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떴을 때 목이 약간 뻣뻣한 것이 ‘혹시 감기가 온 것이 아닌가?’ 하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좀 이상한 체질이어서 감기에 걸리면 항상 몸살이 동반됐고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지독해서 뼈 마디마디가 쑤시고 피부까지도 무지하게 아팠다.
그래서 그나마도 나를 제일 잘 안다는 우리 안주인까지도 내가 엄살이 심하다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곤 했었다. 나는 아파 죽겠는데 내가 엄살을 부리는 것쯤으로 여기며 나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을 때면 ‘마누라라는 작자마저도 저 모양인데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도 없구나’ 하고 친구들이 모두 떠나고 혼자 남았을 때처럼 쓸쓸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회사에 있는 중에도 여느 때와는 달리 머리가 지끈거리고 몸이 뻐적지근해 지는 것이 어두운 골목길을 들어설 때처럼 불안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잠을 자고 나면 괜찮아지겠거니 하고 퇴근 후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잠을 자다가 새벽녘에 잠이 깼는데 목구멍이 가시에 찔린 듯 너무나 따갑고 침을 삼키기도 힘들 정도로 아팠다. 일어나서 물을 마시러 나가다가 힘든 하루를 보내고 곤히 잠든 아내를 깨우지는 않을지 조심스레 문을 열고 발뒤꿈치를 들어 살금살금 주방으로 가서 물을 마셨다. ‘아, 불쌍한 사람 같으니. 나 때문에 고생을 하는구나’ 하고 아내가 애처로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회사에서 졸지 않으려면 잠을 자야지. 이렇게 슬픈 생각을 하면 잠이 더 안와’ 하고 아내가 고생하는 것을 머릿속에서 지우려고 이리저리 돌아 누워보기도 했다.
알람소리와 아내의 움직이는 소리에 눈이 떠졌는데 ‘이거 제대로 걸렸구나. 또 얼마나 고생을 해야 되나?’ 하고 그저께 밤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을 때 빨리 대처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그 날 밤 아내하고 오랜만에 참 좋은 시간을 보냈는데 몸을 식히느라 좀 무리를 하면서 찬 기운을 몸에 받았었나 보다. 그런데 그것이 이렇게 감기로 이어질 줄이야. ‘주님, 주님도 혹시 저처럼 남 좋은 꼴을 못 보시나요?’
회사에 도착해 보니 마당에 커다란 화물차가 와 있었다. 몇 년 동안이나 내리 앉았을지 모를 시커먼 먼지를 겹겹이 머리에 이고 있는, 해외로 선적됐다가 되돌아 온 제품 박스였다. 일손이 부족하다고 사무실 남자 직원들까지 모두 박스를 내리러 내보내고서는 나 감기 걸렸다고 사무실에 혼자 남아 있는 것도 모양새가 영 보기 흉측해서 나가서 도와주는 척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손바닥이 본래는 빨갯을 터이지만 지금은 거무튀튀해진 땟국물이 쪼르르 흐르는 작업용 목장갑을 주섬주섬 집어 들고는 손가락에 억지로 잡아 끼우고 나가 보니 이미 일을 시작해서 많이 진행 됐으려니 하는 나의 기대와는 달리 이누무시키들이 이제야 박스를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그, 좀 더 있다 나올껄. 아파 죽겠는데 너무 일찍 나왔네’ 속으로 이런 때도 하나 제대로 못 맞춘 자신을 탓하고 투덜거리며 박스를 내리다 보니 머리의 속과 겉피부가 따로따로 분리되어 있는 듯 움직일 때마다 통증이 너무 심했다. 그 때 나는 내 머리가 오래된 목조건물의 창틀이 바람에 덜컹거릴 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스에 덮혀 있던 시커먼 먼지를 고스란히 뒤집어 쓴 뒤 그래도 깨끗한 척 한다고 입고 있던 잠바를 벗어 다리에 대고 탁탁 털어 낸 다음 허리를 굽혀 머리도 털어냈다. 다른 직원들은 그냥 옷을 입은 채로 툭툭 털어 내는데 추운 날씨에도 옷을 벗는 나를 보고 누가 감기몸살 걸려서 많이 아프고 힘들겠다고 위로해 준단 말인가?
그런데 정말로 나는 너무 아팠다. 머리가 산산이 뽀개질 것 같고 온 몸의 뼈마디가 난동을 부리는 건지 쑤셔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내가 그리웠다. 이럴 때는 아내의 손이 마법의 손 같았는데... 세심하지 못하고 대충대충 주물렀지만 옛날 우리 어머니가 주물러 준 이래로 내가 제일 맘에 들어 한 손이었다.
몸살이 심해서 일찍 들어가겠다는 한 마디를 남기고 직원들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사무실을 나왔다. 미안하기도 했고 혹시 직원들에게 이런 일이 생겼을 때 그들도 나처럼 일찍 퇴근하겠다고 할까봐... 언제나 원칙주의자나 합리적인 사람인양 말하더니 이게 무슨 꼴이람. 내 자신이 치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어떡해? 지금 난 정말 무지무지 아픈데. 직원들의 눈초리가 내 뒤통수에 꽂히는 것 같아서 내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전설따라 삼천리에 나오는 얘기같이 뒤를 돌아보면 그 자리에 돌이 되어 굳어버린다는 말을 믿는 사람처럼.
차를 몰고 한참 왔을 때 이럴 때 사우나에 가서 땀을 쭉 빼고 아면 감기가 홀딱 낫는다는 말이 생각나서 오늘은 나도 사우나에 가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평소 혈압이 높아서인지 찜질방의 뜨거운 방에 들어가면 머리가 아프고 토할 것 같아서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혼자 널찍한 거실 같은데서 TV나 보곤 했었기 때문에 오늘처럼 땀을 빼러 사우나에 간다는 생각을 한 것만으로도 스스로가 대견하고 정말 대단한 발전이었다.
뜨거운 물속에 들어 앉아 있으니 처음엔 참 편안하고 옛날 내가 결혼하기 전 우리 집에 있었던 빨간 카시미롱 이불에 파묻힌 것처럼 안락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뿐이고 머리가 더 아픈 것 같고 가슴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물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그래도 조금만 더 참아보기로 했다. ‘사내가 이 정도도 못 참아서야 어디다 쓰겠어?’ 하구.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이렇게 가슴이 막히고 토할 것 같은걸 보니 꽤 오랜 시간이 지났나 보다고 생각하곤 머리를 이리저리 돌려 벽에 붙은 시계를 올려다봤는데 이게 무신 일이람? 내 머리가 너무 아파서 시계바늘에 집중이 안 되는 건지 수증기와 땀이 범벅되어 눈으로 흘러 내려서 잘 안 보이는 건지 몇 번이나 손을 털어 눈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물방울들을 걷어 치웠다. 너무 실망스러웠다. 아직 채 십분도 지나지 않았다니... 언제까지 이 지옥 같은 탕 속에 들어 앉아 있어야 된단 말인가!
그 때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눈을 크게 부릅뜨고 보니 평소 내가 좋아했던 동네 형님이었다. 남자들끼리의 공간이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아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왠지 쑥스럽고 훨씬 연배인 형님의 알몸을 어느 곳 하나 빼놓지 않고 본다는 것이 더욱 미안하게 느껴졌다. 내가 손아래인 것이 다행스러웠다.
그 형님이 탕 속으로 들어오셨다. ‘이 시간에 왠일이여어?’ ‘감기가 들어서 뜨건 물 속에 좀 들어 앉아 있으면 빨리 날 거 같아서 왔어요.’ ‘잘 지내지이?’ ‘그럼요, 형님두 잘 지내시지요?’ 빨리 탕 밖으로 나가고 싶은데 누가 충청도 양반 아니랠까봐 천천히 천천히 한 마디씩 꺼내셨다.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 같을 때 드디어 형님이 탕 밖으로 나가셨다. ‘아, 살았다.’
기왕에 목욕탕에 왔으니 오랜만에 때나 밀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몸을 불릴려고 따뜻한 물을 연신 퍼붓다가 뱃가죽을 밀어보니 때가 좀 밀려 나왔다. ‘아저씨, 때 좀 밀어 주세요.’ 침상 같은 데에 물을 몇 바가지 퍼 부우며 올라가 누우란다. 약간 미끌거리는 것이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방어할 수 없는 무방비 상태로 내 몸을 온전히 그 분께 맡겼다.
‘으악, 왜 이렇게 아퍼.’ 초록색 이태리 타올이 내 피부에 닿을 때마다 피부가 갈갈이 찢겨나갈 것 같았다. ‘사람 죽이는구나.’ 눈을 질끈 감고 이를 악물었다. 별난 체질이라 몸살이 나면 항상 피부까지 아프다는 것을 알면서 왜 때를 밀 생각을 했단 말인가? ‘아프다고 좀 살살하라고 하면 애도 아이고 다 큰 어른이 엄살떤다고 생각하겠지? 말을 하지 않는 게 오히려 덜 창피스러울거야.‘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 분의 손길이 저 아래 지방에서 배회하고 있었는데 이리스치고 저리 스칠 때마다(?) 부끄러운 느낌이 들었다. ‘왜 이렇게 고난의 연속일까?’ 샤워기로 비눗물을 씻어내고 물기를 닦는데 한기가 느껴졌다. ‘목욕탕까지 와서 땀을 뺐으니 감기가 나아야 할텐데...’
다음 날 아침, 목욕탕 갔던 걸 후회했다. 몸살이 더 지독해졌기 때문이다. ‘내 다시는 감기 걸렸을 때 목욕탕에 가지 말아야지’ 그리고 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감기 예방을 위해서. 그래야 아내와 좋은 시간을 보내고서도 감기에 안 걸리지.
아직도 감기가 다 낫지 않아서 혹시나 아내가 감기 옮을까봐 이불의 양쪽 끝 쪽으로 뚝뚝 떨어져서 잔다. 참 견디기 힘든(?) 밤이다. 그래도 또 수작을 걸어본다.
내 발을 아내의 발 위에 올려놓으며,
‘이거 누구~발?’
‘기일씨~발’
‘뭬야?’
임기일이었습니다. 추웅~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