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청춘시절은 샘 치기와 말 여물 썰기가 한창이었던 고교시절인 것 같다. 나의 힘은 정말
지금 생각해도 대단하였다. 괴력이 나타났다는 뜻이 아니라 나의 몸에서 나타나는 에너지는 무한
대인 것 같이 느껴졌다는 말이다.
지적인 면에서는 정말 보잘것이 없는 나였다고 자책이 갔지만, 나의 또래가 느낀바와 같이 힘
은 쓸수록 점점 더 불어나는 강물 같았다. 괴테가 <파우스트>를 쓴 목적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
만, 유럽의 전설에서 대한 매력이 바로 늙은 몸에서 느끼는 허약함을 극복하는 이상향을 발견함
으로써, 메피스토펠레스의 출현이 괴테와 파우스트 모두에게 필요하였기 때문인 것 같았다.
우리 집에는 아담한 샘이 하나 있었다. 어린 시절에 수돗물이 나오고부터는 샘이 냉대를 받아
왔지만, 여름에 시원한 물의 온도 때문에 수박을 식혀 먹는 오늘날의 냉장고 구실을 하였다. 60년
대 중반부터 샘물이 도랑과 화장실로부터 오염되어 왔기 때문에, 샘치는 사람의 도움없이 거의
혼자의 힘으로 샘을 깨끗이 치우기 위해서 샘의 지하로 가끔씩 내려갔다
물론 큰 물통으로 만든 두레박을 임시로 노끈으로 엮어 만들어서, 수 십 번에 걸쳐서 물을 퍼
내어 샘에 물이 마르도록 한 다음에 내려갔다. 돌덩이를 하나 하나씩 딛고서 내려갈 때는, 약간의
흥분과 스릴을 느끼게 된다. 물이끼가 발에 닫자 미끄러져서 불안하였지만, 오히려 나만의 세계로
내려가는 기분은 모험을 통한 영웅심을 발동시켜 주었다.
그 당시만 해도 동네에서는 가난으로 학교 공부보다는 운동이나 장사에 관심이 많았고, 비싼
학비를 내고 진학을 한다는 자체가 사치에 가까웠다. 그러나 나의 부모님도 우리 나라의 대부분
의 부모님들의 교육에 대한 집념과 마찬가지로, 옛날이나 지금이나 거의 다를 바 없는 높은 교육
열이셨던 것만은 사실이라고 생각된다.
지금도 변두리인 K동에서 그래도 오래 동안 살아오셨고 열심히 사신 덕분에, 동네의 유지로서
계셨던 선친과 모친의 배려로 오직 공부에만 몰두할 수가 있었다. 지금 나의 처지로 보아서 교육
계에 20여년간 근무해온 처지여서 이렇다 저렇다 평가할 단계가 아니지만, 소위 반 풍수로서 내
일을 믿으며 살아가는 민초의 생활에 이젠 만사가 그저 괴로울 따름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불효요 위선자라고 욕을 할지도 모르겠으나, 아직 뚜렸한 생활 철학이 세
워 지지를 않고 있다는 점은 나 개인뿐만 아니라, 민족을 위해서도 슬픈 일이라고 본다. 세상은
나의 인생관으로는 너무나 안일한 일상 생활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고 하는 자책감을 느낄 뿐이
다.
세상은 고난과 욕설과 비난과 저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나를 재촉하고 있다. 나의 인생 철
학은 정말 온순하고 칭찬과 사랑과 충고로 이어가야 할 인생이라고 느끼는 데, 이상향(Utopia, 즉
Nowhere)속에서나 찾아야할 요소이라고 생각된다. 천국과 지옥 속을 오락가락하는 일상생활이
이어지고 있는 데, 바로 현실과 이상과의 갈등이 계속됨으로써, 하루하루 허탈감을 삼키면서 살아
가도록 강요당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 어찌 나만의 느낌이라 할 수가 있을까.
세상의 냉대는 인간의 인간관계에 찬물을 끼얹는 생활을 지속시킬 수도 있겠다. 언제인가부터
서울의 명문대학의 입학 경쟁이 각 도간의 경쟁이 지속되면서부터, 지적이지만 나이 어리고 이기
적인 인간이 직장의 꽃으로 성장하면서, 인격에는 독버섯으로 마구 자라난 인생들이 우후죽순처
럼 돋아나게 만든 것이라고 생각하면, 나만의 공상인지를 되묻고 싶다.
황금만능의 시대에서 황금은 인격의 면허장이 되었고 많은 낙오자를 최대한 배출시키면서, 소
위 왕따(이지매, 완전히 따돌림 당함)를 만들기에 혈안이 된 족속을 오히려 우상화 내지는 지도자
(?) 운운 해나가는, 한심한 속물들의 천국이 되고 있음을 볼 때는 개탄의 여지도 남기지 않고 멋
지게 살아가는 지적 속물들의 모습은 구역질을 토하게 만들어 주기에 충분한 것 같다.
한 시대의 마지막 보루인 양심을 팔아서 소위 멋진 생활을 영위한다고 선언하는 속물들의 작태
를 대하면서도 나도 하루 빨리 저런 속물이 되어 보았으면 하는 유혹조차 느끼게됨은 왠 일일까
요. 이젠 반성이나 양보의 시대는 끝났고 오직 생존의 전투가 있을 뿐이다. 서로 끌어내리고 깎아
내리기에 혈안이 된 야수의 포효가 메아리 치고 있는 오늘이다.
청년의 생활은 넘치는 힘이고 장년의 생활은 지혜라고 하였으나, 컴퓨터는 힘과 지혜를 모두
빼앗고 다만 경쟁과 낙오만을 남겨놓고 있다. 이것이 현실이며 패배자의 쓰라린 가슴은 어느 누
구도 달래 줄 수가 없는 울분을 길이길이 펼쳐주고 있다.
바보처럼 살고 싶다는 말은 이제는 여유있는 생활 신조가 아니라, 패배자의 한스러운 절규라는
것이 되고 말았다. 책임감이라는 미명아래 인간을 혹사시키는 잔인한 지배자가 옛날이나 지금이
나 마찬가지로 존재하고 있다.
현실에서 얻은 교훈은 세상을 꿰뚫는 묘책을 신문에서 흡수하고, 그 묘책을 이웃에게 실현시켜
서 악이 지배하는 지옥으로 몰아넣는, 소위 마키아벨리안이나 시시포스 같은 악으로 뭉쳐진 인간
만을, 세상살이의 승리자인 것으로 일시적으로 판단하는 착각의 무리들이 수없이 많다는 점이다.
왜 나 자신은 홀로서기를 거부하고 살아온 것일까. 나의 부족함을 왜 박차고 나가질 못한 것
일까. 언제 나의 무기력을 투지로 바꿀 날이 올 것인가. 과연 그 방법이 있다면 어디서 시작해야
할 것인가. 자본주의 사회의 꽃은 돈이기 때문에 선친을 그 많은 고초를 감내하시면서도 재산에
연연하신 것 같다.
어디서부터 시작할 것인가를 생각한다면 역시 책밖에 없는 데, 책은 음모를 뚫는 데 너무나
힘이 드는 방패다. 그러면 돈인데 역시 지금의 나로서는 어머니께서나 동생들이 염려하는 것처럼
무력한 생활의 연속이다. 마지막으로 친구이다. 그러나 나의 고집으로 적이 점점 더 많아지고 친
한 친구는 오히려 줄어들고 있는 현실은 아닌지 걱정된다.
나와 같이 심한 왕자병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던 친척으로부터, 즉 문제성이 있는 사람으
로 생각되는 분을 통해서 세상 읽기를 배워온 나는, 이젠 스스로 외롭지만 홀로서기의 가난한 선
비와 민초로서의 길을 묵묵히 걷고 있을 뿐이다. 가시밭길과 고통의 기나긴 터널을 통과하고 있
는 모든 서민들의 애환은 느낄수록 아찔아찔한 현기증은 더 늘어갈 뿐 도무지 줄어들 기미가 없
다는 것이 또 다른 비극임을 이젠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무엇인가를 의지하고 살아갈려는 소시민의 꿈은, 무기력한 능력과 가난 앞에 통곡소리만 높이
울리면서, 지나간 평화와 안정을 향해 퇴행이란 비겁한 수단을 사용하여 도피행각을 함으로써, 스
스로 판 함정 속으로 서서히 함몰의 행진을 계속할 뿐이다. 쓰러지면서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안간힘을 써보지만 잡히는 것은 오직 허공 속의 바람뿐임을 정신을 차린 다음에 알게 되고는 씁
쓸한 미소를 지을 뿐이다.
세상의 부조리를 고발하거나 경험한다고 위대해지지 않는다. 다만 그 인생을 말없이 사라지게
할 뿐 이다. 모든 청춘은 장년이란 내리막 길을 반드시 거치면서 또한 비련의 생활을 향해서 길
을 가도록 재촉을 당하면 마지못해 나아가게 될 것이다. 장년의 길도 마찬가지이며, 노년도 예외
는 아니다. 잠시 비련을 겪고는 셰익스피어의 말대로 무대에서 사라질 뿐이다.
전도서와 법구경은 비련의 삶을 허무로 표현하였고, 어른들은 한 토막의 꿈으로 묘사하였고, 프
로이드는 문화 건설과의 대결내지 거부로 보았다. 부정적이거나 파괴적이지만 인생을 이해하는
혜안을 줄 수도 있기 때문에 무조건 나쁘다고 매도할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수용하면서 서서
히 변화를 통한 인간 구원을 향하여 유도하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된다.
무작정 구석진 곳에서 기다릴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이상이자 비련의 삶을 구원하는 방법으
로 잘 알려진, 가난과 무지와 질병으로 고통받는 형제를 위하여 노력을 아끼지 않는 단체와 협력
하거나, 경제회복과 교육과 치료로 구원의 손길이 되어주는 행동을 실천할 길을 찾아야할 때가
온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