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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6. 8. 7. 16:16
▲양평공 이철견신도비(襄平公李鐵堅神道碑)
종 목 | 시도유형문화재 38호 |
명 칭 | 이철견신도비(李鐵堅神道碑) |
분 류 | 석비 |
수 량 | 1기400㎡ |
지정일 | 1995.05.12 |
소재지 | 대구 달성군 옥포면 강림리 731-1 |
소유자 | 경주이씨양평공파종친회 |
관리자 | 경주이씨양평공파종친회 |
이 비는 조선 성종(成宗)때의 공신인 이철견 장군의 신도비(神道碑)이다. 장군은 세조에서 연산군사이에 의금부사(義禁府事),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 호조판서(戶曹判書),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한성판윤(漢城判尹) 등을 지냈으며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다. 이 비는 비신(碑身)의 상부에 가로로 『양평이공신도비명(襄平李公神道碑銘)』이라 제(題)하였으며 홍귀달(洪貴達)이 짓고 안침(安琛)이 전액(篆額)과 본문(本文)을 썼고 연산군(燕山君) 3년(1597)에 건립하였다. 좌대(座臺)는 화강석이고 비신과 이수(이首)는 하나의 돌로 되어있는 대리석이다. 이수는 보개형(寶蓋型)을 하고 있어 조선전기 신도비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는 좋은 금석자료이다. 이 비는 본래 서울 관악구 봉천동 산72번지에 있던 것을 1969년에 도시계획 관계로 현위치로 옮긴 것이다. 작성자 : 이재훈 |
●양평공 신도비문
■ 이철견 (李鐵堅)
[생졸년] 1435년(세종 17)~ 1496년(연산군 2) / 향년 61세
조선전기 형조판서, 호조판서, 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한 무신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연부(鍊夫). 이원보(李元普)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승(李昇)이고, 아버지는 참판 이연손(李延孫)이다. 어머니는 파평윤씨(坡平尹氏)로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윤번(尹璠)의 딸로, 세조비 정희왕후(貞熹王后)의 동생이다.
문음으로 헌릉직(獻陵直)을 거쳐 한성부판관 재임 시인 1460년(세조 6) 무과에 급제하고, 1466년 등준시(登俊試)에 합격하여 이듬해에 훈련원도정이 되었다. 1468년(戊子年,세조 14) 예종 즉위 후에 평안도절도사가 되고 성종 즉위 후인 1470년(庚寅年, 성종 1)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랐다.
이듬해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에 책록되고 월성군(月城君)에 봉하여졌다. 이어 경기도관찰사, 형조·호조의 판서를 거쳐 1480년(성종 11)에 평안도관찰사를 역임하고, 이어 좌참찬·경상도관찰사·대사헌을 지냈다. 1484년(甲辰年,성종 15)에 한성부판윤으로 사민안접순찰사(徙民安接巡察使)를 겸하여 사민정책을 주관하였다. 1486년(丙午年,성종 17)에 좌찬성이 되고, 이어 판의금부사, 평안도·영안도(永安道)의 도체찰사, 도총관 등을 역임하였다.
1493년(癸丑年,성종 24)에 척신으로서 탐학하고 사치를 좋아하며 전횡이 심하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연산군 즉위 후인 1495년에 지의금부사에 복직되었다. 시호는 양평(襄平)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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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 이공 신도비명 병서(襄平李公神道碑銘幷序)
홍귀달 지음(洪貴達 撰)
1438년(세종 20)~1504년(연산군 10)
유명조선국 순성 좌리공신(純誠 佐理功臣)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월성군(月城君) 증시(贈諡) 양평(襄平) 이공(李公)의 신도비명(神道碑銘) : 서문을 아울러 기록하였다.
자헌대부(資憲大夫) 지중추부사 겸 동지경연사 지춘추관 의금부사 예문관제학 홍귀달(洪貴達)은 비문(碑文)을 짓고,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 겸 동지춘추관사 안침(安琛)은 비문의 글씨를 쓰고 아울러 전액(篆額)을 하다.
홍치(弘治) 9년(1496, 연산군 2) 5월 임자일에 월성(月城) 이공(李公)이 사망하여, 그해 9월에 금천(衿川) 동면(東面) 봉천리(奉天里)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그 이듬해 여름에 그의 아들이 비석을 세우고자 하여 소매 속에 공의 행장(行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비문을 요청하며 말하기를, “우리 선공(先公)의 평소 행적과 사업은 오직 공만이 알고 있으니, 명문(銘文)을 짓기에 적임자이십니다.” 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공의 이름은 철견(鐵堅)이요, 자(字)는 연부(鍊夫)이다. 증조부인 원보(元普)는 지인주사(知仁州事)를 지내고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증직(贈職)되었으며, 할아버지인 승(昇)은 전농판관(典農判官)을 지내고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되었다.
아버지인 연손(延孫)은 공조참판(工曹參判)을 지냈고,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 윤씨(尹氏)로 우의정(右議政)에 증직된 윤번(尹璠)의 따님이며 세조대왕의 비인 정희왕후(貞熹王后)의 언니이다.
공은 재주와 기량이 남달라서 세조 임금의 돌보심과 예우(禮遇)가 특별히 융숭하였고, 예종 임금과 성종 임금을 거쳐 우리 성조(聖朝)에 미칠 때까지 은택(恩澤)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아 부귀하게 일생을 마쳤으니, 아! 성대하다.
공은 처음에 헌릉지기[獻陵直]가 되어 여러 차례 관직(官職)을 옮겨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에 이르렀다가 충청도도사(忠淸道都事),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에 천전(遷轉)되었다. 두 번 무과에 급제하여 번번이 지위와 녹봉이 더해졌고, 선전관(宣傳官)이 되고 내승(內乘)이 되었는데 왕명을 출납하고 주선(周旋)하는 것이 임금의 뜻에 맞았다.
통정대부(通政大夫) 훈련원도정(訓鍊院都正)에 올랐다. 얼마 뒤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곧바로 자헌대부(資憲大夫)에 가자(加資)되어 평안서도절도사(平安西道節度使)가 되었으며, 조정으로 들어와서 지중추부사 겸 지의금부사(知中樞府事兼知義禁府事)가 되었다.
성종 임금 초반에 임금을 잘 보좌하고 나라를 잘 다스린 공로가 있어 공신의 칭호를 하사하고 전토(田土)와 노비를 부상(副賞)으로 주었다. 공은 일찍부터 군율(軍律)을 익혔다. 성상(聖上)이 일찍이 동교(東郊)에서 대대적으로 군대를 사열(査閱)할 때 공을 대장(大將)으로 삼았는데 호령(號令)이 엄명(嚴明)하고 군사들의 훈련하는 절차가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
성상이 이 일을 가상하게 여겨 특별히 안마(鞍馬)를 하사하여 칭찬하였다.
그 뒤로 군대를 사열할 때마다 반드시 공을 대장으로 명하였는데, 위에서 말한 것과 같지 않은 적이 없었다.
공이 삼도(三道)의 관찰사를 지낼 때에는 관리에 대한 평가가 엄명하였으며, 양조(兩曹)에서 판서를 지낼 때에는 모든 사무가 바로잡혔다. 금군(禁軍)을 총괄하고 사헌부의 대사헌이 되자 군대의 위엄이 확립되고 조정의 기강이 엄숙해졌으며, 두 차례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지내고 승문원제조(承文院提調)가 되자 교활한 관리가 숨을 죽이고 모든 벼슬아치들이 의젓해졌다.
의금부에서 죄인을 신문(訊問)하고 농민의 사정을 헤아리며 이주한 백성을 위무(慰撫)하고 성루(城壘)를 쌓아서 임금이 위임한 뜻에 특별히 응한 것이 하나둘이 아니었으며 모두 다 기록할 만한 실적이 있었다.
아! 세조 임금과 성종 임금이 영웅을 모아들이고 문관과 무관을 신임하여 썼으므로 문관과 무장이 수두룩하였으나 각각 한쪽에만 능력이 있었지 공처럼 재주와 능력을 겸비해서 상황에 따라 알맞게 적용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은택(恩澤)을 받은 것이 융성하고 높은 작위를 받았으니, 이는 행운이 아니고 당연한 것이다.
공의 성품은 온화하고 후덕하여 동네의 종족(宗族)과 친구들이 좋은 일이나 궂은 일, 경사나 상사(喪事)를 당하며 마음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공에게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도 더할 나위 없이 지극하였다. 공은 모습이 총명하고 늠름하여 말씨와 행동거지를 대하는 사람마다 모두 장수나 재상이 될 기량임을 알았다.
공은 처음 생원 윤자렴(尹子濂)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 하나를 낳았는데, 강서현령(江西縣令) 허효순(許孝舜)에게 출가하였다.
나중에 현감(縣監) 이영상(李永祥)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이름은 성정(成楨)으로 지금 종친부 전부(宗親府典簿)이다.
첩 하나가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이름은 윤정(允楨)으로 대호군(大護軍)이고, 한 첩이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이름은 안정(安楨)이며, 한 첩이 아들 둘을 낳았는데 장남은 익정(益楨)이고 차남은 극정(克楨)으로 모두 어리다.
강서현령은 아들 다섯을 낳았는데 장남은 윤관(允寬)으로 목청전참봉(穆淸殿參奉)이고, 다음은 윤홍(允弘)이며, 다음은 윤굉(允宏)이고, 다음은 윤평(允平)이며, 다음은 윤문(允文)이다. 전부는 부정(副正) 안온천(安溫泉)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넷을 낳았는데 완(琬)과 경(瓊)과 영(瑛)과 호(瑚)이다.
나 귀달(貴達)은 공과 사는 곳이 서로 가까웠고 또 의정부(議政府)와 의금부(義禁府)에서 함께 근무했던 동료여서 오래 사귀여 온 정분(情分)이 아주 돈독하였다. 그 때문에 그의 아들이 나에게 와서 비문을 요청한 것이니, 감히 사양할 수 있겠는가? 마침내 서문(序文)을 쓰고 비명으로 삼는다.
명문(銘文)에 이르기를,
찬란한 우리 동방(東方)에 훌륭한 분이 탄생하시니
세묘(世廟 세조)께서 나라를 재차 세우시고 정희왕후(貞熹王后)께서 함께 도왔네.
마침내 외척(外戚)을 돌아보시고 특별히 선발(選拔)하시니
성실한 이공(李公)만이 유일하였네.
호랑이 같은 귀인(貴人)의 형상과 소를 먹을 만한 기개가 있고
원숭이처럼 용맹하여 이(蝨)의 심장을 꿰뚫었네.
왕께서 이공에게 이르기를, “그대는 나의 수족(手足)이며 또한 나의 심복(心腹)이니
비범한 친속(親屬)이다.
내가 그대의 능력에 보답하여 작록(爵祿)을 소유하도록 하겠다.” 하고,
갑자기 머리와 허리에 황금과 백옥을 두르니 공이 머리 조아려 절을 하고 더욱 돈독히 충성을 바쳤다.
여러 임금을 두루 섬기어 총애가 더욱 빛났다.
성묘(成廟 성종)께서 즉위하여 26년을 재위하는 동안 나가서는 장수가 되고 들어와서는 재상이 되니
노고(勞苦)하고 공적(功績)을 세워 나라와 운명을 같이 하니, 충성스런 마음이 해처럼 빛났다.
지위는 삼공(三公)에 가까워가고 나이는 겨우 육순이 되어, 한창 명망(名望)이 드높았는데, 갑자기 하늘이 불러갔네. 나라의 남쪽에 한 고을이 있어 그 땅이 길지(吉地)라고 하므로 집처럼 봉분(封墳)을 만들고 이 건장한 뼈를 숨긴다.
죽지 않는 비석이 남아 있게 되어 나의 글을 맡길 수 있게 되었다.
홍치(弘治) 10년인 정사년(1497, 연산군 3) 8월 일에 비석을 세우다.
국역 : 노효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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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有明朝鮮國純誠佐理功臣。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月城君。贈諡襄平李公神道碑銘。幷序
홍귀달 찬(洪貴達 撰)
弘治九年五月壬子。月城李公卒。其年九月。葬于始興東面奉天里艮山丑坐之原。越明年夏。其孤將立石。袖公行狀來請余曰。吾先公行與事。惟公悉之。宜爲銘。謹按公諱鐵堅。字鍊夫。曾祖諱元普。知仁州事。贈吏曹參議。祖諱昇。典農判官。贈吏曹參判。考諱延孫。工曹參判。妣貞夫人尹氏。贈右議政尹璠之女。世祖大王妣貞熹王后之姊。公才器異常。世祖眷遇特隆。歷睿宗,成宗及我聖朝。恩澤不少衰。富貴終其身。吁盛矣哉。公初爲獻陵直。累遷至司憲監察。轉忠淸道都事,漢城府判官。再捷武科。輒增班資。爲宣傳官。爲內乘。出納周旋稱旨。進通政大夫。訓鍊都正。俄陞嘉善。旋加資憲大夫。平安道節度使。入爲知中樞。兼知義禁府事。成宗初。有佐理勳。冊賜功臣號。副以土田臧獲。公夙慣師律。上嘗大閱于東郊。公爲大將。號令嚴肅 。凡進退坐作之節。無少差違。上嘉之。特賜鞍以賞之。後凡遇閱武命將。必以公無不如上云。公觀察三道。黜陟明。判書兩曹 。庶務釐。都摠禁旅。領袖臺憲。而軍威整。朝綱肅。再判京兆。貳公槐府而姦猾懾。縉紳儀。至於淑問金吾。量度田民。安撫徒民。相築城壘。特膺委寄者非一。皆有實跡可觀焉。嗚呼。世祖成宗之收攬英雄。柄用文武。而文吏武將肩相磨。然各有偏長 。未見有才兼能備。隨處適用如公者。恩澤之隆。爵位之顯。非幸也宜也。公性和厚。凡閭里宗族朋友吉凶慶弔。無不盡心焉。故人之報之。亦無所不至。公儀表英毅。言談擧止。皆知爲將相器。先娶生員尹子濂之女。生一女。適江西縣令許孝舜。後娶縣監李永祥之女。生一男曰成楨。今爲宗親府典簿。一妾生一男曰允楨。大護軍。一妾生一男曰安楨。一妾生二男。曰長益楨。次克楨。皆幼。江西生五男。長允寬。穆淸殿參奉。次允弘。次允宏。次允平。次允文。典簿娶副正安溫泉之女。生四男。曰琬。初名瑠 曰瓊。曰瑛。曰瑚。初名珀 貴達與公擧止相近。又忝政府金吾僚。故情甚款。於其孤之來求文也。敢辭諸乎。乃序而銘之曰。
於皇我東。聖神誕作。世廟再造。貞熹與力。乃眷戚畹。有偏其澤。蹶蹶李侯。維夫之特。虎頭食牛。猿臂貫蝨。王謂李侯。
汝吾手足。亦吾心腹。匪凡親屬。予酬汝能。予有爵祿。倏忽頭腰。黃金白玉。公拜稽首。輸忠益篤。歷事累朝。寵章彌 缺。
成廟臨御。年廿又六。出將入相。劬勞勳績。與國休戚。丹心白日。位逼三台。齒僅六袠。方隆物望。遽爾天奪。國南有縣。
其地云吉。封之若堂。祕此狀骨。不昧者存。庶托吾筆。<끝>
허백정집> 虛白先生續集卷之五> 墓碑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