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병을 혁파하고, 요동정벌을 꿈꾸다
정도전은 사병 혁파로 대표되는 군제 개혁을 추진하고, 요동 정벌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고려 말 지방의 군권은 절제사 개인에게 위임되어 있어서 국군으로서의 성격보다는 절제사의 사병적인 성격이 더 강했다. 태조는 개국 직후 왕자·종친·공신들을 절제사로 임명해 지방군을 통솔하게 했지만 여전히 일원적인 지휘체계는 성립되지 못했고 각 지휘관의 사병적 지휘권도 계속 유지되었다.
정도전은 군대를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이원화하되 통수권은 중앙에서 장악하며, 지방군은 교대로 상격해 수도를 숙위하도록 하는 부병제를 가장 이상적인 군사 제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부병제를 실시하려면 통수권이 반드시 일원화되어야 하며, 정도전이 군제 개혁을 추진한 목적은 여기에 있었다.
정도전은 1393년(태조 2)부터 진법 훈련 등 각종 군사 훈련을 실시함으로써 각 절제사들이 거느리던 사병 성격의 군대를 자신이 직접 장악하고자 했다.
그리고 1394년 중앙군의 최고 책임자인 판의흥삼군부사에 임명되자 본격적인 군제 개혁을 추진하여 2월 29일 8개 조목의 병제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이 상서문을 통해 군대의 실질적인 지휘권을 병마사 이하 장군들에게 주고, 절제사는 병마사를 감독하는 직무만 담당하게 할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부병과 시위의 편제를 개편하고자 했다. 이로써 절제사의 지휘권을 유명무실하게 함으로써 절제사 휘하의 군대를 중앙에서 장악하려는 것이었다.
개혁안을 현실화하는 후속 조치로 정도전은 강력한 군사 훈련을 실시했으며, 훈련에 미숙하거나 명령을 어긴 자를 엄격히 처벌하도록 했다. 이는 정예 군대를 육성하려는 목적 이외에 군사 훈련을 중앙에서 주관함으로써 절제사와의 사병적 연결 고리를 약화시키려는 목적이 담겨 있었다.
1396년에 명나라와의 외교 관계에서 발생한 표전문 사건 이후 정도전은 군사 훈련의 강도를 높였다. 표전문은 그 격식과 용어가 까다로워서 잘못 선택한 단어 하나가 외교 문제를 야기하기도 하였다. 1396년 6월 명나라는 사신을 보내 조선이 보낸 외교문서에 무례한 표현이 있음을 지적하면서 글을 만든 정도전과 정탁을 보내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 문제는 권근을 대신 파견하여 명 황제를 설득함으로써 원만히 해결되었다.
하지만 표전문 사건은 1397년에도 되풀이 되었다.
이에 정도전은 남은을 시켜 “사졸(士卒)이 이미 훈련되었고 군량(軍糧)이 이미 갖추어졌으니, 동명왕(東明王)의 옛 강토를 회복할 만합니다.”라고 상서하였다.
이에 대해서 요동 정벌이 실질적으로 준비되고 있었으며, 이를 간파한 명과 표전문을 빌미로 양국 사이에 긴장상태가 형성되고 있었다는 평가가 있고 한편으로는 요동 정벌을 빌미로 사병 혁파의 반대하는 세력을 억제하려고 했다고 보는 평가로 나뉜다.
1398년 3월에는 남은이 “여러 절제사를 혁파하고 합하여 관군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어 윤5월 말부터 8월 초까지 군사 훈련의 강도가 최고조에 올랐다. 군사 훈련에 불참하거나 《진도(陣圖)》 강습을 게을리 한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문책했는데, 《진도》를 익히지 않았다고 해서 삼군 절도사(三軍節度使)와 상장군·대장군·군관(軍官) 등 2백 92인이 한꺼번에 탄핵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국 같은 달 26일 왕자의 난이 일어나 정도전과 남은 등이 숙청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된다. 사병 혁파를 두고 일어난 갈등이 정도전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었다. 하지만 반대편이던 태종도 집권 뒤에는 결국 사병 혁파를 추진하여 조선의 국방군 체계를 갖추었다.
정도전은 새 나라의 기틀을 확립하는데 많은 공을 세웠지만, 반역의 죄목으로 죽임을 당한 불명예가 있었다. 이런 정도전의 사상이 국가 차원에서 재평가 된 것은 정조대의 일이다. 정조는 1791년(정조 15) 규장각에 명해 ≪삼봉집≫에 누락된 글들을 수집하고 체제도 정비해 새로 편찬하도록 했다. 현재 주로 이용되는 ≪삼봉집≫이 이때 간행된 것이다. 그리고 고종대 경복궁이 중건되는 과정에서 정도전의 공이 인정되어, 1865년(고종 2) 대왕대비의 전교에 따라 정도전의 훈작이 회복되었고, 1871년에는 문헌(文憲)이라는 시호와 ‘유종공종(儒宗功宗)’이라는 편액이 하사되었다. 이로써 사후 거의 500년이 지난 뒤에야 명예를 회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