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사무엘상 12장 23~24절, 욥기 20장 2절, 야고보서 1장 26절
나는 당신들이 잘 되도록 기도할 것입니다. 내가 기도하는 일을 그친다면, 그것은 내가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나는, 당신들이 가장 선하고 가장 바른길로 가도록 가르치겠습니다. 당신들은 주님만을 두려워하며, 마음을 다 바쳐서 진실하게 그분만을 섬기십시오. 주님께서 당신들을 생각하시고 얼마나 놀라운 일들을 하셨는가를 기억하십시오. <표준새번역>
그러므로 내 초조한 마음이 나로 하여금 대답하게 하나니 이는 내 중심이 조급함이니라 <개역개정>
누가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혀를 다스리지 않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신앙은 헛된 것입니다. <표준새번역>
여러분은 잔소리를 좋아하십니까? 조언을 좋아하십니까? 물어보나마한 질문일 것입니다. 물론 잔소리든, 조언이든 다 나를 위한 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잔소리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조언'이라고 느껴지는 언어가 좋습니다. 그러면 이 질문은 어떻습니까? 당신의 대부분의 언어는 듣는 이가 느끼기에 잔소리일까요? 조언일까요? 아마도 당신은 분명 '조언'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듣는 이도 과연 그렇게 생각할까요?
실로 '잔소리'와 '조언'의 경계는 애매합니다. 아마도 그 어떤 이도 정확하게 이 두 가지의 차이점을 나눌 수 있는 이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잔소리와 조언의 차이는 말을 하는 사람에게서 뜻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에게서 뜻이 결정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좋은 '조언'을 해준다고 해도, 듣는 이가 잔소리라고 느끼면 그건 '잔소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실상 듣는 이를 배려하지 않고 하는 모든 말들은 '잔소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꼭 들어야 할 말도 귀를 닫은 이에게는 그저 '소 귀에 경 읽기'일 뿐인 것입니다.
그런데 듣는 사람을 배려하면서 하는 말이라고 해서 꼭 조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듣는 사람이 원해서, 듣는 사람이 조언을 듣기 원해서 요청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아무리 듣는 이를 배려해준다고 하여도 '잔소리'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실상 듣는 이가 원할 때 해주는 말이 '조언'이고, 그 외에는 '잔소리'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야구선수 박찬호나 개그맨 김영철'만큼 TMT(Too Much Talker)가 있다면 전 바로 그리스도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대학 시절 명동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처음 명동에 가본거라 마음이 얼마나 들떠 있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명동에 있던 내내 마음이 계속 불편했습니다. 왜냐하면 길거리에서 전도를 하시던 할머니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도 관심가지지 않는 군중 속에서 홀로 외롭게 전도를 하시는 모습이 감사하기도 하고, 죄송한 마음도 들어 그냥 지나치치 못하고 잠시 멈추어 서서 그분의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을 까 했습니다. 그렇게 조금 잘 해드렸는데 거의 2시간이 넘도록 계속해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저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해도 안 들으셨습니다. '아멘'하고 가려고 하면 팔을 잡고 계속 이야기 하셨습니다, 제가 어떤 말을 해도 듣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본인의 이야기만 하시는 할머니셨습니다. 도저히 그 할머니를 뿌리치지 못해 2시간을 그 자리에 서서 들었습니다. 평소에 제가 좋아하는 성경이야기를 해주시는 것이었지만 기분은 점점 나빠졌습니다. 좋은 소식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저에게는 너무나도 짜쯩나는 이야기였습니다. 표정은 점점 일그러져 가고, 화가 나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할머니에게는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아야 했으니 속으로 삭혀진 화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그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비단 그 할머니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접할수록, 그리스도인이 꽤 말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또한 '잔소리'가 엄청 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앙적 조언이라고 하면서 본인의 의를 드러내기도 했고, 부탁이라고 했지만 강요였으며, 심지어 성경에 없는 이야기로 간증을 하면서 미신적 방법을 권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이런 분들과 이야기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금방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었습니다. 말은 끊어질지 모르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필리버스터'였습니다. 신앙에서 시작해서 생활로 옮겨오기 시작하면 이제 끝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진짜 이야기가 많은 분들을 만날때면 아예 통째로 하루를 비웠던 적도 있습니다. 그래야 감당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상대방을 배려해주는 '그리스도인'을 만날 때면 왜 그렇게 기분이 좋은지요?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에 마음을 쓰시는 분들을 만나면 평소에 잔소리라고 생각했던 영역들도 조언이 되는 놀라움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몇 마디 하지 않으셨지만 오히려 가슴을 파고 드는 주옥같은 조언이 되는 것이 너무 신기했습니다. 말이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별반 다른 말이 아닙니다. 신앙적인 조언은 거의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배려를 받으면서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내가 진심으로 상대방의 조언이 듣고 싶어지면서 '질문'하게 됩니다. 그러니 실상 듣는 이가 오히려 말할 수 있게 만들어 줄 때 '잔소리'가 아니라 '조언'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음 말씀은 많은 이들이 기도할 때 인용하는 '사무엘'의 유언과도 같은 선포입니다.
"나는 당신들이 잘 되도록 기도할 것입니다. 내가 기도하는 일을 그친다면, 그것은 내가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나는, 당신들이 가장 선하고 가장 바른길로 가도록 가르치겠습니다." <사무엘상 12장 23절, 표준새번역>
그런데 저에게는 이 사무엘의 선포가 조언으로 들리지 않고 잔소리로 들렸습니다. 사실 사무엘은 말이 많은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라는 '왕'에게 기름을 부어 세우면서 자신과 자신의 아들들의 통치를 받기를 거부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하여 서운했던 마음을 사무엘상 12장에서 쏟아내고 있습니다.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에게 해주는 조언인데 '잔소리'처럼 들립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마음이 아니라 사무엘 자신의 마음을 생각하며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번 시간이 되신다면 사무엘상 12장에 등장하는 사무엘의 언어를 잘 살펴보십시오. 사무엘상 11장을 보니 전쟁에서 드디어 두각을 나타낸 사울 왕을 다시 한 번 이스라엘의 왕으로 새롭게 선포하기 위해 모든 백성을 길갈에 모이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선포는 한 구절뿐(11장 15절)이고, 사무엘상 12장을 통틀어 자신이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말을 하는데 꽤 긴 시간을 쓰고 있는 사무엘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이 백성들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길갈로 가서, 사울이 우리의 왕이라는 것을 거기에서 새롭게 선포합시다. 그래서 온 백성이 길갈로 가서 그 곳 길갈에 계시는 주님 앞에서 사울을 왕으로 세웠다. 그들은 거기에서 짐승을 잡아서 주님께 화목제물로 바쳤다. 거기에서 사울과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함께 크게 기뻐하였다. <사무엘상 11장 14~15절, 표준새번역>
이렇게 11장이 마무리 되자마자 12장은 사무엘의 하소연의 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소연같기도 하고, 유언같기도 하고, 조언같기도 한 잔소리의 마지막에 했던 말이 바로 23절 말씀입니다. 사무엘이 말하고 있는 소위 '기도하지 않는 죄'는 성경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무엘은 그런 말을 만들어 냅니다. 그런데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기도하지 않는 '죄'를 명명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사무엘은 '기도하지 않는 죄'라고 명명하면서 은근히 자신의 신앙을 자랑했고, 자신을 내친 이스라엘 백성에게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엄포를 놓고 있는 듯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왕이 해야 할 업무인 가르침도 여전히 자신이 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제 사울왕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할 사무엘인데 끝까지 자신의 것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이 있습니다. 사무엘의 하소연같은, 유언같은, 조언같은 잔소리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과 사울의 반응이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혹 사무엘은 염두에 두었던 롤모델 '모세의 유언' 때와는 사뭇 다른 반응이라 놀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모세의 유언때는 백성들이 '아멘'으로 화답하였다면, 사무엘은 그 어떤 화답도 들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정적으로 사무엘의 말이 잔소리인 이유입니다. 평생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만져오던 사무엘이 이제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마음을 쓰지 않을 때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더 이상 사무엘의 언어가 '조언'이 아니라 '잔소리'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그리스도인 여러분, 다시 한 번 질문 드립니다. 당신이 생각할 때 '당신의 언어는 잔소리입니까? 조언입니까?' 그런데 당신이 '조언입니다'라고 답을 하기 위해서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 듣는 이를 배려해 주어야 합니다. 듣는 이에게 마음을 쓰셔야 합니다. 듣는 이와 마음을 나누었는지 먼저 체크해 보십시오. 아직 충분히 전해지지 않았다면 그 어떤 말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듣는 이가 원할 때 당신의 언어를 들려주십시오. 이미 당신의 삶을 통해 당신의 언어가 실천되고 싶다면 더 많은 이들이 당신에게 요청해 올 것입니다. 듣는 이가 원하지도 않는데 내가 하고 싶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원할 때 듣는 짧은 한 마디가, 원하지 않을 때 들은 백만마디의 말보다 훨씬 영향력이 있습니다.
셋째, 듣는 이가 오히려 말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십시오. 잔소리마저도 조언으로 만들어버리는 가장 큰 힘은 '경청'입니다. 당신의 경청이 듣는 이를 말하게 하면서 자연스럽게 대화로 이끌어가고, 열린 귀와 열린 마음으로 우리를 데려갈 것이며, 이미 알고 있지만 멀리하고 있던 답으로 끌어갈 것입니다.
이 땅에 축복의 통로가 되실 그리스도인 여러분, 우리의 언어가 다른 이에게, 세상에게 '잔소리'가 되지 않으려면,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진심'으로 전해지는 조언이 되기를 원한다면, 이제 말하는 '내'가 우선이 아니라 듣는 '그'를 위해 먼저 마음을 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말하는 이가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귀와 마음으로 '들어주는 이'가 되어 주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9DvBGMeYt64
https://www.youtube.com/watch?v=OhUJRBaNPOk
https://www.youtube.com/watch?v=9eJSBisnrYI
https://www.youtube.com/watch?v=7QE5xPLBBB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