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낯선 곳에서 밤을 보낸다는 것은 어렵다. 밤새도록 뒤척거리다가 한두번 깨고 선풍기를 틀고 하다가 7시 정도에 일어났다. 밤새도록 비가 유리창을 때렸는데 일찍 일어난 아침에는 그쳐 있었다. 단지 켜켜이 갈라진 유리창 너머로 비 내음이 가득한 공기가 흘러들고 있을 뿐이었다. 이불도 없이 그냥 입고 있는 옷차림으로 잠자리에 들었는데 밤새도록 땀을 많이 흘렸나보다. 아침에 일어나서 머리만 감겠다고 했다가 내쳐 샤워를 했다. 시원한 물줄기가 그리웠었다.
샤워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와 짐을 대강 정리해놓고 거실로 나왔는데 Garvin이 혼자 앉아 있다 Hi~하고 수줍은 인사를 한다. 웃음과 Hi하는 인사, 그리고 밖으로 나왔다. 어제 St.Paul교회 언덕에서 멀리 보이던 바다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난 말라카가 바다 바로 옆에 있는 도시라서 그 곳이 바다라고 생각했는데 Franco아저씨는 그곳이 바다가 아니라 강이란다. 그게 무슨 강이지? 멀리 길다랗게 생긴 섬이 하나 있을 뿐이던데.. 그래서 강이라고 한 것일까? 뭐 바다든 강이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 난 그저 출렁대는 바다인지 강인지를 보고 싶었을 뿐이다.
밖의 공기는 시원하다 못해 약간은 써늘한 기운까지 있었고 게다가 바람까지 조금은 많이 불었다. 간간히 빗방울도 떨어지고.. 하늘이 잔뜩 찌푸려 있었다. 한손에는 카메라를, 한손에는 우산을 달랑거리면서 거리를 따라 내려갔다. 멀리 보기에 계획도시처럼 3~4층의 길다란 건물들이 줄지어 있어 깨끗하고 깔끔해보였는데 가까이 가보니 많은 가게들이 세를 놓는다는 광고가 붙어있고 비어있다. 몇몇의 카페만이 영업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간혹 차들이 지나가고, 또 많은 개들이 무심하게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한참을 유령도시 같은 건물들 사이를 걸어 마침내 물이 출렁거리는 곳에 도착했다. 멀리서 보았을때 다리가 있었고 그 다리에서 보이는 풍경이 궁금했었다. 그런데, 무슨 연유인지 길은 "무단침입시 발포한다"는 경고문과 함께 굳게 잠겨있었다. 사유지인가... 멀리 보이는 건물의 형태로 보아서 사유지라기 보다는 휴양지 같아 보였는데.... 한참을 철조망 앞에서 왔다리 갔다리하다가 그냥 돌아왔다. 말레이에서 저렇게 굳게 잠근 문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하는 생각을 하면서.
말레이는 이슬람국가이다. 그런데, 화교가 많이 살아서인지 군데군데 향을 피울 수 있는 불단이 있다. 말라카의 바다를 보기 위해 걸어가는 그 거리에도 길가에 서 있는 불단이 하나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그 불단에 들렀다. 불단의 향로에는 타고 남은 향의 기둥만이 남아 많은 향을 피웠음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행운을 기원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무슨 소원을 빌었을까... 타고 있는 향이 하나도 없는 이른아침, 그 자리에서 세개의 향을 피웠다. 하나는 엄마아빠를 위해, 하나는 익노내외를 위해 또 하나는 나를 위해... 앞으로 건강하게 행복하게 살게 해달라고 말이다. 나의 이런 모습을 길가에 있던 한마리의 개가 끝까지 지켜보았다. 마치 증인이라도 되는 듯이 말이다.
다시 Traveller's Inn으로 돌아왔다. 거실에는 소파에 앉은 Garvin과 식탁의자에 앉아 다리를 흔들고 있는 영국인 아가씨 한 명뿐, 조용했다. 우산과 카메라를 방에 두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아침을 해결해야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뭘 먹을까.. 말레이에서 유명한 음식으로는 국수를 들 수 있다고 했다. 그래 이번에는 국수든 뭐든 면으로 먹어보자. 길가에 아침부터 문을 열고 많은 사람들이 아침을 먹고 있는 곳으로 용감히 들어갔다. 그리고는 Noodle을 먹고 싶다고 했더니, 아저씨가 대뜸 Noodle Soup이라고 하면서 자리에 앉으란다. 결국 나온 것은 닭육수에 약간 굵은 면발의 국수를 준다. 맛? 좋았다. 시원한 국물에 야채랑 국수랑 들어있는데, 뜨겁지 않은 시원한 칼국수 맛이라 할까? 하여튼 RM 2.6(약 800원?) 을 주고 먹은 음식인데 가격대비 만족.
Melaka Sultanate Palace에서
9시 반쯤 짐을 다 챙겨서 일박에 RM15의 방값을 치르고 Traveller's Inn을 나섰다. 작은 베낭에 모든 것을 다 챙겨넣고 책을 들고 그러고 나왔는데, 아뿔싸 지도를 그냥 두고 온거다. 어제 뭔가를 물어본다고 들고 나갔던 지도를 그냥 식탁위에 올려놓고 아이스티를 사준다는 아저씨를 따라나선 것이 불찰이었다. 하여튼 먹는 것에는 사죽을 못쓰는 내가 문제지. 다시 들어갈까 어쩔까 고민을 하다가 그냥 떠나기로 했다. 여행이라는 것이 언제나 완벽할 수도 없을 뿐더러 지금 구경을 하러 갈 곳의 위치는 훤히 알고 있으며, 버스터미널을 찾아가는 것은 안내 책자만으로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것이 결국은 불찰이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깨닳았다.
Melaka는 아주 오래된 말레이지아의 무역도시였다. 그런 연유로 많은 선진제국들의 공격을 받았으며, 결국은 통치국이 바뀌었을 뿐 식민지로 계속 통치를 받게된다. Melaka의 식민지로의 오랜 역사는 박물관의 2층을 가득 메울 정도였고, 각 시대별 어느나라가 통치를 했었다는 불명예스러운 연대표가 게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 내용은 이 작은 왕궁을 돌아보는 사이에도 느낄 수 있었다. 말라카왕궁은 목조로 된 3층정도 되는 건물과 그 앞의 작은 정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체 크기가 에버렌드의 장미정원 정도 될까? 왕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왜소한 크기였다.
왕궁은 몇개의 반쯤 분리된 방들로 되어 있었는데, 의전을 행사하는 모습이 마네킹으로 제현되어 있었고, 왕의 침실도 꾸며져 있었는데 왕의 침실에는 왕비도 함부로 들어가지 못했다고 한다. 의전실의 반대편 2층에는 말라카의 독립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한 여성의 이야기가 담긴 그림이 진열되어 있었다. Tun Kudu라는 여성인데, 왕비였다가 옆나라 다른 남자의 여인으로 다시 살아간 비운의 여성이다. 물론 말라카의 독립을 영위하기 위해 개인을 희생했다는 점은 고귀하지만, 두 아이를 가진 어머니로써 그 희생을 강요당했다는 점에서는 불운이며 그런 힘없는 나라의 왕비였다는 것이 불운이겠지. 참, 여자의 운명이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왕궁을 둘러보고 잠시 나무의자에 앉아 있다가 밖으로 빠져나왔다. 왕궁앞의 정원은 그다지 관리가 잘 되는 편이 아니었다. 그냥 한 바퀴를 돌고 자동셔터기능을 사용해서 사진 을 한장 찍고 다시 뜨거운 햇살 속으로 들어왔다. 아침과는 달리 다시 뜨거운 햇살이 온 공기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KL로 떠나는 버스가 12시반이라 왕궁을 보고 난 시간이 10시 반. 조금은 한 숨을 돌리고 가기로 하고, 시원한 분수가 있는 타임스퀘어 광장으로 나왔다. 그 옆에 챈돌이라는 이름이 붙은 가게가 있는데, 그 가게에서는 말레이의 거리음식중의 하나인 챈돌을 판다. 챈돌은 우리나라의 팥빙수에 연유를 많이 넣고, 뭘로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약간 떫은 맛이 나는 국수같은 것이 들어가는 어찌보면 그다지 먹고 싶지 않게 생긴 음식이다. 먹어본 결과 아이스까장보다는 못하지만 나름대로 시원한 맛이 있고 떫은 맛이 몸에 좋다고 하니 그냥 먹어줄만 한 음식이었다. 첸돌을 시켜서 가게뒤편 식탁에 앉아 먹고 있는데, 앞 테이블에 있던 꼬마둘이 내가 재미있어보이나 보다. 계속 곁눈질을 한다. 그래. 나에게 너희들이 외국인으로 보이듯이 나도 너희들에게는 낯선 이방인으로 보이는구나. 하지만, 나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야.
챈돌로 더위를 약간 물리치고 시외버스터미널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넉넉잡고 30분이면 충분하다고 하던데, 한번 가보지 뭐. 안내책자를 보니 얼마걸리지 않겠네..하면서 길을 갔는데 20분이 넘도록 터미널의 터자도 보이지 않는거다. 날은 덥고 길은 모르겠고, 게다가 길에 사람들도 없다. 버스가 떠나는 시간에서 30여분이 남아있을 뿐이다. 도대체 이 작은 옛도시에서 길을 잃다니. 누구에게 물어보나... 한참을 두리번거리다가 남동생과 함께 길을 가던 열서넛정도 되는 여자아이를 붙잡고 길을 물었다. 남동생은 멀찌감치 뛰어가버리고, 여자애는 검은 눈동자를 반짝거리면서 내 말을 듣고 있더니 대뜸, Follow me!한다. 아, 다행이다. 길을 따라 가는 중간에 여자애에게 몇가지 질문을 했는데, 그 애가 하는 말, "저 영어 잘 못해요." 그 정도로 말을 알아듣고 질문을 던지는데 영어를 잘 못한단다. 우리나라 애들은 그만큼 하기나 할까. 그 여자애를 따라서 한 10분정도 걸어가자 드디어 터미널이 보인다. 말라카에는 주변을 돌아다니는 시외버스가 전부 정차하는 우리나라로 치면 버스종점같은 터미널이 있고, 바로 옆에 고속버스터미널이 있다. 나에게 길을 가르쳐준 여자애는 길 저편에 있는 고속버스터미널을 가르켜주고는 손을 흔들고 동생과 함께 사라졌다. 어디를 가든 고마운 손이 기다린다는 말이 사실임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그 여자애와 동생의 사진을 찍지 않은 것을 그 애와 헤어져 돌아오는 버스안에서 후회했다.
버스가 떠나기까지 20여분이 남았다. 어느 버스를 타야하는지 매표소에서 다시 확인을 하고 버스가 보이는 가게안에서 콜라를 마셨다. 그리고 수첩을 꺼내서 그동안 있었던 일을 적기시작했다. 두세개의 의자를 사이에 두고 앉은 아저씨는 점심을 열심히 먹고 있었는데, 손으로 그냥 먹고 있는 거다. 말레이에서 직접 손으로 밥을 먹는 사람은 본 것은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KL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정신없이 잠을 잤다. KL에 도착한 시간은 거의 3시가 넘은 시간. 뿌뜨라야터미널앞에서 엄청나게 차가 막혀 버스가 꼼짝도 하지 않는다. 거의 터미널에 도착한 즈음 차에서 내려 택시를 타려했다. 그런데, 택시가 승차거부를 하는거다. 뿌킷빈탄에 간다니 안간다고 내리라고 한다. 이런, 한국에만 승차거부가 있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다. 길가에 서 있는 택시기사같아 보이는 아저씨에게 물었더니 아마 그곳은 가까워서 아무도 그곳에 가지 않을거라고 하면서 RM15를 주면 가겠다고 한다. 그게 무슨 애 이름인가.. 오는데 RM 4도 주지않았는데, 무슨 바가지를 씌우려고.. 베낭을 매고 시내를 돌아다니는 경전철을 타는 곳을 물어서 갔는데, 빈탄으로 가는 전철로 갈아탈 수 없다고 하면서 Maybank건물을 돌아가면 버스가 있을거라고 그것을 타라고 한다. 하여튼 뿌트라야버스터미널근처에서 30여분을 소비한 끝에 May bank건물을 돌아 아예 걸어갈 심산으로 길을 건너 터벅거리고 걸어가고 있는데 지나가던 버스의 차장이 나를 막 부른다. 뿌킷빈탕이라고 했더니 올라 타란다. 딸랑 RM 0.7. 택시기사 도둑넘들.
호텔에서 짐을 찾고 다시 check-in을 하고 방에 들어와서는 그냥 침대에 뻣었다. 후유.. 더운날 돌아다니기 정말 힘들다. 이 나라 1년내도록 이런 날씨가 계속되는 열대기후. 난 절대 이런 나라에서 살 수 없을 것같다. 대강 짐을 챙기고,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빨아 널어놓고 나서 밥이라도 먹어야되니깐 다시 거리로 나갔다. 버스에서 내린 곳으로 다시 걸아가서 그 곳의 쇼핑센터로 들어갔다. 층층마다 명품매장이 가득했다. 명품이 뭔지 어떤 것이 명품인지도 잘 모르면서 그냥 깔끔하네 하면서 돌아다니다가 지하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음식점은 지하에 있을 것같으니깐. 그곳에는 Food court같은 곳이 있었다. 음식을 고르고 그리고 계산하고 자리에 앉아 먹는 곳. 두바퀴를 돌고난 후 말레이의 전통음식이라는 ....을 먹기로 했다. 접시에 밥을 담고 그 위에 반찬류를 덜어서 먹는 것. 숙주나물, 쇠고기 볶음, 낚지볶음 세종류에 밥까지 RM 6 을 줬다. 거의 대부분 반찬이 매워서 입맛에 딱이었다. 밥을 딸딸 긁어서 먹고 들고간 생수를 마시고 슈퍼마켓으로 들어갔다. 국내 슈퍼와 별 다른 점은 없었다. 단지 과일의 모양이 다르고, 조금 서양에 대한 음식재료가 많다는 정도. 맥주한병과 과일세종류가 든 팩을 하나 사고, 그리고 우유한팩을 사서 달랑거리면서 호텔로 들어왔다. 그 시간이 9시 조금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