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가에 기대어 자고있다 깨어보니 새벽 2시 30분, 밖으로는 동해의 모래사장과 검게 밀려오는 파도가 보이고 불을 훤히 밝혀놓은 여관과 식당들의 모습이 웬지 낯설게 느껴진다.
반포 고속버스터미날에서 어제 밤11시에 출발하는 심야고속버스를 탔으니 이제 어언 속초에 다 왔을것이다.
버스 앞창으로는 가느다란 빗줄기가 부딪히고 있고 버스는 이미 축축히 젖어있는 빈 해안도로를 여유롭게 올라간다.
일기예보를 듣고 이미 비가 오리란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한밤중에 비오는 설악을 홀로 오르려는 마음은 결코 가볍지는 않다.
3시에 도착한 속초터미날에서 택시를 타고 미시령으로 오르니 휴게소에는 여러 여행객들이 앉아있다가 배낭을 메고 새벽에 나타난 외톨이 등산객을 신기한듯 흘깃거리며 쳐다본다.(택시비 16,700원)
비는 멈췄지만 바람이 불고 차가운 공기가 살갗에 닿으니 여름답지 않게 몸이 떨려오고 추워진다.
산행을 준비하고 입산통제소를 지나 철망문을 열고 숲속으로 들어가면 안개는 자욱하고 설악의 검은 실루엩이 공포감을 주며 온몸을 덮쳐온다.(03:32)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젖어있는 수풀지대를 작은 후래쉬 불빛으로 확인하며 올라가니 옷은 금새 젖어버리고 신발속으로 물이 마구 들어온다.
울창한 수풀을 벗어나 나무들이 빽빽한 등산로를 따라가면 서너번 갈림길이 나타나고 그전처럼 표지기들이 많지 않아 후래쉬를 비쳐가며 몇번씩 확인을 하고 방향을 잡는다.
한동안 어두운 산길을 빠져나가면 크고 작은 돌들이 나타나고 드디어 광대한 너덜지대가 앞을 막아선다.
돌들사이의 간격이 꽤 넓고 비에 젖어 미끄러운 곳들이 많이 나타나 신경을 바짝 세우고 조심해서 통과한다.
첫번째 너덜을 올라 뒤돌아 보면 검은 운해가 사방을 뒤덮고 있고 속초시의 불빛들이 반짝거리며 울산바위가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다.
다시 두번째 너덜지대를 올라가다 보면 날은 점차 맑아지고 일출이 시작되어 구름사이로 밝은 햇살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멀리 위쪽으로 나무에 붙어있는 표지기를 보며 대강의 방향을 잡고 곳곳에 만들어 놓은 돌무더기사이로 큰돌들을 잡아가며 한동안 오르면 1318.8봉이다.(05:53)
자연보호표시석이 있는 봉우리에 서면 운해사이로 보이는 풍경이 아름답고 북쪽으로 신선봉을 거쳐 진부령으로 향하는 대간길이 확연하며 남으로는 설악의 크고 작은 연봉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대청봉과 중청의 시설물이 희미하게 보인다.
잠시 쉬고 남서로 방향을 틀어 울창한 수림으로 들어서면 완만한 경사의 능선이 이어진다.
작은 너덜을 지나고 구상나무와 소나무들이 빽빽한 산길을 한동안 오르면 황철봉정상(1381m)에 닿는다.(06:27)
정상에서는 마등령과 공룡능선이 잘보이고 대청에서 귀떼기청봉을 거쳐 안산으로 이어지는 긴 서북릉의 전모가 또렸하게 나타나 욕심 많은 산객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정상의 암봉에 앉아 빵과 우유로 아침식사를 하고 바로 이어지는 너덜로 내려간다.
유난히 뾰족뾰족하게 튀어나온 너덜사이를 미끄러지지 않게 천천히 조심해서 내려오면 긴장하여 진땀이 흐른다.
너덜을 힘겹게 통과하고 내리막 숲길을 한동안 내려오면 넓은 안부인 저항령이 나온다.(07:16)
저항령에는 온갖 초본류가 울창하고 여기저기에 야생화가 지천으로 피여있으며 이곳을 지나면 다시 큰 너덜지대가 나타난다.
바로 정면으로 보이는 봉우리를 쳐다보며 직진으로 오르다 뒤돌아 보면 황철봉과 주위의 암봉들이 우람한 모습으로 서있고 사방으로 산재해 있는 큰 너덜들은 햇빛에 반짝거리며 그 위용을 자랑한다.
계속해서 나타나는 너덜지대를 통과하고 암봉을 오르면 1249.5봉이다.(07:39)
정상에는 분홍색과 흰색의 여러 야생화들이 활짝 피어 바람에 흔들리고 있고 계속 이어지는 기묘한 형태의 큰 암봉들은 주위를 압도하며 당당히 서있다.
암봉을 우회하는 내리막 길로 들어서서 작은 너덜을 다시 통과하고 암봉밑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가면 잔돌들이 많이 깔려있어 발바닥을 괴롭힌다.
간간이 나타나는 야영터들을 지나고 작은 봉우리들을 몇개 넘으면 작은 돌멩이들로 이루어진 짧은 너덜들이 나타난다.
작은 너덜사이로 잘 형성되어있는 길을 따라 올라가면 1326.7봉이다.(09:12)
동쪽으로 나있는 뚜렸한 길로 빠지지않게 조심하고 마등봉이 있는 남쪽으로 방향을 잡아 얼마간 내려오면 비선대 갈림길이 있는 마등령이다.(09:35)
식수를 구할수 있는 이곳에는 몇명의 등산객들이 야영을 하고 있고 나무등걸에 앉아 이야기하며 쉬다보니 하늘에는 검은 먹구름이 마구 몰려오고 있다.
곧 비가 닥칠것 같아 바로 일어나 공룡능선으로 들어선다.
작은 봉우리들을 넘으니 나한봉의 우람한 자태가 앞에 나타나고 등산로는 암봉을 우회하면서 이어진다.
계속해서 오르락 내리락 하는 길을 따라가면 먹구름이 사방을 뒤덮어 용아장성과 천화대의 멋진 모습을 볼수도 없고 조망이 없어 답답한 산행이 된다.
물이 줄줄 흐르는 급경사 절벽지대를 조심해서 내려오니 바로 1275봉이다.(10:57)
멋있는 봉우리를 감상하며 앉아 있으니 하늘이 새카매 지더니 드디어 빗방울이 떨어지지 시작한다.
부랴부랴 발걸음을 옮기며 서둘러서 가다보니 반대쪽에서 오던 사람들이 반갑다고 인사를 하는데 인솔자가 일전에 S산악회에서 같이 산행을 했던 사람이다.
산에 다니는 사람들은 언젠가 산에서 다시 만나기 마련이지만 막상 만나니 정말 반가운 마음이 든다.
오늘 오색으로 올라 설악동으로 내려간다는 분들께 안전산행하기를 빌며 다시 길을 재촉하니 빗방울은 더욱 거세어진다.
계속되는 급경사 오르막을 오랫동안 올라와 평탄한 길로 들어서니 이제 공룡능선이 거의 끝나가는 듯하다.
마주치는 갈림길에서 망설이다 표지기가 붙어있는 내리막 길로 한참 내려간다.
비는 더욱 거세지고 발밑으로는 순식간에 물이 모여지더니 뚜렸한 개울이 되어 소리를 내며 내려간다.
아차! 지금 가야동계곡으로 내려가고 있구나 생각하고 다시 올라가는데 비는 폭우로 변해 앞을 가늠할수도 없고 내려왔던 길도 찿을수 없다.
무조건 주능선으로 생각되는 높은곳을 향해 일직선으로 치고 올라간다.
나뭇가지들을 헤치고 미끄러운 산사면을 한참 올라가니 뚜렸한 등산로가 나온다.
신선대를 올라서 계속 내려오면 무너미고개에 닿고 희운각산장에 도착한다.(13:10)
비를 피해 여기 저기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 틈에 끼어 라면을 끓여 점심을 먹으니 옆에 있는 분들이 코펠의 밥을 권해 사양하지 않고 국물에 말아 든든히 먹어둔다.
원래는 이곳에서 몸을 대강 딱고 새옷으로 갈아 입은 다음 식수를 보충해 물이 없는 중청대피소로 올라갈 계획이었으나 비가 줄기차게 내려 포기하고 양치질만 하고 식수만 보충한다.
비를 맞으며 산장뒤의 주능선으로 들어서면(13:55) 계속해서 암릉들이 나타나고 지형이 좀 험준해진다.
여기저기 바위들을 잡고 올라가면 노송들이 멋있게 서있고 고사목들이 자주 나타나며 자작나무들과 주목들이 많이 보인다.
비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으나 소청쪽으로 오르는 등산객들이 지르는 고함과 환호소리가 바로 옆인양 크게 들린다.
구름이 약간 걷히며 급경사 길이 시작되고 고사목들이 더욱 눈에 띄며 바람이 세차게 불어댄다.
땀을 뻘뻘 흘리며 계속되는 오르막을 오르면 철조망이 나타나고 철난간을 넘어 대청봉 정상(1708m)에 올라선다.(15:26)
정상에 서서 땀을 말리고 바로 중청대피소로 내려오니(15:39) 많은 사람들이 비를 피해 모여있다.
자리를 배정받아 젖은 옷을 갈아입고 나오니 비는 그치고 의자에 앉아 바라보는 설악의 경치는 그야말로 일품이다.
멀리에 황철봉과 이어지는 암봉들이 보이고 운해위로 나한봉과 1275봉 그리고 범봉과 신선대가 다도해의 섬들처럼 불쑥 북쑥 솟아나 있으며 속초시의 야경뒤로 오징어잡이 어선들의 불빛이 반짝거린다.
컵라면 한개와 소주 팩 하나로 저녁을 때우고 내일의 산행을 위하여 일찍 잠자리에 든다.
* 후기
불편한 잠자리에서 뒤척이다 눈을 뜨니 새벽 2시39분, 2시로 시계를 맞추어 놓았는데 웬일인지 알람이 울리지 않았다.
부리나케 일어나 배낭을 정리하고 대피소를 나오니 대피소 직원이 남교리로 하산하는 것은 너무 멀다며 만류를 한다.
여의치 않으면 장수대로 하산하겠다고 대답하니 조심해서 가라며 걱정을 해준다.(03:00)
컴컴한 산길을 한참 내려오다 보니 장수대에서 중청으로 오다가 조난당한 학생들을 구조해서 오는 대피소 직원들과 만난다.
탈진한 대학생들의 축 처진 어깨와 불안해 하는 눈망울이 무척이나 안스러워 보인다.
홀로 내려오는 길은 안개가 잔뜩 끼어서 시야가 희미하지만 자주 오던 길이라 비교적 쉽게 찿을수 있다.
얼마 가지도 않아 풀숲에 맻힌 이슬들로 옷은 순식간에 젖고 그나마 밤사이에 약간 말려놓은 등산화도 금새 물이 철벅거린다.
끝청의 암봉에 서면 시커먼 어둠속의 설악은 깊은 정적속에 묻혀있고 살아 움직이는것은 나 하나뿐인듯 적막함과 고요함이 가득하다.
조금씩 밝아오는 여명으로 반짝거리는 귀떼기청봉을 바라보며 완만한 등산로를 오랫동안 내려오면 한계령 갈림길이 나오고 (05:32) 귀청위로 붉은 기운이 솟아 오르더니 곧 날이 완전히 밝아버렸다.
갈림길의 쓰러진 고목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기운을 내어 귀청으로 향하면 지난날에 이곳을 돌아 다녔던 기억들이 불시에 솟아나 추억을 되살린다.
넓은 너덜지대를 조심해서 통과하고 새들이 지저귀는 능선을 따라 한동안 오르면 귀떼기청봉 정상 (1580m)이다.(06:37)
텐트들이 쳐져 있는 정상에서는 오늘 가야할 안산이 까마득하게 보이며 공룡능선과 용아장성의 암봉들이 군무를 벌이듯 도열해 있고 맞은편에는 점봉산과 가리봉, 주걱봉등 높은 봉우리들이 그 위용을 서로 뽐내며 우뚝 서있다.
바윗돌 사이의 길을 따라 재량골 입구의 안부로 내려와(07:00) 라면을 끓이고 햇반을 데워 아침식사를 한다.
빵을 먹는 것보다 시간이 더 걸리고 귀챦지만 비로서 식사를 한듯 속이 든든하고 제법 기운이 생긴다.
충분히 쉬고 숲사이의 길을 약간 오르면 1456봉에 닿고(07:48) 큰귀떼기골을 형성하는 능선들과 큰감투봉의 모습이 가깝게 보인다.
이어지는 능선을 계속해서 올라 높은 암릉위에 서면 가리봉과 둥그런 모양의 주걱봉이 앞으로 더욱 바짝 다가서 있고 한계령으로 오르는 차량들이 장난감처럼 작게 보인다.
길게 로프가 매어져 있는 험준한 암봉을 올라 봉우리를 넘어서면 1408봉이고 (08:55) 이곳을 지나면 완만하게 오르락 내리락 하는 길이 오랫동안 이어진다.
날은 맑고 햇빛은 따갑게 내리쬐며 바람도 전혀 불지않아 땀이 많이 나고 기운이 빠지기 시작한다.
평탄한 길을 오랫동안 걸어오면 1289봉이 나오고(10:16) 로프를 잡고 몇군데 험한곳을 내려오면 대승령에 도착한다.(10:33)
잠시 쉬고 앞으로 보이는 능선을 향하여 오르막 길을 올라간다.
뜨거운 날씨에 숨은 차고 진땀이 흘러도 목표가 점차 다가 온다는 생각에 기운을 내어 발걸음에 힘을 주어 오르면 곧 안산갈림길에 닿는다.(11:15)
왼쪽으로 꺽어져 안산쪽으로 향하면 온갖 초본류들이 왕성하게 자라나 있고 나무들이 빽빽해서 지금까지 왔던 길하고는 뚜렸하게 차이가 나며 자연미가 더욱 느껴진다.
암릉이 솟아있는 1396봉에 오르면(11:30) 수많은 형형색색의 야생화들이 무더기로 피여서 천상의 화원인양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며 옥녀탕에서 한계고성을 거쳐 이곳까지 오르는 능선에는 기묘한 봉우리들이 멋있게 솟아있다.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안산의 배후로 돌아서 험준한 오르막과 암봉을 힘겹게 오르면 안산정상(1430.4m)이다.(12:08)
좁은 정상에 서면 깍아지른 절벽들이 도열해 있어 시원하고 짜릿한 느낌이 날 정도로 상당한 고도감이 느껴지며 실제로도 추락할수 있어 매우 위험하다.
정상에서 올라왔던 길로 내려와 안부의 갈림길에서 희미한 오른쪽 길로 들어서면 처음에는 길이 아닌듯해도 점차 뚜렸해진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아 한적하고 울창한 숲길을 한동안 내려오면 점차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곧 십이선녀탕 상류로 내려선다.(13:02)
가느다란 물줄기를 따라서 내려오면 길은 온통 크고 작은 돌멩이 투성이다.
이틀간의 우중산행으로 발바닥은 물에 뿔은 오징어 다리처럼 부풀어 오르고 물집이 생겨 돌에 닿기만 해도 아프다.
쉬엄쉬엄 천천히 돌길을 따라 내려오면 물길은 점차로 커지고 크고 작은 폭포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두문폭포를 지나고 봉숭탕부터는 길은 더욱 오르락 내리락 험해지며 철난간이 쳐져 있고 중간중간에 미끄러운 곳들이 많아 통과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길을 내려가면 경치는 빼어나지만 지친 몸에는 모든것이 귀챦을뿐이다.
수많은 철난간과 철다리를 통과해 오랫동안 걸어 내려오면 조난자추모비가 나오고 그제서야 물길이 넓어지며 잔잔해진다.
평탄해진 길을 따라 한참 내려오면 드디어 남교리 매표소에 도착한다.(16:14)
택시로 용대리에 올라가 버스표를 끊고 슈퍼로 들어가 차가운 생맥주 두잔을 연거퍼 마시니 온몸의 땀이 마르고 이틀간의 산행의 피로가 일시에 사라지는듯 하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길가의 의자에 앉아 있으니 한줄기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며 노곤해지고 졸음기가 몰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