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레빗 제4858호) ‘가야고분군’서 빠진 고녕가야 고분군
고녕가야가 있었던 상주 함창에는 고로왕릉, 고로왕릉비와 오봉산 고분군 성혈석이 있으며, 상주 병풍산 고분군에는 고분이 1,700여 기가 있다. 낙동강 상류지역에 있던 고녕가야는 가히 가야를 대표하는 정도 이상이다. 고분의 형태나 유물 등등에서 가야의 고분 형식을 그대로 갖추고 있다.
그러나 임나일본부설이나 정한론자들에 의해서 고녕가야는 왜곡되고, 축소되었음은 물론, 가야권에서도 부정하고 있다. 심지어 이번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에 오른 가야고분군 목록에도 빠져있다.
▲고령가야 고분 가운데 일부는 아직 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고령가야 고분 대부분은 도굴에 의해 처참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렇게 엄청난 고령가야를 그들은 왜 부정하고 외면하는가? 그 까닭은 고령가야를 인정하는 순간 그들이 현재까지 금과옥조로 삼아온 ‘임나일본부’설이 깡그리 무너지기 때문이 아닐까? 이를 확인하기 위해 남원의 시민단체는 지난 9월 16일 답사에 나섰다.
답사단의 이름은 <가야사에서 삭제된 우가야(고녕가야) 고분군 답사>다. 부제로 단 것은 “한국 가야사의 실태를 눈으로 확인한다!”이다. 이날 답사 안내는 ‘고녕가야선양회’ 이사장이며, 봉천사 주지인 지정스님의 안내와 설명으로 진행되었다. 비가 계속 내린 관계로 답사에 어려움이 있는 봉덕산 일대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봉천사의 개미취축제를 돌아봤다.
산사 주변으로 펼쳐진 개미취의 연보라색 꽃이 따스하게 반기고 있으며, 그 풍경은 또한 새로운 세계에 진입한듯하다.
▲개미취의 연보라색 꽃이 반겨주고 있다.
▲<가야사에서 삭제된 우가야(고녕가야) 고분군 답사>에 참여한 사람들
개미취의 정취를 뒤로 하고 본격적으로 고녕가야 고분답사를 한다. 경북 상주시 함창읍 증촌리는 ‘함창김씨’가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으며, 이들은 고녕가야 태조의 후손임을 내세우고 있다. 그들은 조선 선조 25년(1592년) 릉 밑 층계 앞에 파묻혀 있는 묘비를 발견, 이 고분이 고녕가야 왕릉임을 확인했고 숙종 38년(1712년) 왕명에 따라 묘비와 석물을 설치했다고 한다.
오봉산 고분군 입구에는 경상북도기념물 제126호 <함창 오봉산 고분군>이라는 안내판이 서있다. 안내판에는 규모나 조영 면적으로 볼 때 병풍산 고분군에 견줄 수 있을 만한 대규모 고분군이라고 설명한다.
▲고녕가야 태조릉
▲고녕가야 태조와 왕비 영정
▲규모나 조영 면적으로 볼 때 병풍산 고분군에 견줄 수 있을 만한 대규모 고분군
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경상북도기념물 제126호 <함창 오봉산 고분군> 안내판
《삼국유사》 권1 기이 1편 ‘5가야조’에는 “서기 42년 수로왕의 셋째동생 고로왕(古露王 재위 115년)이 나라를 세운 뒤 2대 마종왕 (摩宗王 재위 65년)을 거쳐 3대 이현왕(利賢王 재위 35년)까지 215년간 이어졌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6가야국사실록에는 ”고령가야의 마지막 왕 이현왕은 신라 12대 첨해왕(沾解王)이 군사를 이끌고 공격해오자 다른 가야국들과 연합해 대치하다 힘에 부쳐 김해로 도읍지를 옮겼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삼국유사》, 《삼국사기》, 《고려사》 등 사서에는 함창 고녕가야 기록이 명시되어 있을뿐더러 대규모 고분군이 남아 있음에도 현재 가야사에서 빠져있음은 물론 정부가 방치한 틈을 타서 대규모 도굴이 이루어져 1,700여 기나 된다는 고분들 가운데 현재 온전한 고분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훼손되어 있다.
그런 가운데 지난 17일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열리고 있는 제45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오른 가야 고분군에는 고녕고분군은 빠져있다. 사실 이날 함창 오봉산 고분군 답사는 참여한 사람들의 큰 실망 속에 이루어져야 했다. 그저 도굴된 흔적만 곳곳에 나돌 뿐 1,700여 기에 달한다는 고분군의 위용은 그 어디에도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서 답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한숨 소리만 들릴 뿐이다. 지정스님은 말한다. ”온통 파헤쳐지고, 널브러져 있는 게 가야 고분입니다. 또한 산에 볼록볼록 서 있는 것은 모두 가야 고분입니다. 특히 가야고분은 좁고 길이가 길어서 그 모양으로도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눈으로도 또는 기록으로도 확인되는데도, 가야가 아니고, 신라것으로 치부하거나 아니면 잘못된 설명이라고 강단사학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일본서기의 내용과 임나일본부설과 맞추기 위해서 하는 조작되고 왜곡된 일제의 악랄한 역사조작입니다. 이를 식민사학자들이 그대로 강조하고 있음이죠. 임나일본부설은 한반도 남쪽의 일부가 일본땅이라고 하는데, 그걸 입증하고자 하는 허위조작입니다.“
▲지정스님이 답사단에게 도굴된 고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6가야 위치와 건국자'(이매림 제공)
‘대한사랑’ 사무총장 씨에 따르면 ‘가야=임나’ 논리 구성자인 정한론의 일본학자(대표 : 나카미치오) 등이 가야영역을 축소하고 낙동강 상류의 고녕가야를 부정함에 따라 광복 뒤 조선사편수회 출신 이병도에 의해 그대로 따른 까닭으로 상주, 함창, 예천, 안동의 가야고분군은 우리 가야사에서 지워졌고, 도굴범들의 실습지로 활용되어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한다.
사실 이병도의 ‘한국고대사연구’ 제3장 가라제국의 연맹체란 글을 보면 “여기에 부언(附言)할 것은 《삼국유사》 오가야(五伽倻) 중의 고녕가야(古寧伽耶) 주(註)에 이를 함녕(함창)이라고 했으나, 그리고 보면 다른 가야(伽耶)와의 거리에 비하여 너무 떨어져 있으므로 잘못된 비정(比定)인 듯하다.
나로서는 진주(晉州)의 고명(古名)인 거열(居烈)과 고녕(古寧)이 음근(音近, 소리가 비슷함) 할뿐더러, 지리적 중요성(雄州巨牧)에 비추어 보아 진주에 비정하고 싶다”라고 되어 있다. 그는 분명한 물리적인 증거인 대규모 고분군이 존재한다는 것을 애써 부인하면서 정한론의 일본학자들 궤변에 충실히 따르는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정부는 가야고분군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된 이제라도 제대로 된 고녕고분군 조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기록을 수정하도록 노력하고 고녕고분군 정비를 하루빨리 이루어내야만 할 것이다.
우리문화신문=하진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