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金海)는 경상남도(慶尙南道) 남동부(南東部)에 위치하는 고장으로 고대국가(古代國家)인 6가야(六伽倻) 중 금관가야(金官伽倻)의 중심지였으나 서기 532년(신라 법흥왕19) 신라(新羅)에 병합되어 금관군(金官郡) 또는 금관소경(金官小京)이라 불리우다가 680년(문무왕 20)에 김해(金海)로 개칭하여 소경(小京)을 두었다. 일찍이 가락국(駕洛國) 역사와 함께 문호(門戶)를 개방한 김해 김씨(金海金氏)는 신라 김씨(新羅金氏)의 알지계(閼智系)와 함께 우리나라 김씨(金氏)의 양대산맥(兩大山脈)을 이루어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 번성하여 왔다. 김수로왕 탄강설화
김해 김씨(金海金氏)의 연원(淵源)은 [삼국유사(三國遺事)]와 [가락 국기(駕洛國記)]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서기 42년(중국 후한 건무18) 가락국(駕洛國)의 아홉 촌장인 아도간(我刀干),여도간(汝刀干),피도간(彼刀干),오도간(五刀干),유수간(留水干),유천간(留天干), 신천간(神天干),등 9간이 백성들을 통솔 하고 있었다.
그해 삼월 계욕일(음력 첫뱀날에 액을 물리치기위해 목욕을 하고 회음하는 풍습)에 구간(九干)과 백성들이 시냇가에 모여 나라를 다스릴 임금을 점지해주십사 하고 신에게 정중한 의식을 올리자 가까운 구릉 구지봉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고 오색찬란한 서광이 하늘높이 이어지고 서기가 천지에 뻗치며 자줏빛 밧줄에 분홍빛 보자기로 쌓인 금합(金盒)에 여섯 개의 알(卵)이 담겨 있었다. 이에 신기하게 여긴 구간들은 상의한 끝에 그 금합을 가져와 아도간의 집에 두었는데 다음날 여섯 동자로 화신해 있었다.이 동자들은 모두가 용모가 준수하고 거룩하기만 했다. 그 중에서도 제일먼져 화생한 동자는 나날이 자라서 10여일후에는 키가 구척이요 얼굴은 용안이며 눈섭은 八字로 채색이 돌았고 눈은 중동의 아주 신이한 용모를 갖춘 현현장부의 기상이 넘쳐흘러 구간들은 놀라고 한편 기뻐서 엎디어 절을 올리며 이는 반 듯 군왕을 점지해주심이라 믿어 그달 보름날 즉위식을 갖고 임금으로 받들어 모시니 이 어른이 바로 가락국시조 김수로왕(金首露王)이시다.
성(姓)은 김(金)이라 하신것은 금알에서 화생하였기 때문이며 어휘(御諱)를 수로라 하신것은 여섯알중에서 제일 먼저 화생한 까닭이다. 대왕께서는 국호(國號)를 대가락(大駕洛)이라 정하시고 그 수도를 김해(金海)로 삼으시었다. 그리고 나머지 다섯분들도 차례로 영토를 정하여 분봉(分封)하였으니 아라가야 (阿羅伽倻 * 현 함안지방), 고령가야(古寧伽倻 * 현 함창지방). 대가야(大伽倻*현 함안지방), 성산가야 (星 山伽倻*현 성주),소가야(小伽倻*현 고성지방) 등 5가야였다.
수로왕 영정 허황후 영정
수로왕능
그후 10대(代) 구형왕(仇衡王)이 532년(법흥왕19) 신라에 항복하고 상등(上等)의 작위(爵位)와 가락(駕洛)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았으며, 그의 아들 무력(武力)이 각간(角干)을 역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