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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월간국학(國學) 원문보기 글쓴이: 정유철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정희량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성종 23년 1492년 4월5일 생원(生員) 정희량(鄭希良) 등과 진사(進士) 윤효빙(尹孝聘) 등 각각 1백 인을 뽑았다.
연산군 2년 (1495년)1월 성균관 생원 조유형이 성종에 대해 연산군이 불교식으로 재를 올리는 것이 불가하다고 아뢰어 죄를 얻다. 연산군은 유생 150명을 가두게 하고 의금부에서 추국을 하도록 했다. 승지 권경우(權景祐)가 의금부에서 유생을 추국한 안(案)을 아뢰니, 연산군은 “조유형(趙有亨)은 소문을 주장하여 지었고, 정희량(鄭希良)·이자화(李自華)는 혹 기초(起草)하고 혹 정서(正書)하였으니, 어찌 먼저 발언한 자를 모르랴. 만일 다 말하지 않는다면 형신(刑訊)해야 하리라.” 하였다.
그리고 며칠 후 “정희량(鄭希良)·이목(李穆)·이자화(李自華)는 외방(外方)에 부처(付處)하고, 그 나머지 조유형(趙有亨) 등 21인은 정거(停擧) 하라 "는 명령을 내렸다. 정거란 과거시험을 일정기간 보지 못하게 하는 벌이니 유생으로서는 상당히 엄한 벌을 받은 셈이다.
마침내 정희량(鄭希良)을 해주(海州)로, 이목(李穆)을 공주(公州)로, 이자화(李自華)를 금산(金山)으로 나누어 귀양 보내고, 생원 조유형(趙有亨) 등 21인의 과거 응시를 정지시켰다.
이에 성균관 생원(成均生員) 이공수(李公遂) 등이 상서하기를, “신 등이 두 번 상소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오니, 지극히 통민(痛悶)함을 이기지 못하옵니다. 신 등은 다행히 대행 대왕조에 나서, 대팽(大烹) 으로 양육을 받고, 연어(鳶魚)178) 의 교화에 목욕하였으므로 만분의 일이라도 갚을 방법을 생각하여, 뇌정(雷霆) 같은 위엄 아래에 꺾이지 않는 것이 없고, 만균(萬均)179) 같은 위압에 부서지지 않는 것이 없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오나, 본디 대행왕께서 사도(斯道)를 중히 여기심을 아는 까닭에, 진실로 한 가지 일에 있어서라도 성치(聖治)에 누(累)가 되고, 오도(吾道)에 관계가 있으면, 글을 연이어 항소(抗疏)하여 거푸 면류(冕旒) 를 번독(煩瀆)하게 하고, 광망하고 참람된 말로써 위로 천위(天威)를 범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대행 대왕께옵서는 진실로 학교는 풍화(風化)의 근원이고, 유생은 예의(禮義)의 무리로 여기셨는데, 한 번에 법으로 얽는다면 사도의 무너짐이 반드시 이로부터 시작될 것이니, 오도가 한 번 무너지면 우리의 정사도 따라서 그릇될 것입니다. 욕된 일을 참고 죄를 용서하지 않는 것이 없음이 참으로 천지(天地)가 포용하는 도량이니, 이것이 신 등이 부모를 잃은 듯이 성덕(盛德)을 사모하여 전하(殿下)의 뜰 앞에서 말을 다하는 까닭입니다. 근일에 신 등이 여러 번 과격히 상소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고, 이제 또 정희량 등이 불경(不敬)과 비방의 죄를 받았습니다. 이른바 불경이란 것은 진실로 불경함이 아니며, 이른바 비방이란 것도 진실로 비방함이 아닙니다. 임금께 충성하고 도(道)를 지키는 마음에 실로 가슴속에 격동하여 우연히 언사(言辭)에 나온 것이 그렇게 된 것이니, 어찌 위로 천청(天聽)을 거슬려 이렇게 될 것을 헤아렸겠습니까. 상소를 짓던 날에는 신 등도 다 반열 속에 있어서 일언 일사(一言一辭)라고 가부(可否)를 의논하지 않은 것이 없고, 모두들 ‘옳다.’고 한 뒤에야 글에 썼으니, 어찌 유독 집필자(執筆者)만이 하였다 하겠습니까. 만약 그 죄를 논한다면 누가 가볍고 누가 무겁겠습니까. 신 등이 듣건대 ‘죄는 같은데 벌을 다르게 함은 나라의 아름다운 법[美典]이 아니고, 일은 같은데 구차하게 면하는 것은 선비로서 편안하게 여길 바가 아니다.’ 하였으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신 등의 죄도 아울러 다스려, 면하기를 구하는 부끄러움을 없게 하여 주소서.” 하였으나, 듣지 아니하였다.
귀양은 얼마 가지 않아 풀리고 정희량은 이듬해 연산군 2년 12월 사가독서에 뽑혔다. 연산 2년 12월 15일 이조에서 사가 독서할 사람으로 김전·신용개 등 14인을 선출하여 아뢰다. 이조(吏曹)에서 사가 독서(賜暇讀書)할 사람으로 김전(金銓)·신용개(申用漑)·이주(李胄)·김일손(金馹孫)·강혼(姜渾)·이목(李穆)·이과(李顆)·김감(金勘)·남곤(南袞)·성중엄(成重淹)·최숙생(崔淑生)·정희량(鄭希良)·홍언충(洪彦忠)·박은(朴誾) 등 14인을 선출하였다.
연산군 3년 1497년 7월 11일 정희량은 연산군에게 임금 덕 10가지에 대한 상소를 올렸다.
예문관 대교(藝文館待敎) 정희량(鄭希良)이 상소하기를, “신은 보옵건대 지난달 27일 정전(正殿)에 낙뢰(落雷)가 있자 전하께서는 재앙을 만났다 두려워하여 허물을 들어 자책하시고, 교서를 내려 직언(直言)을 구하사 산간(山間)·초야(草野)에 묻힌 선비들로 모두 폐단을 진술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물며 신은 직책이 시종(侍從)인데 그 우직한 마음을 다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신은 듣건대 ‘인사(人事)가 아래에서 잘못되면 천변(天變)이 위에서 응하는 것이니, 재앙은 내린다 해서 반드시 화가 되는 것이 아니고 착한 일을 하면 길하게 된다.’ 하였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새로 보위(寶位)에 오르시어 기서(基緖)를 계승하셨으니, 이는 왕화(王化)가 융숭하느냐 쇠하느냐 하는 근본이며, 사직(社稷)이 편안하느냐 위태하느냐 하는 계기이며, 국가가 치평하느냐 혼란하느냐 하는 발단이며, 백성이 잘 사느냐 못 사느냐 하는 시초입니다. 그리고 군자와 소인이 진퇴(進退)·소장(消長)할 즈음이요, 천명(天命)과 인심이 이합(離合)·거취(去就)할 시기라고 하겠는데, 두어 해가 지나는 동안에 한 가지 선정(善政)을 낸다든가 한 마디 덕음(德音)을 내린다든가, 하나의 군자를 나오게 하고 하나의 소인을 물리친다 해서 신하들로 하여금 전하께서 태평 세대를 이룩하실 뜻이 있음을 알게 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옵고, 궂은 징조만 자주 일어나며 재변만 연첩으로 나타나니, 이는 하늘이 인애(仁愛)한 마음이 있어 전하께 견고(譴告)하여 깨닫도록 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스스로 깨닫지 못하여 자못 몸을 기울여 덕을 닦을 생각이 없으시다면 또 비상한 재변을 내릴 것이니, 이 시기는 전하께서 마음에 크게 경동하여 천선 개과할 때인 것입니다. 옛날에 태무(太戊)는 상곡(桑穀)의 변이 있었고, 고종(高宗)은 구치(?雉)의 요(妖)가 있었으나 몸을 기울여 덕을 닦고 황당하거나 안일하지를 않았으므로 상(商)나라가 중흥(中興) 하였으며, 송(宋)나라는 큰 수재(水災)가 있었으나 군자의 말을 받아들여 일찍이 조회 받고 늦게 물러나며, 죽은 자를 조상하고 병든 자를 위문하였으므로 해마다 풍년이 들었으니, 예로부터 천도(天道)는 무상해서 착한 일을 하고 착하지 못한 일을 함에 따라서 재앙과 경사가 각기 그 유(類)대로 이르는 것입니다. 임금이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으면 흥하지 아니함이 없으며, 임금이 교만하고 안일한 마음이 있으면 망하지 아니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옛날에 초(楚)나라 장왕(莊王)이 산천에 기도 드리기를 ‘하늘이 요(妖)를 보이지 않고 땅이 얼(?)을 나타내지 않으니, 하늘이 아마도 나를 잊은 것이 아닌가?’ 했습니다. 장왕은 허물을 하늘에 구했으며, 편안해도 위태로움을 잊지 아니하여 마침내는 패업(覇業)을 이룬 것입니다. 하물며 전하께서는 하늘이 견고(譴告)해 주는 은권(恩眷)을 받고 크게 경동(警動)하여 스스로 새롭게 할 생각을 가진다면 천재(天災)를 변경시킬 수 있고, 요얼(妖?)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경동(警動)하여 스스로 새롭게 하시겠다는 생각이 혹시 성경(誠敬)스럽지 못하시면 천재·요얼의 싹과 화란의 이르는 것이 장차 미묘한 사이에 일어나서 방비하고 염려하는 밖에서 나올 것이니, 어찌 삼가지 아니할 수 있습니까? 옛날에 위징(魏徵)이 십점소(十漸疏)를 올리니 당 태종(唐太宗)이 말하기를, ‘짐(朕)은 이제 과실을 들었으니 고쳐서 선도(善道)로써 끝마치기를 원한다.’ 하였고, 또 그 소(疏)를 가져다가 열지어 병장(屛障)을 만들어서 아침저녁으로 보고 반성을 하였으며, 겸하여 사관(史官)에게 녹부(錄付)하여 후세에 전하게 하였습니다. 지금 신은 미천하니 어찌 감히 위공(魏公)에게 비하겠습니까만, 그러나 신자가 나라를 근심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인즉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삼가 일을 조목별로 들어 올리오니, 한가한 틈에 보아 주시기를 원합니다.
1.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신은 듣건대 임금은 조정의 근본이고 마음은 또 임금의 근본이라 합니다. 그러나 성인과 광인(狂人)의 구분은 내고 들이는 즈음에서 말미암고, 치(治)하고 난(亂)할 기미는 잡아 두고 놓아 버리는 사이에 있습니다. 성색(聲色)과 취미(臭味)의 욕심으로 유인하지 못하게 하며, 교지(巧智)와 사위(詐僞)의 사(私)로써 다시 움트지 못하게 하며,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곳에서 더 살피고, 오직 정(精)하고 오직 일(一)한 곳에 이르러 그치면, 의리가 날로 충실하여 요·순(堯舜)과 상거가 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궁실(宮室)은 편안함을 위주로 하고 음식과 의복은 아름다움을 위주로 하며, 또 비빈(妃嬪) 시어(侍御)의 받듬과 유관(遊觀)·일예(逸豫)의 향락이 틈과 사이로 몰려들어 제재를 못하면, 물욕이 날로 불어나서 걸 주(桀紂)와 상거가 멀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므로 당 태종(唐太宗)은 말하기를, ‘임금은 한 마음을 공격하는 것이 많아 혹은 용력으로, 혹은 구변으로, 혹은 첨유(?諛)로, 혹은 기욕(嗜欲)으로써 눈 앞에 폭주하여 각기 스스로 팔리기를 구하므로 조금만 게으르게 하여 그 중 하나만이라도 받아들이게 되면 위망(危亡)이 따른다.’ 하였고, 송 태조(宋太祖)는 ‘대궐 문을 활짝 열어 막히고 가린 것이 없게 하라.’ 하고, 이르기를, ‘이야말로 내 마음에 조금만 사곡(邪曲)함이 있으면 사람이 모두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하였습니다. 큽니다. 그 말은 천하의 본(本)을 안 것이 아닙니까. 임금의 마음이 한 번 바르면 일이 바르지 않은 것이 없고, 임금의 마음이 한 번 사곡하면 정치가 사곡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맹자(孟子)께서 이른바 ‘임금이 바르면 바르지 않는 것이 없다.’ 한 것과, 동자(董子)가 이른바 ‘마음을 바르게 하여 조정을 바르게 한다.’ 한 것이 바로 그 말입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대궐 안에 깊숙이 계시니 사람이 보지 못한 것이라 여기지 마시고, 깊고 어두운 곳에서 한 일이니 나 혼자만이 안다 여기지 마소서. 그리고 근습(近習)을 대하시되 백관(百官)이 둘러 시립해 있을 때와 다름없이 하시고, 빈어(嬪御)를 대하시되 만 백성이 우러러보는 때와 다름 없게 하소서. 그러면 공경이 태만을 이겨서 길(吉)할 것이며, 호령(號令)을 발하고 시행함에 있어도 한결같이 정(正)에 나오지 않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만약 구중(九重) 궁궐 속의 일을 딴 사람이 누가 들으랴 하시고, 일념(一念)의 사이를 딴 사람이 누가 알 것인가 하신다면, 여희(驪姬) 의 야반(夜半)에 한 말과, 비연(飛燕) 의 분양(憤恙)의 말과, 명황(明皇)의 연리(連理) 의 맹세는 모두가 은미(隱微)한 데서 나왔는데 역사에 뚜렷이 실려 있사오니 어찌 크게 두려워할 일이 아닙니까. 이 때문에 군자(君子)는 반드시 그 혼자 있을 때를 삼가하는 것입니다.
2. 경연(經筵)을 부지런히 하실 것입니다. 신은 들으니, 임금은 세상에 뛰어난 자질이 없음을 조심하고, 그 뛰어난 자질을 지니고도 다스림을 구할 뜻이 없음을 조심하고, 그 다스림을 구할 뜻을 지니고도 학문을 좋아하는 실적이 없음을 근심한다 했습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가 구비하고 치적에 공효를 이루지 못한 일은 없습니다. 학문을 귀히 여기는 것은, 하늘과 사람의 이치를 알고 예절과 음악의 근원을 더듬어서 멀리 성현(聖賢)의 도덕적인 말씀을 보아 몸으로 실천하고 실용에 달하려는 것이며, 전 세대에 이미 지나간 자취로 인해서 그 치란(治亂)을 고찰하고 치란으로 인해서 그 득실한 소이를 거울삼아서 옛날을 상고하고 오늘날을 증거하는 데 있습니다. 그 요점은 또 성의(誠意)·정심(正心)·격물(格物)·치지(致知)의 공부에 근본하여,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의 효과를 거두는 데 있기 때문에, 제왕의 덕은 학문을 좋아하는 것으로 선무를 삼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부열(傅說)은 말하기를 ‘왕께서는 사람을 쓰되 듣는 것이 많은 자를 구하소서. 그것은 이 일을 잘 하려 하는 것입니다. 옛 교훈(敎訓)을 배워야 마침내 얻음이 있는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종시(終始) 일념을 학문에 두시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덕이 닦아질 것입니다.’ 했습니다. 그리고 성왕(成王)은 말하기를 ‘내가 총명하지도 못하고 공경하지도 못하지만 배워서 계속 밝혀 광명한 지경에 이르련다.’ 하였습니다. 무릇 고종(高宗)과 성왕 같은 조짐으로도 배움에 대해서 이와 같이 급하게 여겼는데, 하물며 한·당(漢唐) 이후의 중주(中主)야 말할 것이 있습니까. 옛날에 진 평공(晉平公)이 사광(師曠)에게 묻되 ‘내 나이가 70세라서 배우고는 싶지만 이미 늦은 것 같다.’ 하니, 사광은 아뢰기를 ‘어려서 학문을 좋아하는 것은 돋는 햇빛과 같고, 장성해서 학문을 좋아하는 것은 중천에 오른 햇빛과 같고, 늙어서 학문을 좋아하는 것은 병촉(炳觸)의 밝음과 같다.’고 하였으니, 병촉을 밝히고 가는 것이 어둠 속에 가는 것과 어느 것이 낫겠습니까. 지금 전하께서는 생지(生知)의 천품을 지니시고 춘추(春秋)도 한참 젊으시니, 경연에 부지런히 납시어 어진 선비들과 접대해서 선도(善道)를 개진(開陳)하고 치체(治體)를 강론하게 하여 간단 없는 공부를 하시면, 덕성(德性)이 함양(涵養)되어 총명이 날로 넓어질 것입니다.
3. 간쟁(諫諍)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신은 들으니 임금은 외로운 한 몸으로 억조(億兆) 의 위에 처하여 눈과 귀가 두루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대간(臺諫)을 설치하여 밝음이 미치지 못하는 것을 보충한다 합니다. 그러나 임금의 형세는 그 높음이 하늘 같고, 그 위엄은 뇌정(雷霆) 같고 그 성냄은 상설(霜雪) 같은데, 누가 감히 하늘의 존엄을 거슬려 무서운 뇌정에 항거하고 늠름한 상설을 범하겠습니까? 임금이 허물 고치기에 인색하지 않아야 사람들이 모두 당론(?論)1696) 하기를 즐거워 하고, 임금이 간하는 말에 따르기를 물 흘러가듯해야 사람들이 모두 진언(盡言)하기를 즐거워할 것입니다. 임금이 한 번 남의 말 듣기를 싫어하고 자기 멋대로 할 뜻을 두면 선비들이 모두 입을 다물고 혀를 놀리지 않아 괄낭(括囊) 하고 물러가 움츠리고, 수서(首鼠) 같이 돌아보고 꺼려서 말하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백성의 원성이 비등하여도 임금은 알 길이 없고, 기강(紀綱)이 해이해도 임금은 알 길이 없어 귀머거리와 소경과 같아, 마침내는 멸망하는 지경에 이를 것입니다. 이는 《주역(周易)》에 이른바 ‘상하가 교부(交孚)되지 못하여 천하에 나라가 없다.’고 한 것입니다. 옛사람이 이르되 ‘대간(臺諫)의 말이 승여(乘輿)에 미치면 천자(天子)가 안색을 고치고, 일이 낭묘(廊廟)에 관계되면 삼공(三公)이 직위를 피한다.’ 하였으니, 이는 대간을 중히 여긴 것이 아니라 결과는 임금의 권위를 중히 여긴 것입니다.
저 송(宋)나라 왕보지(汪輔之)는 부필(富弼)에게 말하기를 ‘승상(丞相)은 대간의 풍지(風旨)만 받드소서.’ 했습니다. 부필은 어진 재상이로되 이 말을 그르다 아니했는데, 근년에 와서는 대간과 재상이 서로 알력이 생겨서, 대간이 말하는 것을 재상이 그르게 여기어 심지어는 정사가 대각(臺閣)에게 돌아갔다는 논(論)과 더불어 분변하겠다는 말까지 나와 조성의 불화를 불러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찌 사직(社稷)의 복이라 하겠습니까. 그로부터 온 바를 추구해 보면 전하께서 반드시 먼저 길을 열어 놓았습니다. 왜냐하면 즉위하신 뒤로 사람의 말을 강력히 거부하여 간하는 말에 거스름없이 좇는 성의가 없기 때문에, 대간이 그 정성을 다하지 못하여 점점 간격이 생기는 근심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대간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그들이 정론(正論)을 가지고 있는 때문입니다. 대간의 지위에 있는 자라 해서 반드시 다 군자라고 볼 수도 없으니 진실로 모두 군자가 아니라면 그 논한 말도 역시 모두가 바르다고만 못할 것이니, 능히 기강을 중하게 못할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옵서는 충직(忠直)한 자를 선발해서 대간의 자리에 두고, 허심하게 그 말을 받아들이되 혹 얻어듣지 못할까 염려하시면 아름다운 말이 날로 나와 도유 우불(都兪??)의 기풍이 있을 것입니다.
4. 현(賢)과 사(邪)를 분변하는 것입니다. 신은 들으니 군자(君子)를 안으로 하고 소인을 밖으로 하면 군자의 도(道)는 자라고 소인의 도는 소멸할 것이니, 이는 《주역(周易)》의 태(泰)가 된 소이요, 소인을 안으로 하고 군자를 밖으로 하면 소인의 도는 자라고 군자의 도가 소멸할 것이니, 이는 《주역》의 비(否)가 된 소이라 합니다. 옛부터 군자는 수효가 항시 적고 소인은 수효가 반드시 많으므로 군자가 이기지 못하고 소인이 반드시 이깁니다. 군자는 중히 여기는 것이 절의(節義)요, 좋아하는 것이 염치(廉恥)이므로 군자 하나가 물러나면 뭇 군자가 각기 유로써 물러갑니다. 소인은 중히 여기는 것이 이록(利祿)이요, 좋아하는 것이 아첨[?邪]이므로 음으로 서로 지원을 하고 붕당(朋黨)을 지어 천 가닥 길과 만 가지 방법으로 기어이 진출을 얻고야 맙니다.
임금이 된 이는 누가 군자를 등용하여 흥왕하고 싶고 소인을 제거하여 다스리고 싶지 않겠습니까만, 그러나 간(奸)이 혹 충(忠) 같기고 하고, 알(?) 이 혹 직(直) 같기도 하며, 교(巧)가 혹 눌(訥) 같기도 하고, 탐(貪)이 혹은 염(廉) 같기도 하여 잡유(雜蹂)1700) 가 아울러 진출해서 시청을 현혹시키니, 분변하기를 일찍이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특히 그 밝지 못함이 근심인 것입니다. 사람의 행실을 보고 사(邪)와 정(正)을 살피는 것을 명(明)이라 이르고, 사람의 말을 듣고서 능히 시비를 판단하는 것을 총(聰)이라 이르고, 사와 정을 구분하고 시비를 분변하여 간(奸)이 능히 마음을 변동시키지 못하고 영(?)이 능히 뜻을 현혹시키지 못하는 것을 강(剛)이라 이르고, 옳은 것을 취하고 그른 것을 버리며 사를 내치고 정을 등용해서 확고하게 의심하는 바가 없는 것을 단(斷)이라 이릅니다. 전하께서는 이 네 가지를 고집하여 본심의 정(正)에 참작을 하시면 현사(賢邪)를 분변하기가 어렵지 않고, 군자가 조정에 서기를 원할 것입니다.
5. 대신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신은 들으니 ‘임금이 더불어 천위(天位)를 함께 하는 것은 오직 대신이며, 그 직위가 백관을 거느리고 만사를 다스리며, 그 도(道)는 임금의 덕을 기르고 음양(陰陽)을 다스리며, 밖으로 사이(四夷)를 진압하고 안으로 백성을 무마하며, 말은 반드시 국가의 이익을 돌아보고 행동은 뭇사람의 마음을 감복시키며, 평탄하거나 험하거나 한결같은 절개로 종시에 맡길만 해야 한다 합니다.’ 이것은 대현(大賢)이 아니고는 능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러므로 신중히 선택하여 전적으로 맡기며, 전적으로 맡기어 성공하기를 책(責)하소서. 신중히 선택하지 않으면 등용한 것이 혹 그 사람이 아닐 수 있으며, 전적으로 맡기지 않으면 성공하기를 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위를 높이고 녹(祿)을 후히 한다 해서 공경하는 것이 아니며 말을 들어 주고 계책을 따라 준다 해서 공경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을 부리면서 과연 어질다면 위임을 하되 의심이 없고 일에 임해도 현혹되지 않겠으나, 혹시 어질지 못하여 간사하기가 우세기(虞世基)나 이임보(李林甫) 같은 자가 있다면 반드시 동요(棟撓) 의 흉(凶)과 절족(折足) 의 근심이 있는 것입니다. 대저 삼공(三公)이 육경(六卿)을 통솔하고 육경이 백료(百僚)를 다스린 뒤에야 각기 그 직무를 다하게 되어 모든 정사가 닦아질 것이온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아, 육경이 일을 다스리고 삼공은 인원만 갖추었을 뿐입니다. 삼공은 인원만 갖추고 자리만 충당했으면서 국사에 잘못이 있어 천지가 변을 보이면 반드시 삼공에게 죄를 돌리니, 오늘날에 경륜의 재주를 가지고 묘당(廟堂)의 위에 있는 자도 역시 난처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태조 대왕께서 창업 수통(創業垂統)하시고, 의정부(議政府)로 하여금 서사(署事)케 하여 만세의 규모를 삼게 하시니 태종 대왕을 지나서 문종 대왕에 이르도록 구장(舊章)을 준수하여 모두 태평의 정치를 이룩하였습니다. 세조 대왕께서 비록 일시의 폐단을 바로잡았으나 만세의 법은 아니옵니다. 조종(祖宗)의 고사는 경솔히 고쳐서는 아니된다 이른다면 세조 대왕께서 일시의 폐단을 바로잡은 것은 고칠 수 있을지언정, 태조 대왕의 창업 수통하신 규모는 결코 영원히 개혁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오니, 바라옵건대 전하는 대신을 예우하시고 공경하시여 다시 서사를 행하게 하시고 신임하여 변경을 마시고 체통을 잃는 바 없으시면 모든 정사가 모든 빛나서 당우(唐虞)의 정치를 얻어보게 될 것입니다.
6. 내시를 억제하는 것입니다. 신은 들으니, ‘임금이 내시를 친밀히 하고 총애하오면 마치 범을 기르는 자가 스스로 후환을 끼치는 것과 같다.’ 합니다. 그들이 궁금(宮禁)을 무상 출입하여 더불어 친압하므로 임금의 안색을 잘 살펴 임금의 뜻에 영합합니다. 명을 받으면 어기고 거역하는 근심이 없고, 영을 전달하면 비위를 잘 맞추기도 합니다. 이것이 무심코 나오는 것 같지만, 모두가 음으로 증우(憎憂)의 정을 펼칩니다. 그러니 인주께서 어찌 믿지 않겠습니까. 옛부터 환관의 직책은 등촉(燈燭)을 소제하는 데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아 노예로써 출납(出納)의 소임을 제수했으므로 무릇 진언(進言)하는 자는 모두가 그를 경유하여 진달(進達)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대간의 진언을 승지(承旨)에게 전달하면 승지는 또 내시에게 전달합니다. 말이 세 번이나 전달되면 어찌 시비의 뒤바뀜이 없겠습니까. 그런데 누가 기휘하지 않고 직언을 해서 좌우의 친근한 사람에게 원망을 사고자 하겠습니까.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쾌히 강단을 내리시어 세종 대왕의 고사에 의거하여 크나 작으나 진언(進言)하는 자는 혹 인견도 하시고 혹 승지로 하여금 직접 아뢰게 하여, 이목을 넓히시고 내시가 국정에 간여하는 것을 막으소서.
7. 학교(學校)를 숭상하는 것입니다. 신은 들으니 학교는 어진 선비들의 기관이요, 풍화(風化)의 근원이라, 삼대(三代)가 숭상함을 같이 하였음은 모두 인륜(人倫)을 밝히자는 것이라 합니다. 우리 국가도 안으로 성균관(成均館)을 세워서 공·경(公卿)의 자제들을 양성하고 밖으로 향교(鄕校)를 설립하여 민간의 준수(俊秀)한 자를 교육합니다. 이것이 곧 성주(成主)의 끼친 제도입니다. 대팽(大烹)1703) 을 내려주어 정아(菁莪)1704) 의 교화를 넓히고 사유(師儒)를 선택해서 모범의 책임을 맡겼으니, 가르치심이 매우 성실하고 은혜가 지극히 거룩하십니다. 그러나 고비(皐比)의 위에 처한 자가 혹 그 사람이 아니면 태만을 되풀이 하여 헛되이 국고(國庫)만 소비하고 세월만 지연시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황폐하고 해이하여 성상(聖上)의 작성(作成)하시는 뜻을 저버리니 어찌 마음 아프지 않겠습니까.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몸소 행하시고 깊이 체득하시고 유(儒)를 존숭하시고 도(道)를 중히 여기시고 선성(先聖)을 예로 뵈시고 다사(多士)에게 어려운 곳을 문의하소서. 또 어진 스승을 골라 배치해서 엄격하게 훈도를 하시오면, 가르침에 성규(成規)가 있는데 어찌 인재가 나지 않을 것을 걱정하겠습니까. 그윽이 보건대 요사이 해마다 시험을 보여 선비를 뽑았습니다만 그러나 벼슬자리는 한정이있는데 별도로 서용(敍用)하는 길이 없어 과거에 급제해서 나온 자들이 모두 권지(權知)1705) 로 머물러 있습니다. 또 금년 가을에 뽑고 또 명년 봄에 뽑으면 비록 십 년을 기다려도 모두 등용되지 않아 권지로 끝마치는 자가 그 사이에 반을 될 것입니다. 이 어찌 국가에서 과거를 베풀어 선비를 뽑는 본뜻이겠습니까. 대신에게 수의하여 전직(轉職)의 길을 넓히시면 어진 인재가 엄체(掩滯)되는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
8. 이단(異端)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신은 들으니, 무릇 도(道)란 하나뿐이니, 이른바 도는 요(堯)·순(舜)·우(禹)·탕(湯)·문·무(文武)·주공(周公)이 서로 전수한 도이고, 노자(老子)와 불씨(佛氏)가 이른바 청정(淸淨) 적멸(寂滅)의 도는 아니며, 삼대(三代) 이상에는 인심이 바르어 도가 하나로 되었다가 삼대 이후는 사(邪)와 정(正)이 양립하므로 도가 가닥이 났다 합니다. 더구나 우리 나라는 불씨의 화가 가득차고 스며들어, 신라 때에 시작되었고 고려 때에 넘실거려, 수 천 년을 내려오는 동안 그에 골몰하고 빠졌으나 깨닫는 자가 없었습니다. 우리 태종 대왕께서 하늘이 내신 맑은 성학(聖學)으로서 전조(前朝)에 쌓인 폐습을 비춰 보아 사원(寺院)을 혁파하고 민전(民田)을 삭탈하여 대정(大正)의 도를 열어 놓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성종 대왕께서 강상(綱常)을 부식(扶植)하시고 이단을 제거하여 수명을 연장하는 재(齋)를 개혁하시고 도승(度僧)의 법을 혁파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즉위하신 처음에 제일 먼저 밝은 교서를 내려 불교를 배척하고 공자를 존숭하는 뜻을 보이셨으니, 이것은 우리 도에 일대 다행한 일입니다. 그러나 중을 과거 보이는 법이 《국전(國典)》에 실려 있으며, 대도회에는 아직도 두 종파가 존재하여 화복(禍福)을 과장해서 인심을 현혹하고 부역(賦役)을 도피하여 군액(軍額)이 날로 줄어갈 뿐 아니라, 놀고 입고 놀고 먹어 민생을 해치고 있으니, 이는 모두가 우리 도(道)를 해치는 명충(螟蟲)이며 왕정(王政)에 큰 좀이옵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그 근본을 뽑아 버리시고 사예(邪穢)를 깨끗이 씻어 버리소서. 양종(兩宗)을 철폐하시고 선법(選法)을 삭제하시고 승니(僧尼)를 도태시켜 모두 속(俗)으로 돌아오게 하옵시면, 나라에는 이정(異政)이 없고 민간에는 이교(異敎)가 없어서 이 백성은 지극한 정치의 혜택을 입게 될 것입니다.
9. 상벌(賞罰)을 삼가는 것입니다. 신은 들으니 작상(爵賞)이란 천하의 작상이지 임금의 작상이 아니며, 형벌이란 천하의 형벌이지 임금의 형벌이 아니라 합니다. 임금이 천하의 권병(權柄)을 쥐고 천하 사람을 다스리는 데 있어 오형(五刑)과 오용(五用)은 하늘이 내리는 주벌이며 한 사람의 성난 바를 쾌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오복(五服)과 오장(五章)은 하늘의 명령이며 한 사람의 기뻐하는 바에 사(私)를 쓰라는 것이 아닙니다. 상을 주는 데 공로에 해당되지 않고, 벌을 내리는 데 죄에 해당되지 않으면 한 사람을 상줌으로써 온 천하가 모두 해이하고, 한 사람을 벌줌으로써 온 천하가 원망을 합니다. 그 폐단이 장차 권장하고 징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이니, 그렇다면 상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지극히 공정하고 신중히 쓰는 데 있습니다. 옛날에 한(韓)나라 소후(昭侯)는 떨어진 바지라도 아끼면서 좌우에 있는 공 없는 자에게 내려주지 않았으며, 당(唐)나라 선종(宣宗)은 복장(服章)을 아끼므로 당시에 배자(緋紫)를 얻은 자는 그것을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이것은 공을 상주는 데 지당한 처사입니다. 정공(丁公)이 한(漢)나라에 귀순하니 고조(高朝)는 불충(不忠)하다고 베었으며, 소평(昭平)이 사람을 죽이니 무제(武帝)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를 베었습니다. 이것은 죄를 벌주는 데 지당한 처사입니다. 그윽이 보건대 요사이는 작상(爵賞)이 참람하고 형벌이 온당치 못해 외척(外戚)은 죄가 있는 자도 방치하고 다스리지 않으며 친척은 공이 없는 자도 은혜가 가해집니다. 그래서 명이 자주 변하니 중외(中外)가 해체(解體)되었습니다. 이는 작은 연고가 아니옵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무편 무당(無偏無黨)하고 지공 지명(至公至明)해서, 상은 사정으로써 주지 마시고 벌은 미움으로써 주지 않으시면, 착한 일을 하는 자는 권장이 되고 악(惡)한 일을 하는 자는 두려워할 것이니 상하는 열복할 것이요, 조정의 기강은 크게 떨칠 것입니다.
10. 재용(財用)을 절약하는 것입니다. 신은 들으니 천지에서 나는 재화(財貨)는 숫자가 한정되어 민간에 있지 아니하면 관(官)에 있다 합니다. 그 취하는 것이 도(道)가 있고 그 쓰는 것이 절제가 있으면 민력(民力)은 여유가 있어 의식(衣食)이 불어날 것이니, 이른바 백성이 풍족하면 임금이 어찌 풍족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며, 취하기를 그 도로써 않고 쓰기를 절약하지 않으면 횡포한 세금과 과다한 추렴이 백성의 이익을 침해할 것이니, 이른바 백성이 풍족하지 못하면 임금이 어찌 풍족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송 태조(宋太祖)는 말하기를 ‘나는 천하를 위하여 재물을 지키고 있는데 어찌 함부로 쓰겠느냐.’ 했습니다. 이 말은 백성의 근본을 아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국가가 비록 승평(昇平) 무사하고 부고(府庫)도 충실하다 하지만 밖으로 도이(島夷) 에게 보내는 것은 부득이한 것이 있어 징수를 많이 하고, 안으로 중을 받드는 비용이 있어, 그만두어도 될 수 있는데도 앉아서 그 이익을 절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복어(服御)의 아름다움과 토목(土木)의 역사와 급하지 않은 사무와 명분없는 하사(下賜)가 더욱 번다하게 있을 것이므로 용도는 자연 절약이 되지 않아, 사치의 풍습이 날로 더욱 심한 것이니, 이는 세금의 부과가 무겁게 되는 까닭이며, 백성의 원망이 일어나는 소이입니다. 수령(守令)들은 두회 기렴(頭會箕斂) 하면서 기어이 모두 받겠다 해서 되[升]를 말[斗]로 가산하고 말을 가마로 가산해서 상과(常科) 외에도 속이는 방식이 여러 가지입니다. 그래서 까다로운 법으로 몰아대니 고향을 등지고 떠돌게 됩니다. 전하께서는 구중(九重) 안에 계시어 팔진(八珍)의 음식을 누리시니 어찌 한 창고에 낱알 하나가 모두 백성 지고(脂膏)와 혈육(血肉)인 것을 알겠습니까.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어진 정사를 베풀며 부세(賦稅)를 적게 받고 요역(?役)을 가볍게 하소서. 법에 없는 염출을 혁파하고 전조(田租)의 수납(收納)을 경감하여 몸소 절약과 검소를 실행하되, 주(周)의 성왕(成王)·강왕(康王)과 한(漢)의 문제(文帝)·경제(景帝) 같이 하시면 돈꿰미가 썩고 곡식이 묵어서 백성이 모두 부유할 것입니다.
전하께서 직언(直言)의 문을 열으시어 저희들이 곧은 말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났습니다. 전하께서 진실하게 구언(求言)을 하시는데 저희들이 진언(進言)의 정성이 없다면 죽어도 남은 죄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을 구함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말을 들어줌이 어려운 것이요, 말을 들어줌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말을 써줌이 어려운 것이니, 말이 착한 것이 있으면 마음에 유념하시고 말이 채용할 만한 것이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쾌히 시행하시면 사람들이 모두 ‘전하의 말 구하심이 성심에서 나온 것이다.’ 하여 모두 간담(肝膽)을 피력(披瀝)하여 말을 다하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겠으나, 만약 구하기를 성심으로써 않고, 말해도 써주지 않으면 사람들이 모두 ‘전하의 말 구하심은 짐짓 고사(故事)를 흉내낸 것이다.’ 할 것입니다. 뒤에 비록 말을 구한다 해도 누가 다시 말을 하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쓸 만한 말이 있고 쓸 수 없는 말이 있다.” 하매, 정원(政院)에서, “해사(該司)에 내려 계획을 세워 시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리하라.’고 전교를 내렸다.
성균관 지사(知事) 어세겸(魚世謙), 동지(同知) 윤효손(尹孝孫)·김응기(金應箕), 대사성(大司成) 반우형(潘佑亨)이 홍문관과 정희량(鄭希良)의 소(疏)가 자기들을 논박한 것이라 해서 직위를 인피(引避)했다. 그리고 세겸은 다시 아뢰기를,
“그 소장은 사표(師表)가 적격자가 아니라는 데서 기인했습니다. 그들은 어린 아이가 아닌데, 어찌 듣고 본 바가 없이 함부로 말했겠습니까. 청컨대 재덕(才德)이 출중한 자를 가려서 맡기소서. 신의 생각으로는 비록 다시 정밀하게 선택을 한다 해도 효손 등과 같은 자는 없다고 여기옵니다. 유생(儒生)이 책을 끼지 않고 청금(靑衿)을 입지 않으며 살찐 말을 타고 가벼운 갖옷을 입는 것은 모두 왕년에 없었던 풍속입니다. 그러나 장관(長官)이 도로에서 금할 수 없습니다. 이세좌(李世佐)가 대사헌(大司憲)이 되어서 책을 끼지 않은 유생(儒生)을 태학(太學) 가운데에서 벌(罰)하자 논하였으니, 이 법이 비록 세쇄한 것 같사오나, 만약 검거하기로 한다면 역시 이와 같이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또 유생이 체면을 무릅쓰고 자급(資級)을 구걸하여 벼슬길을 횡으로 나가는 자가 과연 많습니다. 국가에서도 역시 생원(生員)·진사(進士)에 합격한 자를 참봉(參奉)으로 채용하고 있는데, 이 무리들이 비록 배우지 않은 재상가의 자제보다는 낫지만, 한 번 벼슬길에 나가게 되면 드디어 그 업을 폐하고 맙니다. 옛법에 ‘유생은 40세가 되어야 비로소 벼슬한다.’ 하였으니, 지금 이 법을 다시 밝히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바가 옳도다. 그러나 한 가지 법을 세우면 한 가지 폐단이 생기기 마련이니, 만약 옛적에 그 법이 없었다면 지금 따로 과조(科條)를 세운다는 것은 불가하다. 상고하여 아뢰라. 그리고 ‘40세가 되어야 비로소 벼슬한다.’는 법이 또한 있느냐? 만약 쓸 만한 사람이라면 어찌 40세까지 기다리랴. 생원·진사는 과연 문음(門蔭)이 있는 자제들의 불학(不學)한 자보다 나은 것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이다. 그러나 지금 졸지에 고칠 수는 없다.”
하였다.
정희량은 이후 기사관이 되었다.
1년 후 연산군 4년 7월 정희량은 무오사화에 연루되었다. 윤필상 등이 의논하여 서계하기를,
“김일손(金馹孫)·권오복(權五福)·권경유(權景裕)는 대역(大逆)의 죄에 해당하니 능지 처사(凌遲處死)하고, 이목(李穆)·허반(許磐)·강겸(姜謙)은 난언 절해(亂言切害)의 죄에 해당하니 베어 적몰(籍沒)하고, 표연말(表沿沫)·정여창(鄭汝昌)·홍한(洪瀚)·무풍부정 총(武豊副正摠)은 난언(亂言)을 했고, 강경서(姜景敍)·이수공(李守恭)·정희량(鄭希良)·정승조(鄭承祖)는 난언(亂言)한 것을 알면서도 고발하지 아니하였으니 아울러 곤장 1백 대에 3천 리 밖으로 내쳐서 봉수군(烽燧軍) 정로한(庭爐干)으로 정역(定役)하고, 이종준(李宗準)·최보(崔溥)·이원(李?)·강백진(康伯珍)·이주(李胄)·김굉필(金宏弼)·박한주(朴漢柱)·임희재(任熙載)·이계맹(李繼孟)·강혼(姜渾)은 붕당(朋黨)을 지었으니 곤장 80대를 때려 먼 지방으로 부처(付處)하고, 윤효손(尹孝孫)·김전(金詮)은 파직을 시키고, 성중엄(成重淹)은 곤장 80대를 때려서 먼 지방으로 부처하고, 이의무(李宜茂)는 곤장 60대와 도역(徒役) 1년에 과하고, 유순정(柳順汀)은 국문하지 못했으며, 한훈(韓訓)은 도피 중에 있습니다.”
하고, 따라서 대간(臺諫)들도 역시 붕당(朋黨)으로 논한 것을 청하였다.
연산군이 전교하기를,
“유형(流刑)이나 부처(付處)를 받은 사람들은 마땅히 15일 노정(路程) 밖으로 정배(定配)해야 한다.”
하니, 필상(弼商) 등이 서계하기를,
“강겸(姜謙)은 강계(江界)에 보내어 종을 삼고, 표연말(表沿沫)은 경원(慶源)으로, 정여창(鄭汝昌)은 종성(鍾城)으로, 강경서(姜景敍)는 회령(會寧)으로, 이수공(李守恭)은 창성(昌城)으로, 정희량(鄭希良)은 의주(義州)로, 홍한(洪瀚)은 경흥(慶興)으로, 임희재(任熙載)는 경성(鏡城)으로, 총(摠)은 온성(穩城)으로, 유정수(柳廷秀)는 이산(理山)으로, 이유청(李惟淸)은 삭주(朔州)로, 민수복(閔壽福)은 귀성(龜城)으로, 이종준(李宗準)은 부령(富寧)으로, 박한주(朴漢柱)는 벽동(碧潼)으로, 신복의(辛服義)는 위원(渭原)으로, 성중엄(成重淹)은 인산(麟山)으로, 박권(朴權)은 길성(吉城)으로, 손원로(孫元老)는 명천(明川)으로, 이창윤(李昌胤)은 용천(龍川)으로, 최보(崔溥)는 단천(端川)으로, 이주(李胄)는 진도(珍島)로, 김굉필(金宏弼)은 희천(熙川)으로, 이원(李?)은 선천(宣川)으로, 안팽수(安彭壽)는 철산(鐵山)으로, 조형(趙珩)은 북청(北靑)으로, 이의무(李宜茂)는 어천(魚川)으로 정배(定配)하소서.”
하니, 왕이 좇았다.정희량은 평안도 의주로 귀양을 갔으나 다음해 김해로 옮겨간다. 평안도가 흉년이 들었기 때문이다. 정희량은 연산군 7년(1501년) 해배되었다. 정희량은 다시 벼슬살이를 하지 않았다.
연산군 8년 1502년 5월 14일 승지들이 전 대교 정희량을 찾도록 건의하다.
전 대교(待敎) 정희량(鄭希良)이, 고양군(高陽郡)에서 어머니의 묘를 지키다가 병으로 인해 풍덕현(?德縣) 종의 집에 피해가 우거(寓居)하더니, 이내 도망해 버려 간 곳을 알 수가 없었다. 승지들이 아뢰기를,
“희량은 오랫동안 경연(經筵)에 모시던 사람인데, 지금 미친 병을 얻어 집을 나가서 간 곳을 알 수가 없으니 청컨대 경기·황해 두 도의 감사로 하여금 널리 찾도록 하소서.”
하니, 전교하였다.
“착하지 못한 사람을 무엇 때문에 찾겠는가?”
하였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희량은 총명하고 민첩하며 널리 배워 글을 잘하였다. 유생(儒生) 때에 상소하여 시사(時事)를 논하다가 해주(海州)로 귀양갔었고, 과거에 급제, 예문관(藝文館)에 뽑혀 들었는데, 성질이 온자(蘊藉)하지 못하고 자부심이 너무 강하여 남이 자기 위에 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복서(卜書) 보기를 좋아하여 매양 일이 있게 되면 반드시 길(吉)한가 흉(凶)한가를 먼저 점쳤었다. 무오 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기 전에 일찍이 친구에게 말하기를 ‘아무 해에는 반드시 사림(士林)의 화가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화가 일어나자, 남쪽 고을로 귀양갔다가, 이때 마침 사면(赦免)되어 고양군(高陽郡)에서 어머니의 묘를 지켰다. 상기(喪期)가 끝나려 하자, 벽곡(?穀)하며 말도 하지 않았다. 풍덕군(?德郡)으로 이거(移居)하여서는 여러 가지 버섯과 풀들을 캐어먹으며 한 잔의 물도 마시지 않기를 열흘 또는 한 달이 되도록 하다가, 단오(端午)날 몸을 빼서 도망해 버려 간 곳을 알 수가 없었다. 그 가족이 찾아서 해변(海邊)에 이르니, 다만 신 두 짝이 물가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어떤 이는, ‘갑자 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물에 빠져 죽은 것이었다.’ 하고, 어떤 이는, ‘거짓 미쳐 세상을 피하며 지금도 아직 살아있다.’고 한다.”
연산군 5년 2월22일 <<성종실록>>편수관에 뽑히다 선무랑 행 예문관 봉교(宣務郞行藝文館奉敎) 정희량(鄭希良)
첫댓글 헉.. 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