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종의 호족견제정책에 억눌리며 황주 세력의 부활을 꿈꾸었던 황주원부인은 천추태후와 헌정왕후 자매를 경종에게 시집 보냈다. 외손자에게 친손녀 둘을 한꺼번에 시집 보낸 것이다. 경종에게는 이미 두 명의 부인이 있었지만, 천추태후가 유일한 왕자 송을 낳으면서 새로운 권력자로 부상했다. 그런데 송이 태어난 지 1년 2개월 만에 경종이 사망하고 만다. 후계자로 어린 원자와 천추태후의 오빠인 개령군, 왕건의 또 다른 아들 대량원군이 거론되었다. 천추태후의 아들은 너무 어렸고, 대량원군은 어머니가 신라 계열이라 고려의 주류 세력들이 선호하지 않았다. 반면 개령군은 왕실의 최고어른인 황주원부인의 손자로 황주 세력을 등에 업고 있었을 뿐 아니라 유학적인 소양도 있어 광종 때 조정에 많이 들어온 귀화인들, 그리고 최승로 등의 친신라계 인물들도 선호했다.
그렇게 개령군이 왕위에 올라 고려 제6대왕 성종이 되었다. 천추태후보다 네 살 많은 오빠이다. 열여덟의 나이에 남편을 잃고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난 천추태후의 옆을 지킨 것은 김치양이라는 남자이다. 김치양은 천추태후의 어머니 쪽 친척으로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김치양이 거짓으로 머리를 깎고 천추태후를 만나러 드나들었다고 역사에 기록되어 있으나, 불교와 가까웠던 것을 보면 얼마 동안 승려 생활을 했을지도 모른다. 천추태후가 이후 조선시대의 역사가들에게 가장 많은 비난을 받은 것은 바로 이 장면으로, 한 나라의 왕비였던 여성이 절개를 지키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당시의 기록을 보면 고려시대에는 남녀의 교제가 자유로웠고, 이혼과 재혼도 많았다. 남편을 잃은 젊은 여성이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던 사회였다. 더구나 천추태후는 방탕했던 것도 아니고, 마지막까지 오직 김치양과 함께했다. 문제는 성종이 유학 교육을 받았고 유학자들의 지지를 받아 왕이 되었다는 사실에 있었다. 누이의 사랑을 안 성종은 김치양을 먼 곳으로 유배 보내 버렸다. 자신이 펼치려는 유학 기반의 정치에 누이의 행동이 위배된다는 사실도 문제였지만, 천추태후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성종이 보위에 오르는 데에는 최승로를 비롯한 유학자들의 도움이 컸다. 당연히 이들은 권력의 핵심에 섰고, 이들의 건의를 바탕으로 성종은 유교 중심의 정책들을 펴나갔다. 태조 왕건이 중시했던 팔관회∙연등회 등의 전통행사가 사라졌고, 송나라를 숭상하는 분위기 속에서 황제국 체제마저 흔들렸다. 그런데 이 무렵 거란이 침입하자 대부분의 중신이 거란에 땅을 떼어주자는 할지론에 찬성하는 등 문약한 모습을 보였다. 다행히 서희의 외교 담판으로 거란은 물러났지만, 무기력한 유학자들의 모습에 반발하는 목소리가 높아갔다. 그 중심에 천추태후가 있었다. 성종 자신도 유학자들에게 실망했던 때문인가 치세 후반기에 들어서자 천추태후의 기반이기도 한 서경에 행차하는 등 남매간에 정치적으로 화해한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990년 아들이 없던 성종은 천추태후의 아들인 왕송을 개령군에 책봉했다. 자신이 왕위에 오르기 전 작위를 조카에게 물려준 것은 그가 왕위계승자임을 내외에 알린 것이다.
왕송이 후계자가 되면서 천추태후는 다시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그런데 이 무렵 성종의 또 다른 여자형제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린다. 천추태후와 함께 경종의 비가 되었던 헌정왕후인데, 역시 젊은 나이에 혼자 된 헌정왕후도 새로운 사랑을 만난 것이다. 상대는 앞에서 성종과 왕위를 다투었던 대량원군이다. 대량원군의 집에 불이 나 급히 위로하러 갔다가 만삭의 헌정왕후를 발견한 성종은 크게 화를 내며 대량원군을 유배 보냈다. 사랑하는 남자가 떠나는 모습을 배웅하던 헌정왕후는 아들을 난산하고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때 낳은 아들이 뒷날 천추태후의 아들(목종)을 내몰고 왕위에 오르는 왕순(현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