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遠祖 趙鼎 : 字禹寶,號慕唐,仕高麗大將軍元尹 ○按舊譜,稱新羅元尹,家藏舊錄中曰,仕於高麗,未(末을 바꿈)知孰是,而自公九傳而至典書公,入本朝,自新羅歷麗朝五百年其間,代數必不止(至를 바꿈. 1738년 무오보에는 止지로 되어 있음)於九代,且元尹之職乃麗朝官名,則公之仕於麗朝似(以를 바꿈)無疑,故今書以仕高麗以俟後日更考 이 족보의 원문은 후손 조성래(1959년 함안 하림태생)가 수백 년 동안 옮겨 적으면서 잘못 옮긴 것들을 모두 교정한 것이다.
(仕 벼슬 사. 벼슬살이. 벼슬살 사. 벼슬살이를 함 按 살필 안. 조사하여 증거를 세움 孰 누구 숙. 어느 숙. 어느 것 俟 기다릴 사. 떼지어갈 사. 클 사)
◉ 遠祖(원조) 趙鼎(조정) 字(자)禹寶(우보) 號(호)慕唐(당모), 仕(사) 高麗大將軍(고려대장군), 元尹(원윤) ○按(안) 舊譜(구보)稱(칭)新羅元尹(신라원윤) 家(가)藏(장)舊錄中(구록중)曰(왈)仕於高麗(사어고려) 未知孰是(미지숙시) 而(이) 自公(자공)九傳(구전)而至典書公(이지전서공)入本朝(입본조) 自新羅(자신라) 歷麗朝(력려조) 五百年(오백년) 其間(기간) 代數(대수) 必不止於九代(필부지어구대), 且元尹之職(차원윤지직)乃(내)麗朝(려조)官名(관명)則(즉)公之仕於麗朝(공지사어려조)似無疑故(사무의고) 今書(금서)以仕高麗以(이사고려이)俟後日更考(사후일경고)
1664년에 간행된 함안조씨 최초의 족보인 「갑진보甲辰譜」 이전의 필사본에는 “신라원윤”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갑진보」와 1738(영조14)년에 간행된 「무오보戊午譜」에는 “고려대장군원윤(高麗大將軍元尹)”으로 수정되어 있다. 수정하면서 수정 이유를 위의 족보 내용과 같이 밝혀 놓았다. 또 1780(정조4)년에 간행된 「경자보庚子譜」와 1825년에 간행된 「을유보乙酉譜」에도 위의 내용을 기재하고 있다. 그런데 새로운 족보의 간행이 거듭되면서 실수 또는 고의로 글자가 바뀌거나 누락되거나 표현이 조금 바뀌는데, 그 결과, 뜻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모호한 문장이 되어 버리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후손 관정 조성래가 시조 할아버지 조정(趙鼎)의 족보 내용을 번역하면서 많이 힘들었다. 왜냐하면 번역자의 한문 해독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한문 원문 자체가 어렵게 표현해 놓은 것이거나 전해 내려오는 과정에서 변모된 형태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위의 족보의 한문 원문은 후손 조성래가 그동안 새로운 족보가 발간되는 과정에서 잘못 옮겨 적었거나 잘못 바꾼 것들을 모두 바로잡은 것이다.
위의 솥 정(鼎) 자 할아버지의 족보 내용에서도 언급하고 있듯이 고려 오백 년 동안 대수가 9~10대 밖에 내려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솥 정 자 할아버지에서 10대 열(悅) 자 할아버지 사이의 여섯 분에 대한 족보 내용은 관직이름 이외에 별 다른 정보가 없다. 단지 제 6대와 7대만이 족보다운 기본 정보를 담고 있다. 족보에 고려시대 선조들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족보가 처음 출현한 것은 15세기이기 때문이다. 1423(세종5)년에 간행된 문화 유씨(文化柳氏)의 <영락보永樂譜>가 조선 최초의 족보이고, 함안조씨의 족보는 임진왜란 후에 필사본으로 나온 것이 최초의 족보이다. 그래서 고려왕조 500년 동안의 족보 내용은 정확하지 않거나 충실하지 못 할 수밖에 없다. 특히 고려왕조 500년 동안의 대수가 9대밖에 내려오지 않았다는 것이 그렇다. 이것은 아마 500년 동안 구전 또는 기록으로 전해 내려오면서 정확하게 전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족보내용은 기록으로 전해졌을 가능성이 90%이상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만약 기록되어 전해지지 않았다면, 족보가 처음 만들어졌을 당시에(조선중기) 10개나 되는 고려의 관직명을 정확하게 다 알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신(功臣)은 ‘공이 큰 신하’라는 뜻이다. 개국공신(開國功臣)은 왕을 도와서 나라를 세우는 데 공이 큰 사람에게 내린 칭호 또는 그 칭호를 받은 사람이다. 고려개국에는 후고구려의 왕이었던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고려 태조로 추대한 사람들을 포상했는데, 그들을 ‘고려개국공신’이라고 했다. 고려개국 일등공신으로 책록된 사람은 918년에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고, 궁예를 왕위에서 축출한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 등 4명의 장군이다.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이란 무엇인가?
936(태조19)년에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뒤 940(태조23)년에 신흥사(新興寺, 神興寺)를 중수하면서 이곳에 공신들을 모시는 공신당(功臣堂)을 짓고, 동쪽과 서쪽 벽면(壁面)에 공신들을 그려 넣었다고 한다. 그 그림에 이름이 올라간 사람을 벽상공신(壁上功臣)이라고 했다. 벽상공신들에게는 조정에서 내리는 벼슬아치의 임명장[職牒직첩]이 내려지고, 이를 후손에게 전승하게 함으로써 그 후손들은 조상이 세운 공훈(功勳)으로 벼슬길에 나아가는 특전[門蔭문음]를 받게 되었다. 이와 함께 벽상공신들에게는 관직에 복무하는 것에 대한 봉급 대신 조세를 받아먹을 수 있는 일정한 지역, 즉 읍(邑)을 내려줌으로써 경제적 기반이 보장되었다. 이와 같이 왕은 공신들에게 그 지위에 부응하는 명예의 칭호와 함께 조세를 받아먹을 수 있는 지역[食邑식읍,祿邑녹읍]을 내려줌으로써 왕실에 충성하도록 했다.
대장군(大將軍)은 고려시대의 벼슬 이름으로서 종3품 무관직이다. 대장군은 중앙군에서 상장군(上將軍,오늘날 군단장, 무관 최고의 품계인 정3품) 다음가는 직위이다. 대장군은 이군육위(二軍六衛)의 8개 군단에 각 1명씩 배속되어서 총 8명에 이르렀다. 대장군은 오늘날 대장 내지 중장, 즉 포 스타 내지 쓰리 스타 계급의 장군이었다.
(참고) 상장군(上將軍)은 고려시대 중앙군의 최고지휘관이다. 이군육위(二軍六衛)에 각 1명씩 두어서 총 8명의 상장군이 있었다. 상장군은 무관으로는 최고의 품계인 정3품이다. 고려초에는 무관은 정3품까지 밖에 올라갈 수 없었다. 이것은 정1품까지 승진할 수 있는 문관에 비해 무관의 지위가 격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전기에 무관들을 격하한 나머지 고려중기(1170년)에 무신의 난(武臣亂)이 일어났다.
원윤(元尹)은 고려초의 작호(爵號,벼슬을 지낸 자에게 붙이는 아주 명예스러운 호칭)의 하나이다. 원윤은 주로 왕족과 중앙의 고위 관리들과 왕건을 고려 태조로 만드는 데 공이 큰 장군들과 왕건을 떠받드는 지방호족들에게 주어졌다. 원윤의 벼슬을 가진 사람에게는 곡물을 얻을 수 있는 토지와 땔감을 얻을 수 있는 산이 지급되었다. 고려초에는 왕족을 원군(院君), 대군(大君)이라고 불렀다. 1012년(현종3)에 이르러서 왕족의 모든 군(君)을 공(公), 후(侯)로 봉(封)하고, 그 이하를 ‘원윤(元尹)’, ‘정윤(正尹)’으로 불렀다.
함안조씨는 이러한 원윤공(元尹公) 솥 정(鼎) 자 할아버지를 시작으로 하여, 고려 500년 동안 다음과 같이 대대로 최상위의 벼슬자리에서 학문과 덕을 닦으면서 충(忠)과 효(孝), 정(正)과 의(義)의 모범이 되었다.
함안조씨 1~10세 이름 및 그 관직명
고려초에는 무관직은 정3품이 최고로 올라갈 수 있는 품계였다.
1세 정(鼎, 대장군大將軍, 오늘날 중장 내지 대장, 종3품 무관직)
2세 간(幹, 중랑장中郎將, 오늘날 준장, 완 스타 정5품 무관직)
3세 단석(丹碩, 장군원윤將軍元尹, 오늘날 중장, 쓰리 스타 정4품 무관직)
4세 1) 시우(時雨, 오위도령장五衛都領將, 오늘날 국방부장관, 정3품 무관직)
2) 영준(英俊, 형부상서刑部尙書,형조판서, 오늘날 법무부장관, 정2품)
5세 석화(錫和, 군자감軍資監,군수품의 저장과 출납을 맡아보는 관청, 벼슬? 소실됨)
6세 렬(烈, 광정대부匡靖大夫, 정2품 문신, 정당문학政堂文學, 종2품 등을 역임함)
7세 희(禧, 밀직사삼사좌윤密直使三司左尹, 종5품)
8세 지흥(之興, 문과계림부참군文科鷄林府參軍, 참지정사參知政事, 종2품)
9세 1) 인계(仁啓, 1290년생, 감찰監察,감찰어사監察御史, 벼슬? 소실됨, 둘째 아들 안경安卿 1320년생, 호조전서, 정2품, 묘 황해도 해주)
2) 천계(天啓, 1295년생, 전서공 조열(趙悅)의 부친, 판도판서版圖判書, 정2품, 묘 합천 반포 조산趙山 소실됨)
3) 신계(信啓, 1305년생, 오위도장五衛都將, 정3품 무관직. 묘 소실됨. 사위가 공조전서(오늘날 국토건설부장관, 정2품)를 지낸 정자현鄭自賢)
10세 1) 안경(安卿, 1320~?)은 1351년 문과급제, 호조전서(戶曹典書,정2품), 두문동 72현 중 한 분. 외아들 성옥(成玉)은 조선왕조 호조참판, 정2품
2) 열(悅, 1334? ~ 1419(세종1)년 졸 86세亡, 묘 함안 원북, 공조전서(工曹典書, 오늘날 국토건설부장관, 정2품), 두문동 72현 중 한 명
* 이 글은 다음 카페 <함안조가 감찰공파 하림유사(遺事)>에 올려져 있는 글입니다. 이 글을 주변의 함안조가 일가들에게 카톡 또는 문자로 많이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조성래 (1959년 하림태생) 올림
첫댓글 그 동안 어느 누구도 번역해 놓지 않았던 함안조씨 시조 원윤공 솥 정(鼎) 자 할아버지의 족보 내용을 성실하게 번역하였습니다. 너무 어려워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이 글을 보는 사람은 다 댓글을 달아주시면 기분이 좋아져서 탈진한 상태가 빨리 회복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글을 읽는 것만 해도 좋습니다.
관정 죽을 고생을 하셨구나 니덕에 많은사람이 편하게 되었다 ㅡ관정만세!관정화이팅!
참으로 관정 만세! 과정 파이팅! 이다. 고려 시대를 훤히 들여다보고 작성한 것이라서 참으로 알기가 쉽구나. 그동안 연구한다고 수고했다. 그러나 관정 자신에게도 많은 공부가 되었으니 그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하겠다. 그리고 우리 후손들에게 시조 할아버지 등 선조 할아버지들에 대해 상세하게 알도록 하는데 큰 공적을 세웠으니, 이 또한 얼마나 기쁜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이런 작업을 할 사람이 많지 않다. 참으로 기특하고 귀한 일이다. 관정에개 무한한 박수를 보낸다.
나는오래전부터 우리시조할배의 산소가 합천땅 어딘가에 있을것이란 생각이 자꾸들었다ㅡ을미보 제1편에의하면 시조로부터 9세손 인계 천계까지의 여러대 분묘가 합천반포에 있었다고한다ㅡ라고되어있기때문에.
합천 반포, 아주 관심이 가는 정보입니다. 어쩌면 고려시대에는 산소를 지금 처럼 안 썼는지도 모르지예. 확인해봐야 합니다만. 다른 성씨들도 고려시대 산소를 가지고 있는 성씨는 거의 없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함안시대 이전에는 안동, 대구, 합천 등이 함안조가의 본거지였을 것입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전서공할아버지께서 함안 원북으로 내려와 정착하게 됨으로써 함안조씨가 탄생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물론 함안조가의 시조는 신라말 고려초 솥 정(鼎) 자 할아버지이지만. 함안조가라는 말을 쓰게 된 것은 조선초부터일 것입니다.
참으로 수고 많았습니다. 함안조가 양반 집안이다 라는 말이 여기서도 확인이 돼는것 같습니다. 대한민국에 아니 전세계에 이런 집안이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관정 덕분에 우리 혈족들 모두가 무한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이번에 글작업을 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왜 함안조가를 알양반이라고 말하는지를
조선규님(1937년 하림생) 카톡 문자 왈,
어려운 한문 번역과 역사적 사실 확인등 난해하고 복잡한 뿌리찾기 일을 해낸 자네 정말 수고 많네. 도움이 되지 못하는 나 자신이 부끄러울 뿐이네. 덕분에 이해에 큰힘이 되어 감사히네. 계속 분발하시게.
관정정말수고가많았구나.시조정자할아버지로부터9대까지고려시대분들은묘가없음조선시대와서야중시조격인.10대조열(전서공)원북,11대조안(시정공)하림부상토.12대조려(생육신)매바위에묘소가있음.이세묘소을함안조씨삼소라함 그래서작년(19년)에함조대종회에서하림가남골(웃못위쪽)에시조부터9대까지설단을멋지게만들어놓았음.그러니까.조씨들의성지가되는거지
금제 아제 등장 반갑습니다. 윗 재실인 남계공재실 뒤 위의 편에 조성해 놓았지예. 조성은 좀 더 격조 있게 하지 못 하면 안 되는데, ....... 최고의 전문가와 미학자(美學者)가 동원되야 하는데, ........ 아마 재원조달에 약간의 어려움이 있었지 않았나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