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그것이 궁금했다. 그것이 알고 싶었다. 학생들이 다 돌아 간 뒤, 남산의 어둑한 기악실(器樂室) 2층에서 들려오는 거문고 소리. 슬키둥 당 뜰- - - 싸랭. 거기에는 한 나라를 삼키려는 대장부의 야망이 숨어 있었다. 벼슬길을 마다 하고 청산에 묻힌 선비의 기개가 있었다. 때로는 들릴 듯 말 듯한 여인의 흐느낌 사이로 끊어지려는 생명을 부둥켜안은 단말마의 비명이 섞여들기도 했다. 한낱 나무통에 불과한 거문고에서 저런 소리가 나다니. 그것은 단번에 영혼을 사로잡는 마술이었다.
“우조는 우조답게, 평조는 평조답게, 계면조는 너무 울지 않는 평계면 . 우조계면, 변조계면이 각각이어야 한다. 잔재주로 농현하지 말고, 힘껏 공력 들여 농현을 해라. 야문 농현법은 오랜 수련 없이는 흉내조차 어려우니, 연습보다 더 좋은 스승은 없니라.”
근세의 거문고 명인 신쾌동의 가르침이다. 본디 거문고는 인격도야의 방편으로서 사랑 받던 악기다. 가야금이 규방의 악기라면 거문고는 `군자의 벗'으로서 사랑방에 걸린 악기였다. 모든 악기의 우두머리(百樂之長)로서 거문고를 익히는 것은 서예와 더불어 선비의 덕목이었다. 음악으로서 자신을 닦은 다음 품위와 기예를 갖춘 음악을 남에게 들려 주는 거문고 연주기풍과 거문고의 모양과 소리는 우리가 얼결에 잃어버린 한국적 심성이다.
거문고의 울림통은 돌틈에서 자라다 죽은 오동나무가 제일 좋은 재료다. 물무늬가 느릿느릿 흐르는 듯한 나무 위에 받침목 24괘를 놓고 명주실로 꼬은 6줄을 괸다. 좌정한 무릎에 악기를 올려놓고서 오른손의 대나무 술대가 줄을 건드리면 왼손은 괘를 따라 다니며 혹은 흔들고 혹은 구른다. 살짝 건드리면 실비 오듯 속삭이고, 세게 건드리면 벼락치듯 무섭고, 때론 맑고, 때론 무거운 소리를 내야 으뜸소리로 친다.
“거문고는 남자지요. 푸근하게 받아주는 둥글고 속깊은 소리입니다. 술대법을 뒤죽박죽 쓰는 요즘의 연주자들을 보면 답답합니다. 악보가 음악을 버리지요. 악보로 안 가르치고 양악보가 표현 못하는 함축미를 구음(口音)으로 전수하면 훨씬 효과적입니다. 전통은 변할 필요가 없는 것이 전통 아닙니까?”
신쾌동의 제자 김영재(거문고 인간문화재. 한국종합예술원 교수)의 탄식이다. 세태도 많이 변했으니, 옛날이 아무리 좋다 해도 옛날처럼 살 수는 없다. 흰 두루마기를 입고 학이 날아가는 듯 정좌한 모습으로 기고만장하게 대점을 치는 모습, 명절치레에 심난한 아내를 위해 거문고로 떡방아소리를 내고, 때가 아니면 악기통에 가시가 돋아도 줄을 끊어버리는 선비의 고고함은 사라진 지 오래다.
19세기 초 백낙준이 창시한 거문고 산조는 이후, 신쾌동, 한갑득, 김윤덕에 의해 발전하였다. 그들의 제자들이 오늘날 가장 바쁜 거문고 연주자들로서 김영재, 김무길, 이세환, 이재화 등 사십 대 중견이다. 그들이 바쁜 중에도 꼭 해야 할 귀중한 일은 거문고의 정신과 그 음악의 찬연한 부흥이다. 키보다 높은 나뭇짐을 지고서 지게막대기로 지겟발을 두드리며 흥얼흥얼 노래하는 나뭇군의 여유를 살려내야 한다. 줄 없는 거문고를 안고 앉아 음률에 젖은 이제현(고려 때 학자)의 그 높은 음악성을 살려내야 한다. 오동이 천년 동안 곡을 지니듯(桐老千年 恒藏曲) 우리네 범부도 죽을 때까지 거문고 소리를 닮은 넉넉함과 호탕함으로 살도록 해야 한다.
벽오동 심은 뜻은 \ 봉황을 보렸더니 \ 내 심은 탓인지 기다려도 아니 오고 \ 밤중 일편 명월이 빈 가지에 걸렸에라(작자 미상)
봉황새는 세상에 성인군자가 태어날 때만 오동나무에 나타난다. 난세지음(亂世之音)이 들끓는 오늘에 한국인의 참다운 진선미를 일깨워 줄 전통음악인의 출현을 애타게 기다리는 마음으로 필자는 이 글판에 오동나무를 심는다. 1960년경 녹음한 아세아 레코드의 신쾌동 거문고 산조가 명반이며, 뿌리깊은나무에서 만든 한반도의 슬픈 소리에도 장부의 깊은 슬픔을 닮은 거문고 산조(김영재 연주)가 들어 있다. 매주 토요일 5시, 서초동 아담한 국악당에서 열리는 `토요 국악 상설공연'에서도 빠짐없이 거문고는 오르고 있으니, 멀어서 못 가랴. 마음 먹기 나름일 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