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세계의 기아와 분쟁 몰아내기 원문보기 글쓴이: 유니온
1. 세계 난민이 오늘날에 이르기 까지..
20세기에 들어와 난민이 발생한 사례
ü 러시아혁명 기간- 약 150만의 난민이 러시아를 떠났고, 1934년 독일에 나치정권이 수립되자 반체제 인사들과 유대인을 비롯한 나치의 피해자 약 250만의 난민이 독일을 등지고 각지로 흩어짐
ü 제2차 세계대전 후- 1947년 인도의 분열과 팔레스타인 분열, 1948년의 팔레스타인 전쟁,1975년의 캄보디아와 라오스 및 베트남 등지에서 "보트 피플"로 유출된 인도차이나 난민 등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음
ü 1998년부터 시작된 코소보에 대한 세르비아군의 인종청소 때에는 78만에 달하는 주민이 학살을 피해 국외로 탈출함
이러한 난민에 대해 국제사회에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구출과 원조에 나서고 있다. 러시아혁명으로 인해 난민이 발생하자 국제연맹은 노르웨이의 탐험가 난센을 난민구제판무관으로 임명하여 외국에서 거주할 수 있는 신분증명서(난센여권)를 발급하였고, 1939년에는 국제 연맹에 독일난민고등판무관 사무소를 두어 난민보호에 나섰다.
또 1946년 유엔은 산하에 국제난민기구를 설치하여 제2차 세계대전 때 피해를 당한 난민, 정치적 추방자의 보호와 구제를 행하여 난민을 자유의사에 따라 원하는 나라에 정주시키는 임무를 담당하였다. 그리고 그 역할이 끝나자 1951년에 유엔 난민고등판무관사무소를 설치하여 난민보호를 위한 유엔의 보조기관으로 삼아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2. 세계난민의 실태: 지구촌 난민 2110만명
--[6월 20일 세계 난민의 날]
전쟁 내전 독재 기아
도저히 살기 힘든 고향과 조국을 떠나 헐벗고 굶주린 채 지구촌 곳곳을 방황하는 난민 숫자가 무려 2100만명이 넘는다. 20일은 유엔난민협약 체결(1951년) 반세기를 기념하기 위해 제정된 제1회 세계 난민의 날. 피난민에 대한 국제적인 보호와 재정착을 담당하는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은 이날 스위스 제네바에서 “난민 지원체제가 위기 상황에 놓여 있다”며 “각국 정부는 망명 원칙을 새롭게 다짐하고 난민 지원 자금을 더 많이 내달라”고 촉구했다.
세계 난민실태
UNHCR에 따르면 2001년 현재 세계 난민 수는 2110여만 명. 가장 규모가 큰 난민은 팔레스타인인들로 중동과 북아프리카에 320만명이 흩어져 살고 있다. 오랫동안 내전에 시달려온 아프가니스탄은 인구의 10%인 265만명이 국경을 넘어 파키스탄과 유럽 각국으로 이주했다.
1950년대까지 1500여만명에 그쳤던 난민 수는 동유럽과 아프리카의 내전으로 2700만명(1995년)까지 늘어났다가 한때 감소했으나 99년부터 다시 증가 추세다. 세계 난민의 65%인 1370만명이 아프리카와 아시아 대륙을 떠돌고 있으며 매년 30여만명이 유럽을 찾는다. 파키스탄은 수용능력 한계를 이유로 지난해 겨울 이후 유입된 아프가니스탄 난민 중 대부분인 3만여명을 추방할 계획이며 난민촌 일부에 대한 폐쇄작업을 20일 시작했다. 올 들어 내전이 격화된 마케도니아는 2월부터 4만명의 난민이 발생, ‘난민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난민 수는 늘어나지만 UNHCR의 올 예산은 8억1000만달러로 지난해보다 1억달러가 줄었다. UNHCR는 “1990년대 중반 이후 자금난에 직면, 아프리카와 중앙아시아, 중남미 지역의 활동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고 안타까워 했다.
난민의 날 행사
유엔은 20일 미국 뉴욕 자유의 여신상 앞에서 기념식을 갖고 엘리스 섬에서 난민사진 전시회를 개최했다. 이곳은 1892∼1954년까지 ‘기회의 땅’을 찾아온 1200만명의 이민자들이 수속을 밟은 곳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담긴 곳. UNHCR 본부가 있는 제네바에선 난민과 비정부기구(NGO), 학자, 정치인 등이 참가한 가운데 기념식과 각종 행사가 열렸다. 이탈리아 출신의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는 아프간 난민 보호에 기여한 공로로 ‘인도주의상’을 수상했으며 루드 러버스 UNHCR 고등판무관은 ‘난민 여성 50명과의 대화’를 직접 개최했다.
세계 난민의 한 단면: 방글라데시 치타콩(CHT)의 난민들
방글라데시는 아시아의 개발도상국이고 그곳에 13,190.87평방미터 크기의 Chittagong Hill Tracts (CHT) 이라는 고원지역이 있다. 그곳에는 백만이상의 원주민 부족들이 아득히 먼 옛날부터 오랫동안 거주하면서 화전농작으로 생활해왔다. 나는 진심으로 아시아 난민들의 현황과 NGO들의 역할에 대한 훌륭한 워크샵을 마련한 주최즉에 감사하며 방글라데쉬 난민들의 현황을 규명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참으로 이러한 워크샵은 시기적절하다.
난민문제의 원인
1947년 인도-파키스탄이 두 개의 자치국으로 분할되었을 때는 Chittagong Hill Tracts (CHT- 치타콩)에는 겨우 2%에 달하는 평지주민(방갈리)족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 부족 공동체의 사려깊은 지도자들은 인도와 파키스탄의 경우처럼 2개국 체제에 근거해서 인도에 합병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부족지도자의 이런 소망은 소수민족이며 정치적 힘이 없는 까닭에 현실화되지 못했고 파키스탄정부는 부족민을 인도의 지지자로 취급하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파키스탄정부는 부족민들을 차별해왔고, 치타콩으로부터 부족민들을 몰아내기 시작하였으며 야만적 행동의 첫 단계로 Rangamati 지역의 Kaptai에 있는 Karnafully 강에 수력발전소를 건설해 왔다. 맹렬한 저항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54,000에이커 이상의 논이 침수되고 100,000명이 땅과 집을 잃고 그들의 50%가 인도의 Tripura, Assam, Meghaloy, Mizoram, Arunachal Pradesh로 쫓겨갔으며 이들은 아직도 인도국적을 얻지 못하고 있다. . 이러한 비극적 운명에 처한 난민들은 인도의 하층민이 되어 언제 방글라데시로 추방될지도 모르는 비인간적인 생활을 해오고 있다. 국경을 넘지 못하고 남은 50%의 사람들은 표면적으로는 치타콩의 다른 지역에서 살고 있으나 이런 식으로 드러나지 않은 슬픔이 CHT 원주민들의 가슴 속에 쌓이기 시작하였다.
바로 이때 동파키스탄의 사람들은 독립하여 1971년 방글라데시라는 이름의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였다. 그러자 불행한 이들 부족민들은 새롭게 태어난 이 나라에서 적어도 어느정도는 오랫동안 쌓인 원한이 풀리기를 바랬다. 그러나 이들 부족민들의 운명은 과거와 같았다. 오히려 방글라데시의 위대한 지도자인 故 Bangabandhu Sheikh Mujibur Rahman 이 CHT의 확실한 지도자이자 1972년 구 방글라데시의 의회 의원인 Mr. Manabendra Narayan Larma에게 CHT 부족민들의 분열된 종족의 정체성을 보존하기 위한 방글라데시 헌법의 법조항을 마련하는 대가로 뱅갈인이 될 것을 요구했을 때 상황은 더 악화 되었다.
이러한 민감한 문제로 마음에 상처를 받은 Larma는 궁극적인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은신처로 가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무장투쟁을 시작하였다. 이러는 동안 CHT에서의 뱅갈인들의 침략은 방글라데시 정부의 직접, 간접적 지원으로 시작되었고 그곳에 세운 기관들은 前 대통령인 Ziaur Rahman의 임기동안 오직 부족 공동체의 인구를 줄이기 위한 목적으로 비참한 무대로 변하였다. 방갈 이주민들과 함께 방글라데시 육군에 의해서 폭동을 진압하기 위한 조직적인 일이 수행돼 왔다. 부족민들의 슬픔은 끝나지 않았다. 사회적 정치적 분위기가 악화되고 Shanti Bahini 의 대원이라고 싸잡아 원주민들에 대한 육체적 고문이 급속도로 증가했기 때문에 1984년까지 10만의 뱅갈인 가구가 CHT의 다른 지역에 정착했다. 이러한 국지전은 지방 정부의 지원으로 침투한 뱅갈인들에 의해서 일어났고 군대는 국지전과 함께 계속해서 몇 달동안 부족민들이 살고 있는 집에 방화를 저질러 왔다. 이러한 무차별의 고문과 끔찍한 살인이 방글라데시 군대와 뱅갈인들에 의해서 동시에 전개되는 동안 특히 지방에 있는 7만이상의 사람들은 방글라데시 국경을 건너야 했고 인도의 Tripura 에 있는 다른 난민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국경을 건너지 못한 사람들은 그들의 동산, 부동산을 남기고서 HT의 안전한 곳에 흩어졌다. 이주민들(뱅갈인)은 이들 동산들을 약탈하였고 땅을 팔아먹었다.
난민들의 현황
방글라데시 정부가 20개 항목의 제공한 공약에 의하여 12,222 가구의 64,609명에 달하는 난민들이 지난 98년 2월 27일 인도의 난민수용소를 떠나 감격스럽게도 본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실제로 이들 공약들의 대부분은 이행되지 않았다.
아래는 아직도 이행되지 않은 중요한 문제들이다.
1) 72가구는 이미 뱅갈인의 소유가 된 택지를 돌려받지 못해서 아직도 Dighinala와 Matiranga 의 캠프에서 머무르고 있다.
2) 942가구의 논은 아직도 뱅갈인들이 비워주지 않고 있다.
3) 1,331가구의 택지는 아직도 뱅갈인의 소유로 되어 있다.
4) 774가구의 밭을 뱅갈인이 점유하고 있다.
5) 전체 40개 마을이 아직도 고아원과 뱅갈인의 소유로 있다.
6) 9개의 불교 사찰과 화장터, 고아원이 침탈되었고 아직 비워지지 않았다.
7) 난민들이 없는 동안 이동되었던 국민학교 전부가 아직 이전의 장소로 복구되지 않고 있다.
정부에 의해서 결성된 대책위원회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의 통계에 의하면 CHT의 3개의 구역에 있는 내부 난민중 82,020가구들은 아직도 재정착하지 못하고 있다. 정부의 후원하에 대책위원회가 있어서 내부 난민들의 재정착을 위한 일들을 수행하도록 되어있지만 회의하는 것외에는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6개월 후에 대책위원회는 많은 난민들에게 오직 세금을 부과할 뿐이었다. 그래서 내부 난민들의 재정착을 위한 그들의 행동은 바람직하거나 희망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멋대로 지연 전술을 사용하여 시간을 허비하는 것뿐이다. 본국으로 송환된 94,240가구들과 CHT에 있는 471,200명의 부족 공동체 사람들은 불확실한 생활을 하면서 표류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결과적으로 CHT 원주민들의 전체적인 사회-경제적 상황은 심각한 곤경에 직면해 있다. 현재 이들 난민들은 이주민들의 소유가 된 경작지를 갖지 못하고 돌려받은 땅도 또한 몇 년 동안 경작을 하지 않아서 정글이 되어 개간되지 않았기 때문에 실직상태이며 돈을 벌 수도 없다. 바로 이때 정부의 식량배급이 전면 중단되었다. 원주민들은 고산지대에는 산업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공장일을 할 수 있는 기술도 없다.
난민들의 인권 유린
원주민들은 실직으로 지내왔기 때문에 오랫동안 굶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된다면 틀림없이 CHT에 있는 원주민들은 위협에 처하고 엄청난 인권유린 상태에서 심각한 이례적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이 지역에서 테러가 크게 증가하고 그러한 행동들이 상승하는 분위기가 되면 그 결과 군사통치가 이루어 질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살인, 강간, 약탈은 일상적이고 경찰들은 부족민들에 대한 성희롱을 절차상으로 지연하면서 공평하지 않게 처리하고 있다. 그래서 이곳 CHT에는 항상 난민들의 인권유린이 생겨난다.
가능한 NGO의 역할
정치적 상황이 이곳에 유리한 쪽으로 조성되어서 1997년 방글라데시 정부와 Parbattya Chattagram Jana Sanghati Samity (PCJSS) 사이에 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 나는 지금이 NGO가 아래에 열거된 각기 다른 부분의 일을 수행함으로써 난민들의 거의 전멸된 사회-경제적 구조를 복구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평화 협정이 아직도 이행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NGO는 정치적 상황이 현재보다 나아지도록 평화 협정이 가능한 빨리 이행될 수 있게 압력을 가할 수도 있다.
1) 사회 사업
① 난민들을 위한 저비용 건축 프로젝트
② Food for Work (음식을 위한 노동) 를 통한 마을 도로의 건설
2) 농업과 원예
① 시장- 임업 사업
② 시장- 어업 사업
③ 관개사업
④ 종묘를 심는 사회적 식수(육림)
3) 진료와 의료 봉사
① 무료 의료 봉사 센터의 설립
4) 공공복지
① 난민촌의 깊은 상하수도관 시공
② 수세식 변소의 설치
5) 지역산물을 이용하는 산업
① 과일 가공 공장 건설
② 삼림 가공 공장 건설
③ 통조림 공장 건설
④ 직물 공장 건설
6) 교육
① 초등교육의 실시
② 기초단계에 해당하는 상설 학교의 설립
만약 위의 프로젝트가 적절한 단계로 이행된다면 난민들과 CHT에 있는 다른 거주자들의 삶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확신한다. 짧은 연설을 통해서 나는 아시아의 NGO 대표님들을 정중히 초대하는 바이며 CHT 방글라데시의 인간적 생활을 위한 전 세계인들의 도움의 손길과 가능한 모든 협조는 이후 CHT 지역의 NGO에 의해서 주어질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Parbattya Bouddha Mission (PBM)은 난민들의 아이들에게 은신처를 위한 고아원과 교육을 위한 상설 학교를 건설하였다. 여기에다 PBM은 직업훈련센터, 컴퓨터 교육, 선반의 조작, 구멍뚫기와 용접기계, 양재와 자수들을 난민들과 빈곤한 사람들의 사회-경제적 조건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실행하고 있고 방글라데시에 있는 Australian High Commission (AHC)의 재정적 도움으로 1,000마리의 암염소를 500가구에 나눠주었다. 나는 PBM은 대중에게 이익이 되는 어떠한 프로젝트도 수행할 능력이 있다고 강력히 주장할 수 있다. 모든 생명의 행복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