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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의 근거>
서울대 규장각에 있는 고서중 <고지도 "관동지도" 책1" "8도총목">의 내용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경외제군[중국밖의 제후군대수] 일백이십사만삼천칠백사명이 (1,243,784명), 칠도속오군[중국밖의 7도내 속오군] 일십구만 일천오백이십사만명(191,524명), 수군이 사만칠천육백십일명(47,611명), 전선이 113척,...."
기타.. 봉군[봉화 담당군대]이 일천사백칠십구명, 보.. 이만구천일백이십이명, 역사노[노역 군대, 일종의 공병]가 칠만사천삼백이십팔명등이다. 이들을 다합하면, 총 158만명이 된다.

관동지도 책1 팔도총목
참고: 대륙조선사 연구회 ,자유게시판.1159. 조상현저,
새날새날이 오는구나중 조선의 백만대군,새날저 ,2007.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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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의>
1. 조선의 군대수가 158만명(1,587,848명)이라는 사실은 놀라운 것이다. 과연 사실일까? 서울대규장각을 뒤져보면 사실로 나올 것이다.
2. 조선의 군대수가 10만명도 되지 않아 조선선조 임진왜란때 10만명 양병설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도 의혹이 많다.
이 사서에서 124만명의 경외제군[황궁밖의 조선제후군대]이 대조선에 있었다고 하니 말이다. 그뿐이 아니다. 정약용의 <일본론>에 보면 임진왜란때 일본이 100만대군으로 쳐들어왔다고 하는데, 조선에 10만명도 없다는 것은 역시 말이 안된다. 따라서 조선에 100만대군이 있어야함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러브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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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오군[束伍軍]은 대조선의 지방군대였다.
대조선군대인 158만대군을 표기한 사서에 속오군[束伍軍]이 나온다. 속오군이란 임진왜란시 대조선에 설치된 양반, 중인, 양인등으로 구성된 혼성 지방군대명이다. - 러브 선 
[자료의 출처]
속오군 (조선 군사) [束伍軍]출처: 브리태니커
문화원형 백과사전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2s2590a
조선 후기에 설치된 지방군의 하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생했는데, 기존의 국방체제인 중앙의 5위제도(五衛制度)와 지방의 진관체제(鎭管體制)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정부에서는 전쟁중에 군제를 전면적으로 개편했는데, 이때 지방에는 속오군이 설치되었다.
이는 〈기효신서 紀效新書〉의 속오법에 따라 양반·중인·양인·공사천으로 조직된 혼성군이었다. 속오지군·속오군병·속오군졸·편오군·초군 등으로 호칭되다가 1597년경 속오군으로 명칭이 통일되었다. 1594년 10월에 유성룡이 건의한 전수기의십조(戰守機宜十條)를 각 도에 내려보내 시행하도록 한 데서 편성되기 시작했다.
1595년에 유성룡이 4도체찰사가 되고, 무학사목(武學事目)을 반행함으로써 전국적인 속오군편성이 촉진되기 시작하여 다음해 전반기까지는 일단 편성이 완료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정유재란중에는 실제로 겸4도도체찰사(兼四道都體察使) 유성룡 소관의 4도 속오군을 징발하여 경사(京司)를 방어하게 했다.
속오군의 지휘권은 종전의 진관(鎭管)에 해당하는 영장(營將)이 가지고 있었으며, 대(隊)·기(旗)·초(哨)·사(司)·영(營)의 방식으로 편성되었다. 최말단 조직인 대는 대총(隊摠) 1명을 포함하여 11명으로 편성되었고, 3대가 1기, 3기가 1초, 5초가 1사, 5사가 1영(약 2,500명)으로 편제되었다.
속오군의 총수는 1636년(인조 14) 평안도를 제외하고 8만 6,000여 명이었으나 1681년(숙종 7)에는 20여 만 명으로 급증하여 조선 후기 지방군의 주축이 되었다. 이는 처음에 임진왜란을 치르기 위해 편성되었지만, 병농일치의 원칙에 의거하여 향리에서 초관과 기·대총을 뽑아 군병을 훈련시키고 통솔하게 하여 평소에는 토적(土賊)을 방비하고 환란을 당하면 서로 도우면서 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전쟁이 발발했을 때 갑작스럽게 군병을 징발하거나, 훈련 때문에 군병이 멀리 왕래하는 폐단을 제거하여 군역민을 안정시키려는 조치였다. 속오군은 왕성중심의 5군영체제(五軍營體制)가 정비되면서 군사력으로서의 역할은 점차 유명무실해지고 포를 바치는 수포군으로 변질되었다.
속오군은 초기에 양민은 물론 양반·아전·천민 등으로 편성된 것으로 보이나, 1736년(영조 12) 이후 사노(私奴)만으로 편성되었다. 속오군이 사천 중심으로 바뀐 것은 첫째, 사천에 대한 국가의 지배력을 강화하고 역의 불균형을 시정하면서 군액을 확대하려 한 것이다.
조선시대의 노비는 주인에 예속되어 재산으로 파악되었기 때문에 개인이 소유주로 되어 있는 사노의 경우 국가의 인신적인 지배는 미치지 못했다. 이에 따라 양인들이 역을 피하기 위하여 토호나 궁방에 투탁하는 등 국가의 공적인 지배에서 이탈하는 사례가 많았다.
투탁은 양민의 수를 감소시켜 역의 징발과 재정수입의 확보를 방해하고, 남아 있는 소수의 양민들에게 무거운 역부담을 지게 함으로써 그들도 몰락하게 했다. 임진왜란을 맞아 군사력의 강화가 절실하게 요청되는 시점에서 현실적으로 사노를 군역에 동원하는 방법의 하나로 속오군을 설치했다.
둘째, 중앙집권체제의 강화라는 측면이 있다. 종래에는 국가의 힘이 미치지 않던 사천을 지속적으로 통제하여 민에 대한 국가의 지배력을 확대하고, 노비를 많이 소유하고 있던 토호들의 물적기반을 약화시켜 향촌민에 대한 국가의 직접지배를 강화해가려는 것이었다.
토호반란인 이인좌의 난을 겪고난 영조가 영장제(營將制)를 강화하면서 사천만으로 속오군을 편성한 것은 이러한 의도를 보여주는 예가 된다
지구조선사랑 
지구촌 우리역사의 발견
첫댓글 컥 백만요?????
학교에서는 이러한 중요한 역사를 빠트리는지 알 수 없습니다...
유언 비어같은 좋은 자료입니다, 퍼갑니다, 수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