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네거리!
풀코스 출발을 위해 모인 사람들의 풍경이 가히 장관이다.
넓디 넓은 도로에 수를 헤아리기 힘들만큼 많은 사람들이 꽉 들어차 있어서 몸을 푼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하고 그저 손만 위로 뻗어 본다.
아까 경복궁에서 몸을 풀 것인데 출발 30분 전쯤이나 하려고 미루던 것이 몹시 후회가 된다.
막상 출발 30분 전엔 이곳 출발장소로 단체이동을 해와서 이처럼 꼼짝달싹 못하고 끼어 있는 것이다.
요란한 확성기 소리가 계속된 다음 출발 신호가 들려오고 환호성과 함께 구름 같은 주자들이 이순신장군 옆을 지나 머나먼 여정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다.
얼마나 이순간을 기다려 왔던가?
서울 한도심을 맨몸으로 달릴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가슴이 설레어 왔었다.
먼발치에서만 보아오던 남대문이 눈앞에 큼직하게 들어온다.
몸을 제대로 풀지 못해서 인지 아님 잠을 제대로 못자서인지 달리는 컨디션이 영 좋지가 않다.
다리가 뻑뻑하고 몸이 묵직한 게 대회를 손꼽아 기다려온 설렘과는 너무 대조적인 현실의 중압감으로 다가온다.
서울역을 지나 용산역 반환점을 향해 한참을 달리다 보니 맞은편에 엘리트 선수들의 무리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초반 오버페이스를 해서는 풀코스대회에서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다짐 또 다짐해왔던 것을 떠올리며 발걸음의 속도를 조정하면서 도로 중앙선 쪽으로 달리는 위치를 옮긴다.
곧이어 마주칠 일반참가자들 중 일행이 보일까 해서인데 평상 심을 흐리게 하는 경쟁과 욕심이 대회를 망치는 가장 큰 적이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데 오늘은 또 어떤 이가 그 미련한 역할의 주인공일까?
사람의 수가 너무 많아서 누구를 알아보고 찾고 하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닐 것 같아 포기를 하고 용산역 5km 반환점을 돌았다. 시간은 24분18초, 좀 빠르다는 생각이 들면서 지금부터 10Km구간까지 완만한 오르막에서 25분 페이스를 맞추기로 했다.
6Km쯤 되는 곳에서 클럽 일행 두 분을 만났다.
50대의 김동은님, 첫 풀코스인데도 3주전엔가 혼자서 풀코스 거리를 완주해 봐서 인지 자신감이 넘치고 있었다.
또 다른 이는 30대 비슷한 또래의 허영창, 클럽에 가입한지는 얼마 되지 않지만 그 동안 혼자서 3시간 31분이라는 좋은 기록을 세워놓은 실력자이다.
이 많은 사람들 중에 일행을 만나서 같이 뛴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같이 뛰니 심리적으로도 안정이 되고 힘도 훨씬 덜드는 것 같아서 좋았다.
하지만 불과 1Km도 못 가서 그 분위기는 깨어지고 말았다.
갑자기 뒤에서 나타난 클럽 총무 이기영님이 손을 흔들며 앞질러 가는 바람에 김동은님이 먼저 흔들린다.
페이스를 유지하시라고 강력히 주문을 해서 분위기에 휘말리는 것을 간신히 막았으나 8Km쯤 되는 곳에서 허영창님이 뛰쳐 나가고 잠시 뒤 어느 순간엔가 김동은님 조차 보이지 않는다.
아직은 시기가 아닌데 걱정이 된다.
그리고 혼자 떨어진 내자신 또한 외로운 길을 가야 한다는 심리적 중압감이 무겁게 몸을 누른다.
길이 오른쪽으로 기우는가 싶더니 오른편을 보니 종각이 있다.
전철역 출구마다 응원 나온 가족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고 있다. 전철응원단이 있다더니 바로 저런 식으로 응원을 하나보다!
가만? 후배 녀석이 종각으로 응원 나온다고 했었는데 저 인파 속 어딘가에 있을까? 행여 말로만 해놓고 까맣게 잊어버리지는 않았을까? 하기야 달리기를 취미로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동아마라톤이건 동네마라톤이건 남의 나라 일처럼 느껴지는 건 매 한가지일 텐데 괜히 부담 가게 의미부여하고 바람 잡은 내가 이상한 사람이겠지…
10Km통과지점에서 시계를 보니 구간시간이 24분42초, 그런대로 괜찮다는 생각이다.
동대문이 보이는 곳에 이르렀을 때 언제부터인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던 발소리와 소음들 속에 딸랑거리는 방울소리가 섞여 들려온다.
점차 가까워지는 방울소리의 정체를 알고 보니 끈으로 팔을 묶은 두 사람이 방울소리를 내며 달리고 있는 것이었다.
지난 몇몇 대회에서 시각장애를 가진 분들의 달리는 모습을 보았던 적이 있었는데 방울소리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시각뿐만 아니라 청각장애까지 있는 분이었다는데 그 사연을 읽으며 한없이 눈물이 나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마라톤에선 ‘극복’이라는 두 글자가 가장 상징적일 것이다.
세상과 격리되어 있는 이에게 세상을 다시 느끼게 해주고 절망에 빠져 있던 이들에겐 희망을 주는 수많은 사연들 속에 마라톤은 본래의 달리는 그 단순함을 넘어서 철학과 종교 이상의 의미로 다가오는 것 일 게다.
몸의 상태가 영 좋지 않은데도 달리는 속도를 조절하는 데는 이상이 없는 것이 신기하다.
15Km 급수대에서 바나나를 먹고 있는데 허겁지겁 서두르며 달려나가는 멋쟁이가 눈에 띈다.
아! 장영신 이구나!’
오십 나이에 젊은 아가씨 같은 몸매를 하고 팔을 좌우로 흔들며 씽씽 달리는 것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넘어선다.
최고기록이 지난 전군대회 때의 3시간27분 이었던 것으로 기억나는데 따라가 볼까? 하다가 이내 생각을 접었다.
'나는 나의 길을 달려야 한다'.
그것이 가장 옳고 바른 길이다.
시계를 보니 구간 24분38초, 전체1시간13분을 가리키고 있다.
군자교를 지나 20Km지점에 이르는 길은 굴곡이 좀 있는 것 같다. 무리들 중에 상대속도가 조금씩 빨라지는 것 같더니 아닌 게 아니라 구간 23분56초로 이제까지 중 가장 빨랐다.
동서울 터미널 이정표를 지나 잠실대교에 올라서기 전 주유소 앞 길가에 방금 전까지 뛰다가 만 듯 런닝타이즈를 쫙 빼 입은 아가씨가 펄쩍 펄쩍 뛰면서 응원하고 있다.
달리던 사람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들하고 지난다.
“쥑여주네!” “같이 뜁시다!”
잠실대교 위에선 바람이 장난 아니다.
모자를 쓰지도 않았는데 가끔씩 머리를 만지게 되고 날아갈 것이라고는 없는데도 뭔가 챙기느라고 부산해진다.
제법 긴 다리를 건너고 나니 다시 넓은 길이 열리고 사거리에서 좌회전을 하는데 정면에는 롯데월드가 커다랗게 눈에 들어온다.
멋진 아가씨들의 응원도 뜨겁다.
25Km지점, 시간은 약간 늦춰진 25분29초, 2시간3분을 가리키고 있다.
무거운 몸이 점차 그 증상을 나타내려고 하는 즈음 스포츠음료회사에서 파워런인가 하는 음료를 나누어 주고 있다.
아까 앞서갔던 이기영님이 혼자서만 숨겨두고 먹던 비장의 무기!
'그 것을 이곳에서 먹게 되다니…'
줄을 세번이나 바꿔가며 세 잔을 먹고 나니 크게 위안이 된다.
무거워진 몸을 길 한켠에서 잠깐 스트레칭을 하고 천호동으로 이르는 오르막길을 달리는데 눈에 익은 노란유니폼이 들어온다.
구찬서님! 이번이 풀코스만 네 번째로 매번 초반 무리로 경기를 망쳐서 4시간 중반대의 기록에 머무르고 있는데 이번에도 역시 초반에 오버페이스를 한 모양이다.
위로의 말을 뒤로하고 앞서 나가지만 나 역시 발걸음이 자꾸 무거워지는 것이 느껴진다.
드디어 천호동 전철역에 이르렀다.
서울에 사는 작은누나하고 수원에서 올라온 큰 누나네가 마중 나오기로 했던 곳이라 전철역 출구를 유심히 살피며 지나가는데 아는 얼굴을 찾을 수가 없다.
사람이 워낙 많아서 못 볼 수도 있겠거니 하고 도로 중앙 쪽으로 나서려는데 갑자기 온 동네가 떠나갈 만큼 요란한 소리가 들리며 길옆 한쪽이 난리다.
누나네 일행인데 태극기를 흔들며 “강기상”을 외치고 있다. 30Km를 외롭게 달려온 사람에게는 그보다 더 반가운 소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불과 두 달 전에는 죽일 놈 살릴 놈 하던 큰누나까지 일부러 올라오고 그것도 부족해서 딸에 그 애인까지 모두 끌고 나와서 연호를 하니 감동적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곧이어 30Km 표지가 있고 대규모의 음료좌판이 나왔다.
바나나를 몇 개 먹고 보니 쵸코파이도 눈에 띄길래 손에 들고 보니 사람들이 몇 명 길가 쪽으로 종아리를 대고 서있는 것이 눈에 띈다.
‘맞다! 마사지구나!’
마사지를 받으면 나머지 구간에서 힘이 펄펄 날 것 같은 생각이 들기에 나 역시 다리를 뒤로 하고 서 있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손에 든 음식을 다 먹도록 다리에 아무 반응이 없는 게 아닌가?
그제서야 뒤를 돌아보니 마사지를 해주는 남녀 자원봉사자들이 가운데 있는 나만 서로 미루고 눈앞에 새로 나타나는 사람들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었다.
시간을 보낸 것이 아까워서라도 악착같이 마사지를 받으리라는 마음으로 기다렸더니 이번엔 크림이 바닥나서 한쪽다리만 하고는 또 한참을 기다리게 되었다.
결국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마사지를 받고 나니 후회가 막심했지만 이미 금쪽 같은 시간은 5분 이상이나 지난 뒤였다.
급할 것 없이 페이스 조절을 해가며 여기까지 제대로 잘 왔는데 이렇게 경기를 망치는 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덕분에 좀 쉬었으니 나머지에서 만회를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고쳐먹고 주로에 나섰다.
맞바람이 제법 거세고 오르막이 계속되면서 걷거나 멈춘 주자들의 수가 계속 늘어났다.
‘지금부터 천명만 잡자!’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에서 거북이처럼 꾸준히 열심히 가던 사람이 토끼처럼 쉬어버렸으니 지금부터는 토끼가 되어야 되겠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달리는 속도가 빠르지는 않았겠지만 상대적인 속도로는 단거리를 달리는 사람처럼 빨라 보였다.
무더기 무더기의 주자들이 뒤로 밀려나는 것이…
제친 사람들의 숫자를 이백 몇 십 명 인가까지 세다가 아까 앞서갔던 김동은님을 만났다.
지친 발걸음이 한눈에 들어오는데도 내가 앞서 나가니까 그 페이스에 맞춰 따라오시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안 된다고 하는 말을 하고 싶어도 하지는 못하고 계속 가는데 그렇게 1Km쯤 지난 34Km지점에서 “어이, 한 5Km쯤 남았지?” 하는 물음에 “8Km남았는데요” 하고 대답했더니 갑자기 걸음이 늦어지더니 잠시 후 볼 수가 없었다.
35Km에 이르러서 시간을 확인해보니 구간29분25초, 역시 5분을 쉰 것이 그대로 시간에 반영이 되었다. 전체 시간은 3시간에 좀 못 미치고 있었다. 어차피 이 시간대라면 목표로 한 3시간 30분은 물 건너 간 것이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 그리고 다음 대회를 위해서 몸을 유지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계속되는 맞바람을 거슬러 헤쳐가며 힘들고 지친 주자들을 뒤로 하고 발걸음을 재촉하던 끝에 39Km지점에서 힘겹게 달리고 있는 회장님을 발견했다.
3시간27분의 기록을 가지고 계시는 회장님을 이 시간 이런 곳에서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힘내시라고 위로의 말을 전한 뒤 한 모퉁이도 채 가지 않아서 이번엔 이기영님이 눈에 확 들어온다.
‘오 신이시여 마라톤은 이래서 정직한 것입니다!’
얼굴에 환한 웃음이 절로 나오며 옆으로 다가갔다.
힘이 펄펄 나는 주자와 이미 힘이 다된 주자는 상대가 될 수 없는 법,
“마라톤은 이제부터가 진짜 마라톤이여!”
제법 명언을 남기고 속도를 더해 학여울역으로 향한다.
한참을 더 달려 드디어 잠실주경기장의 팻말이 나타나고 경기장 단지로 진입을 하게 되었다.
방향감각이 없어져서 입구에 있는 경기장이 메인스타디움인 것으로 착각을 했었는데 학생체육관이었다.
서울과 수원누나일행들이 여기에 나와 있었다.
또 한번 요란한 응원소리가 들렸다.
주경기장 조금 못미친 곳에서는 “산이 아빠 파이팅!” 집사람이 혼자서 소리를 치고 있었다.
주경기장 골인지점에 있었으면 멋지게 골인하는 모습을 보여줄 텐데…
트랙에 들어서니 발바닥에 느껴지는 느낌이 확연히 다른 푹신한 쿠션이 발끝을 통해 전해진다.
‘아~ 이 경기장에 당당히 들어서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던가?’
올림픽 때 경비대에 있었으면서도 이 주경기장트랙은 밟아볼 기회가 없었다.
이 많은 사람들 중에 한 사람으로 입장하는 것이지만 내 자신에게는 십 수년 만에 이루는 작은 소망이 지금 막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트랙에서 많은 사람들을 제치고 힘차게 골인~
내 자신의 역사에 진하게 기억될 몇 시간의 레이스를 마감했다.
시간은 3시간 37분 22초, 달성치 못한 목표는 한달 뒤 전군대회로 넘겨주고 오늘은 세상에서 제일 기분 좋게 즐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