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柳洞)
● 율목동(栗木洞)
● 긴담모퉁이
유동은 구한말 인천부 다소면 송림리에 속해있던 동네다.
‘우각리(牛角里)’라 불리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우각리’와 ‘유정(柳町)’으로 나누어졌다. 이 ‘유정’이 광복 뒤에 일본식 행정구역 이름인 ‘町(정)’을 ‘洞(동)’으로 바꾸어 유동이 됐다.
유동은 원래 버드나무〈柳:버들 류〉가 많았기 때문에 ‘버드나무골’, ‘버들골’ 등으로 불리다가 이것이 한자로 바뀌어 유동이 됐다고 한다. 하지만 이곳에 실제로 버드나무가 많았는지는 제대로 확인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는 곳곳에 ‘유촌(柳村)’이나 ‘버들골’, ‘버들고개’ 등의 땅 이름이 있다. 이들은 대부분 버드나무가 많아서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버드나무 때문이 아니라 ‘버드러진 곳’이라는 뜻에서 생긴 이름이 많다.
‘버드러지다’ 라는 말은 “바깥쪽으로 벌어졌다”라는 뜻이다.
앞으로 튀어나온 이빨을 말하는 ‘뻐드렁니’ 같은 말이 여기서 나온 것이다. 땅 이름에서는 버드러진 곳에 자리 잡은 마을을 ‘버드러지’ 등으로 불렀다. 그런데 이 말을 한자로 바꾸는 과정에서 ‘버드러졌다’는 말을 ‘버드(나무)’로 잘못 생각해 ‘유혼’ 또는 ‘양화촌(楊花村)’ 등의 이름이 생기곤 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유촌(柳村)’과 같은 이름이 생기고 나면 흔히 “예전 이곳에 버드나무가 많았다’’거나 “유씨(柳氏) 집안사람들이 많이 살았다”는 등의 이야기가 생기곤 한다. 그 땅의 이름의 원래 뜻을 모르기 때문에 사실이 아닌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곳 유동도 실제로 버드나무가 많았다는 사실이 입증되지 않는다.
이런 면에서 유동은 바로 옆 동네인 율목동이 다소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을 따져 해석할 필요가 있다. 율목동 쪽에서 볼 때 유동은 ‘앞에 벌어져 있는 동네’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다르게 이곳 유동을 일본인들의 화류계(花柳界) 문화와 연관지어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유동에서 멀지 않은 선화동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식 사창가(私娼衝)인 유곽(遊廓)이 있어 ‘화개동(花開洞)’, 일본식으로는 ‘화정(花町)’이라 불렸다. 화류계 여인들을 ‘꽃〈花〉’에 비유한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이곳 유동에도 유곽을 운영한 바 있다.
1933년에 일본인들이 쓴 「인천부사」에 보면 “유정(柳町) 탈곡공장이 있는 자리에 조선인 유곽을 만들기 위해 온돌이 있는 건물을 만들었으나 잘 되지 않았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따라서 역시 화류계 여인들을 말하는 단어 ‘노류장화(路柳墻花)’를 연상해 ‘柳’자를 붙인 ‘柳町/柳洞’이라는 이름을 만들었을 것이라는 해석인데,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는 애키다.
율목동
유동과 붙어 있는 율목동은 우리말로 ‘밤나무골’ 또는 발음이 조금 바뀐 ˙밤니무골’이라 불렸던 곳이다. 이것이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에 의해 한자 그대로 옮겨져 ‘율목리(栗木里)’ 또는 ‘율목정(栗木町)’으로 불리다가 광복 뒤인 1946년에 그대로 율목동이 됐다.
‘율목’에 대해서는 흔히 이곳에 밤나무가 많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갖게 됐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실제로 밤나무가 많았는지는 별다른 자료가 없어 확인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곳이 아니어도 우리나라에는 ‘밤나무골’이나 이 말이 줄어든 ‘밤골’이라는 이름을 가진 동네가 많다. 이를 한자로 바꾼 이름 중 하나가 ‘율곡(栗谷)’으로, 조선시대의 유명한 성 리학자 율곡 이이 선생도 고향의 동네 이름을 호(號)로 쓴 것이다. 아마도 율곡 선생의 동네 역시 당시에는 ‘율곡’ 보다 ‘밤나무골’ 이나 ‘밤골’이라는 우리말로 더 많이 불렸을 것이다.
이런 이름을 가진 동네는 거의 모두가 밤나무가 많았던 곳이라고 설명된다. 그 중에는 실제로 그런 곳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실 여부가 확인되지 않는데 막연히 그렇게 설명하는 곳이 더 많다.
이런 경우는 우리말 ‘반골’이나 ‘밭골’에서 발음이 바뀐 이름의 동네일 가능성이 크다.
먼저 ‘반골’의 ‘반’은 ‘벌어졌다’는 뜻의 우리 옛말 ‘발아지다’에서 그 발아진 모습을 나타낸 말이다. 동네를 앞이나 뒤 또는 위쪽에서 볼 때, 그 모양이 ‘넓게 퍼져서 활짝 열려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발아진 동네(골)’가 줄어서 ‘반골’이라 불리다가 그 발음이 다시 ‘밤골’로 바뀐 것이다.
반면 ‘밭골’은 ‘바깥 골’ 이 줄어든 말이다.
어떤 중심이 되는 동네를 기준으로 해서 그 바깥에 있는 마을을 ‘바깥골’이라 불렀는데, 그 발음이 바뀌어 ‘밭골’ 이 됐다가 다시 ‘밤골’이 된 것이다.
이곳 율목동의 경우는 ‘밤나무골’이라 불렸지 ‘밤골’이라 불리지는 않았다. 또 실제 지형으로 볼 때 ‘반골’의 발음이 바뀐 것으로 보기도 쉽지 않다.
특히 율목동은 부자들이 모여 살던 동네로 유명했고, 주변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곳이라 ‘바깥골’로 보는 것은 더욱 맞지 않다. 따라서 실제로 밤나무가 있었기 때문에 밤나무골, 즉 율목동이 됐다고 봐야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럼에도 동네의 옛날 모습을 확인하기 어려운 지금으로서는 어느 쪽이 맞는지 여전히 단정 하기가 어렵다.
긴담모퉁이
경동 싸리재에서 답동성당과 기독병원 사잇길을 지나 율목동에서 신흥동으로 넘어가는 길 끄트며리에 ‘긴담모퉁이’라는 곳이 있다. 말 그대로 돌담이 길게 놓여있어 생긴 이름인데, 이제는 싸리재와 마찬가지로 점차 잊혀가는 이름이 기도 하다.
긴담모퉁이는 일본인들이 이곳에 새로 큰 길을 낼 때 쌓은 축대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예전의 이곳은 지금의 신흥동과 경동 사이에 야트막하게 솟아있는 언덕이었다.
지금 송도중학교가 자리 잡고 있는 신포동·신흥동과의 경계(境界)지역 일대에는 1900년도 초반까지도 인가(人家)가 거의 없는 대신 일본인들의 묘지와 절이 있었다. 이곳에 묻혀있던 일본인들의 상당수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때 목숨을 잃은 일본군이었다고 한다.
그 뒤 이곳의 묘지들은 1902년쯤 인근 율목동에 새로 만들어진 공동묘지로 옮겨졌다. 그 대신 신흥동에서 이곳 긴담모퉁이를 지나 축현역(지금의 동인천역)으로 이어지는 도로공사가 추진됐다.
이는 신흥동 일대에 모여 살던 일본인들이 축현역과 그 주변 한국인촌까지 편하게 오가기 위해 벌인 일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언덕에 꼬불꼬불한 흙길만 하나 있었다고 한다. 이에 일본인들이 중심이 돼서 언덕을 잘라 헤치고, 양쪽으로 긴 축대를 쌓아올려 그 사이에 새 도로를 만든 것이다.
고(故) 최성연 선생이 쓴 향토사 책자 「개항(開港)과 양관역정(洋館歷程」에 따르면 이 공사를 시작한 것은 1907년 4월이었고, 그 해 11월에 끝냈는데, 당시 돈으로 1만4000원의 공사비가 들어갔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긴 돌담 축대가 생기게 됐고, 그 모퉁이까지 가면 신흥동길과 만나니 이곳에 긴담모퉁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당시 이 공사를 주도한 사람은 산근(山根)이라는 이름의 일본군 육군 소장으로, 러일전쟁 당시 병참부의 사령관을 맡고 있었던 인물이다. 그가 러일전쟁이 끝난 뒤에도 공병대를 이끌고 지금의 중구 전동(錢洞)에 있었던 전환국(典園局) 청사에 주둔하면서 이 공사를 맡아서 했다. 그는 이곳의 공사뿐 아니라 월미도에 벚꽃을 많이 심기도 했는데, 당시 일본인들은 이 같은 그의 활동을 칭송한다는 뜻에서 전동의 이름을 산근정(山根町)이라 바꿔 붙이기도 했다.
긴담모퉁이의 돌담 축대에는 가운데쯤에 큰 철문이 하나 있다.
지금은 아예 폐쇄된 이 철문은 이전에도 늘 닫혀있다시피 했고, 무슨 용도인지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래서 1960~80년대에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 안에 6·25 전쟁 때 죽은 사람들의 시신(屍身)이 있다는 소문이 돌곤 했다.
이 철문은 일제 강점기 후반에 일본인들이 만든 방공호(防空壕)의 출입문이다.
1930년대 들어 군국주의 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아시아 전체의 패권(覇權)을 꿈꾸던 일본인들이 전쟁에 대비해 만든 방공호이다.
2019년에 인천시립박물관이 이곳을 조사한 일이 있다.
당시 조사를 위해 이 안에 직접 들어가 본 유동현 인천시립박물관장은 “긴담모퉁이에서 시작해 중간에 길이 꺾이면서 신흥초등학교까지 이어지는 방공호인데, 전쟁이 났을 때 일본인들이 대피하기 위한 시설로 만들어졌던 것”이라며 “6·25 전쟁 뒤에는 갈 곳 없는 피난민들이 오랫동안 이곳을 임시 거처로 사용했다고도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