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장사(七長寺)
사거용인(死居龍仁)이요 생거진천(生居鎭川)이라고 자랑하는 진천 고
을을 청주에서 지나면 광혜원이 나오는데 여기서 다시 이십 리쯤 북으
로 가면 죽산 고을 못미쳐 왼편으로 칠현산 칠장사가 보인다.
이 절은 신라 때 자장(慈藏)스님이 창건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믿
을 만한 것이 못되고, 고려 문종시 혜소국사(慧炤國師) 정현(鼎賢972
-1054)이 이 절에서 공부하다가 뒤에 여기서 입적하였다는 사실만이 믿
을 만한 기록으로는 가장 오래 된 것이다. 그 뒤로는 우와 9년(1383)에
왜적의 위험 때문에 고려조의 실록을 이곳에 보관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는 다시 기록이 희미하다가, 조선 인조 원년에 인목대비(仁穆,1584-1632)
가 인조반정으로써 복위가 된 다음 억울하게 돌아간 친정 아버지 김제
남과 와자 영창대군을 위하여 이곳을 원찰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인
목대비가 이 칠장사를 자신의 원찰로 삼았던 흔적은 대웅전에 보관된
두 벌의 괘불(掛佛)중 고본(古本)에 해당하는 숭정 원년 즉 인조6년
(1628) 무진(戊辰)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석불
경내에는 한장의 돌에다 광배까지 아울러 조각한 석조 불입상이 서쪽
을 향하여 서 있는데, 이석불은 본디 죽산중고등학교 교정에 있던 것을
학생들의 훼손이 심하여 수년 전 이곳으로 옮겨 모신것으로, 화염광배가
전신을 감싼 데다 두부에는 다시 두원광이 겹쳐 있고 그 두원광에는 3
구의 화불이 중앙과 좌우로 자리하고 있는데 구름을 타고 있는 듯한 동
감이 잘 표현되어 있다. 얼굴 모습이 많이 파손되어 자세한 표정을 살필
수 없는 점이 아쉽기는 하지만 의습선이라든가 광배의 화염문 같은 세
부적인 묘사도 그대로 살아 있고 전체적으로 보아서 나무랄 곳이 없는
8세기 양식의 수작이다. 얼마전에 보물 제 988호로 지정되었다.
괘불대
대웅전으로 오르는 계단 아래에는 한쌍의 괘불대가 양쪽으로 서 있는
데 오른쪽 것의 전면에 새겨진 글씨는 '죽산 칠장사 영산회 괘불탱기석
급탱죽 조성기'라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요즈음 괘불대라고 하는 것을
괘불탱기석이라고 불렀고 거기에다 세우는 받침대는 또 탱죽이라고 불
렀던 것임을 알겠는데, 바로 옆줄에는 '옹정 3년 을사 2월 일입(雍正三年
乙巳(1725)二月日立)'이라고 씌어 있다. 이 영산회상의 모습을 그린 괘불
은 법보화(法報化) 삼신불을 그린 고본 괘불과 함께 이 절에 아직 보관
되어 있다.
대웅전
대웅전안에는 무척 원만한 상호의 본존이 눈에 들어온다. 인중이 길고
거기다 윗입술마저 약간 위로 들치어져 있는 모습은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무척 친근감이 가는 얼굴이며 본존의 조성시기와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상의 양 협시가 서 있고 본존
후불탱화와 지장탱, 신중탱, 칠성탱 등 갖추고 있어야 할 탱화들이 모두
한 사람의 솜씨로 걸려 있는데. 화기는 전부 고종 말년의 것들이다
법당 한쪽에는 건륭47년(1782)에 조성된 범종 하나가 놓여 있는데 이
동종은 두 개의 용두가 모두 구멍이 뚫리어 있지 않아 음통의 역활보다
는 다만 걸어 놓기에 편리한 구실을 하는 것에 불과할 뿐인 듯하며 대
신 소리를 퍼지도록 하기 위한 음통 구멍은 용두 옆에 두개를 나란히
뚫어 놓았다. 대웅전 옆에는 원통전과 명부전이 주존인 관음보살과 지장
보살 그리고 협시인 남순동자, 남해용왕과 도명존자, 무독귀왕이 있으며
모두 대웅전에 모신 성상들의 솜씨보다는 떨어지는듯 하다.
혜소국사비, 부도
원통전을 뒤로 하고 연못 위를 지나 서북쪽으로 50여 미터쯤 약간 가
파른 높은 곳에 보물 제488호로 지정된 혜소 국사비가 있는데, 이곳은
사실 법당이 자리잡은 터보다도 휠씬 더 지세가 나아 보인다. 위를 두르
고 있는 산은 완만하고 아담한 소잔등 같은 봉우리가 일곱 개 있는 모
습인데, 이산을 이곳에서는 칠장산이라고 부르고 있고 기실 칠현산이라
고 하는 산은 절 남쪽에 있는 명적암의 뒷산이라고 한다.
원래 이 산의 이름은 아미산이였고 이 절의 이름은 칠장(七長)이 아니
라 칠장(漆長)이었다고 하는데 이 절에 내려오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에
의해서 산 이름이 바뀌었다 한다.
옛날 이 근방에는 못된 짓을 일삼는 포악한 악인들 7인이 있었는데
혜소 국사가 이 칠장사에 머물고 있을 때 마침 이들이 어느 날 절 아래
에서 쉬다가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목이 말라 샘까지 왔었다. 그런데 샘
가에 놓인 바가지가 순금으로 만든 바가지가 아닌가, 그래서 그 사람은
욕심이 나서 얼른 물을 떠먹고 나서는 그 바가지를 몰래 옷 속에 숨겨
가기고 왔었다. 두번째의 사람이 물을 마시러 갔을 때도 역시 금으로 된
바가지가 있어서 그이도 몰래 숨겨 가지고 돌아왔고, 세번째 네번째의
사람도 마찬가지었다. 이렇게 일곱 사람 모두 순금 바가지를 훔쳐 가지
고 돌아왔지만 나중에 각기 만져 보니 바가지들은 모두 온데간데 없었
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이상하다고 여겨 각자 바가지를 숨겨 가지고 온
사실들을 실토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혜소 국사가 조화를 부린 일임을
알게 되어 그들은 그날부터 스님의 교화를 받기 시작하였고, 나중에는
이들이 모두 현인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 후로는 산 이름을 칠현
산(七賢山)이라고 부르고 절 이름도 칠장사라고 하였다 한다.
혜소국사의 비 바로 옆에는 칠현인의 화현이라고 일컬어지는 돌로 된
나한상를 모신 나한전이 넓은 바위 위에 조그맣게 올라 앉아 있다 앞서
법당 앞의 괘불대를 세웠던 장본인인 탄명(坦明)스님이 강희42년(1703)
에 노천에서 눈비를 맞고 계시는 모습이 너무 안되어 조금만 전각을 마
련하여 모신 것이다.
혜소 국사의 비는 비신의 높이만도 3.45미터나 되는 거대한 것이고 귀
부나 이수의 생김도 웅장하여 전체적으로 화려함을 극한 모습인데 현재
는 귀부와 비신 이수가 모두 따로 떨어져 앉아 있다. 높이와 푠에 비하
여 두께가 너무 얇은 날렵한 모양의 비신에다 장대하고 무거운 이수를
얹었으니 비를 파괴하기에는 쉬웠을 것으로 보인다. 귀부의 구갑은 방원
형에다 육각의 갑문(甲文)이 자세히 나타나 있고 머리와 꼬리 및 네 개
의 발에는 뚜렷한 물결 무늬가 남아 있다. 그리고 비신의 양 측면에는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형상을 길게 양각했는데 마치 용이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한 모습은 일품의 솜씨를 자랑하고 있다. 돌의 재
질은 남포 오석 같고 특히 법상종 승려들의 비가 화려하며 현존하는 부
도탑비로는 가장 크고 화려한 것 중의 하나이다.
혜소 국사의 부도는 9층의 장엄한 보습으로 지금 남아 있는 이 비석
옆에 있었는데, 임진란에 적장 가등정정이 이곳에 들어와 파괴하여 없
어졌다고 한다.
나옹스님의 소나무
비간 바로 아래에는 커다란 반송 한 그루가 준수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는데 이 소나무는 나옹(懶翁)선사가 심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이 소나
무는 6백 년이 넘은 셈인데 칠현인의 화현이라는 나한들을 모신 나한전
이 마치 그 소나무을 일산으로 삼고서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소나무는 가지를 넓게 드리우고 있어 전각과 나무의 배치가 절묘한 조
하를 이루고 있다.
사천왕상
사천왕상이 보이는 건실한 사실성과 청신(淸新)한 기품이 인조 장릉의
무인석과 상통하는 점이 있으며, 허리가 길쭉한 데다 가슴을 딱 벌리고
기마 자세로 반쯤 앉은 형상이 흡사 위급하면 언제라도 반사적으로 일
어설 자세와 같아 사상으로 치면 소양인(少陽人)의 모습을 한 천왕이 있
는가 하면, 시선을 먼 곳에 둔 채 온갖 신경을 위에다 두면서 위엄을 나
타내는 태양인(太陽人)의 형상을 한 천왕이 있는 등 네 분의 천왕이 모
두 표정을 달리한 채로 보는 이의 외경을 자아내는 걸작들이다. 채색도
형체와의 조화에 무리가 없이 잘 되었고 지물들도 모두 잘 어울리는 것
들이어서 한 군데도 나무랄 데가 없는 수작이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 우일신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