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린 시절을 범섬과 함께 보냈다. 아침 햇살은 항상 그 섬에서부터 피어올라 빼곡히 내 창살 틈바구니를 헤집고 들어와 잠을 깨우곤 하였다. 바닷가 삶은 심상찮은 거센 폭풍 앞에서, 휘몰아치는 해일 앞에서 마당의 잡동사니들까지 집어내 주는 일이 반복되고 있었지만 그나마 그 섬은 제 한몸 사리지 않으며 소용돌이를 잘게 부셔준 덕분에 그만그만한 삶을 지탱할 수 있었다.
바닷가를 끼고 사는 사람들은 항상 짠 내를 머금고 살아야 했다. 그나마 집 앞에 버티고 있는 저런 우직한 놈이라도 없으면 돌담을 쌓아놓고 신작로에서 현관까지 이어주는 길을 구불구불 만들었다. 섬사람들에게 이런 구불한 길은 풍랑을 삭혀주는데 그만이었다. 그러나 어릴 적 기억으론, 어둠이 깔린 녘에 인기척 소리를 들은 어머니로부터 “애야! 올레 나가 보거라”는 소리가 제일 무서웠다. 가뜩이나 겁이 많은 내가 현관을 열고 꽤 긴 그 통로를 따라 나가야 하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까까머리 중학생이 되면서 나는 바닷가를 등지고 시내로 옮겼다. 물이 들어오면 종이배를 띄우며 상상의 나래를 키워갔고 물이 나갈 때면 다시 바릇잡이에 나서다 하루에도 몇 번씩 할퀸 손톱이 성할 날이 없는 그런 시절도, 구부적한 그 긴 통로를 따라나서야 하는 올레도 이제 더 이상 접할 수 없었다.
세월이 많이 흘러 추억에 젖어들기를 마다하지 않는 나이가 된 지금, 나는 그 섬을 찾는 횟수가 부쩍 늘었다. 해일을 막으려는 인위적인 방파제가 세워지고 투수콘크리트에 의한 해안 길이 개설되기는 했지만 그 섬이 버티고 있는 한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변한 것은 우직한 그 섬이 아니라 내 마음일 것이다. 너를 버리고 떠났던 몽매함은, 이렇게 아름다운 풍광을 언제나 바라볼 수 있는 여유로움을 이제는 외지인들에게 넘겨주고 말았으니 어쩌면 당연시한 결과인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울적하고 아쉬운 마음을 털어 내지 못한 채 곧잘 이곳을 찾는다.
조용하기만 했던 좀녀마을을 찾는 횟수가 늘어난 건 비단 내뿐만이 아니다. 이방인의 발길을 이어주는 끈은 최근 이곳이 올레길 7코스로 개발되면서부터이다.
서귀포의 여자로 태어나 서울의 유수한 대학을 거쳐 23년간 기자생활을 마치고 홀연히 산티아고 길을 걸었던 서명숙. 그녀가 고향에 내려와 만든 길이 올레길이다. 현재 성산 일출봉에서 시작되는 1코스를 시작으로 12코스까지 직접 걸으며 만들었다.
시즌이 되면 제주는 항상 뭍사람들의 발길로 붐빈다. 관광지 주차장 곳곳이 시루떡마냥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는 관광버스와 ꡐ허ꡑ넘버를 달고 있는 렌터카 천국이다. 년 600만 명이 제주를 찾고 있으니 ꡐ관광 1번지ꡑ라고 제주 앞에다 고유명사를 붙여주고 있는 것은 인지상정인지 모른다. 그러나 저들이 관광을 마치고 또다시 다음에 찾아올지는 미지수이다. 관광의 패턴을 볼거리에서 체험형으로 바뀌려 갖은 정책을 벌였으나 별로 소득이 없었던 것도 한 원인이라 아니 꼽을 수 없다.
머무르지 못하는 관광은 또 다른 병폐를 낳았다. 머무르는 일정이 갈수록 짧아지면서 실속 없는 관광객들만 넘쳐난다고 아우성이다.
관광객들 또한 거침없이 뱉어내는 항변이 이유가 있어 보인다.
“제주요? 벌써 다섯 번째요”
“구석구석 관광지 안 돌아본 데 없지요. 이제 더 이상 메리트가 없어요. 하루빨리 다른 테마를 개발하던지. 그나마 찾아오는 관광객들에게 바가지 상술이나 없애는 게 급선무가 아닌가요?”
다 맞는 말이다. 유명관광지만을 일정에 꼬박꼬박 챙겨 넣는 여행상품 앞에서 그들이 물렸음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렇게 다섯 번을, 열 번을 왔다 갔다고 한들 그건 숫자에 불과할 뿐이다.
사실 유명관광지는 그만이 전해주는 멋스러움을 단맛 하기보다는 그저 다녀왔다는 의미부여 이외에는 별다른 기억이 없게 마련이다. 몇 해 전에 다녀왔던 이태리 트레비분수, ꡐ동전을 던지면 언젠가 다시 오게 된다.ꡑ는 얼토당토 않는 전설에 따라 동전을 던졌던 기억밖에 남는 건 없다.
이제 제주의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풍광 하나하나가 전해주는 감미로운 선율과 설문대 할망이 전해주는 설을 느낄 수 있는 올레길이 진정으로 열렸다.
다만 올레 탐사 역시 몇 가지 상식이 따른다.
첫째, 목적의식을 너무 의식하지 말아야 한다. 즉 산악인들이 자주 하는 “저 산을 오늘 기필코 정복하리라”라는 발상과는 정면 대치된다. 설령 오늘 1코스를 완주하겠다고 목표를 세웠다 하여 완주를 못해도 그만이다. 많은 사람이 완주만을 목표로, 그저 앞만 보며 냅다 달리기를 마다하지 않는다면 주변 곳곳의 아름다운 정서와 풍광은 스쳐 지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올레는 슬로우 탐사이기도 하다. 천천히 걷는 ꡐ느림의 미학ꡑ이란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둘째, 올레는 잘 닦아놓은 콘크리트길이 아니므로 불편이 따른다. 그저 자연 그대로, 예부터 있어온 구부정한 길 그대로이다. 더군다나 이어주는 이정표도 없다. 있는 것이라곤 푸른색의 화살표와 숲 속에서 만날 수 있는 리본 끈 정도가 간간이 있을 뿐이다.
사람들이 부쩍 찾는다고 길을 내거나 개발을 한다고 한동안 행정이 떠들어대다가 서명숙 이사장으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은 적이 있다. 올레는 개발이 아니라 자연이 주는 그대로를 걷는 것이니 비가 온 뒤에나 설령 날이 화창하다 하여도 길이 아닌, 밭고랑을 지나게도 되는데 이 경우 농사일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셋째, 올레는 배낭 하나 메고 떠나는 트레킹이다. 가는 여정에서 만날 수 있는 노년의 부부, 지역민들과 이방인들과도 마주칠 때마다 인사를 건네는 여유도 마다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마음가짐이 있다면 이제 진짜 제주의 속살을 음미할 준비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나의 코스가 대략 15~20km로 구성되어 있고 시간은 5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유채꽃이 만발하면 향내 음도 들이켜 보고, 바닷가 짠 내가 물씬 풍겨나는 포구에서 쉬었다 가기를 반복하며, 아낙네들의 오징어 말리는 풍경도 놓치지 말고 앵글에 담으면서 그렇게 쉬엄쉬엄 걷는 게 올레꾼의 진정한 자세이다.
이제 올레는 더 이상 소수가 도모하는 역사와 문화탐방이 아니다. 진정한 대한민국 관광 1번지로 거듭날 진정한 우리들의 비전이다.
“사랑해요. 내 사랑 올레!”
☞ 올레란?
제주어로 ꡐ거릿길에서 대문까지의, 집으로 통하는 아주 좁은 골목길ꡑ을 뜻한다. 중세어로는 ꡐ오라ꡑ ꡐ오래ꡑ이며, ꡐ오래ꡑ는 문(門)을 뜻하는 순 우리말 ꡐ오래ꡑ가 제주에서는 ꡐ올레ꡑ로 굳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ꡐ제주 올레ꡑ는 발음상 ꡐ제주에 올래?ꡑ ꡐ제주에 오겠니?ꡑ라는 이중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