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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0. 06. 09
▲고려 태조 왕건(高麗 太祖王建, 877년~943년)
■ 태조 왕건(太祖王建)
고려 제1대 태조왕(재위 918~943)의 성은 왕(王), 휘(諱)는 건(建), 자는 약천(若天), 시호는 신성(紳聖), 본관은 개성(開城)으로, 금성태수(金城太守) 융(隆)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위숙왕후(威肅王后) 한씨(韓氏), 895년(진성여왕 9) 아버지를 따라 궁예(弓裔)의 휘하에 들어가 898년(효공왕 2) 정기대감(精騎大監)이 되고 900년 광주(廣州). 충주(忠州)등을 공취하여 그 공으로 아찬(阿粲)의 벼슬을 받았다. 903년에는 궁예의 영토를 확장하여 알찬(閼粲)에 승진되고 계속하여 전라도. 경상도 지방에서 견훤(甄萱)의 군사를 진압 하였다.
913년 시중(侍中)이 되었고 918년 세력이 강대해짐에 따라 난폭한 행동을 자행하는 궁예가 민심을 잃자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등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어 즉위하고, 국호를 고려(高麗)라 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 정한 뒤 이듬해 수도를 송악(松嶽)으로 옮기고 융화정책. 북진정책. 숭불정책을 건국이념으로 삼아 정책을 펴나갔다.
마침내 후삼국(後三國)을 통일한 후 정계(政誡) 계백요서(誡百寮書)를 저술하여 정치의 귀감으로 삼도록 하는 훈요십조를 남겼다.
▲고려 제2대왕 혜종(惠宗, 912~945년).
■ 혜종(惠宗)
고려 제2대왕 혜종(惠宗 : 재위 943~945)의 휘(諱)는 무(武) 자는 승건(承乾), 시호는 의공(義恭)으로, 태조의 서장자(庶長子)로서 어머니는 장화왕후(莊和王后 :추존) 오씨(吳氏)인데 태조가 수군장군(水軍將軍)으로 나주에 출진(出鎭) 하였을 때에 맞아 들였다.
비(妃)는 대광(大匡) 임희(林曦)의 딸 의화왕후(義和王后)이다.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하였고 호창한 기질을 가져 태조를 따라 종군하여 후백제정벌에 많은 공을 세워 태자로 책봉되었다.
즉위한 다음해인 944년에 대광(大匡) 왕규(王規)가 그의 딸인 태조의 제16비(妃)의 몸에서 태어난 광주원군(廣州院君)을 후사(後嗣)로 세우려고 왕제인 요(堯 : 定宗)와 소(昭 : 光宗)를 무고하여 왕의 형제간을 이간하고 여러 차례 왕을 시해 하려 하였으나 혜종은 왕규의 야망을 알고 있었으므로 두 동생에게 더욱 은혜를 배 풀고 신변의 호위(護衛)를 튼튼히 하여 화(禍)를 면하였다.
정국(政局)이 소란한 가운데 혜종은 재위 2년 만에 붕거(崩去)하였는데, 능은 개성의 순릉(順陵)이다.
▲고려 제3대왕 정종(定宗), 923년(태조 6)∼949년(정종 4)
■ 정종(定宗)
고려 재3대왕 정종(定宗 : 재위 946~949)의 휘(諱)는 요(堯), 자는 의천(義天), 시호는 문명(文明)으로 태조의 둘째아들이다.
어머니는 유긍달(劉兢達)의 딸 신명왕후(紳明王后), 비(妃)는 문공왕후(文恭王后) 박씨(朴氏)와 문성왕후(文成王后) 박씨이다.
이복형(異服兄)인 혜종(惠宗)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즉위 초에 외측으로 세도를 부리던 왕규(王規)의 난을 평정하였고 불교를 매우 신봉하여 불교를 장려할 목적으로 946년(정종 1)에 양곡 7만석을 내어 여러 사원(寺院)에 불명경보(佛名經寶). 광학보(廣學寶)를 설치하였고 친히 불사리를 받들고 도보로 10리 밖의 개국사(開國寺)에 나아가 사리(舍利)를 안치하였다.
풍수설(風水說)을 믿어 947년 도읍을 서경(西京)으로 옮기고자 인부를 징발하여 성곽과 궁궐을 경영하고 개경(開京)의 민호(民戶)를 뽑아 서경으로 이동토록 하여 민원(民怨)이 크게 일어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거란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하여 광군(光軍)이라고 하는 군사 30만을 뽑아서 광군사(光軍司)를 설치하였다. 능은 개성의 안릉(安陵)이다.
▲고려 제4대왕 광종(光宗, 925~975년)
■ 광종(光宗)
고려 제4대왕 광종(光宗 :재위 949~975)의 휘(諱)는 소(昭), 자는 일화(日華), 시호는 대성(大成), 태조 왕건(王建)의 셋째아들 이고, 제3대왕 정종(定宗)의 친동생이며 비(妃)는 태조의 딸 대목황태후(大穆皇太后) 황보씨(皇甫氏)이다.
정종의 선위 (禪位)를 받아 즉위 한 후 많은 치적을 쌓았는데 먼저 권호강족(權豪强族)의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훈신(勳臣). 장상(將相). 심지어 골육지친(骨肉之親)에 이르기까지 무자비한 숙청을 단행하였으며 노비안검법(奴卑按檢法)을 만들어 노주(奴主). 노비 간의 분쟁을 재판하여 많은 노비를 풀어 주었다.
958년에는 중국에서 고려로 귀화한 쌍기(雙箕)의 건의를 받아들여 고려에서는 처음으로 과거제도를 실시하여 인재를 등용 하였다.
한편 불교를 독신(篤信)했으며 국방에 유의하여 동북계(東北界) 서북계(西北界)에 많은 성을 쌓았다.
서북계에는 주로 지금의 평안북도 지방에 축성(築城)하였고 동북계에는 주로 지금의 함경남도 지방에 축성 하였다.
만년(晩年)에는 참소에 귀 기울였으며 죄 없는 사람을 많이 죽였다. 왕의 능호(陵號)는 헌릉(憲陵)이다.
▲고려 제5대왕 경종(景宗, 981~995년)
■ 경종(景宗)
고려 제5대왕 경종(景宗 : 재위 976~986)의 이름은 유(由), 자는 장민(長民), 시호는 헌화(獻和)이다.
광종의 장남으로 모친은 대목왕후(大穆王后) 황보씨(皇甫氏)이고, 비(妃)는 대종(大宗) 욱(旭)의 딸 헌애왕후(獻哀王后)와 헌정왕후(獻貞王后) 두자매이다.
955년 태자에 책봉되고 즉위하자 전시과(田柴科)를 재정하여 실시하였다. 이는 태조이래로 문무관에게 인품의 선악과 공로의 대소에 따라 토지를 지급해오던 역분전(役分田)을 직관(職官)과 산관(散官)으로 나누어 그의 품계에 따라 지급한 것이다.
이밖에 개국공신. 투화(投化)와. 귀순(歸順)한 성주에게는 훈전(勳田)을 주었다 .
거란과 여진에 방어하기 위하여 청색진(淸塞鎭 : 平北熙州)에 성을 쌓았으며 송(宋)과도 통교(通交)하여 문물교류의 터전을 다졌다.
왕은 성품이 인자하고 온순 하였는데 그 말년에 이르러 정사를 싫어하여 태만해지고 날로 오락을 일삼아 주색에 빠져 소인(小人)과 사귀기 좋아 하였고 군자(君子)를 멀리 하였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정교(政敎)가 쇠퇴하였다. 능은 영릉(營陵)이다.
▲고려 제6대왕 성종(成宗, 960~997년)
■ 성종(成宗)
고려 제6대왕 성종(成宗 : 재위 981~997)의 이름은 치(治) 자(字)는 온고(溫古), 시호는 문의(文懿), 태조의 손자이다.
어머니는 선의태후(宣義太后) 류씨(柳氏)이고, 981년(경종 6) 경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는데 고려시대 역대의 왕 중 명군으로 일컬어지며 내치. 외교에 많은 치적을 남겼다.
성종은 거유(巨儒) 최승로(崔承老)의 자문을 받아 유교를 국가의 지도 원리로 삼고 중앙집권적인 봉건제도를 확립하였다.
관제개혁에 있어 중앙에 3성과 6부를 두었으며 사무를 분장(分掌)한 7시를 설치하였다 .
한편 지방에는 처음에 12목(牧)을 설치하였으나 후에 10도(道). 12주(州)로 나누어 다스리는 한편 권농정책을 힘써 행하였다.
993년(성종 12)에 거란족이 세운 요(遙) 나라의 군대가 고려에 침입하자 서희(徐熙)를 요군(遙軍)의 진영에 보내서 외교단판으로 요나라의 군대를 물러가게 하였다.
후에 여진족(女眞族)이 차지하고 있던 지금의 평안북도 일대 즉 장흥(長興), 귀화(歸化), 곽주(郭州), 귀주(龜州), 안의(安義), 흥화(興化), 선주(宣州) 등에 성을 쌓아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능은 개성의 강릉(康陵)이다.
▲고려 제7대왕 목종(穆宗, 980~1009년)
■ 목종(穆宗)
고려 제7대왕 목종(穆宗 : 재위 997~1009)의 이름은 송(誦), 자는 효신(孝伸), 시호는 선양(宣讓) 경종(景宗)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헌애왕후(獻哀王后) 황보씨이다. 990년(성종 9)개령군(開寧君)에 봉해졌는데 997년(성종 16)에 성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후 모후(母后)를 천추태후(千秋太后)로 존칭했다.
관리의 봉급제도인 전시과(田柴科)를 개정하고 학문을 장려하는 등 많은 치적(治積)을 남겼으나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천추태후는 외측인 김치양(金致陽)과 간통하여 낳은 아들을 왕으로 삼고자 김치양과 함께 음모하여, 후계자인 왕의 당숙(當淑) 대량원군(大良院君) 순(詢)을 중으로 만들어 죽이려 하였다.
이를 간파한 목종은 서경(西京) 도순검사(都巡檢使) 강조(康兆)에게 대량원군의 호위를 명 하였으나 도리어 강조에 의해 폐위 되여 충주(忠州)로 가는 도중에 살해 되었다. 강조는 천추태후와 김치양 일당을 숙청하고 대량원군을 왕위에 즉위케 했다. 능은 공릉(恭陵)이다.
▲고려 제8대왕 현종(顯宗, 992~1031년)
■ 고려 제8대왕 현종(顯宗)
고려 제8대왕 현종(顯宗 : 재위 1010~1031)의 이름은 순(詢), 자는 안세(安世), 시호는 원문(元文), 태조의 여덟째아들인 안종(安宗) 욱(郁)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경종의 둘째 비(妃)인 헌정왕후(獻貞王后) 효숙태후(孝肅太后)이다.
비는 성종의 두 딸 원정왕후(元貞王后)와 원화왕후(元和王后), 시중(侍中) 김은부(金殷傅)의 딸 원성왕후(元成王后), 대종의 손녀 원용왕후(元容王后)이다. 1009년 서북면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 강조(康兆)의 옹립으로 왕위에 올랐다.
이 해에 강조가 목종을 살해한데 대하여 문책한다는 구실로 거란의 성종(聖宗)이 쳐들어오자 참패하고 친조(親朝)할 것을 조건으로 화의가 성립되어 거란군은 물러갔으나, 끝내 친조를 하지 않았다고 또 6성을 요구해 온 것도 거절하였다.
1018년(현종 9)거란의 장군 소배압(蕭排押)이 6성을 빼앗고자 침입 했으나 강감찬의 활약으로 물리쳤다. 다음해부터 거란과 국교를 열어 평화정책으로 일관하여 우호관계를 회복하고 모든 사치와 호화로운 의식. 제도를 폐지하고 승려의 횡포를 엄금하는 한편, 기민(飢民)의 구제에 만전을 가하였다. 능은 개성의 선릉(宣陵)이다.
▲북한 개성 교외 만수산 기슭 언덕에 있는 고려 8대 임금 현종의 선릉.
병풍석이 묻힌 채 민묘처럼 퇴락한 무덤을 훼손된 석물들이 쓸쓸히 지키고 서 있다.
무덤 바로 앞에 옥수수밭이 펼쳐져 있다. <장경희 교수 제공>
▲고려 제9대왕 덕종(德宗, 1016~1034년)
■ 덕종(德宗)
고려의 제9대왕 덕종(德宗 : 재위 1031~1034)의 자는 원량(元良), 이름은 흠(欽), 시호는 경강(敬康), 현종(顯宗)의 장자(長子)로, 어머니는 원성태후(元成太后) 김 씨이다.
1022년(현종 13) 태자로 책봉 즉위한 뒤에 거란(渠丹)에 억류된 고려인 송환을 요구했으나 거란의 반대로 하정사(賀正使)를 중지 하였으므로 삭주(朔州). 영인진(寧仁鎭). 파천(派川)과 동북(東北)의 여진(女眞)이 대립하고 있어 이 양 적을 방어하기 위하여 평장사(平章事) 류소(柳韶)에게 명해서 압록강 어구로 부터 영원(永遠)등 14성을 거쳐 동해안의 도련포(都連浦)에 이르는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축성하게 하자. 동여진인(東女眞人)과 거란인 들의 투항이 속출하였다.
천리장성은 규모가 매우 웅대하여 길이 천리와 높이와 폭이 각각 25측의 석축(石築)이었다. 전략무기를 창안하여 새로운 병기를 만들었고 덕종 즉위년에 국자감시(國子監試)를 비로소 시행하여 부(賦)와 시(詩)로써 인재를 등용했다. 현종 때 시작한 국사 편찬사업을 완성하였으며 능은 개성의 숙릉(肅陵)이다.
▲고려 제10대왕 정종(靖宗, 1018~1046년)
■ 정종(靖宗)
고려 제10대왕 정종(靖宗 : 재위 1035~1046)의 휘(諱)는 형(亨), 자는 신조(申照), 시호는 용혜(容惠), 현종(顯宗)의 둘째아들이며 덕종(德宗)의 동생이다, 어머니는 원성왕후(元成王后) 김 씨이고 비(妃)는 용신왕후(容信王后) 한씨(韓氏), 용의왕후(容懿王后) 한씨, 용목왕후(容穆王后) 이씨다.
1027년(현종 18)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겸 내사령이 되었다. 1034년(덕종 3)즉위하여 명주성(溟州城)을 수축 다음해에는 북계(北界) 송령(松嶺) 동쪽장성을 수축 하였으며 또 창주(昌州 :平北昌成)에도 성을 쌓았다. 1036년(정종 2) 각 도(道)의 양전(量田)을 다시 실시하고 여러 위(衛)의 군인 중 경전(耕田)이 부족한 자에게는 공전(公田)을 더 주었다.
이후 북방 민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1044년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완성시켰다. 또 같은 해 예성강(禮成江)의 병선(兵船) 180척으로 군수물자(軍需物資)를 운반하여 서북계 주진(州鎭)의 창고에 보관케 하는 등 국방정책에 힘을 기우렸다.
이듬해 비서성(秘書省)으로 하여금 예기정의(禮記正義) 모시정의(毛詩正義)등을 간행하게 하였고, 46년 장자상속법(長子相續法)과 적서(嫡庶)의 구별을 법으로 정하였다.
▲고려 제11대왕 문종(文宗, 1019~1083년)
■ 문종(文宗)
고려 제11대왕 문종(文宗 : 재위 1046~1083)의 이름은 휘(徽), 초명(初名)은 서(緖), 자는 촉유(燭幽), 현종(顯宗)의 셋째 아들로 어머니는 원혜태후(元惠太后) 김씨이다. 처음에 낙랑군(樂浪君)에 책봉되었으며 정종(靖宗) 때에 내사령(內史令)에 임명되었다.
그 후 정종의 뒤를 이어 고려의 제11대왕으로 즉위 하였으며 고려시대 중에서도 가장 찬란한 문화 황금기(文化黃金期)를 이룩하였다.
한편 문종은 왕자 후(煦)를 출가(出家)시켜 승려가 되게 하였으니 그가 곧 대각국사 의천(義天)이다.
문종은 불교뿐만 아니라 유학(儒學)도 함께 장려하여 최충의 구재(九齋)를 비롯한 12도(徒)의 사학(私學)을 진흥 시켰다.
특히 문종은 중국 송(宋)나라와의 친선을 도모하여 선진문화(先進文化)의 수입에 힘썼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현명한 정책이 차차 큰 효과를 나타내어 문종의 치세(治世)에는 고려의 문화도 찬란한 빛을 발휘하게 되었다.
문종은 인재 등용에도 높은 안목을 가지고 있어서 인사를 적재적소에 배치했기 때문에 제도의 개혁 빈민의 구휼(救恤)등에도 큰 치적을 올렸다. 학문을 좋아 하고 서도(書道)에도 뛰어났으며 능은 경능(景陵)이다.
문종의 왕비는 인평왕후 김씨(仁平王后 : 현종과 원성왕후의 딸)와 인목덕비(인목덕비(仁穆德妃) 김씨를 제외한 나머지 왕비는 이자연의 딸들이며 특히 이복누이인 인평왕후는 왕족출신이라 다른 왕비들과 달리 원비로 책봉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 때부터 인주 이씨의 권력독점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제1비 : 인평왕후(仁平王后) 김씨(현종과 원성왕후의 딸). 제2비 : 인예왕후(仁睿王后) 이씨(이자연의 첫째 딸). 제3비 : 인경현비(仁敬賢妃) 이씨(이자연의 둘째 딸). 제4비 : 인목덕비(仁穆德妃)김씨이다.
▲고려 제12대 순종(順宗, 1046~1083년)
■ 순종(順宗)
고려 제12대왕 순종(順宗 : 재위 1년)의 휘(諱)는 훈(勳), 초명은 휴(烋), 자는 의공(義恭), 시호는 선혜(宣惠), 1047년 12월에 문종(文宗元年)과 인예태후(仁睿太后) 이씨(李氏)의 장남으로. 태어나, 8세가 되던 1053년에 태자로 책봉되었고 1083년 7월에 문종이 죽자 37세의 나이로 고려 제12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병약한 몸인데다가 아버지 문종의 승하를 너무나도 슬퍼한 나머지 심신이 쇠약해져 재위 3개월 만에 승하하였다. 고려의 국왕 중 가장 짧은 재위기간의 왕이다. 이에 왕의 빈소를 선덕전(宣德殿)에 모신 후, 장사지냈는데, 묘는 개성에 위치한 성릉(成陵)이다.순종은 세명의 부인을 두었으나, 자식을 얻지는 못하였다.
제1비는 평양공 기(平壤公基)의 딸 정의왕후(貞懿王后)왕씨이며, 제 2비는 김양검(金良儉)의 딸 선희왕후(宣禧王后)김씨이며, 제3비는 이호(李顥)의 딸 장경궁주(長慶宮主) 이씨이다.
▲고려 제13대 선종(宣宗, 1049~1094년)
■ 선종(宣宗)
고려 제13대왕 선종(宣宗 : 재위 1083~1094)의 휘(諱)는 운(運), 자는 계천(繼天), 시호는 사효(思孝), 문종과 인예태후(仁睿太后) 이씨(李氏)의 둘째 아들로 순조의 친동생이며 어려서부터 지혜롭고 성장할수록 효경공검(孝敬恭儉)하며 식견과 도량이 넓고 깊으며 널리 경사(經史)를 보고 특히 문예에 능하였다. 문종 때는 국원후(國原侯)에 피봉 되어 중서령(中書令)을 지냈고, 순종 때에 수태사(守太師)상서령(尙書令)을 지냈다.
순종을 이어 등극한 선종 시대는 불교와 유교의 균형적인 발전을 토대로 매우 안정되었으며, 외교에서도 거란을 포함한 송, 일본, 여진 등과 광범위한 교역을 추진하며 주도권을 행사하였다. 1084년에는 승과를 설치하고 불교를 장려하였으며, 변경을 지키는 사졸들에게 저고리와 바지를 하사하였다.
국제적인 대외관계(對外關係)가 평화로웠고 특히 송(宋)과의 문물교류도 성행하였으며 문종의 뒤를 이어 승평시절(昇平時節)을 누리었다. 1085년 왕의 아우 의천(義天)이 몰래 송나라에 들어가 2년 동안 불법을 공부하고 돌아오자 선종은 환영의식을 성대하게 하였는데 의천은 불경과 경서 1,000권을 바쳤고, 흥왕사(興王寺)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세울 것을 건의하였으며, 송, 요, 일본 등지에서 서적을 사들여 거의 4, 000여 권에 달하였는데 모두 간행하게 하였다.
1089년 회경전(會慶殿)에 13층 금탑(金塔)을 세우고, 인예왕후(仁睿王后)의 청에 따라 천태종(天台宗)의 중심사찰인 국청사(國淸寺)를 짓게 하였다. 1091년 예부의 주장으로 국학(國學)에 72현의 상을 벽에 그려 붙였는데, 그 차례는 송나라 국자감의 예를 따르고, 그 복장은 10철(十哲)을 모방하게 하였다. 1092년 병이 들어 의원이 처방한 약을 먹고 문득 시를 지었는데 “약효가 있고 없음이야 무엇을 염려하랴.
덧없는 인생 시작이 있었으니 어찌 끝이 없으리. 오직 원하는 것은 여러가지 선행을 닦아 청청한 곳에 올라 부처에게 예를 드림이네.”라는 구절이 있어 만백성이 안타까워 하였다. 1094년 2월 열병(閱兵)을 한 뒤 재위 10년 7개월 만에 향년 46세로 승하하였다.
능은 개성에 있는 인릉(仁陵)이다.선종은 3명의 부인에게서 4남 3녀를 얻었다.
제1비 정신현비(貞信賢妃) 이씨가 1녀 제2비 사숙왕후(思肅王后)인 수안(遂安)이씨가 헌종을 비롯 1남 2녀, 제3비 원신궁주(元信宮主)인 한산(漢山)이씨가 3남을 낳았다.
▲고려 제14대 헌종(獻宗, 1084~1097년)
■ 헌종(獻宗)
고려 제14대왕 헌종(獻宗 : 재위 1094~1095)의 휘(諱)는 욱(昱), 시호는 회상(懷傷), 선종(宣宗)의 원자(元子)이며 어머니는 사숙태후(思肅太后) 수안이씨(遂安李氏)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특하여 9세에 서화(書畵)를 잘 하였으나 소갈증으로 몸이 매우 유약하였다.
1094년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그의 모후(母后)가 국정을 전단(專斷)하니 왕실이 미약하여서 즉위원년에 이자의(李資義)가 헌종이 허약하고 왕의 숙부(叔父) 왕희에게 왕위가 돌아갈 것을 추측하여 그의 누이 원신궁주(元信宮主)가 낳은 한산후(漢山侯)전을 세우고자 군사를 궁중에 모아 거사 하려 하였다.
이에 계림공(鷄林公) 왕희(王熙 : 숙종)가 이 기미를 알고 소윤보(邵允補)에게 도움을 청하여 이자의(李資義) 난을 곧 평정하게 하였다.
그 후 그는 중서령(中書令)이 되었다가 헌종이 즉위 다음해 신병이 깊어지자 선위(禪位)를 받았다.
헌종은 후궁에서 지내다 14세에 요절 하였는데, 능은 개성(開城)의 온릉(穩陵)인데, 현재 위치는 알 수 없고 개성 동쪽에 위치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려 제15대 숙종(肅宗, 1054~1105년)
▲ 1910년대에 촬영된 고려 15대 숙종(肅宗) 영릉(英陵) 전경. 현재 행정구역상으로 개성시
선적리 소재지로부터 서쪽 방향으로 3km 정도 떨어진 산에 있다.<국립중앙박물관 e뮤지엄>.
■ 숙종(肅宗)
고려 제15대왕 숙종(肅宗 : 재위 1095~1105)의 초명(初名)은 희(熙), 휘(諱)는 (옹), 자는 천상(天常), 시호는 명효(明孝), 문종(文宗)의 3남으로 인예왕후 이 씨 소생으로 1054년 7월에 태어났다. 또한 순종, 선종의 동복아우이다.
비(妃)는 류홍(柳洪)의 딸 명의왕후(明懿太后) 유씨 1명이었으며, 그녀에게서 예종을 비롯한 7남 4녀가 태어났다.
숙종(肅宗)은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과단성이 있고, 오경(五經)·제자서(諸子書)·사서(史書)등에 해박하였고. 문종의 큰 기대를 받아 「뒷날에 왕실을 부흥시킬 자는 너다」라고 하여 문종 때 계림공에 봉하여졌으며, 1086년(선종 3)에는 수태보 벼슬을 받았다. 1094년 조카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수태사 겸 상서령에 올랐다.
그러자 1094년 10월 측근세력이 전혀 없는 어린 헌종을 밀어내고 왕위를 찬탈함으로서 고려 제15대왕에 올랐다.
이때 그의 나이42세였다. 숙종은 왕권을 장악하자 곧 반대세력을 완전히 숙청하고, 왕위에 오른 던 날에도 이자의 의 누이동생 원신궁주 이씨와 그녀의 아들 한산 후 그리고 나머지 두 아들까지 모두 경원군으로 귀양을 보냈다.
1096년 6촌 이내의 혼인을 금하였으나 백성들이나 귀족들에게 별로 지켜지지 못했다. 1097년에는 주전관(鑄錢官)을 두고 주화를 만들어 통용하게 하였으며, 1101년에는 본국의 지형을 본떠서 은병[闊口]을 주조하고 이듬해에는 고주법(鼓鑄法:돈 만드는 법)을 제정하여 해동통보(海東通寶) 1만5000관을 만들어 문무양반과 군인들에게 분배하였다.
1099년 김위제의 주장에 따라 남경을 중시하고 남경개창도감(南京開創都監) 을 두어 궁궐을 조영하게 하였다.
1102년에 예부에서 (우리나라가 예의로 교화하기는 기자(箕子)로부터 비롯 되었으니, 원컨대 그 분묘를 찾고, 사당을 세워 제사하십시오.)라고 아뢰니 이에 따라 서경에 기자사(箕子祠)를 세웠다.
1103년 동여진의 추장 영가(盈歌)가 사신을 보내어 내조하였으나, 추장이 되면서 고려에 침입하였다.
같은해 2월에 임간(林幹)이 정주에서 패하였고, 3월에는 윤관(尹瓘)이 여진정벌을 꾀하였으나, 역시 이기지 못하고 화약을 체결하고 돌아왔다. 이에 따라 윤관의 주장으로 별무반(別武班)을 처음 설치하였다.
윤관은 "신이 여진에게 패한 것은 저들은 기병이고, 우리는 보병이므로 대적할 수 없었습니다." 라고 아뢰니 드디어 기병으로 구성된 신기군(神騎 軍), 보병으로 구성된 신보군(神步軍), 승도(僧徒)들로 구성된 항마군(降魔 軍)을 두어 별무반이라 칭하고, 여진정벌을 준비하게 하였다.
1105년 서경에 순행하여 동명왕묘(東明王廟)에 제사하고, 병이 들어 개경으로 돌아오다가 10월에 수레 안에서 죽으니 태자[우]가 유조를 받들어 즉위하였다. 능은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판문리에 있는 영릉(英陵)이다.
▲고려 제16대왕 예종(睿宗, 1079~1122년)
▲개성에 있는 예종의 유릉(裕陵)이다.
■ 예종(睿宗)
고려 제16대왕 예종(睿宗 : 재위 1105~1122)의 휘(諱)는 우(吳), 자는 세민(世民), 시호는 문효(文孝), 숙종과 명의왕후(明懿王后) 유씨(明懿太后 柳氏)의 아들이다. 부왕인 숙종의 여진정벌에 대한 서소(誓疏)를 간직하고 즉위한 뒤 군법을 정비하고 신기군을 사열하는 등 여진정벌에 힘써 1107년에 윤관(尹瓘), 오연총(吳延寵) 등으로 하여금 여진을 정벌하여 섬멸하고 이듬해에는 천리장성 동북지역에 9성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계속적인 여진족의 침입과 9성 방비의 어려움, 윤관의 공을 시기하는 자들로 인하여 1년 만에 9성을 철폐하고 여진에게 반환하였다. 1109년 국학(國學)에 학과별 전문강좌인 칠재(七齋)를 설치하여 관학(官學)의 진흥을 꾀하였으며 1112년에는 혜민국(惠民局)을 설치하여 빈민들의 시약을 담당하게 하였고 이듬해에는 예의상정소(禮儀詳定所)를 설치하였다.
1115년 완안부(完顔部)의 추장 아골타(阿骨打)가 여진족을 통일하여 황제라 일컫고 나라 이름을 금(金)이라 칭하자,
요(遼)에서 금나라를 정벌하기 위하여 고려에 원병을 청하였으나 거부하였고 1116년, 청연각(淸讌閣)과 보문각(寶文閣)을 짓고 학사(學士)를 두어 경적(經籍)을 토론하게 함으로써 유학을 부흥시켰으며 송나라에서 대성악(大晟樂)을 들여왔는데 이것이 바로 아악(雅樂)이다.
1117년, 금나라에서 "형인 대여진금국황제(大女眞金國皇帝)가 아우인 고려 국왕에게 글을 보낸다." 는 글로써 화친하기를 청하였으나 조정의 반대로 회답하지 않았고 1119년 양현고(養賢庫)라는 장학재단을 국학에 설립하였다.
1120년, 팔관회를 열고 태조의 공신인 신숭겸(申崇謙)과 김락(金樂)을 추도하여 도이장가를 지었으며 2년 뒤인 1122년 4월에 승하하였다. 능은 개성에 있는 유릉(裕陵)이다.
▲고려 제17대왕 인종(仁宗, 1109~1146년)
■ 인종(仁宗)
고려 제17대왕 인종(仁宗 : 재위 1122~1146), 휘(諱)는 해(楷), 자는 인표(仁表), 예종(睿宗)과 순덕왕후(順德王后) 이씨(李氏)의 맏아들로, 1109년 음력 10월 28일 태어났다. 1115년(예종 10) 음력 2월 7살의 어린 나이에 왕태자로 책봉되었다가, 1122년 음력 4월 아버지가 죽자 14살에 왕위를 이었다.
나이가 어린 것이 염려되었으나 외조부인 평장사 이자겸이 옹립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즉위 초에는 이자겸이 정권을 틀어쥐고 인종을 위협하였다.
심지어 이자겸은 자신의 셋째와 넷째 딸, 즉 인종의 이모들을 모두 인종에게 시집보내어 왕의 장인까지 되었다.
일부 신하들은 이러한 이자겸의 횡포에 반기를 품고 이자겸을 축출하려 하였으나 이자겸이 과거 윤관의 부하 장수인 척준경과 손을 잡고 권세를 부려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자겸은 심지어 인종을 자신의 집에 가두고 자신이 공공연히 왕이 될 것이란 소문을 퍼뜨렸다.
그러나 이자겸과 척준경의 사이가 곧 멀어지고 그사이 척준경은 인종과 가까워진다.
1126년(인종 4) 이자겸이 궐내에 침입하여 궁실을 방화하여 왕은 남궁(南宮)에 파천하였으나, 최사전(崔思全)·척준경(拓俊京) 등으로 하여금 이자겸을 잡아 영광에 귀양 보내고, 이듬해 척준경도 귀양 갔다.
인종은 개경의 터가 좋지 않은 것 같아 고심하고 있던 차에 승려 묘청이 인종에게 서경으로 도읍을 옮겨야한다 주장하였고, 역시 고려가 칭제건원(稱帝建元), 즉 왕을 황제로 높이고 연호를 써야 한다는 자주적 사상을 인종에게 설득하였다.
그러나 당시 중국 북부의 금나라가 고려를 심히 견제하자 김부식 등 개경파는 이에 크게 반대하였고, 어떻게든 인종이 개경에 머물게 하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묘청이 인종의 신임을 믿고 오만방자하게 굴자 인종은 점차 묘청을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1135년(인종 13년) 묘청이 반란을 일으키니, 이것이 묘청의 난이다. 김부식을 서경정토대장(西京征討大將)으로 보내어 이듬해 평정하였다. 인종은 또한 김부식에게 명하여 삼국사기(三國史記) 50권을 1145년에 완성을 보았다.
1146년(인종 23년) 음력 2월 향년 38세에 태자(太子)에게 왕위를 물리고 병으로 죽었다.
능은 경기도 개풍군 청교면에 위치한 장릉(長陵)이다.
▲고려 제18대왕 의종(毅宗, 1127~1173년)
■ 의종(毅宗)
고려 제18대왕 의종(毅宗 : 재위 1146~1170)의 휘(諱)는 현(晛), 초명은 철(徹), 자(字)는 일승(日升), 시호는 장효(莊孝)로, 인종과 공예태후(恭睿太后) 임씨(任氏)의 맏아들이다. 비는 강릉공(江陵公) 온(溫)의 딸 장경왕후(莊敬王后), 계비는 참정(參政) 최단(崔端)의 딸 장선왕후(莊宣王后)이다.
1134년에 왕태자(王太子)가 되었으며 1146년 인종이 죽자 즉위 하였는데, 그는 즉위 뒤 이미 인종 때에 일어난 이자겸의 전횡과 반란, 묘청의 난 등으로 크게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여 쇠약해진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이를 위해 무신(武臣)들을 총애하여 친위군을 강화시켜 나갔다. 이 과정에서 정중부, 이의방, 이의민 등이 발탁되었다. 그러나 말년에는 문신(文臣)들 및 환관(宦官)들과 어울려 유흥과 오락에 깊이 빠지고, 지나치게 불교·음양설(陰陽說)·선풍(仙風)을 중요시하고 유교를 멀리하는 등 정치적·사회적 혼란을 초래하였고, 이 과정에서 무신들을 소외시켜 천대받게 만들어 무신정변(武臣政變)의 계기를 낳았다.
1170년 보현원(普賢院)에 거동하였을 때에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의 무신들이 반란을 일으켜 무신정변이 일어남으로써 무신 정권에 의해 폐위되어 3년간 거제도의 폐왕성(廢王城)에 유폐되었다. 그 뒤 1173년에 김보당(金甫當) 등 의종 복위 세력이 무신 정권에 항거하여 거병하면서 사람을 보내어 유배된 의종을 모셔와 받들고 경주로 가서 웅거하였다. 그러나 무신 정권이 보낸 군대에게 모두 패하였다.
이 때 의종(毅宗)은 총애하던 장수 이의민에 의해 곤원사(坤元寺) 연못가에서 술을 두어 잔 마신 뒤에 등뼈가 꺾여 지고 시체는 그대로 연못에 수장당하는 비참한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이때 그의 나이 47세였으며 이후 동생인 명종에 의해 능이 조성되었는데 바로 희릉(禧陵)이다. 현재 희릉의 위치는 알 수 없으나 개성 동쪽에 위치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려 제19대왕 명종(明宗, 1131~1202년)
■ 명종(明宗)
고려 제19대왕 명종(明宗 : 재위1170~1197)의 초명(初名)은 흔(昕), 이름은 호(晧), 자는 지단(之旦), 시호는 광효(光孝), 인종(仁宗)과 공예태후(恭睿太后) 임씨(任氏)의 셋째 아들이며 제2자 의종(毅宗)의 동생이다. 비(妃)는 김온(金溫)의 딸 의정왕후(義靜王后), 김씨(의종의 비인 장경왕후의 여동생)이다.
1170년에 무신정변으로 의종(毅宗)이 폐위되고 무신들에게 추대되어 즉위하였는데, 이후 무신 정권 집권자들을 서로 견제하게 만들고 왕족들의 단합을 이끌어내어 무신들의 손아귀로부터 부단히 왕실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1173년에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 김보당이 무신 정권 타도와 전(前) 임금인 의종의 복위를 천명하며 군사를 일으켰으나, 무신 정권에 의하여 진압되고 의종은 시해되었다. 1179년 정중부의 전횡을 탐탁지 않게 여긴 경대승이 정변을 일으켜 정중부를 죽이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경대승이 죽자, 명종은 경주로 달아난 이의민을 다시 불러들였다.
이의민은 새로운 무신 권력자가 되어 자신의 아들들을 모두 요직에 앉히고 부정부패를 일삼아 갖은 횡포를 부리다가, 나중에 가서는 스스로 임금이 되려는 야심까지 품게 된다.
1196년 음력 4월, 최충헌이 이의민을 참살하고 정권을 장악하여 최씨 정권 시대가 열리게 된다.
이 때 최충헌은 거사의 명분을 얻기 위하여 앞으로의 국정개혁안의 내용을 담은 봉사 10조(封事十條)를 올리고 명종은 이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러나 1197년에 최충헌 형제의 정변으로 폐위를 당하고 창락궁(昌樂宮)에 유폐된 지 6년 후에 병을 얻어 승하하였으며 능은 장단군 장도면에 위치한 지릉(智陵)이다.
▲고려 제20대왕 신종(紳宗, 1144~1204년)
■ 신종(紳宗)
고려 제20대왕 신종(紳宗 : 재위 1197~1204)의 휘(諱)는 탁(晫), 초명(初名)은 민(旼), 자는 지화(至華), 시호는 정효(靖孝), 인종과 공예태후 임씨(恭睿太后 任氏)의 다섯째 아들이자 의종과 명종의 막내 동생이다.
1154년(의종 8) 평량후(平凉侯)에 책봉되었다가 최충헌(崔忠獻)형제가 명종을 폐하고 왕으로 추대하여 대관전(大觀殿)에서 즉위하였으며, 1198년, 산천비보도감(山川裨補都監)을 두었고 관서(關西) 민가의 안대(安碓)를 금지하였다.
같은 해 만적의 난이 일어난 것을 비롯하여 이듬해에는 명주(강릉)와 동경(경주), 뒤이어 진주와 전주, 합주(합천) 등지에서 민란이 계속 일어났다. 1199년에 최충헌이 문무관의 인사행정(人事行政)를 도맡았는데 이로부터 모든 실권은 최충헌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같은 해에 수양장도감(輸養帳都監)과 오가도감(五家都監)을 두었다.
1202년에 탐라(제주도)에서 다시 반란이 일어나자 소부소감(少府少監)인 장윤문(張允文)과 중랑장(中郞將) 이당적(李唐積)을 안무사(安撫使)로 보내어 평정하였다. 1204년 등창이 심하여 태자에게 양위하였다. 능은 개풍군 청교면에 위치한 양릉(陽陵)이다.
자료출처 : 대한민국5000년사 역대왕조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