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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하늘과 흰 눈의 조화가 멋졌던 계방산
1. 일자 : 2012. 12. 23(일)
2. 장소 : 계방산(1577m)
3. 행로 및 시간
[운두령(10:15) -> 이정표(10:45, 계방산 3.6km) -> 전망 쉼터(11:09) -> 1492봉(11:56) -> 정상(12:17-27, 아래삼거리 4.8km) -> 발왕산 전망대(12:52) -> 1276봉(13:15, 아래삼거리 2.6km) -> 이정표(13:31, 아래삼거리 2.1km) -> 권대감바위(13:36) -> 아래삼거리(14:15)]
4. 동행 : 홀로, 안전산악회
< 계방산 산행을 준비하여 >
1,577m 계방산
정상에 섰다.
< 옛 산행의 추억 : 계방산 정상에서 >
다시 계방산 산행에 나선다. 4년 전 몹시 추웠던 날, 정상에서 바라보던 일망무제의 풍광이 아직도 뇌리에 남아있다. 시간이 지났어도 한강기맥이 흐른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산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머릿속에 넣지 못했다. 오늘 코스는 운두령을 출발 정상을 거쳐 1276봉을 지나 아래삼거리로 하산하는 길로 잡았다. 시간 단축이 이유가 아니라 새로운 길에 대한 욕심 때문이다. 하산 후 시간 여유가 있다면 예전 식사를 했던 뜨끈한 토장국 집을 찾아 허해진 속을 달래고 싶다.
계방산이 산림청 선정 100 명산 선정에 선정된 이유는 ‘남한에서 한라산, 지리산, 설악산, 덕유산에 이어 다섯 번째로 높은 산으로서 산약초·야생화 등이 많이 서식하고, 희귀수목인 주목·철쭉나무 등이 군락을 이루고 있어 생태계 보호지역으로 지정된 점 등을 고려하여 선정. 백두대간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으며 겨울철 설경이 백미. 우리나라에서 자동차로 오를 수 있는 고개 중 가장 높은 운두령이 있으며 내린천으로 흐르는 계방천의 발원지임’이다.
< 희망사항 >
오랜만에 떠나는 일요 산행이다. 금요일은 대학 동기들과의 송년회가 있었고 토요일은 회사에 출근을 했다. 연말이라 이래저래 바쁜데다 날씨가 추워지니 게을러진다. 전에 없던 꾀도 난다. 지난 선거일, 조조영화를 보고 모락산에라도 가려고 계획했는데 집사람에 꾐에 빠져 집에서 쉬었더니 산에 갈 준비를 하는 것이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스트레스. ‘변화한 환경에 적응할 때 인체가 갖는 부담의 징후’을 일컫는 말이다. 인체는 그 변화가 달갑든 괴롭든 이전의 상태를 유지하려고 애쓴다. 진정한 산꾼은 이 상태를 떨쳐야 한다. 누군가 등산은 샤워, 기도와 더불어 하고 나서 후회하지 않는 세가지 중 하나라 했다. 수 만 가지 산에 가지 않을 이유를 멀리하고 계방산에 오르기로 한다. 가지 않고 후회하는 것보다는 저지르는 편이 마음 편하기 때문이다.
요즈음 운(運)에 관한 책을 읽고 있다. 한자 運을 풀어 보면, ‘수레바퀴 위에 싣고 덮은 뒤 천천히 이동해간다.’ 이다. 우연 / 불확실성 / 가능성 / 행운 / 불운 / 영감이 운과 관련된 말들이다. 이중 가장 근사한 말은 행운이고, 행운이 가장 좋아하는 스타일은 '여유와 안목이 있는 사람'이다. 변화에 대한 지속적 관심과 몰입하는 습관으로 행운을 낚아채라 한다. 다양한 경험과 좋아하는 일에 대한 몰입이 축적되면서 행운은 내 것이 된다 했다. 오늘 눈 덮인 겨울 산 길을 걸으며, 그리고 오가는 버스에서 마음의 여유와 세상을 보는 안목을 길러 나가는 긴 사색의 시간을 가져 보아야겠다.
금요일 오전 창 밖으로 소리 없이 눈이 내린다. 하얗게 쌓여 가는 눈을 보니 마음이 차분해 진다. 계수나무의 향기가 어린 산에서도 눈 잔치가 벌어졌을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즐거운 상상의 나래가 돋아난다. 눈과 바람이 만든 풍경, 겨울
산의 매력에 푹 빠졌으면 좋겠다.
< 운두령 가는 길 >
여러 겹의 옷으로 중무장을 하고 집을 나선다. 몇 년 만에 내복까지 껴입어가며 다시 찾아 든 추위에 대한 대비를 했으나 현관을 나오면서부터 다리가 서늘하다. 그래도 공기는 쾌청하니 최고의 산행날씨를 기대해 본다. 날씨는 등산의 만족도를 결정하는 최대 변수이니 절반의 성공은 먹고 들어가는 셈이다.
7시 30분 정시에 올라 탄 버스는 빈 평소보다 자리가 많다. 추위로 예약이 줄었는지 모처럼 두 자리를 독차지하는 여유가 생겨 좋았다. 버스가
중부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지날 무렵 이어폰의 볼륨을 올린다. 늘 그렇듯 비몽사몽으로 빠져든다. 버스는 한적한 고속도로를 질주한다.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는 버스와는
달리 ‘벗꽃엔딩과 여수밤바다’라는 노래를 통해 전해지는 버스커버스커(거리의 악사라는 뜻)의 감미로운 목소리는 잠의 나락으로 나를 더 깊게
밀어 넣었다.
대장의 코스 안내가 왔다 갔다 한다. 당초에는 버스를 윗삼거리에 주차시켜 놓겠다 하더니, 운두령 부근
휴게소에서 들은 새 정보에 의하면 윗삼거리에는 버스가 못 올라간다 하니 아래삼거리로 내려오란다. 우왕좌왕
하는 모습이 걱정된다. 말은 한번 뱉고 나면 주워 담기가 어려운 법이다.
그래도 대장을 통해 새로운 정보 하나를 얻는다. 운두령의 고도는 1089m 인데, 만항재 1340m에 이어 국내에서 두 번째 높은 고개라는 것이다. 운두령이 가장 높다는 예전 정보가 새 것으로 바뀐다.
< 운두령에서 계방산 정상까지 >
10시 15분 무렵 운두령에 도착했다. 4년 만이지만 눈에 익은 들머리 계단을 보자 옛 기억이 오롯이 되살아난다. 정상까지는 인파로 긴 행렬이 이어질 것이다. 클램폰, 스패츠에 두터운 장갑에 모자까지 중무장을 하고 길을 나선다. 하산 완료시간은 3시, 충분해도 너무 충분하다. 우보산행이 오늘 길의 색다른 목표다. 고도계가 운두령의 고도를 1250미터로 표시한다. 실제 고도와는 약 160미터의 차이가 난다. 고도가 높을수록, 눈이 온 길을 오를수록 실제보다 고도계가 높게 표시되는 이유를 모르겠다. 문뜩 히말라야와 같은 고산용 고도계도 오차가 많이 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산에서의 고도 표시는 생명과 관계되는 일이니 그렇지 않겠지 하는 추측이 든다. 다음에는 나도 좀 더 성능 좋은 놈을 구입해야겠다.
< 운두령 전경 >
< 능선 좌측 방태산, 가칠봉 풍경 >
산 길은 눈이 온지 꽤 지나서인지 걷기에 편하다. 클램폰을 통해 들려오는 뽀드득 소리가 경쾌하다. 시간 여유가 생기니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겨울 산의 서정적 풍경들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간간이 불어오는 북서풍 바람에서 저 멀리 시베리아의 찬 기운이 느껴진다. 털모자에 더해 자켓의 모자까지 푹 덮어쓴다.
길가 눈 속에서 무언가 검고 둥근 물체가 보여 시선을 멈춘다. 집어보니 카메라 렌즈와 커버이다. 앞선 누군가가 흘린 것 같다. 배낭에 넣고 길을 가는데, 고급 카메라의 렌즈 가격은 비싸다 했는데
잊어버린 주인이 나중에 알면 얼마나 상심이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이 눈 길에 주인을 찾아
광고를 하고 다닐 수도 없고 난감하다. 어차피 내가 필요한 물건이 아니니 산행 중 혹은 하산 후에라도
주인이 나타났으면 좋겠다. (이 렌즈는 주인을 찾지 못했고 내 것이 될 것 같다,)
평지 길이 한동안 이어지다니 내리막 그리고 다시 오름이 반복된다. 올려다 보는 하늘 밑에 눈을 인 계방산의 정상이 어서 오라 손짓한다. 그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 보려 하나 참나무 가지들이 원망스럽다. 카메라를 도로 집어넣는다.
출발 25여분이
지났을까 오름에서 긴 정체가 시작된다. 올 것이 왔다. 우보산행이다. 그런데 목표한 것은 내가 내 걸음을 조절하는 것이었지 앞 사람의 꽁무니를 속절없이 따라 가는 것은 아니었다. 여유와 지체는 분명 다른 것이다.
그 와중에도 이정을 지난다. 운두령 1.2km, 계방산 3.8km. 평지에 가까운 길을30분을 걸어왔는데 겨우 1.2km라니 너무하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고쳐먹는다. 느리지만 그래도 터벅터벅 가다 보면
정상에 도착하겠지, 천천히 동쪽으로 나아간다. 좌측으로 긴
능선이 멋지다. 방태산과 주억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일 것이다. 푸른
하늘과 흰 눈이 어우러진 풍경이 그만이다.
11시 10분 무렵
전망 쉼터에 도착했다. 올려다 보는 정상 능선이 훨씬 가까워 보인다.
이제 1492봉을 향해 나아간다. 고도 1300미터 어름을 지날 무렵부터 눈 꽃이 목격된다. 지난 주 대룡산에서
빙화(氷花)의 감동이 체 가시기도 전에 이번에는 설화(雪花)다. 간간이 눈을
인 나무가 있는 풍경을 찍는 재미가 반복되는 정체에 활력이 되어준다. 작은 고도 상승에도 산은 곧바로
반응한다. 눈꽃의 축제는 고도를 높일수록 화려해진다. 길이
평탄해진다. 정체도 풀렸다. 길가에 주목도 눈에 띄고 좌우로
너울지는 능선의 장쾌한 흐름이 압권이다.
< 눈꽃 잔치 1 >
< 계방산 원경 1 >
11시 50분 무렵 전망대가 있는 개활지에 도착했다. 이곳이 1492봉인 것 같다. 낯선 전망대를 보니 기억의 힘이 맥없이 작아진다. 동쪽 저편에 우뚝 솟은 가야 할 정상이 보이고 사방은 막힘이 없다. 온통 눈에 덮여 있는 순백의 세계다. 지난 산행 때는 이곳에서 강형과 식사를 했었다. 라면 냄새가 코를 찌르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것으로 보아 후각은 추억을 불러오는 가장 확실한 감각임에 틀림없다. 오늘도 전망대 일대는 인파로 북적거린다.
어수선함을 멀리하고 길을 이어간다. 남은 거리는 1.2km, 정상까지 고도차가 크지 않아 부담 없는 길이다. 사람들의 표정에서도 여유가 묻어난다. 황홀한 설경, 정상이 멀지 않았다는 안도감과 기대감, 크게 힘들지 않은 길 사정이 여유의 근원이다. 그래도 바람이 불면 코끝은 찡하다. 덮어쓴 모자로 인해 공기의 흐름이 막혔는지 안경에도 김이 서린다. 바람이 정상에 서려는 나의 자격을 묻는다. 발걸음에 힘을 보태는 것으로 화답한다.
< 눈꽃 잔치 2 >
< 1492봉에서 >
마침내 계방산의 정상에 섰다. 운두령 출발 2시간 만이다. 긴 정체에도 불구하고 희한하게도 소요시간은 당초 계획대로다. 나의 작고 느린 발걸음이 만들어낸 노고의 결과다. 아스라이 선자령의 풍차가 첫 눈에 들어온다. 설악산과 오대산의 줄기가 길게 이어진다. 아아(峨峨)한 풍경이다. 줄을 서 기다려 정상석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었다. 시간 여유가 많다. 한참을 하릴없이 정상 부근을 서성인다.
< 계방산에서 본 오대산 >
< 계방산 정상 풍경 >
< 계방산 정상에서 아래삼거리 >
눈 덮인 계방산 정상에 서서 사방으로 조망되는 풍경을 보고 또 보고, 사진을 연이어 찍으며 나만의 의식을 묵묵히 행한다. 멀리 유장하게 펼쳐진 백두대간의 긴 흐름은 산 아래 두고 온 일상의 시름을 잊게 한다. 지금 이순간은 로제타도 실리콘밸리도 없다. 오직 산과 눈과 내가 있을 뿐이다.
< 계방산 정상에서 1 >
< 계방산 원경 2 >
겨울 산행은 산의 몸통을 여실히 보게 한다. 주름이 깊어 볕이 들지 않는 기슭의 눈은 산의 근육을 선명히 하고 잎 떨군 나무들의 허허로운 모습은 오히려 꽉 찬 느낌을 준다. 버림으로써 많은 것을 얻는 역설의 미학, 바로 이것이 겨울 산의 아름다움이다.
< 계방산 정상에서 2 >
< 하산 길 풍경 1 >
순간의 바람은 잠자던 길가의 눈까지 깨워 세운다. 한 순간의 돌풍은 가야 할 길의 선택을 강요한다. 이제 어째야 하나. 하산은 해야 하는데 다 내려섰는데도 남는 시간을 주체 못할까 걱정이 된다.
직직하면 주목 삼거리를 거쳐 노동계곡으로 향할 것이다. 그래
당초 계획한 대로 능선으로 향하는 새 길을 가자. 우측 계단으로 발을 내려 놓는다. 가야 할 능선이 한 눈에 들어온다. 길은 생각만큼 가파르지 않다. 바람이 눈을 적당히 배분시켜 놓아, 발이 눈에 파 묻히지 않는다. 모처럼 찬 스패츠가 무색하다. 지금쯤 일행은 눈이 깊게 쌓인 계곡
길을 내려서고 있을 것이다. 주목이 있는 풍경은 그립지만 지금 내가 가는 길에 만족한다. 1276봉을 향해 가는데 봉우리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1시 10분 무렵
높다란 봉우리가 있기에 이곳 1276봉 이겠지 나름 판단해 버린다. 잠시
후 길가에 이정표가 보인다. 계방산 2.2km, 주차장 2.6km. 그 옆에 있는 지도에 표시되 있는 현지점은 1276봉, 아이야! 또 헛다리 집었네. ㅎㅎ
< 하산 길 풍경 2 >
< 발왕산 원경 >
이제 남은 시간은 1시간여, 고도는 500미터, 큰 무리는 없다. 다만
길이 지금까지 와는 달리 가팔라진다. 1201봉으로 내려와 올려다 보는 1276봉이 우람하다. 봉이라는 이름에 걸맞다.
소속이 어느 산악회인지 모르는 산객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길을 내려선다. 좌측 계곡이 끝나는 어름에 이승복 생가가 보이고 그 밑으로 오토캠핑장도 보인다. 불현듯 산행이 끝나가려 한다. 눈과 바람과 싸우며 긴 오름짓에 힘겨워
하던 순간이 바로 전 같은데, 시간무상을 느낀다.
< 에필로그 >
엊그제 동지가 지났다. 겨울을 어둠을 기준으로 한 긴 터널로
비유하면 이제 가장 어두운 구간을 지났다. 이제부터 하루하루가 밝음과 조금씩 더 가까워질 것이다. 저울의 추가 아주 조금 밝음으로 기울어졌을 뿐인데, 그리고 겨울의
추위는 지금이 한창인데도 심리적으로는 희망의 기운이 샘솟는다.
5시 30분 사위가
어두워져 간다. 그래도 아직은 빛이 남아 있다. 절기의 변화가
느껴진다. 오늘 산행은 영어로 말하자면 ‘so so’였다. 그 이유는 앞서 여정을 기록한 것과 같으니 부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한
해가 저물어간다. 올 해 산해도 다음 주면 막을 내린다. 내가
기획하고 내가 주인공인 연극의 한 막이 끝나 가고 있는 것이다. 나이가 먹어감에 따라 더 여유 있고
안목이 넓은 사람이 되고픈데 그게 그리 쉽지 않다. 그래도 간절히 기원하고 그 길을 가면 꿈은 이루어진다
했으니 뚜벅뚜벅 나아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