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중섭은 가장 한국적인 작가인 동시에 가장 현대적인 작가로 평가받는 화가이다.
이중섭은 평양에서 태어나 오산고등보통학교를 졸업.
일본 도쿄문화학원 미술과 재학중, 1938년 일본 자유미술가협회전에 출품하여
각광을 받았다.
1943년 귀국, 1945년 마사코(이남덕)와 결혼.
1951년 서귀포에서 피난생활을 하였다.
1952년 부인과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내고, 전국을 떠돌며 부두노동 등을 하다가
전쟁이 끝나자 서울로 올라갔다.
1955년 미도파화랑, 대구 미국공보원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1956년 적십자병원에서 만 40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작품은 야수파적인 강렬한 색감과 선묘 위주의 독특한 조형 등 서구적인 표현이지만,
향토적인 숨소리와 꿈을 표현하여 한국적이면서도 웅장하고 무한한 세계를 내포하고 있다.
그의 작품의 소재는 주로 소, 닭, 어린이, 가족 등 일상성을 띠고 있으면서 시정이 넘치는 것들이다.
[소], [흰소], [투계], [집 떠나는 가족] 그리고 담뱃갑속의 은지에 그린 수많은 은지화들이 대표작들로 남아 있다.
그의 예술세계를 이루는 기반은 철저하게 자신의 삶으로부터 연유하고 있다. 생활고 속에서 가족마저 일본에 보내고 전국을 떠돌며 외롭게 제작한 고통의 산물이었던 그의 작품은 1970년대에 이르러서 새롭게 평가를 받게 된다.
대향 이중섭 연보
1916 평남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에서 태어남.
1931 오산학교에서 도화교사 임용련을 만나 화가의 꿈을 키움.
1935 일본으로 건너가 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 입학.
1936 3년제의 사립문화학원으로 옮겨 입학.
1938 제2회 자유미술가협회 전람회 공모전에서 협회상을 받음.
1940 자유미술가협회 제4회 서울전에 [서 있는 소], [망월], [소의 머리], [산의 풍경]을 출품.
1941 조선신미술가협회 창립전 출품. 제5회 자유미술가협회전에 [망월], [소와 여인]을 출품, 회우로 추대.
1942 제6회 자유미술가협회전에 [소와 아이], [봄], [소묘], [목동], [지일]을 출품.
1943 제7회 자유미술가협회전에 출품, 태양상수상.
1944 평양 체신회관에서 김병기, 문학수, 황염수, 윤중식 등과 6인전.
1945 5월 원산에서 마사코(이남덕)와 결혼.
1946 조선조형예술동맹 가입.
1950 원산에서 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고 회장이 됨.
1951 한국전쟁으로 제주도 서귀포에서 피난생활을 시작.
이 곳에서 [서귀포의 환상], 두 점의 [섶섬이 보이는 풍경], [바닷가와 아이들]
등을 그림.
12월에 부산으로 옮겨감.
1952 종군화가가 됨. 은지화 기법을 착안. 12월 부산 르네상스 다방에서 기조동인을
결성하여 동인전을 가짐.
1953 통영 성림다방에서 개인전을 가짐.
일본으로 건너가 부인과 아이들을 만남.
1954 유강열, 장윤성, 전혁림과 4인전 개최. 진주에서 개인전 가짐. 6월 경복궁
국립미술관에서 개최된 대한미술협회전에 [닭] 2점과 [소]를 출품.
7월 천일백화점 개관기념 현대미술 작가전에 출품.
1955 서울 미도파 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짐.
작품은 적잖게 팔렸으나 제대로 수금이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나마
얼마 되지 않은 돈으로 친구들과 어울려 술로서 다 써 버리고 일본의
가족들을 만나러 가려던 계획은 더욱 어렵게 됨.
친구인 구상의 종용으로 대구에 가서 전시를 열었으나 성과는 신통치 않았음.
이 무렵부터 거식증 같은 일종의 정신질환 증세를 보임.
대구 성누가병원 정신과에 입원.
병세가 호전되어 퇴원해서는 정릉에서 한묵과 자취를 함.
1956 9월 6일 서대문 적십자병원에서 영양실조와 간장염으로 숨을 거둠. 화장되어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힘.
1957 차근호 작가의 묘비가 세워짐.
1972 서울 현대화랑에서 15주기 유작전 및 작품집 간행.
1978 건국 30주년 기념훈장 추서.
1986 호암갤러리에서 30주기 회고전 및 화집 간행.
1997 서귀포에서 이중섭거리 선포 및 거주지 복원 기념식 열림.
2002 서귀포시립 이중섭미술관 개관
2003 7월 29일 미술관 등록(제2종)
2004 9월 15일 제1종 전문미술관 등록.
이중섭의 황소
대향(大鄕) 이중섭
이중섭이 일본여성 마사코(이남덕)를 사랑하게 되기까지는 갈등과 번민이 매우
컸다고한다.
이중섭과 마사코, 한국인과 일본인의 결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41년 이중섭이 마사코에게 보낸 엽서그림 중에는 외딴섬에서 이중섭은 나무가
되고 마사코는 흰 대리석이 되어 영원히 함께 하는 모습이 있다.
이 그림을 그린 지 꼭 10년이 되는 1951년, 이중섭과 마사코는 두 아들을 데리고 이곳 서귀포로 오게 된다.
[섶섬이 보이는 풍경]은 서귀포에 안착한 후 그린 유화 작품이다.
멀리 바다를 배경으로 왼쪽 근경에는 큰 나무 두 그루가 서 있고, 오른쪽으로는
돌담과 초가집이 나지막히 자리하고 있다.
담 너머로 이웃집 지붕과 눌, 우영팟(텃밭)과 녹색 귤나무가 보인다.
마당에 보이는 점경 인물과 바다에 떠 있는 흰 돛단배, 새잎이 돋아나지 않은 나무가 봄을 기다리고 있다.
이중섭 작 [섶섬이 보이는 풍경] 이호재 가나아트 회장 기증24.0 × 19.0cm, 유화, 1951
이중섭 작 [선착장을 내려다본 풍경] 40.8 × 28.4cm, 캔버스에 유채, 연대미상
이중섭 작 [꽃과 아이들] 23.0 × 18.6cm, 캔버스에 유채, 연대미상
이중섭 작 [파란 게와 어린이] 박명자 갤러리 현대 대표 기증 31.0 × 24.0cm, 종이에 에나멜, 1950년대
이중섭 작 [가족] 이호재 가나아트 회장 기증 10.0 × 15.0cm, 은지화, 1950년대
은지화를 그리며 대구에서 보낸 이중섭의 다방이야기
6·25, 피란 지식인들이 움을 틀 곳은 대구와 부산 밖에 없었다.
김동리는 구상 시인과 중섭이 만났던 밀다원 다방을 배경으로 ‘밀다원시대’를 그렸다.
일부 문인은 수건과 칫솔이 들어 있는 낡은 손가방을 들고 바다가 보이는 다방인 금강, 춘추, 녹원, 청구 등으로 몰려들었다. 마감에 쫓긴 문인은 구석자리에서 원고를 썼고, 고료가 생기면 밀린 외상값도 갚고, 기분이 내키면 선창가 대폿집에서 피란살이의 시름과 울분을 달래며 ‘예술대회’(유행가 부르기)를 열기도 했다.
이 풍경은 대구도 마찬가지였다.
50년대초 영남일보 주필로 있던 때 구상은 서울에서 개인전을 한 중섭을 대구로 데려온다.
전 영남대 영문과 교수이자 미공보원 원장을 역임한 맥타카트(작고)와 대구화단의 원로 정점식도 중섭의 대구시절을 열게하는 데 한 몫을 했다. 3원짜리 ‘승리’ 담배도 부담스러워 버려진 담배꽁초 속 담뱃가루를 끄집어내 신문종이에 말아 피웠던 중섭의 얼굴에는 늘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하지만 대구는 그런 그림자까지 끌어안고 낭만의 도시로 빛을 발했다.
55년 가을, 중섭은 낙엽을 밟으면서 말벗을 찾아 음악감상실 녹향(처음에는 향촌동에서 출발, 현재 대구극장 맞은편으로 이전) 구석자리를 찾는다. 그곳에는 명태를 작사한 양명문과 당시엔 ‘광장에서’란 우수어린 시까지 적고 다녔던 경북대학생 김윤환(지금은 허주란 아호로 잘 알려진 원로정치인), 군화를 즐겼던 이어령 전 문화관광부장관도 진을 치고 있었다. 중섭은 일제 때 제작된 SP판에서 흘러나오는 차이코프스키의 비창교향곡,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을 즐겨들었다. 술을 먹지 않을 땐 중섭은 지극히 여리고 말이 없었다. 그는 부산 피란시절 광복동 밀다원 다방을 배회하면서 틈틈이 못 끝으로 그려보았던 은지화 솜씨를 녹향 주인 이창수(83)에게 선보이기도 했다. 당시로선 이창수도 중섭의 은지화가 지금처럼 유명해질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 시절 대구에서 이중섭의 그림을 구입해갈 수입상도 없었고, 중섭 역시 은지화는 본격적인 창작품이 아니고 일종의 낙서화였다 . 심지어 이젤, 화포, 물감을 살 처지도 못 됐으니 자연 담배를 포장했던 은박지가 도화지 구실을 할 수밖에 없었다. 중섭은 당시 미 공보원장 맥타카트의 주선으로 현재 유풍문구사 옆에 자리잡은 미 공보원 1층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전시작품은 20여점. 퀭한 눈빛, 땟국이 흐르는 외투, 교동시장에서 구해 온 워카를 신고 다녔던 중섭은 미 공보원 바로 옆 경복여관에서 함께 기거한 미소년 같았던 소설가 최태응(미국에서 작고)과 함께 도심을 돌아다니길 좋아했다.
여관문을 나와 대구역 방향으로 내려가다가 구 상업은행 향촌동 지점 앞 횡단보도 앞에서 둘은 잠시 갈등한다.
오른편, 교동시장 쪽으로 가서 대구·송죽·자유극장 간판그림을 바라 볼 것인가, 아니면 길건너 향촌동 골목 다방가를 기웃거릴 것인가. 칩거형인 중섭은 다방 커피 앞에서 노닥거리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부산의 백조다방에 대한 향수 때문에 북성로 백조를 점 찍으려다가 한두번 가보곤 결국 발을 끊고만다.
왜그랬을까? 자기하고 코드가 별로 맞지 않는 백조 주인 이삼근 때문이었다. 백조 주인은 너무 야수적이었고 병적일 정도로 매사에 도도하기만 했다. 중섭도 그런 기질이 있어 왠지 그가 부담스럽고 밀쳐내고 싶었다.
중섭은 당시 계성중·고 교사였던 화가 정점식과 흉허물 없이 지냈다. 거식증에 정신분열증세까지 보였던 중섭은 대구에서 극도의 외롬병을 앓았다. 술에 취하면 중섭은 어린 애처럼 극도의 스킨십을 갈구했다.
심지어 옆에 있던 정점식을 마치 애인 끌어안듯 부둥켜안은 뒤 깊은 키스 공세를 폈다. 그런 어느날 최태응이 당시 계성중·고교 미술선생이었던 정점식한테 급전을 날린다. 이중섭이가 애써 그린 은지화를 모두 태우려고 한다는 내용이었다. 정점식은 하던 일을 접어두고 급히 경복여관으로 달려가 중섭을 설득한다. 정 그 그림이 보기 싫으면 당분간 자기가 보관해 줄테니 갖고 있는 걸 모두 달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중섭의 은지화 30여점이 정점식한테 흘러들어갔다. 정점식은 그 은지화를 모두 구상 시인 등 주변 사람들한테 나눠주었다고 최근 증언해 주었다.
중섭이 대구에서 보낸 시간은 불과 1년 남짓했지만 그의 고독한 예술혼은 녹향, 백록, 백조는 물론 북성로 모나코·꽃자리·청포도·향수다방, 향촌동 호수·서라벌·르네상스, 포정동의 살으리·오리온, 대구역앞 나룻배와 야담, 동성로 은다방·파리다방·춘추다방, 남산동 고려다방, 중앙공원 옆 낙양다방, 중앙파출소 근처의 내고향 다방, 동성로 미도, 몬파리 등에서 진을 쳤던 50년대초 향토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중섭은 병세가 악화돼 중구 종로호텔 근처에 있는 가톨릭계 성가병원에 입원했다.
먼저 서울로 올라간 구상 시인은 중섭을 서울로 데려온다. 하지만 육군병원, 청량리 정신병원을 거친 중섭은 56년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영면에 들었다.
[영남일보 대구 추억기행 .46] 다방이야기<2> - 이중섭과 다방 中에서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이중섭 작 [게와 가족] 이호재 가나아트 회장 기증 10.0 × 15.0cm, 은지화, 1950년대
이중섭은 한국전쟁 당시 담뱃갑 안의 은박지에 주목하여 은지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종이 위에 얇게 알루미늄 코팅처리를 한 은박지는 종이의 유연성을 유지하면서도 알루미늄의 매끈한 질감과 은회색의 도시적 미감이 내재된 매력적인 재료이다.
이중섭은 은박지 표면은 물을 흡수하지 않지만 이면의 종이는 물을 흡수한다는 점에 착안하여 날카로운 못이나 송곳으로 은박지 표면에 형상을 그리듯이 판 후 그 위에 물감을 칠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경과한 후 물감을 닦아내었다. 그렇게 되면 코팅 처리한 표면에는 물감이 묻지 않지만 송곳으로 파인 홈에는 종이가 드러나게 되어 물감을 흡수하면서 파인 형상이 뚜렷하게 드러나게 되는데, 이는 고려청자의 상감기법과 유사하다.
전통기법과 어우러진 이중섭의 은지화는 그 독창벅인 기법과 예술성을 인정받고 있다.
이중섭 작 [아이들] 이호재 가나아트 회장 기증 40.8 × 28.4cm, 캔버스에 유채, 연대미상
이중섭 작 [송태연의 초상화] 이호재 가나아트 회장 기증 32.0 × 24.4cm, 종이에 연필, 1951
일본인 부인 마사코가 이중섭에게 보낸 편지
나의 사랑하는 아고리
한동안 편지가 없는데, 그 후 편안히 계시는지요. 1월, 2월 세월의 흐름이 너무도 빨라, 벌써 앞으로 1주일이면 5월이 됩니다. 개인전뿐만 아니라 몇 명이서 함께 전람회를 여신다면 역시 이런저런 준비로 바쁘시겠습니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 예정일이 정해져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때문에 다음 답장에서는 구체적인 일들을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일요일도 먼지를 동반한 봄바람이 불었습니다. 토오요코 백화점의 옥상이 가까워 아이들을 데리고 나들이를 가려고 했지만, 옥상은 더욱 바람이 심할 거라 생각되어 중지 했습니다. 아이들은 "못가도 괜찮아요"라고 말하면서도, 금세 밖에 나가 칼싸움을 하는 등 뛰어 놀고 있습니다. 당신이 속히 용무를 마치고 돌아오시지 않으면, 우리 생활도 불안하여 전 우울해 집니다.
그후, 김향안씨로부터 아무 소식을 전해 듣지 못하여, 당신의 일이 예정대로 진행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은 짐작이 갑니다. 그럼에도 저의 아고리만은 빨리 돌아오시지 않으면...
대구에서의 전람회도, 봄 시즌에라도 서울의 전람회가 호평으로 평가받아 반드시 좋은 성과를 거두리라 믿습니다. 구상씨께는 여러가지 신세를 지고, 그리고 귀찮은 일을 부탁하는 등 깊이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당신 편으로도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주세요.
저는요새 여러 가지 돌아다니거나 신경을 써서인지 이전보다 살이 빠져, 어느정도 늘씬한 모습으로 돌아왔는데, 안 좋은 날씨에도 지지않고 활기차게 생활을 하며 저의 사랑하는 아고리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서울에 있을 때 바쁜와중에도 간간히 편지를 보내주신 것과 같이 그곳에서도 짬을 내어 편지를 보내주십시오. 이런저런 신변의 구체적인 모습을 전해 주십사 외롭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서울에 있을 때와 같이 영진에게도 친구들로부터의 소식이 없어,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떤 세세한 일이라도 좋으니 당신에 대한 일을 알고 싶은 것이 부인으로서의 심정입니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앞으로는 써주세요.
당신이 지냈던 방은 언제 오실지 몰라 창고로 쓰고 있는데, 이번에 언니가 사는 집을 신축한다고 하여 가을까지는 이사를 갈 예정입니다. 지금 있는 2층(당신도 와 보셨으니 기억하고 계시겠죠)의 식당으로 있는 서양식 방, 그 방이 꽤 넓고 조용하여 어떨까 싶은데, 금전문제가 확실치 않아 친구 집에 신세를 지지 않으려면, 여하튼 돌아오시면 이것저것 상담해야 할 것도 있습니다.
부디 건강하여 하루라도 빨리 돌아올 수 있도록...
긴 답장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당신의 남덕.
1955년 4. 24
이중섭의 친구였던 구상 시인에게 남편의 안부를 묻는 편지
구상님
어느새 6월도 얼마남지 않아, 본격적인 더위가 다가왔습니다. 그 후 별 일 없이 지내시고 계신지요.
실은 이전에도 편지를 보내드린 것처럼, 남편으로부터 3개월 이상 편지가 없어 무척 걱정하고있습니다. 구상님께와 동시에 서울에 있는 2, 3명의 친구에게 부탁을 해 보았더니, 그 중 한명 으로부터(남편이) 대구에서 제작중이라는 소식만 들었을 뿐입니다.
그것도 정확한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혹시 그곳에 계신다면 저에게서 몇 번이나 편지를 받았을테고, 님을 통해서라도 어떻게든 답장을 보내셨을 텐데, 혹시 병중에 계시지나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통영 쪽에 가시지나 않았을까 생각도 해보지만, 어디에 계시든 이렇게 오랫동안 소식을 알 수 없는 것은 지금까지 없었던 일이고, 또한 가까운 시일에 도일하신다는 답장이 있어서...
일한관계가 나날이 나빠지는 요즈음 그것도 쉽지 않아 남편도 절망적인 기분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저로서는 이런 일이(헤어지는) 없도록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저희가(조선으로) 갈 결심을 했다는 것도 말씀드렸기에, 남편으로서도 겨우 긴 슬럼프에서 벗어나 마흔이 된 지금, 그리고 내년에는 두 아이들이 모두 학교에 입학하기 때문에 이참에 열심히 하여 안정된 생활을 갖지 않으면 장래도 망가집니다.
제 편지를 받고 계신지 아닌지, 그것도 알 수 없는 상태라, 여러가지 상상을 하면 할수록 불안해질 뿐입니다. 생활력도 왕성하여 혼자서도 잘 할 수 있는 분이라면 잠시 편지가 없더라도 이렇게 걱정을 하지는 않을 텐데, 님도 아시다시피 그런 성격이고, 뿐만 아니라 신경이 둔한 분이라, 하루라도 떨어져 있으면 불안합니다. 병에 걸리지 않고 건강히 계신다면, 다른 일에 대해서는 믿음이 가는 저이기에, 인내심을 갖고 기다맇 수밖에요.
그래서 한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남편의 소식에 대해 확실한 것을 구체적으로 전해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아직 그곳에 계신다면 잘 알고 계실 터이고, 서울이나 통영에 가셨다면 그쪽 분들에게 물어 볼 수도 있을테니...
전람회에 대한 것도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 소식이 없고, 김환기씨 부인의 이야기로는 아마도 서울로 가신다고 다른 사람을 통해 들었는데, 여러분들의 이야기가 모두 정확하지 않고 애매하여 전혀 짐작할 수 가 없습니다. 그곳에서 가장 가까이 여러 신세를 베풀어주셔서 감사하면서도 이렇게 거듭 부탁을 드리는 바입니다.
하루라도 빨리 구체적인 답장을 주시도록 절절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마사코
1955년 6월 22
박정희 대통령과 우정을 나누는 친구였으며 부인과 두 아들을 병으로 잃고
자신 또한 투병 생활을 하며 불행하게 살면서도 남을 위해 힘닿는 대로 도움을 주었던 시인 구상
그는 이중섭의 친구이자 든든한 후원자였다.
여기 구상 시인과 이중섭의 이야기가 있다.
구상 선생과 이중섭은 아주 친한 친구 사이로 그 분들의 우정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 전해내려 오고 있습니다.
구상이 병치례를 하느라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였습니다.
구상은이중섭이 병문안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다 다녀갔는데 유독
이중섭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구상은 이중섭을 기다리다 못해 섭섭한 마음까지 다 들었습니다.
그러자 늦게서야 이중섭이 구상을 찾아왔습니다.
구상은 섭섭한 마음을 감추고 "왜 이렇게 늦게 왔나?"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나?"하고 나무랐습니다.
"미안하네. 내가 자네한테 빈손으로 올 수가 없어서....."
이중섭이 말끝을 흐리면서 손에 들고 온 것을 구상에게 내밀었습니다.
"이게 뭔가?"
"풀어 보게. 실은 이것 때문에 이렇게 늦었네. 내 정성일쎄."
구상은 이중섭이 내민 꾸러미를 풀어보다가 눈이 휘둥그래졌습니다.
그것은 천도복숭아를 그린 그림이었습니다.
"어른들 말씀이 이 복숭아를 먹으면 무병장수한다지 않던가.
그러니 자네도 이걸 먹고 어서 일어나게."
구상은 한동안 말을 잊었습니다. 과일 하나 살 돈이 없는 이중섭이 과일 대신
과일 그림을 그려 오느라고 늦게 왔다고 생각돼 가슴이저려왔습니다.
"그래, 알았네. 이 복숭아 먹고 빨리 일어날 걸세."
구상은 이중섭의 손을 꼭 잡았습니다.
가난한 화가 이중섭의 우정이 뼈저리게 느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정호승 산문집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中에서
2층에는 [자연과 생활, 아름다운 발견]이란 제목으로 이중섭미술관 소장품 기획전이 1월 7일에서 4월 27일까지 열리고 있다.
박영선 - 꽃과소녀
윤중식 - 태양과 비둘기
김상유 - 희
백영수 - 가족
박수근 - 나무와 두 여인
박영선 - 여인있는 풍경
권옥연 - 집풍경
이중섭 거리
전국 최초로 화가 이름을 거리명으로 명명한 이중섭 거리에는 오래된 풍경과 제주의 푸른 바다, 여행자들의 가벼운 발걸음이 함께 한다.
이날도 어김없이 눈발이 날렸다.
물끄러미 하얀 눈을 바라보던 아이들과 황소들은 경사진 도로를 따라 외발로 서 있다.
잠시 발걸음을 붙잡는 중섭공방, 중섭식당은 정말 이중섭의 흔적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중섭의 작품을 응용해서 직접 만들어 판매를 하고 동판화를 체험할 수있는
중섭공방이다.
이중섭이 머물던 공간을 지키고 있는 강아지 한 마리가 제주 정낭 너머로 눈에 들어온다.
그를 만나러 오는 이들에게 대신 눈인사를 던져주고 빈집을 지키고 있으니 훌륭한 지킴이 노릇이 아니겠는가.
'섶섬이 보이는 풍경'의 그림 속 봄을 기다리듯 그의 영혼은 복스러운 강아지를 쓰다듬으며
햇볕의 따스함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2012년 2월 8일 나는 제주로 가서 대향 이중섭을 만났고 이곳에서 나는 그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대구에 머물던 1년간, 그가 거닐었던 장소와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스쳐 지나쳤던 그 길,
은지화를 그렸을 그 다방을 다시 한 번 더 더듬어 보고 싶어진다.
담배 한 개비를 물고 긴 한숨을 뱉어버린 삶의 애환은 어느 봄바람이 다시 주워줄까?
자료참고:이중섭미술관 리플릿, 전시장내 작품설명, 홈페이지, 정호승 산문집, 영남일보
이중섭 - 자화상
서귀포시 이중섭미술관
LEE JUNG-SEOP ART MUSEUM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이중섭거리 87(서귀동 532-1)
064) 733-3555
개관시간 09:00~18:00 (매표마감 17:30)
휴관일 -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 추석
사진촬영을 허락해주신 이중섭미술관 전은자
학예사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임태경-사랑이 사랑을 버린다 [노래듣기]
첫댓글 석천의 정신적 롤모델임까?? 역쉬 예술가적 근본은 속일수가 없어보임다~~~^*^**
그의 작품세계에 대해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시간이 된것 같아서
이렇게 남겨봅니다.^^
석천님!!
늦게라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