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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구의 그리움, 그 언어의 최루탄
공 영 해(시인. 창원문협 회장)
1. 시를 찾아, 고향을 찾아
조승래 시인과 필자와의 인연은 30년 저쪽 세월의 자락에서 맺어진다. 그가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고 필자가 문예담당 교사이던 시절이었다. 1976년 5월 초쯤 되나 보다. 중간고사가 한창일 무렵이었다. 선생님 한 분이 필자를 조용히 불러 종이 몇 장을 내밀며 읽어보란다. A4 용지 세 쪽 분량에 깨알같이 박아 쓴 글씨. 뒤 학생에게 답안지를 보여 주다가 적발되어 반성문을 쓰게 했는데 예사 글이 아니어서 필자에게 보여 준다고 했다. 세에상에! 반성문을 이렇게 구구절절 쓰는 놈도 있다니. 선처해 달라는, 몇 줄로 끝낼 시말의 사연을, 이 학생은 현인들의 말을 동원, 때로는 논리적으로, 대로는 감성에 호소하는 어조로 읍소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도 필자는 그렇게 잘 쓴 반성문을 본 적이 없다. 글씨도 반듯반듯했고, 문법도 정확했으며 문장력 또한 수준급이었다. 무엇보다 그의 기발한 상상력과 창의력이 돋보였다. 입학한 지 두어 달이 지난 다음인지라 문장력이 다부지고 필체가 좋은 아이들 몇을 교지 편집위원으로 뽑을 생각이었다. 조승래 군은, 반성문 한 장으로 그 어려운 편집위원에 스카우트된 학생이어서 분골쇄신 편집 일에 열심이었고, 『빛불』이라는 교내 문학동아리를 조직하여 이끌어 갔다. 그런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 한 뒤로는 소식이 끊겼다. 필자는 그가 교사나 기자가 되었을 줄 알았다. 그러나 들리는 소문에 대기업에 취업하여 기획을 담당하고 있다 하였다. 중국에 가 있다고도 하였다. 상해 교통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도 하였다.
이태 전이었다. 조승래는 『풍경』이라는 수상집 한 권을 보내며 늦은 인사를 해 왔다. 수상집은 70년대 농촌의 아름다운 풍경을 담담한 어조로 그려낸 작품집이었다. 문장에 기교를 부림이 없이 일상적 언어로 쓰되 진솔하여 마치 맑은 시내물의 흐름을 보는 듯하였다. 일찍부터 갈고닦아 온 재능을 썩히지 않아 문장에 신뢰감이 갔다. 문학외적인 세계에서 몸담고 지냈으면서도 틈틈이 글쓰기를 잊지 않았던가 보았다. 대패질하면 재목감은 될 만하였다. 수상집 한 권으로는 속이 차지 않았음일까. 그는, 묵묵히 이 년여를 꼬박 시 습작에 열성을 보이더니 마침내 문예지에 정식 추천을 받아 시인으로 등단하고, 첫 시집을 낼 생각이라며 원고를 들고 필자를 찾아 와 해설을 부탁하였다. 조승래의 문학적 성취 과정을 곁에서 지켜 본 필자이기에 그의 첫 시집 『몽고 조랑말』의 해설을 흔쾌히 맡기로 한다.
조승래는 뛰어난 상상력을 가진 시인이다. 그는 감성의 세계와는 거리가 먼, 시각을 다투는 생존의 현장에서 20년 가까이 한뎃잠 자며 기업의 최일선을 지켜 왔다. 그의 그런 힘은 개성적 상상력을 시장화에 접목함으로써 기업의 활로 개척에 이바지함이 컸으리라. 성공한 엘리트이면서도 그는 자신의 존재 확인을 문학을 통해 궁구해 보겠다는 의지를 박절하게 꺾어 버릴 수는 없었던가 보았다. 문학의 세계야말로 진정 그가 닿아야 할 고향이었다. 그의 고향은 서정적 정취가 무르익은 아늑한 시의 세계일 터. 그의 언어는 문학에로 귀농함으로써 순치(馴致), 무구화 되어 독자들 앞에서 야생화의 향기를 피우게 된다. 이 글은 학문적 조명을 비켜간다. 그냥 편안한 마음으로 화자와의 대화를 통해 얻은 느낌을 간추려 밝힘으로써 다른 독자들로 하여금 조승래의 시세계에 한 발 더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할 따름이다. 조승래의 작의와 다소 다를 수도 있으나 시인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는가는 시집 구성에서 엿볼 수 있는 바, 조승래는, 혈연에의 그리움을 제1부 <도다리쑥국>에서, 자아의 존재 확인을 제2부 <문명인>에서, 여정을 통한 자아의 재발견을 제 3부 <몽고 조랑말>에서, 자연 속에서 얻은 삶의 지혜를 제4부 <해오라기>에서 찾고 있다. 그의 시 전편에 흐르고 있는 담론적 화두는 ‘그리움’을 통한 존재의 궁구이다. 그의 시는, 대상과의 소통을 통하여 끊임없이 ‘나’를 찾아가는 작업을 벌이면서 대상과의 관계 정립에 매우 고심하고 있다. 그에게서 대상은 별개의 공간이 아니라 작품 안에서 화자의 감정을 대신 전달하는 역할로 등장하여 자신을 찾아가는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조승래의 시는 독자들에게 낯설지 않다. 그가 쓰는 시어와 대상과 주제는 지극히 보편적이되 시인과 동시대에 살고 있는 독자들이라면 단박에 그의 시 속으로 빨려들어 대리인인 화자의 노래에 공감하게 된다. 그만큼 그의 시는 흡입력이 강하다. 그의 시에는 유년의 웃음소리가 있고 눈물과 사랑이 있다. 병든 지구가 있고 복원된 생태계가 있다. 우주로 통하는 별이 있고 달이 있고 꽃이 있다. 무엇보다 그의 시에는 무구의 그리움, 아름답고 달콤한 언어의 최루탄이 있다. 요란한 언술로 독자들을 현혹하거나 억지로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수사적 기교를 부리지도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는 긍정적 역사의식을 외면하지 않는다.
2. 닥나무 속살로 겨울을 팽이 쳐 조승래는 향토적 정감 내지 혈연적 삶의 유대를 통한 사랑을 시집 앞쪽에 두고 있다. 기억의 편자로 재생한 유소년기의 추억 속에는 그리움이 묻어 있다. 삶의 한 가녘에 살며 이리저리 부대끼며 긁힌 상처를 따뜻한 연민으로 보듬으며 살아가고 있는 공동체의 모습은 한 폭의 정겨운 민속화이다. 조승래 시의 경우 혈족은 구원의 대상이다. 화두는 ‘그리움’.
빨간 그물망에 잘 말려두었다가 어머니가 보내 온 풋고추 말랭이 기름에 볶아 사시사철 반찬으로 먹었는데 이제는 그 풋내와 매운 그리움 볶아 한 입 깨물면 볼 타고 흐르는 짜릿한 어머니의 진한 땀 맛
어머니가 절간에서 보내왔던 누룽지 한 자루 한 조각을 놓고 셋째와 막내는 다투었지 “할머니 거, 아버지 거 남겨 둬야지” 하는 말에 누룽지 조각 입에 문 채 마주 보고 글썽이던 눈 오늘은 유난히도 환하게 보인다 눈물 이리 뜨겁다
엄마 오면 일러바칠 거라며 울먹이던 그 찡한 울음소리는 아득한 세월을 거슬러 와 오늘 귀에 울린다 내 귀를 울린다 「그리움」 전문
위의 시 「그리움」은 체험적 상상력의 재구이다. ‘풋고추말랭이’는 ‘매운 그리움’으로 ‘진한 땀 맛’의 어머니를 불러온다. ‘짜릿한’ ‘어머니의 진한 땀 맛’은 와 닿는 감각이 낯설지 않아 그 울림이 설탕에 길든 우리들의 혀끝에 오래 남는다. ‘누룽지 조각’은 미각의 구수한 그리움이되 향수의 은유이다. 뜨거운 ‘눈물’은 순정한 화자의 사모곡이다. 조손이 함께 사는 한 가정. 다투는 셋째와 막내의 모습은 무구한 동심의 세계. 늘 허기진 삶이었지만, 아무리 맛있는 것이라도 함께 나누어 먹을 줄 아는 인정은 어릴 때부터 몸에 밴 공동체적 덕목이다. 그것은 사랑이다. 조승래의 그리움 속에는 이처럼 사랑이 숨어 있다. 호미질로 고랑을 일구시며 하교하는 아이를 길마중하시는 어머니의 모습(「호미」), 누이의 사랑을 민요조의 애련미로 담아낸 「디딜방아」, “머리에 수건 또아려 이고 온 새참을 연인의 소풍 도시락처럼 먹으며 그늘에서 잠깐 쉬던” 아버지의 행복이 손에 잡힐 듯한 「녹슨 자전거」, 보랏빛 연정이 상큼한 「포도밭 소녀」, 손자를 그리워하는 촌로의 모습(「달력」), “닥나무 속살로 겨울을 팽이 쳐 / 맞은 봄”의 그리움을 노래한 「송화」의 서정, “인생은 휘저으면 마냥 허공뿐인 삶”임에도 “어헝어헝” 울며 불구의 생을 살다 가신 지인(친구의 아버지)이 눈에 시리게 박히는 「인연의 뒤에서」가 그러하다. 조카를 통해 망자의 모습을 그려낸 「도다리쑥국을 먹으며」 또한 가족애가 끈끈하게 묻어나는 작품이다.
곤히 잠을 자다가 / 옆구리 허전하여 / 거실로 나가본다 / 소파 위에서 아내가 / 새우잠 자고 있다 // 고양이 발걸음으로 / 이불 덮어 주고 다시 잠들면 / 이불이 되돌아 와 있다 / 당신 어제 많이 피곤했나 봐 / 코 골던데 했더니 // 20년 같이 살고도 / 그 소리가 미안하다는데 / 먼 훗날 / 아주 먼 훗날 / 이불을 누가 덮어줄꼬 - 「이불」 전문
위의 시는 부부애를 노래한 것. 이러한 사랑은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했던,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했던, 누이가 남편에게 했던 사랑과도 통한다. ‘이불을 덮어 주고 다시 잠들면 / 이불이 되돌아 와 있다’. ‘이불’은 부부애를 그리기 위한 도구적 기능이자 관심의 대유. 조승래의 그리움은 또 흑백사진 속의 풍경화로 인화되기도 한다. 초파일의 기억 속에 살아 있는 어머니의 모습(「산사 가는 길」)이 그러하고, 「장돌뱅이」가, 「초당에 비가 옵니다」가 그러하다. 깜빡이는 기억의 화면(「사진」)에서 그는 삭제보다 재생의 버튼을 눌러 기억의 필름을 인화해 내고 있다. 그의 그리움은 현실적 삶 속에서도 발견된다. 「망종」에서 화자는 가난한 시절의 “행복한 비명”을 통해 “이 시대 넉넉한 가난”을 진단하며 씁쓰레해 하고, “시대의 부랑자 패거리가 던진 쇠몽둥이에 맞아서 발가락뼈가 부러”진 체험을 바탕으로 쓴 「뼈 사진」을 통해 화자는 낮은 소리로 시대를 어머니에게 고발하기도 한다. 이러한 화자의 언술은 고향, 그리움의 세계에 닿고자 하는 갈망에 다름 아니다.
3. 천년을 입어도 삭지 않을 옷 한 벌 조승래는 자아의 존재 탐구를 위한 모색을 「기도」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기도’를 ‘거울 앞으로 다가서는’ 행위로 비유하고 있다. ‘거울’은 화자의 내면세계를 담아내기 위한 그릇. 시인이 「기도」로 만나고자 하는 자아의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기도는 거울 앞으로 다가서는 것 기도가 간절할수록 거울은 밝아진다 거울 너머 웃는 사람의 정겨운 손짓에 끌려 들어가자 또 하나의 내가 있다
기도로 갇힌 사연 닫힌 마음 다 풀어 놓으면 정좌하여 합장한 내가 거울 안에서 웃는다 그 웃음은 거울 너머 또 가야 할 데가 있음이니 -「기도」 부분
시인은 간절한 기도로 밝은 내면세계를 만나고자 한다. ‘정겨운 손짓’으로 이끄는 거울 속의 존재는 ‘밝은’ 나의 모습이다. ‘기도로 갇힌 사연/ 닫힌 마음 다 풀어 놓으면’ 거기 ‘정좌하여/ 합장한’ 웃는 ‘내’가 있다. 이 만남은 ‘닫힌 마음’의 열림이다. 그의 기도는 ‘웃는’ 내(본래적 자아)가 있는 ‘밝은 세계’, 곧 ‘열린 세계’를 만나기 위한 몸짓이다. ‘웃음’의 확인은 화자로 하여금 당당히 ‘거울 너머 또 가야 할 데’를 가게 한다. 이처럼 시인은 간절한 기도로 ‘열린 마음’의 세계를 끊임없이 추구하고 있다. 기도는 ‘또 가야 할’ 세계로 확장되어야 한다. ‘웃는 나’의 세계에서만 안주할 수는 없다. 「몸에 쓴 일기」는 무릎 꿇고 “희망을 위한 기도”로 잔주름과 굳은살과 향 내음으로 기록된다. 그 기도는 “은근하고 진한 천리향이 되어/ 온 벌판에로 퍼져” 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시인은 “묵향 있는 일기”가 진정한 일기라 한다. 기억의 묵향은 ‘천리향’을 닮았을까. 「누에줄」은 동화적 모티프에서 비롯된다.
아무리 하루 밤새 엮은 거미줄보담은 곰삭은 누에줄이 질기고 말고 죽다가 살아나길 몇 번이나 했는데 거미줄 같기야 하랴. 천 년을 입어도 삭지 않을 옷 한 벌 시의 옷 짓고 싶다. -「누에 줄」 마지막 연
‘천 년을 입어도 삭지 않을 옷’은 ‘묵향’으로 통한다. 그가 진정으로 바라는 삶의 세계는 ‘거미줄’의 세계가 아니다. 거미줄과 누에줄의 대비는 호오(好惡)의 의미를 떠나 삶의 가치관을 재기 위한 장치. 이런 일련의 삶은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 「문명인」에 와서 시인은 현실을 마침내 반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신은 우리에게 묻는다. 해 뜨고 지는 사이는 분명 거리인데 어찌해 시간이라는 눈금으로 나누고서 그 넉넉하게 거듭거듭 주어지는 거리를 시간 없다며 안달복달 초조해 하는가? 우리는 답한다. 그 시간 안에는 돈이, 누렇고 까만 돈이란 놈이 가득 차 있고 무엇이든 그것이면 다 해결되기 때문이라고. 신은 그래도 의아해 한다. 뿌리와 줄기, 가지며 잎, 주렁주렁 열매들, 밝은 날은 먹을 만큼 먹고 날 지면 쉬면 될 것을, 불까지 밝혀 놓고 밤잠을 설치는가, 단순할수록 편안한 행복이 그 거리 안에 다 있는데 하며…….
우리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오래된 신은 현실을 잘 모른다고, 흑진주 같은 황금은 더더구나 모를 것이라고……. - 「문명인」 전문
신은 인간에게 못마땅하다. 아니, 화자가 마땅하지 않은 것이다. 시간에 쫓기는 현대인의 삶이 화자는 마땅치 않은 것이다. 우리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오래된 신은 현실을 잘 모른다고, ‘흑진주 같은 황금은 더더구나 모를 것이라고….’ 「문명인」은 아이러니. 신의 당당한 물음에 화자는 황금만능의 자본주의의 생리를 풍자로 화답한다. 돈이면 무엇이든 ‘다 해결되’는 세상에 살면서 돈을 추구하는 인간의 생래적 병패를 고발하고 있다. 기실 이 시에서 시인은 신의 목소리를 빌려 자신이 하고자 하는 문명인의 생리를 고발하는 것이다. ‘해 뜨고 지는 사이’는 자연인의 삶이다. 인간이 저지르고 있는 말세적 진단을 그는 외면한다. 신의 목소리는 자아의 목소리. 끝 연은 다분히 역설적. 이런 함의가 이 시의 구조적 완성도를 높여 주고 있다. 산문시의 틀은 자유롭다. 그 자유로움을 그는 명쾌하게 이끌어가고 있다. 그는 시 「원초적인 문제」에서 철학적 명제를 한 편의 시로 빚고 있다. 인생의 해석이 행간에 깔려 있는 시이다. 말을 비틀지 않아도 와 닿는 여운은 짧지 않다.
먹이와 입이 가까울수록 삶은 원초적이고 행복하다 먹이와 입이 멀수록 삶은 더 복잡해지고 절박해진다 새끼는 태어나 젖어미가 주는 먹이를 받아먹으면서도 어미의 고민을 모른다 어린 눈, 어두운 귀로는 알 수가 없다 어미의 젖 떨어진 날부터는 먹이와 입과의 거리는 적어도 해 뜨고 지는 사이 또는 별 뜨고 지는 사이에 좁혀 두어야 한다 잡든지, 줍든지, 얻든지, 빼앗든지, 훔치든지… 그게 안 되면 모든 걸 포기해야 한다 입은 닫는 게 좋다 입씨름하는 데 시간 허비할 필요는 없다 입은 먹을 때와 꼭 알아야 할 때만 열라 한다 밴댕이 속을 욕할 일이 아니다 사람의 위장이 밴댕이 속 같으면 엥겔계수 1/3로 떨어질 것이다
위장은 작을수록 좋은, 속은 깊고 넓을수록 좋겠지만… 「원초적인 문제」 전문
현실 세계에서 찾는 본질적 인생 수용의 태도를 만날 수 있다. 시인이 찾고 있는 ‘원초적인 문제’는 ‘먹이와 입이 가까울수록 삶은 원초적이고 행복’한 것. ‘위장은 작을수록 좋은, / 속은 깊고 넓을수록 좋’다는 것은 본능적 욕구의 충족보다 정신적 깊이의 추구를 바라는 시인의 안타까운 내면의 심서(心緖)이며 메시지. 당대적 삶의 애환을 그린 「노숙자의 새벽」, 나를 버림으로 얻을 수 있는 세상을 소를 통해 역설하고 있는「흥정」, 긍정적 삶의 고삐를 놓지 않고 기다리는 「시간의 마차」 등에서도 시인의 존재 탐구는 끝나지 않는다.
4. 사랑을 둥지 틀 반환점을 다시 넘어 그의 언어는 이제 보다 확장된 서정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 그 세계는 여정에서 만날 수 있다. 삶의 여정은 길 위에 있다. 자연에 길이 있듯, 인생에도 길이 있다. 조승래의 길은 자연과 사람의 길을 굳이 구별 짓지 않는다. 조 시인은 생의 4할을 이국에서 살았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이국적인 풍물을 소재로 한 작품이 비교적 많다. 체험적 소재는 이국이되 정서의 뿌리는 고국에 두고 있다. 그의 노래는 자못 분방하다. “사리 하나 없”는 “완전한 성불”을 노래한 「고무나무」, 인간의 삶을 우의적으로 풍자한 「개미집 지진」, “옮은 불 다 타기 전”에 날이 밝기를 간절히 바라는 「우리 동네」, 인간의 가학성을 희화화한 「물에서 쉬는 숨」, 시인의 긍정적 해석이 눈길을 끈 「진시황」, 광막한 세상에서의 아주 작은 존재를 노래한 「족적」, 일세 이주민들의 치열한 삶을 생강꽃에 이입하여 “따갑게 눈 부릅뜨고 억척”으로 산 「하와이 생강꽃」, 중국 상하이의 중심을 흐르는 「황포강」을 통해 눈부시게 발전한 상해를 보며 조국의 내일을 걱정하는 목소리 등은 여로에서 얻은 시이다. “사랑을 둥지 틀 반환점을 다시 넘어” “생의 싹”을 움틔우기 위해 다시 먼 길을 떠나는 철새(「철새」)의 비상은 시인으로서의 삶을 향한 그의 의미 있는 출발이겠다. 「황하」에서 시인은 “개울의 돌 틈새”로부터 강으로 뛰어 든 삶을 노래하고 있다. “청정수”는 순수 자아의 대유. 오염되지 않은 삶의 본향이다. 그 “기억”은 “선명”하다고 하였다.
내 삶의 시작은 개울의 돌 틈새 위협과 유혹을 피해 늘 숨어 살다가 황하로 뛰어 들고 영영 못 갈 청해성 청정수 눈 뜨고 살아온 기억 선명한데
황토의 강 황하는 눈 감고 살아온 세월이 더 길다 만 년을 낮추면서 도도히 강은 흘러 바다에 닿으면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다
죽어라 거슬러 올라가 눈 감고 숨 쉬며 살기보단 차고 따가운 바닷물 속에서 눈 뜬 채 숨 안 쉬고 살 일이다 -「황하」 전문
위의 시에서 ‘내 삶’은 ‘황토의 강 황하’에서 눈 감고 살아온 삶이 더 길다. ‘내’가 가야할 목표는 ‘바다’, 곧 넓은 세계이다. 넓은 세계로 통하는 길은 ‘황토의 강’이다. 바다에 이르는 강의 여정을 통해 화자는 ‘나’의 삶을 돌아본다. 그러나 그렇게도 바라고 바라던 바다에 닿았을 때 화자는 ‘더 이상 내가 아니다’고 노래한다. 그리고 ‘나’는 말한다. “죽어라 거슬러 올라가 눈 감고 숨 쉬며 살기보단 / 차고 따가운 바닷물 속에서 / 눈 뜬 채 숨 안 쉬고 살 일”이란 시련 속에 나를 연마하며 사는 희망적 삶을 말한다. 그의 자전적 독백이라 하겠다. ‘황하’는 작품의 주제를 살리기 위해 차용한 중의적 시어. 「몽고 조랑말」을 보자.
1. 주린 승냥이 울음소리에도 아랑곳없이 털북숭이 개는 밤새 까앙까앙 앞발 치켜들고 쏟아지는 별들 지키노라 맴돌이로 목이 아프다
유년의 그 눈 시리던 은싸라기 다 여기 몰려와 이렇게 하늘 비좁도록 눈 또록또록 뜨고 살아있구나
마을은 마유주 향에 젖은 게르(Ger) 몇 채 뺨이 언 소녀의 순한 눈에도 별빛은 초롱을 켜고 반짝이고 있었다
2. 하나도 낯설지 않은 이 초원은 옛날 우리 탐라국에서 자란 조랑말이 편자도 없이 맨발로 끌려온 선사(先史)의 땅, 고향 아니었나…
풀뿌리 다치지 않게 타박타박 초원을 맷돌질하며 죽는 날까지 탐라의 하늘 잊지 않았을 향수로 목마르면 갈기 세워 질주하다가 푸우 내뿜던 숨결은 모두 하늘에 닿아 별이 되었구나
한데 몰려 살 비비며 잠든 어깨 위로 새도록 별은 삽살이와 함께 초원의 평화를 지키고 있었다 -「몽고 조랑말」 전문
위의 시는 체험의 재구로 씌어진 작품. 언어 구사가 자유로우며 “신인다운 풋내를 풍기는 것이 보다 넓은 시적 상상력을 약속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신인상 심사평에서 밝히듯 시공을 초월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시를 형상화하고 있다. 호흡이 길면서도 치밀한 설계로 작품을 얽고 있다.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었는데 전반부는 이국의 낭만적 서경을 묘사하였고 후반부는 조랑말을 통해 역사의식을 담아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전반부와 후반부는 별개의 시가 아니다. 후반부 2연에서 시인은 ‘향수로 목마르면 갈기 세워 질주하다가 / 푸우 내뿜던 숨결은 모두 / 하늘에 닿아 별이 되었’다고 노래하였다. 여기서의 ‘별’은 전반부 1연에서 털북숭이 개가 ‘밤새 까앙까앙 앞발 치켜들고’ 지킨 ‘쏟아지는 별들’이다. ‘눈 또록또록 뜨고 살아있는’ ‘유년의 그 눈 시리던 은싸라기’이기도 하다. ‘별’은 우리가 지켜야 할 순수의 표상이다. 별과 소녀와 삽사리와 조랑말은 지금도 몽골의 고원에서 함께 살고 있겠다. 여로에 시인의 건강한 상상력이 함께 한 시.
5. 세상의 멍든 푸르름 안에 달콤한 최루탄을 이제 시인은 자연 속에서 얻은 자아의 관조적 삶 내지 인간의 순수한 삶의 모습에 관심을 가진다. 여기에서 시인은 무구의 시선으로 대상을 바라본다. 그런 소년의 마음을 대상은 여과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그의 시를 읽는 재미는 바로 이 동화적 모티프의 극적 전개에 있다 하겠다. 이런 일련의 시도는 조 시인이 평소 추구해 온 산문적 삶의 시적 전개에서 비롯된 것이겠다. 무구한 정신세계는 그의 시의 무기이다. 정직한 기업인의 모습을 우리는 그의 시에서 만나게 된다. 동화적 모티프로 유희본능의 생태 환경을 노래한 시를 만나본다. 겁 많은 소시민들의 삶을 노래한 「집게」, 기회주의적 인간의 삶을 풍자한 「개구리 콧구멍」을 비롯하여 「방생」, 「달밤의 귀뚜라미」,「까치집」 들은 동화적 모티프에 의한 시이다. 「까치집」에서 화자는 “요람은 홀로 꾸미는 거라”는 삶의 방법까지 우의적으로 제시한다. 폭우가 쏟아져 물이 깊어가는 과정을 노래한 「비의 틈 새로」에서는 바람도 귀엽다. 마지막 연은 역설적이다. 우산을 버리고 젖으면서 걷고 싶어진다. “비의 틈새로 날아가는” 바람은 왜 젖지 않는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신선한 이미지를 만난다. 「나비와 꽃」에서 시인은 대상을 의인화하되 있는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한 겹씩 숨죽여 옷 벗는 꽃송이 살짝 앉은 나비의 긴 입맞춤에 부끄러워 속살 가리다가 내사 몰라라 꽃잎 치마 다 펼치다
햇살도 수줍은 허물 펼친 날개로 천천히 가려주는데 숨어 있던 이슬이 쪼르르 뛰어 나가고 정적이 감도는 만남의 시간
사르르 떨고 있는 꽃송이 꼭 껴안고 바람 살랑 밀어내며 나비도 꽃이 되어 다시는 안 떠날 듯 날개 접다 -「나비와 꽃」전문
‘한 겹씩 숨죽여 옷 벗는 꽃송이’는 개화의 순간이다. 화자의 시선은 대상에 투영되었다가 또 다른 대상에로 옮겨진다. 꽃송이의 숨죽임은 경이로운 순간을 관조하는 화자의 내면의 모습이다. 남 먼저 찾아와 살짝 앉는 나비와의 만남, 그리고 긴 입맞춤은 부끄러움일레라. 남이 볼까 속살 가리다가 내사 몰라라 절정의 환희를 위해 활짝 벙글어 나비를 수용하는 꽃잎, 그 치마 활짝 펼친 모습이라니. 이 모습을 보라보던 햇살도 수줍은 이들의 만남을 위해 ‘허물 펼친 날개’로 가려 주는 것이다. 그뿐인가. 밀애는 이슬이 뛰어나가면서 끝이 난다. 절정 뒤에 온 긴 적막. ‘사르르 떨고 있는 꽃송이(를) 꼭 (보듬어) 껴안고 바람 살랑 밀어내며 나비도 꽃이 되어 다시는 안 떠날 듯 날개 접’는 순간은 생명탄생의 경건함을 순간 포착한 회화적 여운. 자연물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각은 다양하다. 서정적 정취를 담은 「달」과 「새벽」이 있는가 하면, 논고동이 살 수 없는 논을 지키는 「해오라기」는 농촌 현실의 고발이며, 복원된 생태계의 모습을 달동네와의 화합으로 바라본(「양재천」) 시인의 자연관은 사물에 대한 긍정적 인식에서 비롯한다. 「산」에 와서 그는 ‘풋풋한 가슴’ 열고 포용의 자세로 꿋꿋이 서는가 하면 「억새」에서는 서정적 은유의 세계를 “눈 감아도 / 가득 물결치는 가을 손짓”의 파노라마로 그리고 있다. 「눈」의 ‘이슬’은 슬픔이 아닌 희망의 메시지. 고드름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은 참회의 눈물(「고드름」)이다. 동행과 결별을 하는 순간에도 남은 동행을 확인하는 누렁이의 모습(「빈 외양간」)에서 우리는 시인의 믿음직한 무구한 감성을 엿보게 된다.
하늘이 누르는 중압감을 누구와 맞서랴? 일생을 순응하며 머리 낮추었더니 힘줄 덮은 이파리만으로 땅 위에 겨우 얇게 떠 있다 비를 맞으며 땅속만은 안 들어가려 이파리 힘껏 펼쳐 더러 구박받는 벙어리처럼 땅에다 얼굴 처박고 비 그치기만 기다린다 하늘과 비와 그 무게는 이파리의 각오를 모른다
바닥에 쫙 펼쳐진 납작한 몸이지만 이파리는 열음을 키워 공처럼 솟고 싶은 것이다 꿈을 위장하여 날고 싶은 것이다
비 개면 평면 무대 위에 펼쳐진 마술처럼 둥글게 부풀어서 세상으로 나가 마음껏 구르고 싶은 것이다 구르다가 마침내 푸른 위장복 벗고 폭발하고 싶은 것이다 뜨거운, 붉은 속살 드러내고 세상의 멍든 푸르름 안에 달콤한 최루탄을 터뜨리는 것이다 자유의 까만 씨앗이 파편처럼 흩어지게 하는 것이다 - 「수박」 전문
「수박」에 와서 시인은 ‘하늘이 누르는 중압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구박받는 벙어리처럼 땅에 얼굴 처박고’ ‘열음을 키워 공처럼 솟고 싶’어 하고 있다. 그것은 수박의 꿈이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마술처럼 둥글게 부풀어서 세상으로 나가’ ‘푸른 위장복 벗고 폭발하’려 한다. 그리하여 ‘뜨거운, 붉은 속살 드러내고 세상의 멍든 푸르름 안에 달콤한 최루탄을 터뜨’려 ‘자유의 까만 씨앗이 파편처럼 흩어지게 하’려 한다. 그러면 ‘멍든 푸르름’은 치유될 것. ‘중압감’도 해소될 것. 후반부의 ‘~ 것이다’ 투의 해설자적 어조는 화자가 중립자적 입장에서 독자들에게 감정 환기의 기능을 하도록 하는 장치. 분방한 상상력의 소산이다. 그의 시 「바다」는 이미지가 빛나는 시이다.
불판 위에 뿌려진 소금같이 툭툭 튀어 오르는 은빛 반짝임 해조海鳥의 낙하와 비상飛上은 해녀처럼 / 삶을 위한 것 죄라 할 수 없다
부리에서 부리로 아기 입에서 젖꼭지 물리듯 수평을 가는 것은 / 대가 없는 희생 사랑이라 이름한다
십자가처럼 교차한 삶과 사랑은 / 한바다 위에서 멈출 수 없는 / 찬란함 아니랴 「바다」 전문
이미지가 선명하다. 해조의 낙하와 비상을 시인은 “불판 위를 뿌려진 소금같이/ 툭툭 튀어 오르는 은빛 반짝임”으로 표현해 놓고 있다. 이는 그야말로 눈부신 뜨거운 여름의 태양 아래 출렁거리는 한없이 펼쳐진 파도를 연상케 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해조의 동작을 시인은 ‘해녀처럼 삶을 위한 것’이라 노래하고 있다. 바다는 해조의 삶의 현장이다. 해조의 삶은 대가 없는 삶의 희생일시 분명하다. ‘십자가처럼 교차한/ 삶과 사랑은’ 계속되는 찬란함이다. 바다를 배경으로 살아가는 해조의 삶을 잘 그려내고 있다. ‘십자가’는 햇빛에 반사하는 물결의 반짝임. 보석처럼 반짝이는 삶에 대한 축복에 다름 아니다.
6. 나가며 이상에서 살펴본 조승래의 시는 혈연적 유대를 통한 공동체적 삶에 대한 그리움과 존재의 궁구, 여정을 통한 자아의 재발견, 자연 속에서 얻은 긍정적 삶의 지혜, 삶의 상처를 보듬는 따뜻한 인간애, 산문적 언술에 의한 비유로 요약 될 수 있다. 그리고 제재 운용에 있어서는 어조를 달리하여 진지성과 해학적 풍자와 유장한 가락을 타는 산문율을, 때로는 압축의 묘를 살린 은유적 함의로 시의 완성도를 높여 결코 내공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 주고 있다. 시의 행간에 흐르고 있는 그의 언어는 낯설지 않다. 기교도 허세도 없다. 목소리는 솔직하고 겸허하다. 그래서 그의 시는 쉽게 읽힌다. 그의 시는 우리들의 가슴을 는개처럼 젖게 하는 그리움이 있기 때문이다. 쉰 고개에 기어이 닿은 그의 정신적 고향은 앞으로 그가 얼마나 치열한 삶을 사느냐에 따라 귀농의 성적표가 매겨질 터이다. 산문에 익은 그의 사고를 시화하는 과정에는 각고의 수련이 따랐을 터. 타성에 젖지 않고 제 목소리를 내고 있는 시야말로 우리가 그에게 바라는 기대일 것이다. 시를 배우는 과정에서 얻게 된 완성의 기교보다 서투르지만 자기의 노래를 부르겠다는 각오가 없는 출발은 무의미하다. 정말 노래하고 싶어서 못 견딜 때 부르는 노래가 감동을 준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 바란다. 이미 나선 길, 무슨 망설임이 있겠는가. 조승래의 첫 시집 『몽고 조랑말』간행을 축하하며 앞으로 보다 중후하고 개성미 넘치는 시로 한국 시단에 새바람을 불어 넣어 주기 바란다. 이미 나선 길, 당당하고 적극적인 어조로 시작에 임해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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