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출애굽기 4장 22절
너는 바로에게 말하여라. '나 주가 이렇게 말한다. 이스라엘은 나의 맏아들이다. <출애굽기 4장 22절>
하나님은 모세에게 분명히 자신이 ‘아버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장자로 두고 있는 아버지입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쉽게 부를 수 없는 이름이었습니다. 망령되이 부르는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가장 먼저 하나님에 대한 호칭을 이렇게 사용하셨습니다.
예수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 <누가복음 2장 49절, 새번역>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부르셨다는 것도 충격이지만 당시의 문화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굳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신 것일까요? 바로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전능자이시고,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피조물인 인간을 너무도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베푸셨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의 자녀라 일컬어 주셨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3장 1절, 새번역>
하나님은 그저 창조주로서 피조물인 우리를 마음대로 조정하시거나 사용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인이시기에 우리를 아무렇지 않게 대하거나, 하찮게 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하십니다. 아버지의 사랑으로 우리와 새로운 관계를 맺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저 멀리 동떨어진 관계가 아닌 ‘가족’이라는 이름의 공동체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고백을 통해 깨달아야 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만드시기 위해 하나님이 먼저 움직이셨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 될 수 없는 우리와 하나가 되기 위하여 ‘죄’의 문제를 해결하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독생자 아들을 ‘우리’라는 아들과 바꾸셨습니다. 독생자 예수에게 죄를 대신 지게하고, ‘우리’라고 하는 죽어 마땅한 아들을 살리셨습니다. 친아들을 양아들을 위해 내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양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되고 싶어서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손을 내미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고 싶어 하십니다. 아담과 하와와 함께 거닐던 에덴동산, 즉 하나님의 나라를 함께 회복하길 원하십니다. 절대 강제로 회복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자원하여’, ‘기쁨으로’, ‘인정함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길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 상속자로 우리의 이름을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또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녀로 삼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영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로마서 8장 15절, 새번역>
CCM 사역자 조준모씨가 부른 ‘십자가에서’라는 곡이 있습니다. 그 곡의 가사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고아에서 아들로, 거절에서 용납으로, 죄인에서 의인으로 바꾸어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또한 저주에서 축복으로, 원수에서 연인으로, 창기에서 신부로 바꾸어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개인적으로 이 찬양을 들으며 ‘고아에서 아들로’ 라는 첫 구절에서 너무도 마음이 먹먹해 졌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셔도 되는 분이십니다. 인간을 포기하셔도 되고, 피조물이니 멋대로 하셔도 됩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잊지 않으십니다. 사랑하십니다. 전능자이시며 창조주이시고, 주인이신 자신을 ‘아버지’의 영역으로 낮추심으로 피조물이며 행악자이며, 종인 우리를 ‘자녀’라 하시며 지금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잊지 마십시오. 끝 날까지 결코 이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하늘의 아버지가 있습니다. 돌아갈 집이 있습니다. 상속받을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