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 명창 송만갑의 생애와 예술 세계
이 경 엽*
1. 머리말
송만갑(宋萬甲, 1865-1939)은 근세 최고의 명창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의 명성은 판소리 최고 가문 출신이라는 특별한 지위와 탁월한 예술적 역량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가왕(歌王) 송흥록으로부터 송광록과 송우룡을 거쳐 송만갑으로 이어지는 가계의 소리는 판소리사상 계보가 가장 확실하고 유서 깊은 소리로 평가된다. 또한 그는 가계 소리의 전승자로 그치지 않고 그것을 창조적으로 계승 발전시켰으며, 대중 공연이나 교육 활동 등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많은 업적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이처럼 송만갑은 주목받는 명창이다. 이 때문에 그에 대한 기록이 적지 않게 남아 있다. 그에 대한 기록은 생시의 신문 기사와 사후의 일대기 등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을 들면, "명창에게 듣는 왕사", "국창 송만갑씨", "국창 송만갑씨 숙아(宿 )로 별세", "근대 조선의 명창 고 송만갑 일대기", "국창 송만갑 일대기" 등이 있다. 이들 기사는 송만갑이 '국창(國唱)'으로 칭송받던 당대의 사회적 관심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이외에 송만갑 관련 기록은 정노식의 {조선창극사}와 박황의 {판소리소사} 등에도 실려 있다. 한편 이들 기록은 단편적인 생애사나 일화 중심의 일대기에 머물러 있는 까닭에 그의 삶과 예술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에는 미흡한 편이다.
송만갑에 대한 연구는 그 동안 적지 않게 이루어졌으나 본격적이고 충분하게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우선 대표적 논의를 들면, 이기우는 [명창론]에서 송만갑, 정정렬, 이동백을 통해 '연속·변이·선택'이라는 판소리 전승의 특성과 명창의 조건을 논한 바 있다. 그리고 유영대는 송만갑의 유성기 음반 사설을 해설하였고, 배연형은 유성기 음반을 통해 본 송만갑 소리의 특징을 살펴본 바 있다. 또한 김기형은 [송문 일가의 판소리사적 의의와 동편제의 맥]을 통해 송씨 가계와 동편제의 흐름을 정리한 바 있다. 이외에 강도근, 박봉술 명창에 대한 연구나 동편제 관련 논의 등에서 그에 대한 약간씩의 언급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와 같은 연구들은 명창 송만갑을 이해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명창론의 측면에서 볼 때 지금까지의 논의는 대개 단편적으로 이루어졌고 본격적인 작업은 아직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비중에 걸맞는 명창론이 기술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특히 그의 판소리사적 위상과 관련하여 판소리 활동의 여러 측면과 예술세계의 특성을 고찰해야 할 것으로 본다.
소리꾼에 대한 연구는 여러 자료를 이용할 수 있다. 기존 문헌 자료와 창본뿐만 아니라 신문 자료나 현지조사 등을 통해 새로운 사실을 찾아야 하며, 그 동안 소홀히 해왔던 음반 분야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근세 명창들의 경우 음반 자료가 있으므로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유성기 음반은 생생한 1차 자료이고, 문헌 자료의 애매성을 보완해주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특히 송만갑은 누구보다도 많은 음반을 남겼으므로 그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송만갑의 생애와 예술 세계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먼저 기존의 여러 문헌과 제적등본, 현지조사 자료 등을 바탕으로 연보를 재구성하고 생애의 각 시기와 활동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의 판소리관과 활동, 음반, 사설 등을 중심으로 예술 세계를 조명하고자 한다. 특히 그의 판소리 활동은 판소리사의 전개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그것을 주목하여 예술 세계의 제 면모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한편 이 연구는 송만갑이라는 특정 소리꾼에 대한 관심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동편제를 대표하는 명창이며, 근세 5명창 중에서 우선 꼽히는 명창이다. 더불어 20세기 초반의 격변기 속에서 판소리의 변화를 주도했던 인물이다. 또한 오늘날 활동하는 명창들 대부분이 직간접적으로 송만갑과 연결된다고 할 만큼 그가 미친 영향도 지대하다. 이 때문에 근세 판소리사의 핵심에 송만갑이 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생애와 예술 세계에 대한 논의는 이런 점에서 여러 가지 중요한 점들을 포괄한다. 특히 송만갑이 보여준 시대 변화에 대한 능동적인 대응 태도는 21세기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송만갑 연구를 통해 근세 판소리사를 점검하고 새로운 전환을 모색하는 계기를 만들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해 본다.
2. 송만갑의 생애와 활동 내용
소리꾼의 생애는 예술 활동의 배경이 되는 중요한 요소다. 성장 환경이나 사사 관계 등에 따라 판소리의 유파나 성격이 달라질 정도로 소리꾼의 생애와 예술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생애사를 면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송만갑의 경우 사후에 바로 일대기가 쓰여질 만큼 주목 받는 소리 인생을 살았다. 앞에서 본 신문 기사와 {실화}의 기사, {조선창극사}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쓰여진 글들에도 송만갑의 생애가 다루어져 있다. 그런데 이들 기록의 내용이 대개 비슷하며, 시대 순으로 사건들을 적고 있으나 정확한 연대를 적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에 널리 알려진 몇 가지 사실 말고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사항은 그리 많지 않다.
여기서는 먼저 여러 기록에 흩어져 있는 내용과 현지조사 자료, 제적등본 등에 나와 있는 사실 등을 토대로 연보를 재구성해 보기로 하자.
1865년. 1세.
구례읍 백련리 위땅꼬랑에서 부친 송우룡과 모친 김씨의 아들로 출생.
1872년. 7세.
조부와 부친에게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함. 나중에 아버지를 따라 봇다리를 짊어지고 명산대천 승지를 찾아 다니며 배움. 울음 우는 장면을 잘못할 때는 종아리를 맞아가며 배움.(조선일보 1939.1.8., {실화}, {조선창극사})
1878년. 13세.
소년 명창('조선의 명창')으로 이름을 날림.(조선일보 1939.1.8., {조선창극사}, {판소리소사})
1882년. 17세.
전주 영문 대령광대가 되어 명성이 높아짐. (조선일보 1939.1.8)
1902년-1909년. 37세-44세.
협률사에 참여. 이 시절 어전에서 누차 소리를 하여 감찰직을 제수받음.(조선일보 1939.1.8., {실화}, {조선창극사}).
1906년. 41세.
4월에 협률사가 해체된 후 감찰직을 수행. 여러 기록에서 '원각사[협률사] 해산 후 궁내부(宮內部) 별순검(別巡檢)의 실직(實職)을 3개월 거행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말대로라면 이 무렵 감찰직을 수행했을 것으로 추정됨.
1907년. 42세.
광무대(光武臺)에서 창극 공연을 지도함.(만세보, 1907.5.21.) 이 무렵 단성사, 연흥사, 장안사 등의 극장이 세워져 창극이 공연되는데 여기에도 송만갑이 관여했을 것으로 추정됨.
1910년. 45세.
한일합방으로 인해 구례로 낙향하여 제자들을 지도함. 구례에서는 오경선의 율방에서 박봉래에게 판소리를 가르치고,({판소리소사}) 박봉래의 집에서 김정문도 지도함.(박봉래의 딸 박향산 여사 구술) 그리고 이 무렵 둘째 아들 송기덕에게 판소리를 가르쳤던 것으로 보임. 3년 후 송기덕과 함께 일본에서 음반을 취입하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 아들에게 판소리를 교육시켰던 것으로 추정됨.
1913년. 48세.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일본 축음기회사 음반(日蓄朝鮮소리盤) 취입.
1918년. 53세.
순천군 낙안면 남내리 38번지로 이사.(가족으로는 부인 박태윤, 장남 영덕 내외, 둘째 기덕, 딸 용이, 손자 태봉 등이 있었다.)
1920년 무렵(?)-1927년. 55세 무렵-62세 무렵.
김정문과 함께 협률사를 조직하여 지방 순회.({판소리소사})
1922년. 57세.
서울 조선극장에서 열린 명창대회에 출연.(고 김무규 옹 구술)
1926년 11월. 61세.
서울 조선극장에서 열린 조선축음기회사 주최의 대연주회에 출연.(조선일보 1926.11.10.)
1927년 2월. 62세.
구가무(舊歌舞) 흥행부 주최의 조선명창대회에 출연.(조선일보 1927.1.12.)
1926-1928년 무렵. 61세-63세 무렵.
일동축음기 음반(제비표朝鮮레코드) 취입.
1932년. 67세.
콜롬비아(Columbia) 레코드 음반 취입.
1933년 10월. 68세.
진주, 창원, 마산 예기(藝妓) 조합 후원의 조선음률명창대회에 출연.(조선일보 1933.10.14.)
1933년-1938년. 68세-73세.
조선성악연구회에서 제자 양성.
1935년. 70세.
빅타(Victor) 음반 취입.
1936년 8월. 71세.
조선일보사 주최 수해 구제의연금 모집 구악대회에 출연.(조선일보 1936.8.27.)
1938년 5월. 73세.
조선일보사 주최 판소리대회에 출연.(조선일보 1939.1.8)
1938년 8월
부인 박태윤 사망.(순천군 낙안면 남내리 38번지)
1938년 12월 8일
대구 명창대회에 출연.(조선일보 1939.1.8)
1939년. 1월 1일. 74세.
경성부 상왕십리 741번지에서 사망.
위의 연보에서 보듯이 송만갑은 명창 집안의 후손으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판소리를 배우고 전 생애를 판소리 중심으로 살았다. 이러한 그의 생애는 크게 네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번째 시기는 판소리 수업 및 자기 소리 모색기이며, 두번째 시기는 협률사 활동 및 대중 공연 활동기, 세번째 시기는 판소리 교육 및 음반 취입기, 마지막 네번째 시기는 조선성악연구회 활동기다.
(1) 판소리 수업 및 자기 소리 모색기 (1865-1901)
송만갑은 고종 초(1865)에 구례읍(求禮邑) 백련리(白蓮里) 위땅고랑에서 명창 송우룡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 동안 출생지가 봉북리 122번지라고 알려져 있었으나, 봉북리는 나중에 이사를 해서 살았던 곳이다. 두 장소의 거리가 별로 멀지 않지만 서로 구별할 필요가 있다. 얼마 전 작고한 '구례향제줄풍류'의 명인 김무규 옹이 생전에 백련리 위땅꼬랑이 출생지라고 지적한 바가 있고, 현지의 고로들도 비슷한 증언을 하고 있다.
송문(宋門) 일가의 구례 정착은 조부인 송광록 때부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광록의 구례 정착 동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남원 운봉 비전리에서 함께 살던 형 송흥록과 분가하여 구례로 이주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여하튼 송광록의 구례 정착은 곧 동편제의 주요 전승 계보의 정착을 의미하는 바, 송흥록-송광록-송우룡-송만갑-송기덕으로 이어지는 송씨 가계를 성립시키고, 나중에 유성준, 박봉래, 박봉술 등의 구례 명창들이 송우룡과 송만갑의 소리를 잇게 됨으로써 결과적으로 구례가 동편제의 고장이 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송만갑은 명창 가계의 후예인 까닭에 출생 환경부터가 대명창으로 성장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가왕 또는 동편제의 시조 등으로 추앙받는 송흥록의 소리를 잇는 명문 가계의 전통이 명창 송만갑의 중요한 성장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더 근본적으로 그의 가계가 무계(巫系)라는 사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가 무계 출신이라는 것은 제적등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등본 윗부분에 '巫'라는 글자가 쓰여져 있다. 이는 다른 사람의 등본에 '雜貨商', '醫生', '飮食業', '宿室' 등으로 쓰여져 있는 것과 관련해 볼 때 특수 직업을 가진 사람에 대한 표시인 것으로 볼 수 있는 바, 그의 가계에서 무업을 담당했음을 짐작케 해준다. 이처럼 무계 출신에서 명창이 나오는 것은 호남지방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으므로 특별할 것이 없지만, 이 지방의 무속음악과 판소리 전승이 밀접한 상관성이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게 해준다. 판소리 명창을 낳게 하고 성장시키는 기층적인 배경으로 세습무계가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의 판소리 수업은 일찍부터 이루어졌다. 그는 일곱 살 때부터 부친 송우룡에게 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부친은 가문의 법통을 잇게 하기 위한 기대와 집념으로 교육을 시켰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그의 조부도 "네가 크면 반드시 내 뜻을 받들어 후세에 전할 것을 재삼재사 부탁했다."고 한다. 그는 천품을 타고 나서 한번 들으면 곧 그대로 잘 했으며, 부친의 기대에 부응하여 13세에 벌써 소년 명창으로 이름을 날릴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다만 한 가지 딱한 일은, 울음우는 장면은 암만 가르쳐야 영 되어 먹지를 않아' 심청이 우는 대목, 춘향이 우는 장면에서는 부친이 아예 굵은 회초리를 옆에다 여러 개 깎아두고 종아리를 때려가며 그를 가르쳤다고 한다. 이처럼 엄격한 판소리 수업을 통해 송만갑이라는 명창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이런 수업 덕분에 그는 이미 17세에 전주 영문광대로 이름을 떨쳤다고 하는데, 이 무렵의 모습을 김창룡은, 어린 시절 전주대사습 참관의 기억을 회고하면서 "송만갑은 총각머리를 땋고 얼굴은 시골 깔머슴같은 연소한 소년이었지만, 동석한 김세종·장자백 선배에 못지 않았다."고 말한 바가 있다. 이와 같이 송만갑은 어린 시절에 소년 명창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당대 명창이던 김세종·장자백 등에게 뒤지지 않았다고 할 만큼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가 20세기 최고의 명창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명문 집안이라는 환경과 엄격한 교육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알게 해준다.
그러나 뛰어난 소리꾼으로서의 송만갑의 명성은 명문 가문의 후광과 선천적 천재성만으로 획득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기 가문의 소리를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새로운 소리를 찾으려고 하였다.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갈등이 파생되었는데, 부친 송우룡과의 '이론투쟁'이 그것이었다. 이것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조선창극사}에서는 그 의미를 다음처럼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창조와 제작이 가문의 전통적 법제를 밟지 아니하고 일종 특색의 제작으로 별립문호(別立門戶)하였다. 그것은 시대적 요구에 순응하기 위하여 통속화한 경향이 많었다. 그러므로 그 부친은 송씨가문 법통을 말살하는 패려자손(悖戾子孫)이라고 해서 독약을 먹여 죽이려고 한 일도 있었다. 부자간에 각기 주장을 달리하는 만큼 이론투쟁으로 불화하여 필경은 집에서 쫒겨나서 조선팔도를 돌아 다니며 소리를 하였다. 그래서 그의 극창(劇唱)은 더 한층 널리 퍼졌던 것이다.
이 사건이 언제 일어났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기록이 없는 이상 연대기적 정확성은 애초에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황으로 보아 10대나 20대에 이 일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가 13세에 명창이 되었다라는 말은 동편 소리를 충실히 계승하고 있는 것에 대한 평가였을 것이다. 그리고 17세에 전주 영문 광대로 이름을 떨쳤다는 것도 그것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곧 이 무렵까지는 이전의 동편제 명창들과 마찬가지로 전통의 보전에 충실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 이후로 다른 유파의 소리를 접하면서 자신의 소리제와 비교하고, 또 당시 사회.경제적 변화 속에서 판소리의 지위를 확인하면서 변화된 시대에 맞는 새로운 소리제를 모색하였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그가 부친 송우룡에 반발하고 나선 때는, 가문의 전통적인 소리와 시대적 요구의 간격 사이에서 새로운 소리제를 모색하고 그렇게 소리를 부르기 시작한 30대 초나 중반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창극사}에 의하면 송우룡은 철종 연간에 태어나 62세를 일기로 작고했다 한다. 따라서 그의 타계 시기는 1897년에서 1910년 사이로 송만갑이 32-45세가 되던 때이다. 이렇게 보아 사건의 시기는 45세 이후는 결코 아니며, 30대일 것이라고 짐작된다.
이러한 추정은 송만갑의 협률사 참가 시기와 당시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보면 어느 정도 타당성을 얻는다. 그가 협률사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때는 37세 되던 1902년이었다. 그런데 당시 그는 이미 명창으로 소문이 자자했다고 하는데, 그 명성은 각고의 노력 끝에 새로운 소리제를 완성한 후에 획득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곧 이 시기를 부친과의 '이론투쟁'을 겪은 후라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보아 부친과의 이론투쟁은 그의 나이 30대초.중반 이전에 일어났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집에서 쫒겨나서 조선팔도를 돌아 다니며 소리를 하고', '그래서 그의 극창(劇唱)은 더 한층 널리 퍼졌다.'라는 {조선창극사}의 기록은, 이론투쟁을 거친 후 명창으로 명성을 날리던 협률사 참여 직후의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2) 협률사 참여와 대중 공연 활동기 (1902-1909)
이 시기는 그의 생애에서 연대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첫번째 공식 활동 기간이다. 그는 1902년 협률사에 참여하여 활동하게 된다. "고종께서 전 조선에 산재한 일류명창을 부르셨는데, 처음으로 나타난 분이 김창환 씨와 송만갑 씨였다. ……이렇게 일류명창이 서울에 모여가지고 생긴 것이 유명한 '원각사'니 지금으로부터 삼십팔년 전 일이다."라는 후일의 신문기사에서 보듯이 송만갑은 협률사 결성을 위해 고종이 명창들을 불러 모을 때 상경하여 합류하였으며, 여기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협률사는 1902년 8월에 고종 등극 40주년을 기념하는 칭경식(稱慶式) 축하공연을 위해 봉상사(奉常寺) 산하에 조직된 기관이었다. 칭경식을 위해 정부에서는 서양식 건물을 짓고 거기서 각국 사절 참석하에 기념공연을 할 작정으로 연희를 관장하는 관청인 협률사(協律司)를 설치해 판소리·잡가 등의 명창 170명을 모아 연습을 시켰다. 그러나 왕자의 질병, 보리 흉년, 콜레라 창궐 등의 사정으로 공식 행사는 연기되다가 취소되고 그 대신 국내의 관객을 상대로 한 공연이 이루어졌다. 그러다가 1904년 러일전쟁의 발발로 불안이 고조되고,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맺어지는 등 사회의 불안으로 2년 동안 공연을 중단했다. 이어 1906년 들어 협률사 공연이 재개되어 대중의 인기를 끌지만, 을사조약의 분이 채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국가가 영리를 목적으로 퇴폐풍조를 조장한다.'는 언론의 격렬한 비난을 받고 같은 해 4월 협률사가 해체되었다. 그리고 2년 뒤 1908년 7월에 원각사(圓覺社)라는 민간 공연단체가 그 극장을 맡아 공연장으로 삼았으며, 이 때부터 극장 이름도 원각사라고 불려지게 되었다. 한편 협률사가 혁파되었지만 국가에서 관장하던 '국립극장' 격의 단체였던 까닭에 명성은 그 뒤로도 존속되었다. 단체가 해체되었지만 협률사라는 이름은 판소리 계통의 공연단체를 뜻하는 말로 널리 사용되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김창환 협률사(協律社)', '김채만 협률사'하는 식으로 보통명사화되어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협률사는 처음에는 관청을 뜻하는 말이었으나 나중에는 일반 판소리·창극 공연 단체를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초기 협률사는 관기와 예기 등 기생을 조직한 단체로 시작하여 곧이어 창부(唱夫)를 모집한 뒤 소춘대유희(笑春臺遊戱)를 대대로 공연하였다. 이 공연은 구성원으로 볼 때 기생의 춤과 창부의 소리 등으로 짜여졌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고용료를 제시하면서 창부를 모집하였다는 사실인데, 기생의 경우 본래부터 궁내부 소속이니 따로 모집할 것이 없었을 것이고, 판소리 창부들은 따로 모집하여 공연의 효과를 보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으로 볼 때 판소리가 당시 구매 가치가 있는 연희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기생들의 연희와 판소리 창부의 소리 등으로 짜여진 연희 형태는 협률사 기간 내내 지속되는데, 이 시기 명창들은 협률사의 공연을 꾸준히 하면서, 사사놀음에 불려 나가기도 하고 한편으로 벼슬을 제수받는 식으로 개인적인 명성을 떨치기도 했다. 이러다가 1908년 원각사 개장 이후 연희 형태에 변화가 생기는데, 기생 중심에서 창부 중심으로 연희 담당자가 변하게 되고, 일반 연희보다 판소리 공연이나 창극 공연 등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런 사실로 볼 때 당시 판소리 명창들이 대중 공연에서 큰 인기를 누리게 되고 대중 연예인으로서 지위도 누리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송만갑은 판소리 및 창극 공연에 열중하였다. 협률사와 원각사뿐만 아니라 1907년 무렵에 세워진 광무대 공연에도 관여했는데, "근일 전기철도회사(광무대) 임원…… 등이 아국에 유래하는 제반 연희 등절을 일신개량하기 위하야…… 아국에 명창으로 칭도하는 김창환·송만갑 양인을 교사로 정하야……"라는 기사에서 보듯이 그는 광무대에서 창극 또는 판소리 공연의 지도를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무렵 세워지는 단성사, 연흥사 등의 극장 공연에도 관여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와 같이 그는 이 시기에 대중 공연 활동을 활발히 하였다. 이런 그의 활동은 개인적으로뿐만 아니라 판소리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는데, "(이 무렵이) 송씨의 일생에서 가장 활약 많이 하던 시절이요, 조선 구악이 전성하던 시절"이라고 평가되기도 했다.
또한 그는 이 시절 어전(御殿)에서 여러 차례 소리를 하여 감찰직(監察職)을 제수받았으며, '협률사'가 해산되자 궁내부(宮內府) 별순검(別巡檢)에 실제로 3개월 부임했다고 한다. 이 말대로라면 협률사가 해산될 때인 1906년 4월 무렵에 감찰직을 수행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훗날 송만갑, 이동백, 김창룡, 정정렬 등은 이 무렵을 회상하면서, 어전에서 소리하는 것을 '과거본다'라고 표현하며 그 때가 화려했던 전성기라고 말한 바 있다. 특히 송만갑의 경우 다른 이들의 벼슬이 대개 명예직인데 비해 실직(實職)을 받았다는 점에서 특별했다고 할 수 있다.
(3) 판소리 교육과 음반 취입기 (1910-1932)
송만갑은 한일합방을 전후한 시기에 낙향하게 된다. 1910년 한일합방 후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공연이 어려워지고, 대중의 갈채나 왕실의 관심도 기대할 수 없게 된 형편 때문에 이루어진 낙향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우국적 반발심도 낙향 동기가 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훗날 제자 한승호 명창이 조선성악연구회에서 배울 때, "특히 송만갑 명창은 나라 뺏긴 가객이 술 담배 먹고 방탕하면 안된다고 하여 제자들에게 술 담배를 못하게 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 송만갑의 태도를 유추해볼 수 있다.
고향 구례에 돌아온 후 송만갑은 소리 교육에 힘을 쏟았다. 그가 구례에서 생활할 때에는 구례의 유지들이 후원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단소, 가야금, 거문고 명인이었던 신윤준(辛允畯)과 같이 고향에 돌아올 때 마산면 냉천리(冷泉里)의 오경선(吳慶善)과 오두선(吳斗善) 등이 그들을 맞이하였다고 하는데, 오경선과 오두선은 천 석 이상씩 하는 부자들로서 율방을 차려주고 송만갑이 활동하도록 뒷받침을 했다고 한다.
이 때 그가 가르친 제자 중에서 주목되는 사람은 박봉래(1900-1932)다. 송만갑은 위의 후원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후원자인 오경선은 특히 11세의 박봉래가 재주 있음을 알고 국창의 창제와 더늠을 이어받게 하려고 송만갑과 박봉래의 생계를 돌보아 주며 소리 공부를 도왔다고 한다. 또한 이 무렵 남원 출신의 소리꾼 김정문에게도 소리를 가르쳤는데, 그 뒤 박봉래와 김정문은 송만갑의 수제자로 꼽히는 명창이 되었다.
이처럼 그는 이 시기에 대표적인 제자들을 길러냈다. 특히 두 제자는 동편제 판소리를 전승하는 주요 계보를 이루었는데, 박봉래의 소리는 박봉술에게 이어 지고, 김정문의 소리는 박녹주, 김정문을 통해 강도근에게 전승되었다. 이런 점에서 이 시기 교육 활동이 판소리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는 또한 둘째 아들 송기덕(1896-?)에게 소리 공부를 시켰다. 송기덕에 대해서는 최근까지도 그를 아는 이가 별로 없어 교육 기간이나 시기 등을 알 수 없었으나, 얼마 전 그의 유성기 음반이 발견되면서 그의 존재를 주목하게 되었다. 이 음반으로 미루어 볼 때 송만갑은 구례에 있으면서 아들에게 소리 공부를 시켰던 것으로 추정된다. 곧, 음반의 취입 시기가 1913년이기 때문에 그 전에 판소리를 가르친 후 함께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음반 취입을 했던 것으로 짐작하는 것이다. 음반에 남은 송기덕의 소리는 송만갑을 빼어 닮았다고 평가된다. 그리고 녹음 곡목을 보면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적벽가 등에 걸쳐 있고, 녹음 분량도 많고 기량도 상당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것으로 보아 송만갑이 아들을 소리꾼으로 키울 작정으로 체계적인 교육을 시켰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제자 육성과 함께 이 시기에 이루어진 활동 중에서 주목되는 것은 음반 취입이다. 송만갑의 음반 제작 참여는 모두 네 차례였다. 처음 녹음했을 때는 1913년(48세)으로 주식회사 일본축음기회사(日本蓄音機會社)에서 취입했다. 일축(日蓄)의 이 음반은 1913년에 'NIPPONOPHONE(독수리표)'으로 처음 발매되었고, 나중에 1920년대에는 닙보노홍, 일츅죠션소리반 등의 레이블로도 여러 차례 재발매되었다. 초판은 대단히 희귀하며 현재 발견되고 있는 것은 20년대 재발매 음반이다. 두번째 녹음은 1926-1928년 경에 일동축음기 주식회사에서 이루어졌으며, 세번째 녹음은 1932년(67세)에 콜롬비아 레코드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마지막 녹음은 1935년(70세) 경 빅타 음반으로 녹음되었다.
그의 음반 취입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 1913년 일축조선소리반(NIPPONOPHONE)발매
단가 진국명산, 백구타령
춘향가 신신애가, 이춘분수상별가, 십장가 일장, 심장가 이장, 제기생축춘향가, 춘향옥중자탄가, 행수기생가, 이도령초사가, 어사발행가, 농부가, 어사춘향관장가, 어사출도가, 춘향모무가,
심청가 곽씨부인공축가, 심청모행여가, 심봉공방자탄가, 심봉여식귀애가, 심청곡가, 승유가, 승구심봉가, 심청수선인가, 심청해중가, 심청화중가, 화초탁령, 심봉후첩악심가, 동민축심청가, 심봉후첩실가, 심봉사방아타령, 심귀인사부친가, 맹인연회가, 심봉사안명가, 심봉사안명호무가
흥보가 놀부악심가, 놀보제축출가, 흥부고생가, 연박종정흥부가, 박타령, 흥보득재가, 놀보연구가, 놀보초망가, 양반호령놀보가
수궁가 용약토가, 각색해중선어가, 사풍세우, 별출육지가, 각색산수출가, 백로횡강가, 통방정가
적벽가 조운선두궁사가1, 조운선두궁사가2, 적벽강형화가, 적벽원조가, 군사혼일포조조가, 조조포리신가, 관공출쟁오림가, 호곡파조군가, 전초알대전동달가, 좌기병골내종가, 조조검무가
② 1926-1928년경 일동축음기 주식회사(NITTO)발매
심청가 심청부르러 나가는데, 즁나려 오는데
③ 1932년경 콜럼비아 레코드 발매
단가 진국명산
춘향가 십장가, 이별가(一), 이별가(二), 박타령
흥보가 톡기타령
④ 1935년경 빅타(Victor) 발매
단가 진국명산, 역려과객, 고고천변
춘향가 이별가
수궁가 토공화상, 가자 어서 가
이처럼 그는 20년이 넘는 긴 기간에 걸쳐 소리를 녹음시켰으며, 그양도 방대하다. 판소리의 근대적 변화 요구에 직면한 그의 적극적인 적응의 모습이라고 하겠다. 이런 음반 취입을 통해 그는 근대 판소리 연구에서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자료를 남겼다. 그의 소리는 특히 동편제 소리의 정수로서 앞으로의 판소리 발전에 규범이 될 것이다.
또한 이 시기에 각종 판소리 공연이나 대회에도 참가했는데, 당시의 신문기사를 보면 음반회사 주최나 예기 조합 후원의 명창대회에 여러 번 출연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향제 줄풍류의 명인인 백경(白耕) 김무규(金茂圭, 1906-1994) 옹이 작고하기 전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는데, 당시 공연에서 나타난 청중의 기호와 송만갑의 대응 태도를 말하고 있어서 흥미를 준다.
내 나이 16세 때 1922년에 서울 조선극장에서 전국명창대회가 있었다. 그때에 최종결승으로 이동백과 50세(?)가 된 송만갑이 경합하게 되었다. 만장한 관중들의 열렬한 박수 속에 등장한 소리가 부드럽고 풍채가 좋은 이동백 명창이 소리를 하자 흥분의 도가니 속에 수십번의 열광적인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어 지방 출신인 이마가 튀어나오고 볼품이 없는 쇠소리를 내는 송만갑 명창이 등단하여 소리를 하는데, 박수는 치지도 않고 다만 경청만 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집어치워"하는 고함소리를 지르면서 장내가 소란스러졌다. 그러나 계속 소리를 하다가 적벽가를 중단하고 '새타령'을 열창하니 관중들은 도취된듯 조용해졌으며, 소리를 다 한 후에 인사를 하니 큰 박수가 터져 나왔다. 파장후 관중석에 있던 나(김무규)에게 와서 "사향 중에서 당사향을 몰라줘."하면서 웃었다. 그날 명창대회의 성적은 일등이었다.
한편 그는 1918년에 구례에서 순천 낙안으로 주소지를 옮겼는데, 정확한 이주 동기는 알 수 없다. 다만 가족사적인 어떤 변동을 짐작할 수 있는데, 같은 해에 며느리가 죽고, 또한 장성한 두 아들들이 가계의 전통과 상관 없이 다른 일에 종사하게 되었으므로 토착지를 떠나 새로운 거주지를 찾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가족사적인 내력에 크게 얽매이지 않고 자식들이 활동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또한 나름의 여유를 모색하기 위해 이사를 했을 것으로 짐작하는 것이다. 참고로 판소리와 가야금 병창의 명인인 오태석이 집 근처에 살고 있었으므로 송만갑의 낙안 생활과 관련성을 추정해 볼 수 있다.
(4) 조선성악연구회 활동기 (1933-1939)
그는 말년에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조선성악연구회는 당시 판소리 지망생들이 가장 동경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조선성악연구회는 순천의 독지가 김종익(金種翊)이 자기 소유의 건물을 내놓아 송만갑, 이동백, 정정렬과 같은 대명창들을 초청하여 제자들을 가르치도록 하자 기왕이면 단체로서 성격을 갖추자고 하여 만들어진 조직체이다. 지금 활동하는 원로 명창들이 대부분 그 곳에서 공부를 하였으며, 그 곳에 한두 번 놀러 다녔을 뿐인 사람도 반드시 자기 경력에 조선성악연구회에서 판소리 수업을 하였다고 할 만큼 영향력이 컸던 곳이다.
이 곳이 이처럼 판소리 교육의 요람으로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송만갑의 존재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그가 이 곳에서 맡은 직함이 '교육부장'이었는데 그 직함에 걸맞게 그는 판소리 교육에 전력하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은 그가 지닌 소리의 정통성과 역량을 존중했고, 더불어 인간적으로도 자애로워 그를 따랐다고 한다. {조선창극사}에 의하면, 보수없이 가르친 제자가 반 이상이고 친구의 딱한 사정을 보면 의복을 벗어서 줄 정도로 의협심이 있어서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의 문하에 모여 들었는데, 직·간접으로 배운 사람이 천여 명이고, 전국의 광대와 기생들이 그의 창법으로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약간 과장된 부분이 있어 보이지만 송만갑이 끼친 영향력의 범위와 정도를 짐작할 수 있겠다.
조선성악연구회가 결성된 때가 1933년이니 송만갑의 나이 68세 되던 해였다. 당시에 녹음된 음반을 들으면, 이 무렵까지도 그의 소리가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음을 보게 되는데, 제자들에 대한 소리 교육 역시 그러하였으리라 짐작된다. 그가 말년까지 판소리 교육에 최선을 다했다는 것은 사망 직후 쓰여졌던 신문 기사에 자세히 나와 있다.
칠십이라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새벽부터 밤까지 매일 삼사십명의 제자를 가르치기에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고 심지어 이 세상을 떠나기 사흘 전날도 역시 병석에 있으면서 노래를 가르쳤다. 그리하여 평생 소원은 내 생명이 붙을 동안은 노래를 가르쳐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송만갑은 제자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누구보다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그의 문하에서 장판개, 김정문, 박중근, 박봉래 등이 배출되었으며, 특히 조선성악연구회 시기에는 최근까지 활동했거나 원로로 활동 중인 명창들을 교육시켰다. 박녹주, 김연수, 김소희, 한승호, 박봉술, 강도근 등이 이 시기에 그의 문하에 있던 사람들이다. 그의 이러한 제자 양성은 우리 시대 판소리에 직접적이고 포괄적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일제 암흑기 동안 판소리가 위축될 수밖에 없었지만 그와 같은 열정적인 교육 활동으로 인해 판소리의 전승이 이루어질 수 있었으며, 당시 그에게서 배운 후대 명창들이 그것을 토대로 해서 우리 시대 판소리를 이끌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그는 이 시기에 상처(喪妻)를 하였다. 부인 박태윤이 1938년 8월에 사망하였던 것이다. 널리 알려진 일화로, 그가 상처한 뒤로 자신의 딱한 처지와 비교되어 심청가를 부르지 않았다는 말이 있는데, 실제 그의 음반을 보면 두 번째 제작(1926-1928) 이후로 심청가가 보이지 않아 그 말이 사실인 것으로 추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추측이 제적등본에 나오는 부인의 사망 시기와 맞지 않으므로 단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한편 상처 이후 심청가를 부르지 않았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그 부인이 후처일 가능성은 있다. 등본에 신원 미상의 '박씨' 부인이 '용이'라는 딸[庶子女]을 낳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심청가를 안 부르게 된 사연의 부인이 그녀일 가능성이 있다.
송만갑은 1939년 74세의 나이로 작고하였다. 그의 후손 중에서 판소리를 제대로 계승한 이는 없다. 둘째 아들 송기덕[宋基得]이 그로부터 소리를 본격적으로 배웠기 때문에 소리꾼의 길을 갈 것으로 기대되었지만, 명창의 자질만 선보이고 다른 길을 택했다. 송기덕은 경찰직에 투신하여 부산, 포항 등지에서 살았다. 그리고 장남 송영덕(宋永德, 1892-?)도 역시 경찰이 되어 나주 영산포, 영암 등지에서 살았다. 그의 후손들은 판소리 최고 명문 집안의 후예라는 각광에도 불구하고 소리꾼의 길을 외면했다. 후손들이 이런 행적을 보인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다른 사람들에게 화려하게 보이는 명문 집안의 전통이 후손들에게는 부담으로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무계 또는 광대라는 신분적인 차별 대우가 항상 원죄처럼 작용했기 때문에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서 전혀 다른 길을 선택했을 가능성이 있다.
3. 송만갑의 예술 세계
(1) 동편 소리의 미학 구현
동편제 판소리의 예술적 지향은 흔히 서편제와 대비되어 설명된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으로 정노식의 견해를 들 수 있는데, 실기인들의 설명이나 다른 문헌의 설명과도 크게 벗어 나지 않으므로 널리 인용되곤 한다.
동편은 우조를 주장하여 웅건청담(雄建淸談)하게 하는데 호령조가 많고 발성초가 썩 진중하고 구절 끝마침을 꼭 되게 하여 쇠마치로나 내려치는 듯이 하고
서편제는 계면을 주장하여 연미부화(軟美浮華)하게 하고 구절 끝마침이 좀 질르를 끌어서 꽁지가 붙어단인다.
동편제는, 기교적이고 화려한 서편 소리에 비해 담백하면서도 꿋꿋한 소리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동편 소리의 특징은 동편제 명창들의 공통분모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지만, 그 구체적인 실상은 송만갑의 소리를 통해 확인하는 게 실제적이다. 백대웅은, 현재 남아 있는 자료 중에서 송만갑의 판소리가 동편 소리의 특징에 가장 가깝다고 하면서, 동편 소리의 실제는 송만갑의 판소리를 기준으로 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송만갑이 전래의 법통 소리에서 벗어나 새로운 소리를 모색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의 소리에 어떤 변화가 담겨져 있겠지만, 전체적인 동편 소리의 면모는 유지되고 있다고 볼 수 있고, 현실적으로 현존 최고의 동편 소리이므로 그것을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송만갑 소리가 동편 소리의 규범에 가장 부합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송만갑은 시김새나, 부침새, 발성, 꼬리따기 등의 판소리 표현에서 동편제적인 아름다움을 가장 잘 구현하는 명창이라고 평가된다. 유파에 대한 설명에서 동편제의 소리로 송만갑의 창이 주로 거론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송만갑 소리를 통해 동편 소리의 예술적 지향이나 미학을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다.
송만갑은 시김새 구사에서 떠는 음이나 꺽는 음 등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보통 서편제 명창들이 이런 음을 많이 사용하여 화려하게 기교를 부리는데, 송만갑의 소리에서는 그보다는 우조의 정대한 시김새를 보여 준다. 이런 점에 대해 김소희 명창은, "송 선생님은……잔목을 쓰거나 구기지 않았습니다. 요즘처럼 소리에 양념을 치면서 부르는 것이 아니라, 잔꾀를 부리지 않고 소리를 짝 펴서 담담하게 나가다가 가끔씩 양념을 쳐주는 겁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부침새도 동편 소리의 규범을 잘 보여 주는데, 흔히 대마디 대장단이라고 하는 틀에 사설을 붙여 나가는 부침새를 구사한다. 다음은 그가 자주 부르고 또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가르쳤다는 단가 '진국명산'의 첫대목이다.
이 예에서 보듯이 장단을 넘나드는 잉어걸이나 완자걸이같은 엇부침은 거의 나타나지 않으며, 대마디 대장단이라는 규격의 짜임새에 충실하게 맞춰 장단을 운용해 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동편 소리의 발성은 통성의 강하고 무거운 소리라고 얘기하는데, 이는 곧 송만갑의 특징이기도 하다. 김소희 명창이 그의 소리를 일러 '돌덩이처럼 뭉친 소리'라고 말했던 것도 힘 있고 무거운 발성에 대한 표현이라고 하겠다. 또한 그는 전력을 다 하여 고음으로 내지르는 소리를 했는데 귀명창들 사이에 '상청으로 위에서 가지고 노는 기술은 그가 최고'라는 평가가 있기도 했다. 이에 대해 그의 제자 박봉술은, "어떻게나 상청이 잘 나는지 상청을 질러대먼 앵벌 날아가는 소리가 에-엥 에-엥 허고 나와 사람을 환장하게 만든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처럼 무겁고 강한 소리를 전력을 다해 불러대는 발성은 기교적인 목구성보다 힘 있는 목을 중시하는 동편 소리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소리꼬리를 짧게 끊는 기법에 있어서도 가장 동편제적인 면모를 보여 준다. 위에서 본 정노식의 설명에서 '구절 끝마침을 되게 하여 쇠망치로 내려 치는'이라고 표현했듯이 끝음을 길게 빼는 것이 아니라 짧게 끊어 노래하기 때문에 힘이 뭉친 소리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우리가 송만갑의 소리를 들으면서 간결하면서도 힘이 있다고 느끼는 것은 이러한 소리꼬리의 표현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송만갑은 시김새와 부침새 그리고 발성과 소리꼬리 등에서 동편 소리가 지닌 미학적 특성을 잘 보여 준다. 송만갑의 소리에는 화려하고 기교적인 것보다 엄정하고 절제된 그리고 힘 있는 소리를 강조하는 동편제 판소리의 예술적 지향이 잘 드러나 있는 것이다.
(2) 판소리의 창조적 계승과 발전
한편 송만갑이 보인 동편 소리의 미학은 고정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끊임 없는 변화 속에서 추구되는 특성이다. 송만갑은 창조적인 소리꾼이었다. 그는 자기 가문의 소리를 답습하지 않고 그것에 변화를 주고자 했다. 그러나 그가 가문의 전통적인 법제를 따르지 않고 새로운 소리를 추구하려 한 일은 대단히 충격적인 일이었고, 이 때문에 부친의 반발과 선배, 동료들의 비난에 마주치게 되었다. 이 일로 인해 그의 부친은 송씨 가문의 법통을 말살하는 패려자손(悖戾子孫)이라 하여 독약을 먹여 송만갑을 죽이려고까지 했다. 부자 간에 불화하게 하고 아버지가 아들을 독살하려고까지 했던 그 '이론투쟁'의 본질은 무엇이었을까? 그 사건은 송만갑 개인뿐만 아니라 판소리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앞에서 생애를 검토하면서 그 시기가 송만갑의 30대 초.중반일 것이라고 하였다. 이 무렵은 시대적 격변기로서 판소리를 향유하고 후원하던 양반층이 와해되고 판소리가 대중들에게 환원되던 시기였다. 1894년 신분제도가 철폐되면서 창우집단들은 그 동안 양반들의 '가호'를 받으며 활동을 하던 것과 다른 상황에 직면했으며, 이어 정치적 변동 속에서 대원군이나 고종같은 판소리의 절대적 후원자들의 지원도 사라지게 되었다. 또한 1900년대 들어 극장들이 세워져 대중 공연이 활성화되면서 판소리의 향유방식에 일대전환이 일어 났다. 이에 따라 가객들은 과거와 전혀 다른 상황에 직면했으며, 벼슬을 얻어 신분 상승을 꾀하고 세력가의 문객으로 우대받던 때와는 다른 활동을 요구받았다. 그것이 바로 {조선창극사}에서 말하는 '시대적 요구'였다.
그러면 송우룡이 '이론투쟁' 끝에 송만갑을 추방하고, 박기홍, 전도성 등이 송만갑의 '변절'을 비판하면서 지키고자 했던 '전래의 소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송흥록부터 이어져 오는 동편제 판소리다. 주지하다시피 송흥록은 동편제의 창시자로서 판소리를 보다 예술적으로 승화시켜 가왕(歌王)으로 칭송되는 인물이다. 송흥록에 의해 창시된 이 소리제는 판소리의 예술적 도약을 이루어냄으로써 판소리사의 새로운 흐름을 개척하였다. 이 소리제는 역사적으로 볼 때 양반들이 판소리의 주향유층으로 떠오르던 시기에 각광받으며 성립된 것이었다. 동편제 소리는 감정의 절제, 엄격한 법식이라는 식자(識者) 취향의 소리 이념을 표방하고 있는데, 이것은 바로 동편제의 성립 과정에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송만갑도 초기에는 이러한 동편제를 충실하게 전수받았다. 부친 송우룡의 엄격한 교육 아래서 명문의 법통을 충실히 이어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송만갑은 그 소리의 답습을 거부하고 자신의 소리를 찾고자 했다. 그의 표현대로 '고법에 구속되는 것보다 시대적 요구에 순응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가 '패려자손'이 되면서까지 새로운 소리를 모색한 것은, 판소리가 마주한 시대적 변화를 인식하고 그것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동편 소리가 특별한 지위를 인정받고 있었지만 그것은 식자 취향이라는 계층적 한계가 있었고, 지역적으로도 '동편'이라는 제한이 있었다. 그러므로 달라진 상황에서는 그 지위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가 '고법에 구속'되지 않으려고 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그는 전래의 '고제' 소리에 변화를 주었는데, 그것은 다른 유파와의 교섭 과정을 거치면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가 서편제 명창 정창업의 소리를 듣고 느낀 바 있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서편제의 장점을 발견했다는 말일 것이며, 새로운 소리제를 개발하게 하는 자극이 되었다는 말일 것이다. 예를 들어 비교적 후대 자료지만, 콜롬비아 레코드 발매의 '이별가'같은 음반에서는 선율이 화려해지고 시김새도 많이 쓰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런 예를 통해 서편제적인 기교의 도입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또한 그는 경기 서울지방의 음악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경드름을 사용했다. 그의 음반 중 '남원오입쟁이', '백구타령', '이별가', '어사 장모 상봉 대목' 등에서 경드름으로 소리를 짜나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협률사 활동을 전후해 서울을 중심으로 활약했기 때문에 청중들의 기호를 고려해 경드름을 사용하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새로운 요소를 수용하는 것은 계층적인 제한이나 유파적 구분이 와해되어 가는 추세 속에서 자신의 소리를 보다 통합적으로 이끌어가는 방법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경드름은 본래 중고제 명창들이 즐겨 쓰고 있던 것으로서 동편 소리에서는 사용하지 않던 조였다. 송만갑은 이런 조를 자신의 소리에 끌어 들여 발전시켰다. 단순히 새로운 것을 도입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리로 만들어갔던 것이다. 김소희 명창이, "송 선생님은 경조를 많이 사용했는데, 송 선생님의 경조는 다른 사람이 흉내내기 어려울 만큼 독특했습니다."라고 말했던 것은 이러한 점에 대한 설명이라고 이해된다. 이질적인 음악 요소를 끌어 들여 자신의 소리를 보다 개성적인 것으로 창조해 갔던 것이다. 이런 점이 그의 창조적인 예술 활동을 말해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태도는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그의 소리 인생 자체에서 찾아지는 특성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는 생애에 네 번에 걸쳐 녹음을 했는데 각각 다르게 불렀다. 배연형은 송만갑의 음반을 해제하고 각 시기 음반의 특징을 비교하면서 그 소리의 변화를 주목하였는데, 송만갑을 두고 "소리의 생애를 살았던 거의 유일한 명창이다."라고 평가했다. 대다수의 명창들이 대개 비슷하게 녹음하는 게 일반적인데 송만갑은 매번 새롭게 부름으로써 자신의 예술을 깨뜨리고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고 있다는 것이다. 배연형에 의하면, 첫번째 녹음은 별 기교 없이 고졸하고 소박하게 소리를 짜나가는 특성이 있고, 두번째 녹음은 앞의 음반보다 시김새가 정교하여 이른바 초치고 장친 느낌이 있으며, 세번째 녹음은 단단하고 쨍쨍한 철성의 목구성과 음악적으로 치밀한 짜임새를 보여 주며, 마지막 네번째 녹음은 고희 노인의 성음으로 믿어지지 않는 단단한 목구성과 신비로운 상청의 성음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이처럼 송만갑의 소리는 말년으로 갈수록 음악적인 짜임이 더욱 세련되고 목구성도 한층 빛을 더해 가며, 예술적인 완성도도 높아져 갔던 것이다.
이와 같이 송만갑은 자신의 소리를 끊임 없이 변화시켜 새로운 경지의 예술을 개척하고자 했던 명창이었다. 국창이라는 칭호를 듣는 대명창답게 그의 예술 세계가 남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실을 통해 전래의 소리를 답습하지 않고 새로운 소리를 모색하고자 했던 그의 노력이 단순히 시대 변화에 '순응'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보다는 고법의 전통을 새로이 하여 판소리를 창조적으로 계승 발전시키고자 했던 의지의 산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가 지닌 이러한 소리 이념과 판소리관에 의해 보다 차원 높은 예술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음을 보게 된다.
(3) 대중성과 예술성의 조화
송만갑 명창이 시대 변화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응했던 것은 한편으로 대중화의 모색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위에서 살펴 본 사항을 이제 대중성이라는 문제로 다시 접근할 필요가 있다. 그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던 협률사와 원각사 이후의 시기는 대중 공연으로 전환하던 때였다. 종래에 양반들의 사랑방이나 놀이판같은 데의 '놀음차'에 주로 의존하던 판소리 공연이 대중을 대상으로 한 흥행으로 변모해가는 시점이 바로 이 때였음을 주목해야 한다. 소수 양반층에 의존하던 단계에 머물지 않고 입장료를 내고 들어오는 익명의 다수를 상대로 공연하게 되는 판소리 향유방식의 변모가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극장식 공연이 성행하면서 대중적 수요가 보다 확산되고 그 흥행성을 바탕으로 상업 음반이 등장하는 새로운 상황이 조성되었다. 1907년에 한국 최초의 음반인 한인오·최홍매의 경기잡가 음반이 발매되고, 이어 1910년대 초반에 심정순, 송만갑, 송기덕 등의 판소리 음반이 연달아 발매되었던 것은 이러한 상황의 토대가 구축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곧 이와 같은 음반의 출현을 통해 판소리의 상업적 판매라는 새로운 환경이 만들어지고 있었고 그로 인해 판소리의 대중화가 더욱 가속화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이러한 새로운 환경 즉, 대중 공연과 음반 제작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협률사와 원각사 등에서의 활동과 네 번에 걸친 음반 취입 등이 모두 이러한 활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그의 이러한 태도는 당시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는데, 특히 식자 취향의 고아한 소리 이념을 표방하고 있던 동편제 명창들의 일반적인 태도와 많은 차이가 있어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송만갑이 먼저 소리를 하는데, 박기홍은 옆에 앉아서 듣고 나서 송만갑더러 "장타령이 아니면 염불이다. 명문후예로 전래 법통을 붕괴한 패려자손이라."고 혹평하였더니, 송만갑은 "고법에 구속되는 것보다 시대에 순응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회피했다.
송만갑 생전에 간혹 (전도성과) 서루 만나게 되면 "군은 자가(自家)의 법통은 고사(姑舍)하고 고제(古制)의 고아(高雅)한 점을 멸살하고 너무 통속적으로 수천의 남녀제자에게 퍼처 놓아서 공죄상반(公罪相半)하다."고 말하면, 송은 "시대적 요구에 순응하는 것이 합리하다."고 하면서 서루 한탄하였다고 한다.
위의 인용에 나오는 박기홍과 전도성은 당대 최고의 동편제 명창들로서 송만갑의 대중성에 비판적인 견해를 가졌던 인물들이다. 이들이 주장했던 '고법'과 '고제의 고아'한 것을 지키는 일은 판소리의 전통과 뿌리를 튼실하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런 까닭에 고법을 지키면서 변화에 비판적이었던 박기홍과 전도성의 태도는 나름의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대적 변화를 외면하고 그것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것은 판소리의 고사를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당대의 문화적 환경에 적절하게 대응하고 또 그것을 주도해 나갈 수 있는 방향을 설정해 나가야 했다. 송만갑은 그것을 시대의 순응이라는 이름이라고 표현하였으며, 판소리의 '통속화' 곧 대중적 기반을 확보하는 방법으로 대응하였다고 할 수 있다.
위의 논쟁에 나오는 '고법'과 '시대적 요구'라는 말은 당시 가장 민감했던 문제를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때문인지 동편제 명창들의 활동 양상이 어느 쪽의 입장인가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지는 것을 볼 수 있게 된다. 곧, 송만갑이나 김정문 등이 시대적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쪽이었다면, 유성준, 이선유, 박중근 등은 시대적 변화에 대한 대응보다는 동편제의 전통적인 예술성을 중요시하는 입장 쪽이었다는 식으로 구분이 되는 것이다. 또한 이런 태도의 차이는 당시의 판소리사적 환경의 변화와 관련되어 있었던 까닭에 명창들의 활동 영역과 특성을 반영하는 준거가 되기도 했다. 김소희 명창의 다음 증언과 같은 양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제가 어렸을 때 진주에 갔다가 이선유 씨, 유성준 씨, 박중근 씨를 보았습니다. 소리 바탕은 모두 좋았습니다만 거의 진주에서만 활동했기 때문에 기호가 다른 서울의 청중들에게는 이 분들의 소리가 먹혀들지 않았습니다."
한편 고제의 고아한 예술성을 중시하는가 아니면 대중에게 다가가는 새로운 예술 세계를 구축하는가의 선택 문제가 시대 변화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비롯되었던 만큼 그 변화의 흐름에 따른 역할과 비중도 각기 달라지기 마련이었다. 다시 말하면 20세기 판소리의 변화가 대중성의 강화로 나아가고 있었던 만큼 필연적으로 후자의 역할이 증대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 경우 주목할 부분은 결과적인 양상보다는 시대 변화에 대한 창조적 대응 태도와 모색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송만갑은 시대 변화에 무조건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동편제 명창들이 지녔던 유파적 우월성을 포기하고 또 그들의 혹평을 감수하면서 변화를 개척하였다는 점이 부각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문화 변동에 적극적으로 대응함으로써 판소리가 20세기의 대중 예술로 나아가는 판소리사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가 지닌 판소리사적 위상은 각별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활동을 토대로 그는 당시 '국창'이라고 불리는 특별한 명성을 얻었다. 국창이란 말은 20세기식의 평가라고 할 수 있는 바, 대중적인 지지 기반이 전국민적인 위대한 명창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대중적인 지지 양상은 대중 공연이나 음반 취입과 관련된 소리 활동을 통해 파악할 수 있을 것인데, 여기서는 특히 음반 문제를 더 보기로 하자. 그는 판소리 분야에서 심정순에 이어 두번째로 음반을 취입하였다. 그리고 네 번에 걸쳐 녹음을 남겼고, 그 곡목도 단가와 판소리 5바탕에 모두 걸쳐 있다. 이처럼 그는 음반 발매 초기부터 시작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음반을 취입했으며 그 곡목의 종류와 양도 다양하고 많았다. 이런 예는 대단히 특별한 것으로서 그만큼 송만갑의 소리가 인기가 있고 구매력이 있었다는 방증이 될 것이다.
송만갑의 음반은 최초 취입 연도인 1913년 이후 대한매일신보나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을 통해 광고가 되었다. 신문 광고는 상품 정보를 제공하거나 구매 욕구를 자극함으로써 수요를 확대하려는 전략으로서 이는 곧 대량 생산과 소비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송만갑의 음반이 지속적으로 광고된다는 것은 대중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그의 소리 중 '진국명산'같은 단가는 무려 네 번이나 녹음되어 발매되었다. 그리고 '박타령', '농부가', '십장가', '고고천변', '이별가' 등도 두 번 이상 녹음되었는데 그만큼 인기가 있었음을 말해 준다. 특히 박타령이나 농부가는 신문 광고나 기사에도 자주 등장하며 그가 특장으로 자주 불렀던 소리여서 더늠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한편 그의 소리가 대단한 인기를 누리고 있었지만 그것은 단순히 대중적인 인기에 영합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특정 대목이 인기를 끌어 명성을 얻은 것이 아니었으며, 인기 곡이라는 것은 그의 판소리를 대표하는 자격을 지니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판소리 5바탕을 골고루 녹음하여 예술적 기량을 충분히 보여 주었다. 그는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 모두에 능했으며, 실제 그의 바디는 후대 명창들에게 전승됨으로써 동편제의 가장 핵심적인 전승 계보를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그의 대중성은 불완전한 한쪽이 아니라 전체 중의 한 면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점은 소위 인기곡들의 예술적 완성도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십장가'[남원 오입쟁이]같은 소리는 사설 구성이나 음악적 구성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스물 치고 짐작헐까. 삼십도의 맹장하니 옥모화용의 맑은 눈물 옥같이 지닌 양은 쌍수용용, 옥같은 두다리으 유수같이 흐른 피난 사람의 자식은 볼 수 없네. 수십명이 귀경을 허다가, 오오입쟁이 아나가 나서면서 "제기를 붙고 발기를 갈 녀석. 이런 매질이 또 있느냐. 집장 사령을 눈익헤 두었다 밖으로 나오면 급살을 주리라. 저런 매질이 또 있느냐." 매질하던 집장사령이 돌아서 발 툭 탁 구르면서, "못 하겄네 못 하겠네 집장사령 못 하겠네. 이놈의 영업 아니면 영업이 없느냐. 우리집에 돌아가서 농사 영업을 허여를 보리라. 이런 몰골이 또 있느냐." 춘향 모친이 발 동동 구를 적으로, 여러 오입쟁이 각자 흩어가며, "나 돌아간다. 내 돌아간다. 다른 사람을 차마 볼 수가 없구나." 떨떠리고 돌아서는디, "가노라 가네. 내가 가네. 이런 일은 다시는 허지마라. 사람을 치면은 저렇게 치느냐. 사람의 자식은 볼 수가 없네."
이 소리에서는 춘향이 수십 대의 매를 맞고 난 후의 처절한 형상을 둘러싸고 '남원읍내 오입쟁이'와 집장사령, 춘향모가 보이는 태도를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특히 집장사령의 무자비함을 꾸짖는 오입쟁이와 무고한 매질을 더 이상 못하겠다고 팽개치는 집장사령의 모습을 통해 문제의 핵심이 변학도에게 있음을 지연스럽게 강조하는 연출 수법이 부각된다. 또한 오입쟁이가 말하는 대목은 경드름을 사용하여 독특한 맛을 냄으로써 전체적으로 입체적인 음악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3-4분 정도의 짧은 시간 안에 연주되는 소리에 이처럼 치밀하고 입체적인 구성을 할 수 있다는 데서 그의 예술적 역량을 충분히 엿볼 수 있겠다.
이처럼 그의 판소리는 예술적인 완성도가 뛰어났다. 물론 그의 예술성은 기존의 동편제가 지닌 고법의 고아한 예술성과 다른 것이며, 식자 취향의 미학보다는 대중적인 기호를 중시한 예술적 지향을 선보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그의 소리는 대중적이면서도 예술성이 부각되는데, 이 점은 20세기 판소리의 변화 과정에서 하나의 지침이 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20세기 판소리는 전반적으로 이전 시기의 다양한 예술 기법을 계승하지 못하고, 또한 계면조 위주의 선율과 음역의 축소 등과 같은 변화를 겪게 되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송만갑같은 이는 전조의 기법을 적극 활용하고 발전시켜 20세기 판소리의 새로운 전환을 이루어내었다. 더욱이 20세기 판소리가 지나치게 기교적으로 흐르고 설음조의 나약에 빠졌다는 문제에 봉착해 있는 상황에서 그가 구축한 동편 소리의 꿋꿋하면서 절제되고 힘 있는 소리의 예술성은 판소리 예술의 균형을 위해서도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이런 사실에서 보듯이 그가 지향한 판소리의 대중화는 값싼 통속화가 아니었다. 앞에서 보았듯이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소리를 가다듬으며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는 예술적인 인생을 살았다. 그의 판소리관은, 고제의 전통에 새로운 요소들을 추가하는 방식의 변화를 중시하고, 공력이 깃든 판소리와 그것의 예술적 완성도를 중시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아니리나 발림보다도 소리 그 자체를 중시했고, 부를 때마다 달라지는 변주를 통해서 새로운 예술 세계를 개척하려고 했던 태도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그가 추구한 대중성은 얄팍한 인기에 영합하려는 것이 아니었으며 예술성과의 조화를 통해 보다 수준 높은 대중 예술을 구축하려고 했던 노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소리꾼을 포목상에 비유하면서 "비단을 달라는 이에게는 비단을 주고 무명을 달라는 이에게는 무명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판소리의 시대적 변화 속에서 그가 추구한 예술 세계의 특성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대중 예술인 판소리가 이루고자 하는 가장 이상적인 경지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대중성과 예술성의 조화, 그의 예술 세계는 그것을 지향하고 있으며, 그것을 성취했다. 그가 '별립문호(別立門戶)'했다는 것은 이런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동편 소리를 그대로 계승했던 다른 명창들과 달리 그는 분명히 특징적인 예술 세계를 지녔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판소리사에서 중요한 의미로 작용하였다. 판소리가 보다 많은 사람에게 다가가고, 또 깊은 감동을 주는 예술로 자리매김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4. 맺음말
송만갑은, 다른 소리꾼처럼 '누구에게 판소리를 배워 불렀는가' 식의 단순한 소리 인생을 살지 않았다. 그의 생애는 개인사에 머물지 않고 판소리사의 전개와 거의 맥을 같이 한다. 근세 판소리사의 중요한 전환점마다 그가 자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그만큼 치열한 소리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전래의 소리와 다른 새로운 소리제를 모색하여 시대적 변화라는 판소리사의 새로운 흐름을 이끌어냈으며, 1900년대 초에 판소리가 대중 공연의 연희물로 등장할 때에 협률사와 원각사의 주역으로 참여하였고, 이어 상업 음반이 등장하는 새로운 환경에서 음반 취입을 4번씩이나 할 만큼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다. 그리고 일제 침략기에 판소리의 중흥을 모색하는 시점에서는 조선성악연구회를 통해 제자를 길러 내었다. 이처럼 그의 생애와 활동은 근세 판소리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까닭에 그의 예술 세계 역시 판소리사의 전개와 관련지어 조명해 볼 수 있다. 그가 구축한 예술 세계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동편 소리의 미학을 구현하였다. 그의 판소리는 현존 자료 중에서 동편 소리의 특징에 가장 가깝다고 평가된다. 그의 소리에는 엄정하고 절제된 그리고 힘 있는 소리를 강조하는 동편 소리의 미학이 잘 드러나 있다.
둘째, 급변하는 시대 변화 속에서 판소리를 창조적으로 계승하고 발전시키고자 했다. 그는 당시까지 유지되던 동편제의 특권적 우월 의식을 포기하면서 다른 유파의 소리를 수용하고 또 자신의 소리를 끊임 없이 변화시켜 새로운 경지의 예술을 개척하고자 했던 창조적인 명창이었다.
셋째, 대중성과 예술성의 조화를 추구하였다. 그는 고법의 예술성을 준수하고자 했던 다른 동편제 명창들과 달리 대중 공연과 음반 취입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더불어 예술성과의 조화를 꾀함으로써 대중 예술로서 판소리가 추구하는 고차원의 예술 세계를 구축하였다. 이런 점에서 그의 판소리사적 위상과 예술 세계의 특성은 각별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송만갑은 20세기 초반의 격변기 속에서 중요한 족적을 남긴 명창이다. 그가 보여준 판소리 활동과 예술 세계는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다. 특히 20세기 판소리가, 이전 시기의 예술 기법을 제대로 계승하지 못하고, 계면조 위주의 설음조의 나약에 빠지고 지나치게 기교적인 방향으로 변화되고 있다는 진단을 받고 있기 때문에 더욱 송만갑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가 구축한 꿋꿋하면서 힘 있는 동편 소리의 미학은 판소리의 균형적인 전승을 위해서 다시 주목해야 할 점이다. 또한 시대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되 전통과 공력을 바탕으로 하고, 전래의 소리를 극복하여 창조적인 예술 세계를 개척하고, 대중성과 예술성을 조화롭게 추구하고자 했던 그의 예술 세계는 우리 시대에 여러 가지 점을 시사해 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
한편 이 글에서는 송만갑 바디의 다섯 마당에 대한 작품론이나 그것의 전승 문제 등에 대해서는 다루지 못했다. 이 문제는 다른 글에서 다루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