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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쓰시마 정벌
조선은 건국 이래 왜구 금압과 회유책을 써서 왜구 활동을 어느 정도 진정시켰다. 그러나 왜구 금합에 공적이 있던 쓰시마 슈고 소 사다시게(宗貞茂)가 사망하자 왜구 활동이 다시 활발해졌다. 이에 조선은 왜구의 근거지인 쓰시마를 정벌할 계획을 세웠다. 1419년 6월 17일 이종무(李從茂)가 이끄는 병선 227척, 1만 7000명의 대군이 거제도를 출발하여 20일 쓰시마에 도착했다. 쓰시마 주민들은 처음에 이 선단을 왜구의 귀환으로 오인하여 축하연을 준비했다고도 한다. 쓰시마를 습격하여 각지에서 싸우던 조선군이 쓰시마 중부의 어촌인 니이에 상륙하여 누카다케에서 쓰시마군과 격렬히 싸웠다(누카다케 전투).
일본측은 가옥 1939채가 소실되고 114명이 참수되는 피해가 있었다. 조선측도 100여 명이 전사했다. 조선군은 교통의 요지를 차단하고 전투를 개시했는데, 태풍이 곧 불어 올 것이라는 쓰시마 슈고의 경고를 받아들여 군대를 철수했다. 조선군이 10여 일 만에 후퇴했지만, 일본에서는 원나라가 쳐들어왔을 때와 같은 상황이라며 떠들썩했다. 무로마치 바쿠후는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조선에 사절을 파견했고, 이듬해인 1420년 조선에서 회례사 송희경을 파견했다. 기해동정(己亥東征)이라고도 하며, 일본에서는 오에이의 외구(外寇)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