Audrey Hepburn's Enchanted Tales)>라는 앨범으로 오드리 헵번의 고전 동화 낭독이 수록되어 있으며 이 앨범으로 그녀는 사후에 그래미상 최우수 아동용 스포큰 워드 앨범(Grammy Award for Best Spoken Word Album for Children)상을 수상합니다.
오드리 헵번은 매 역할마다 진지한 자세로 임했던 것으로 유명하며 <사브리나>를 찍을 때는 실제로 전문 요리사에게 요리를 배웠고 <하오의 연정>을 찍을 때는 첼로 연주를 배워서 직접 첼로를 연주했으며 <파계>를 찍을 때는 실제로 수녀 수업을 받으면서 영화를 촬영하다가 컨디션 난조로 병원에 실려갔습니다.
수상 경력
1953년 제19회 뉴욕비평가협회상 여우주연상
1954년 제11회 골든글로브시상식 드라마부문 여우주연상
1954년 제7회 영국아카데미시상식 여우주연상
1954년 제26회 아카데미시상식 여우주연상
1954년 제8회 토니상 연극부문 여우주연상
1955년 제12회 골든글로브시상식 여자인기상
1959년 제25회 뉴욕비평가협회상 여우주연상
1959년 제7회 산세바스찬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1960년 제13회 영국아카데미시상식 여우주연상
1965년 제18회 영국아카데미시상식 여우주연상
1968년 제22회 토니상 특별상
1990년 제47회 골든글로브시상식 평생공로상
1992년 제45회 영국아카데미시상식 평생공로상
1993년 미국배우조합협회 평생공로상
1993년 제65회 아카데미시상식 진허숄트박애상
이 세상 모든 여성들의 워너비
은퇴 이후에는 유니세프를 통해 개발도상국으로 건너가 자선활동과 기부를 꾸준히 하며 난민 구호활동에 노력을 기울이는 제2의 삶을 살아 칭송을 받았고 이를 근거로 1992년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의 수훈자가 되었습니다.
'The Spirit of Audrey'
(뉴욕 유니세프 본사 앞에는 헵번의 업적과 봉사, 희생 정신을 기린 'The Spirit of Audrey'라는 이름의 동상이 서 있음)
영화계 은퇴 이후 유니세프 대사로서 인권운동과 자선사업 활동에 참가하고 제3세계 오지 마을에 가서 아이들을 도와주었으며, 그런 활동에서 미소짓는 노년의 헵번이 보여준 모습은 젊을적 미녀의 이미지 못지않게 유명해졌고, 세계적인 찬사를 받았습니다.
특히 1992년 암 투병 중임에도 불구하고 소말리아에 방문하여 봉사활동을 했으며 이후 유니세프에서 이름을 딴 오드리 헵번 인도주의상(Audrey Hepburn Humanitarian Award)이 수여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어린 시절의 힘들었던 경험이 자선사업 활동을 하는 계기들 중 하나가 되었고 자신도 한때 전쟁 난민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어려움을 외면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평소 오드리 헵번은 매우 검소해서 아이들에게 밤새 동화책을 읽어주며 직접 밥을 해주고 빨래하는 것이 일상이었고 사치도 하지 않는 매우 검소한 성격이었습니다.
스위스로 이사를 갔을 때는 허름한 옷을 입고 직접 짐을 날랐고, 협찬받은 의상은 모조리 반납했으며 재규어에서 나온 예쁜 스포츠카도 가지고 싶어했지만 가족이 다 탈 수도 없고 장 보러 갈때 쓰지도 못한다고 끝내 안 샀습니다.
둘째 아들의 회고에 따르면 하도 사람들이 "너희 엄마가 밥은 주냐, 책은 읽어주냐"고 물어봐서 다른 엄마들은 아무도 집에서 밥을 안 해 줘서 자기에게 묻는 줄 알았다고 합니다.
순탄치 않았던 사생활
첫 결혼 전 약혼했던 제임스 핸슨이라는 연인이 있었으나 헵번이 <로마의 휴일>을 찍으면서 스케줄이 바빠지자 헤어졌는데 당시 헵번은 <로마의 휴일>을 찍는 한편 약혼을 동시에 준비하면서, 자신이 직업과 결혼생활을 동시에 할 수 있을지를 엄청 고민했다고 합니다.
<사브리나> 촬영 도중 주연인 윌리엄 홀든과 연애를 했다가 영화 개봉 후 헤어집니다.
이후 헵번은 미국 배우인 유부남 멜 퍼러 (Mel Ferrer)와 사귀게 되는데, 멜 퍼러는 엄청난 바람둥이였고 헵번도 인정할 정도로 성질이 더러웠지만, 결국 1954년 멜 퍼러는 세 번째 와이프를 버리고 오드리 헵번과 네 번째 결혼을 하는데, 최전성기의 탑 여배우가 한물간데다가 돈도 별로 없고 사회적 평판도 바닥이었으며 사생활도 3번이나 이혼했을 정도로 엉망인 배우랑 결혼했기 때문에 큰 이슈가 되었습니다.
이 결혼은 불행하게 끝장났는데, 오드리 헵번은 다른 거장 감독들이 제안한 캐스팅을 거절하고 남편인 멜 퍼러가 감독한 영화에 출연하는 등 지극정성으로 그를 사랑했지만 정작 멜 퍼러는 결혼 생활 와중에도 자신의 바람기와 오드리 헵번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헵번과 잦은 다툼을 했고 헵번이 첫번째 임신 중 언포기븐 촬영을 하다가 낙마사고를 당해서 유산한 이후 잦은 유산을 하게되자 결혼 생활 말년에는 헵번에게 폭력까지 휘둘렀고 결국 참다못한 헵번은 1968년 퍼러와 이혼합니다.
1969년, 오드리 헵번은 로마의 휴일 촬영 당시부터 "나는 오드리 헵번과 결혼식을 올릴 거예요" 라고 말하며 오드리 헵번을 따라다니던 이탈리아 정신과 의사인 안드레아 도티 (Andrea Dotti)와 재혼하는데, 재혼시 나이가 만 39세였는데도 불구하고 아들 하나를 낳았지만 전성기 시절 헵번의 아름다운 모습을 사랑했던 안드레아 도티는 중년이 된 헵번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외도를 하기 시작했고 결국, 오드리와 결혼한지 13년만에 이혼합니다.
도티와 이혼 후 헵번은 유니세프 대사로 활동하면서 본격적인 구호 활동에 나서게 되고 구호 활동시기에 네덜란드 배우인 로버트 월더스를 만나서 1993년 사망할 때 까지 동거합니다.
여담
벨기에 브뤼셀에서 태어나고 부유한 부모를 따라 어린 시절 유럽 각지에서 살아본데다, 잉글랜드와 네덜란드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기에 다중언어 화자였는데 영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네덜란드어를 모두 유창하게 구사했습니다.
오드리 헵번은 생전 인상깊은 영화로 히치콕 감독의 <현기증>을 꼽았는데, 킴 노박의 이중인격 연기가 특히 뛰어났다며 극찬을 했고 히치콕 감독의 영화에 출연하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쳤고 히치콕 역시 오드리 헵번을 마음에 들어해서 오드리를 위해 <판사를 위한 보석금은 없다>라는 영화를 준비했지만 후반부에 여주인공이 강간당하는 장면이 들어가있는 영화 대본을 보고 유산의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던 오드리 헵번은 "이런 장면이 들어가는 영화에는 출연할 수 없다."며 최종적으로 출연을 고사했고 영화는 제작이 중단되었습니다.
히치콕은 해당 영화가 엎어져서 20만 달러의 손실을 겪었고 이후 "헵번은 무책임하고 배우로서 기본이 되지 안된 여자"라고 크게 비난했는데 손실을 매꾸기 위해 TV 기술자들과 협업하며 저예산으로 영화 한 편을 만들게 되는데 이 영화가 바로 그 유명한 <사이코>입니다.
로마의 휴일에서 보여준 담배를 처음 펴본 공주 이미지와는 달리, 실제로는 절친인 율 브리너와 함께 엄청난 골초로 유명하고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보여 준 긴 담배 파이프가 유명하며, 아직까지도 '헵번 파이프'라고 불립니다.
담배 피우는 헵번의 모습이 2001년 우표에 담겨 발행된 적이 있는데, 헵번의 아들이 어머니가 담배를 피는 모습이 이미지가 좋지 않다고 하여 발행 중단을 요청, 중단되었고 판매된 것들은 전량회수되어 소각처리했는데 당연히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아 가장 최근 낙찰가가 한화로 6억 7,000만원 정도였는데 당시 폐기를 담당한 직원이 30장 가량 빼돌렸다는 소문이 있고 몇 장 남아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며 잊을만 하면 경매에 나와 그 때마다 최고가를 경신합니다.
워낙 호리호리한 몸매 때문에 아담할 것이라는 오해를 많이 받지만 키가 170cm로 현대 기준으로 봐도 상당한 장신이며 자신의 건강과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엄격한 식단 관리와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았지만 정작 헵번 본인은 외모 콤플렉스가 상당했으며 지인들에게 털어놓기를 "나는 피부도 좋지 않아 화장하지 않으면 볼품이 없고, 콧등도 매끄럽지 않다."라고 했습니다.
달콤한 디저트류를 좋아했다고 특히, 초콜릿을 너무 좋아해서 다른 디저트류는 절제하더라도 초콜릿은 평소에 적당히 먹어주는 것으로 자기 자신과 타협했는데 제2차 세계 대전이 확전 조짐을 보이자 네덜란드의 외가로 피신했는데, 이후 네덜란드가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해 가혹한 지배와 탄압 하에 놓이면서 제대로 음식을 먹지 못하여 몸무게가 39㎏까지 빠지고 거의 죽을 고비를 겪다가 네덜란드 병사가 준 초콜릿을 먹고 간신히 아사를 모면했습니다.
2017년 9월 27일 헵번의 생전 애장품들이 경매에 나왔고 그 중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대본이 있었는데 할리우드 대본 역사상 가장 높은 가격인 632,750 파운드(9억 8,000만원)에 낙찰되어 신기록을 세웠고 이날 경매에서 팔린 헵번의 소장품들 총 판매액은 약 71억원이었습니다.
안네 프랑크와 여러모로 공통점이 많은데 둘 다 1929년 생 동갑내기였고, 오드리 헵번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에 발레 수업을 받기 위해 암스테르담에서 거주했고 헵번의 거주지와 안네의 거주지가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에 위치해있었습니다.
헵번은 종전 이후 안네의 일기가 출판되자 여러모로 자신과 안네가 공통점이 많다는 걸 알게 되면서 내용을 거의 외우다 싶을 정도로 읽었고 안네의 존재를 알게되면서 자기는 유대인이 아니라 결국 살아남았다는 의식에 죄책감도 가지고 있었으며 훗날 안네의 일기가 영화화되었을 때 영화 제작진 측에서는 헵번을 캐스팅하려고 했지만 전쟁으로 인한 트라우마와 죄책감때문에 캐스팅을 거절했습니다.
굿바이 마이 레이디
은막의 슈퍼스타로서 자선사업가로서 아름다운 삶을 살다가 1993년 1월 20일 결장암으로 향년 63세에 세상을 떠납니다.
Time Tested Beauty Tips
For attractive lips,
speak words of kindness.
For lovely eyes,
seek out the good in people.
For a slim figure,
share your food with the hungry.
For beautiful hair,
let a child run his fingers through it once a day.
For poise,
walk with the knowledge you'll never walk alone…
People, even more than things,
have to be restored, renewed, revived,
reclaimed and redeemed and redeemed…
Never throw out anybody. Remember, if you ever need a
helping hand, you'll find one at the end of your arm.
As you grow older you will discover that you have two hands.
One for helping yourself, the other for helping others.
시간이 검증한 아름다움의 비결
매혹적인 입술을 가지고 싶다면
친절한 말을 하라.
사랑스런 눈을 가지고 싶다면
사람들의 선한 점을 보아라.
날씬한 몸매를 가지고 싶다면
그대의 음식을 배고픈 자와 나누어라.
예쁜 머릿결을 가지고 싶다면
하루에 한 번, 어린이가 그 손가락으로 그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게 하라.
아름다운 자세를 가지고 싶다면
결코 그대 혼자 걸어가는 것이 아님을 알도록 하라.
재산보다는 사람들이야말로
회복되어야 하고, 새로워져야 하며, 활기를 얻고,
깨우쳐지고, 구원받고 또 구원받아야 한다.
누구도 내버리지 말라. 이 사실을 기억하라, 도움의 손길이 필요할 때
그대는 그것을 자신의 손 끝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대는 손이 두 개인 이유가
하나는 자신을 돕기 위해서, 하나는 다른 이를 돕기 위해서임을 알게 되리라.
오드리 헵번의 유언이라고 돌아다니는 이 시는 헵번이 좋아했던 시인 샘 레벤슨(Sam Levenson)의 시로, 숨을 거두기 1년 전 크리스마스 이브에 자식들에게 들려주기도 했습니다.
고인의 뜻을 잇기 위해서 아들 션 헵번은 오드리 헵번 어린이 기금(Audrey Hepburn Children's Fund)을 설립하여 전세계의 아이들에 대한 구호사업을 펼치고 있습니다.
현재 오드리 헵번의 무덤은 스위스 톨로체나즈에 있습니다.
그녀의 마지막 인사
글을 마치며...
2014년 서울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에서 열린 '오드리 헵번 전시회'를 통해 오드리 헵번의 많은 것을 알게되고 배우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녀의 세상과 사람을 대하는 아름답고 따뜻한 마음가짐과 행동을 알게된 것은 정말 커다란 영광이자 축복이었고 '할리우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배우'라는 수식어를 뛰어넘는 영원히 사랑받고 존경받아 마땅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성'입니다.
첫댓글 우아하다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셨던 분
우아함과 사랑스러움이 공존하는 역대 최고의 미녀배우중 하나라고 봅니다.
잘 읽었습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와 이 어마어마한 글 뭔가요?
제가 어렸을때 너무 좋아하던 배우 햅번이네요
워낙 좋아하는 배우라서 신경을 많이 쓴 글이네요.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5.01.21 23:25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5.01.22 12:55
기다렸습니다 햅번.
오래도록 연재해주세요.
제 첫사랑 실비아크리스텔 누님 순번까지 저는 기다릴수 있어요. 애독중입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실비아 크리스텔... 개인교수와 마타하리를 리뷰한적이 있습니다ㅋㅋ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찾아볼께요~
에너지 넘치도록 구독할께요
저 글이 햅번이 한말이 아니었군요. 옛날 싸이에 올렸었던 글이었는데..ㅎㅎ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독했습니다. 시대의 아이콘이 될만한 얼굴이에요. 한편으로 저는, 이 분 사진을 보면 꼭 마리아 칼라스가 떠오릅니다.
많은 분들께서 마리아 칼라스를 떠오르시더라구요.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영화사, 패션사 통틀어 불멸의 아이콘이 아닐까 합니다.
여담으로 '티파니에서 아침을' 남자 주인공이 A특공대의 한니발 대장이었더군요^^
로더리고 님 요청에 의해 비스게로 옮겼습니다. 많은 분들께서 관심갖고 봐주셨음 하오며, 내일 저녁에 다시 로더리고님 개인 게시판으로 재이동 하겠습니다.
앞으로 로드리고 님께서 비스포츠 게시판에 글을 올려주시고 일정 시간 지나면 제가 옮기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