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독립 투쟁사는 좌우를 초월하여 있는 그대로 기록되야 한다.남북한의 입장에서만 독립운동사를 왜곡하면 민족을 상실하게 된다.어떤 인물을 왜곡우상화하는 경우 그 인물의 역사적 실존이 비하되고 만다.반민족 친일파들이 사용하는 을사조약은 을사늑약으로,한일합방은 경술국치로 사용되야 올바른 용어다.무단헌병통치로 억압탄압착취한 일제는 조선을 보호한적이 없으며, 그런 보호를 원하지도 않았던 조선은 일본과의 합병을 원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좌우를 초월하여 영남이 낳은 일제하 독립운동가 영남지역이 반민족 친일파 후손들의 정치적 텃밭이 되어서야 어찌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그 수많은 애국영령들에게 스스로 당당할 수 있겠는가? 밀양의 김종직-세조의 왕권찬탈을 반대하다 세조지지파인 훈구파들에 의해 무오사화로 부관참시된 충절의 조선선비-이 김종직의 후손이 바로 무장투쟁노선을 지향하며 조선의열단을 창설하여 중국의 모택동.등소평의 중국 공산당 혁명의 성공을 가져오게 한 김원봉이였다. 김원봉은 중국 남경대학을 졸업한 정치엘리트로서 외모도 잘 생기고 과묵하고 실천력이 강한 인물이였다고 한다.
그리고, 김원봉의 둘도 없는 고향친구였던 윤세주는 역할분담차원에서 김원봉의 의열단에서 분화된 조선의용단의 수장이였다. 이 통역.선전.전투력을 보유한 조선의용군은 중국혁명과정에서 가장 최선두에서 가장 최후까지 고구려의 전사들처럼 지치지 않고 싸움으로써 중국혁명군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윤세주는 일본이 중국 팔로군사령부을 토벌할 때 퇴각로를 뚫는 과정에서 중국 십자령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장렬히 산화하여 등소평과 팽덕희을 죽음에서 구하는 생명의 은인이 되었다. 때문에 등소평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지금의 중국이 대한민국을 은인이라고 생각해야 하며, 100년 전 엄연히 대한민국의 영토인 간도을 반환시켜야하는 정당성에도 불구하고,고대 동이사와 고구려.대진국사를 왜곡하고, 최근에는 이어도까지 중국영토로 표기하려는 침략성을 노골화하니 100년전 일본에게 얻어 터지고, 일본에게 패한 중국이 못한 일을 윤봉길 의사가 상해홍구공원에서 일본고관들을 해치운 은혜를 망각하는 차원에서 일본의 침략주의와 동일한 파렴치함이라 할 것이다. 역사의 순리는 그래서 사필귀정 이인과응보로 귀결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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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u Shaopqi, 주은래 및 등소평(등소평의 생명은 윤세주없이는 존재할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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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9년 8월, 등소평은 12세 연하의 탁림과 연안에서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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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년 8월 12일 유백승과 등소평의 129사단은 팔로군의 「백단대전」에 참가했다. 유백승, 등소평의 진중휴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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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세주는 중국혁명의 영웅으로 묘비가 중국에 크게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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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의용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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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열단 대장 김원봉과 부인 박차정(여성 독립 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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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용군 사들의 군사훈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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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의용군 활동 시절의 윤세주
'조선독립동맹’을 조직하여 중국혁명군과 연대하였다.
김원봉이 남경대학에서 조직한 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은 중국 내의 독립운동 단체뿐만 아니라 국내와 미주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하려 했던 거대한 독립운동단체이다. 이 단체 산하의 직할부대가 1938년 한커우에서 조직된 ‘조선의용대’인데, 이후 김원봉이 조선의용대의 일부를 이끌고 ‘한국광복군’으로 편입되고 대부분의 조선의용대는 윤세주를 따라 중국 옌안(화북 지역)으로 이동해 ‘화북조선청년연합회(사회주의 무장 세력)’라는 단체와 연합해 ‘조선독립동맹’이라는 거대한 조직을 만들고 산하 부대로 ‘조선의용군’을 조직해 중국 공산당 세력(팔로군)과 항일 연합투쟁을 전개하게 된다. 또한 해방 전 대표적 건국 준비 활동도 조선독립동맹에서 나오게 된다. 이처럼 의열단은 실로 엄청난 독립 단체를 만들어내는 산파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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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윤세주의 조선의열단.의용군의 목적은 조선독립이였으며, 일본군을 격퇴시키기위해 불가피하게 중국혁명군과 연대할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런데, 김원봉 장군이 8.15이후 귀국하였을 때 청산되지 않는 친일파들이 좌익으로 몰아 감옥에 집어 넣자, 한탄하여 석방 후 월북하여 북한의 비중있는 정치인이 되였으나, 나중에는 아마도 권력투쟁에서 빚어진 비극으로 장개석의 첩자라는 누명으로 감옥에 갇혀 숨지고 말았다. 민족독립투쟁사가 좌우를 초월하여 공정하게 평가되야 하는 이유이며, 민족주의적인 인재들이 이념과 권력의 희생물로 사라져서는 안되는 이유다. 이재명,전명운,나석주 의사,안중근 장군의 의거에는 김원봉의 의열단이 있었다.
백범 김구도 김원봉의 의열단 투쟁을 수용하여 무력투쟁노선으로 나갈 수 있었다. 김원봉은 단재 신채호 선생을 의열단 고문으로 모시고, 조선의열단이름으로 '조선독립선언'을 작성케하였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미국의 위임통치안을 주장한 이승만을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선출한 임시요인들을 쓰레기들이라고 규탄했다. 이 얼마나 자주주권적인 포효인가?
[조선혁명선언]....내정 간섭이나 참정권이나 자치를 운운하는 자가 누구이냐? ...... 3∙1운동 이후에 강도 일본이 또 우리의 독립운동을 완화시키려고 송병준, 민원식 등 매국노들을 시키어 이따위 미친 소리를 외치게 할 따름이니, 이에 부화뇌동 하는 자, 맹인이 아니면 어찌 간사한 무리가 아니냐. ...... 일본 강도 정치 하에서 문화운동을 부르짖는 자는 누구이냐? 문화는 산업과 문물의 발달한 총적(總積)을 가리키는 명사이니, 경제약탈의 제도 하에서 생존권이 박탈된 민족은 ‘그 종족의 보존’도 의문이거든 하물며 문화 발전의 가능이 있으랴. ......정신상에서는 파괴가 곧 건설이니 이를테면 우리가 일본 세력을 파괴하려는 것이 제1은, 이족 통치를 파괴하자 함이다. ......이족 전제의 밑에 있는 조선은 고유적 조선이 아니니, 고유적 조선을 발견하기 위하여 이족 통치를 파괴함이니라.
3.1만세운동의 한계를 인식하고 대일본 무장투쟁노선으로 나가게 되는데, 무장투쟁의 선봉에 김원봉이 서게 되는 것이다.김원봉은 중국 남경대학에서 민족혁명당을 창설하여 대일 항일전선을 김구파에 제안했으나, 김구파가 김원봉이 사회주의자라고 우려하여 반대했기 때문에 독자노선을 걷게 되었다. 김구의 경우 민족주의적인 우파라면 김원봉.이동휘,여운형의 경우는 민족주의적인 좌파라 할 것이다. 이승만의 경우는 미국의 위임통치안을 원한 반민족주의자라고 규정해야 할 것이다. 좌우파라도 자주주권이 전제되는 민족주의 노선이라면 얼마든지 대화와 합의를 통하여 좌우가 융합하는 정치를 실현할 수 있다. 그러나, 좌우파라도 민족주의 노선이 아니고, 이승만처럼 사대주의노선이라면 국가와 민족의 미래는 암울할 수 밖에 없다. 안동은 밀양의 김종직의 학풍을 계승한 퇴계 이황의 고향이다. 여기서 이승만이 미국의 위임통치안을 상정하여 탄핵당한 후 임시정부 초대 부통령에 오른 이상용, '광야'의 시인 이육사을 배출했다.
이육사-김원봉의 의열단 출신
을사늑약이후의 대한민국 독립투쟁사 중국지역을 중심으로 대한독립투쟁전선을 3가지로 구분하면, 화북지역은 중국혁명군과 연대한 김원봉.윤세주의 의열.의용군의 항일무장투쟁/동북지역은 일제초기 이상용의 아나키스트 세력과 홍범도.김좌진부대,그리고 일제말기 김일성부대의 항일무장투쟁/강남지역은 임시정부로 대변되는 김구.여운형 등의 항일 외교투쟁으로 구분될 수 있다.
멋으로 안경을 쓰고 있는 게 아니다. 을사늑약 후 음독자결하려다가 실패, 한 쪽 눈이 실명하여 안경을 쓴 것이다. 실명된 한쪽 눈은 어두운 일제를 보지 않겠다는 뜻이고 보이는 한쪽 눈은 민족의 광복을 보겠다는 의미였다고 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아버지는 중국 사회주의 혁명의 이론적 기초를 세운 진독수와 친구였으며, 국제정세에 정통했으며, 학식이 넓고 신의가 강했던 민족주의자 신규식이였다. 신규식은 일찍이 좌우노선의 분열을 우려하여 좌우합작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몽양 여운형의 좌우합작노선은 신규식에게서 나온 것이다. 신규식은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여 국제적 외교전과 국내외의 독립운동세력을 조직하게 하고 3.1만세운동을 국내외적으로 조직적으로 주도했던 몽양 여운형을 길러냈다. 몽양 여운형은 국제적 감각이 뛰어났으며, 스케일이 큰 정치인이자 독립운동가였다.
몽양 여운형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면서 계파간 분열이 극렬했는데, 그것은 미국의 위임통치안을 임시정부에 상정한데 결정적 배경이 되었다. 단재 신채호 등은 이러한 이승만을 탄핵하여 미국으로 추방시켰다. 이승만의 단독정부수립이후 아직도 단재 신채호 선생 등이 무국적 상태로 지속되는 배경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어수선한 당시 임시정부의 분열상황과 김구의 가족이 쓰레기에서 채소를 뒤질 정도로 빈궁한 재정상태에서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공원 의거는 상해 임시정부가 크게 알려지고 중국 장개석정부의 적극적인 재정지원의 계기가 되어 이후 임시정부는 김구 주석체제로 8.15까지 운영되었다.
백범 김구선생과 윤봉길 의사 일제하 수 많은 독립운동단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안에서 단일화를 실현하려고 노력했으나, 결국 이데올로기와 패거리주의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러한 운동의 한계성과 문제는 오늘날에도 그대로 재현되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깊이 들어가면 결국 여운형 선생이 말한 것 처럼 인간문제가 근원이라 할 수 있다. 즉, 민족독립이라는 대의로 하나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공명심과 집단이기주의로 인한 교만과 패거리주의가 가장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안중근 장군의 [인심론]에서 잘 나타나 있으며, 그러한 문제점이 드러난 사건이 바로 러시아 지역에 모인 독립군들의 패거리주의에서 기인하여 결국 러시아군대로 하여금 집단총살당하게 만든 자유시 참변이다. 이 사건으로 홍범도 장군은 부대원들을 잃고 결국 혼자남아 러시아의 어느 극장의 문지기를 하다가 죽게 되고, 1920년대 독립운동는 잠시 휴지기로 들어가게 된다. 이유는 유능한 독립운동의 인재들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즉, 서로를 적으로 돌리고 누명을 쒸워 밀고하여 서로 죽게 만든 사건들이 독립운동사에서 다반사로 발생했던 것이다. 또한 배신으로 점철되기도 했다. 안중근 장군의 의형제 엄인섭이 15만원에 눈이 어두워 조직을 일본군에게 밀고했으며, 안중근의 큰 아들은 아버지의 의거에 대해 일본에 사죄했으며,조선총독을 아버지라며 아부했다. 아버지 안중근의 아들이라고 하기에는 비참하고 굴욕적이라고 행동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무엇보다 인성과 품성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지식과 투쟁의욕보다 중요한 것이 원칙과 합의를 존중하고 지키고 상대를 존중하고 신뢰하고 스스로 헌신하는 인간성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즉, 홍익인간이 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홍익인간으로 변하게 되면 누구나가 지도자가 될 수 있으며, 조직을 구성할 수 있으며, 전략전술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지혜와 기운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분쟁과 분열과 대립을 해소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대안은 바로 상호 만족할만한 합의와 원칙을 이끌어 내고 이것을 상호 이행하는 길이다. 민족통일을 위한 남북관계 또한 마찬가지다. 분열은 내부의 적들과 외세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며, 스스로 자멸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홍범도 장군(가운데)
일제이후 최초로 일본정규군과 싸워 북간도 지역의 봉오동 승리를 일구해 내고, 김좌진 부대의 청산리 대첩을 지원했던 패배가 없었던 홍범도 부대의 중요 몇가지 계율이 홍범도 장군의 손녀에 의해 전해진다. 1.누구나 잘못할 수 있다.그러나, 잘못을 인정하지 못한 자가 나쁜 자다. 2.자신의 책임은 끝까지 완수한다. 3.비밀은 지켜준다. 4.약자들을 돕는다. 러시아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조선여인 김 알렉산드리아 중국의 사회주의보다 30년 앞선 조선인들의 사회주의는 중국과 러시아 혁명에 있어 조선인들은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김 알렉산드리아 페드로브나(女,이하 김알렉산드리아)는 연해주에서 한인2세로 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함북 경흥 사람인데 1869년에 러시아로 이주하였고 철도건설공사장의 통역원으로 일했었다고 한다. 이후 부모를 모두 여읜 그녀는 어버지의 폴란드 친구 스탄케비치의 후원으로 성장하였고 스탄케비치의 아들과 결혼하였다. 니콜라스크사범학교에 진학하면서 러시아 짜르전제에 반대하는 러시아 혁명가들의 저작에 심취하였다. 1914년 볼세비키(러시아사회민주당) 예카체린부르크위원회에 가담하고 1917년 정식 당원이 되었다. 그가 유명해 진 것은 조선인과 중국인 노동자의 소송대리인이 되면서 부터이다. 1917년 러시아 2월 혁명이 일어난 직후 페름스크 대공장의 조선인 노동자들의 소송대리인이 되어 공장 책임자의 불법을 성토하는 등의 활동으로 소송을 승리로 이끌었고, 노동자들의 밀린 임금은 물론 수만원의 손해배상까지 받아냈다. 이 일로 그녀는 조선인, 중국인, 러시아인 노동자들 사이에 널리 명성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러시아 극동지방에서의 볼세비키 조직, 선전활동에 종사하면서(아마 그녀는 러시아 한인 중 최초로 볼세비키 고위층을 차지한 사람이라고 생각된다.당시 그녀는 극동인민위원회 외교부장 이였다고 한다) 이동휘와 함께 한인사회당을 조직하게 되었다. 이동휘에게 있어 그녀는 이론적 스승이였다. 백위군이 극동러시아를 장악하게 되면서 체포되어 우수리강변의 '죽음의 골짜기'에서 총살당하였다. 그녀는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죽었다. 그녀는 조선인으로서 조선의 독립이 최고의 목적이였으며, 약자들이 인간적으로 행복하게 사는 사회주의를 꿈꾼 여성이였다. 1967년 11월 하바로프스크에 그녀의 기념관이 건립되었으며, 처형장에는 추모탑이 건립되었다.
<사진설명: 김알렉산드리아와 남편. 남편과는 두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이후 남편이 술과 도박에 빠지게 되어 사이가 멀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