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구 전민동 광산김씨 삼강정려
정문(旌門)은 절의나 선행한 이를 표창하기 위해서 세우는 문을 말한다.
마을에세웠다해서정려(旌閭)라하고,표창했다해서 정표(旌表)라하고,국가의 특전 이므로 작설지전(綽楔之典)이라고도 한다.
정표의 종류는 여러 가지지만 대개 충신, 효자, 열녀 등으로 기실삼강(三綱)의 범주에 속한다.
‘임군은 신하의 모범이 되고[君爲臣綱], 아비는 자식의 모범이 되고[父爲子綱], 남편은아내의 모범이 되는것[夫爲綱]’이 삼강이다.말하자면군신간,부자간,부부간에지켜야할도리를실천한 이를 표창하고 기리기 위해서 세운 것이 정문이다.
정표의 역사가 오래되어 정문을 세워둔 곳이 많지만 세 가지를 다 갖춘 집안은 드물다.
한 집안에 충·효·열, 세 가지 정표를 갖춘 경우를 ‘삼강정려’라하는데유성의광산김씨집안이 그런 경우다.
광산김씨가 유성 전민동에 터를 잡게 된 것은 허주공(虛舟公)김반(金槃:사계 김장생의 3남, 신독재 김집의 아우)의 묘소가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허주공 묘소 바로 위에 3남 김익겸(金益兼 : 병자호란 때 순절)묘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장남 김익열과 손자 김만준 묘가 있다. 이 외에도 광산김씨의 묘소가 수없이 산재돼 있어 사람들은 이곳을 ‘산소골’이라 불러왔다.
허주공 비석에는 ‘안동김씨 부전우, 연산서씨 부전좌’로 표기되어 있다.
허주공을 중심으로 초취(初娶)인 안동김씨를 오른쪽에 부장(附葬)하고,재취(再娶)인 연산서씨를 왼쪽에 부장했다는 뜻이다.
허주공은 본래 서울 정릉에서 태어났고 연산에 적을 두었는데 이곳에 묘를 쓴 내력이 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허주공은 2남인 익희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왕을호종하였고,서씨부인은 3남 익겸의 내외와함께 강화도로피난했다.그런데청(淸)군이 강화도를 함락하자 익겸은 김상용(金尙容:청음 김상헌의 형)을 따라 분사하였고, 서씨부인 역시 아들의 죽음소식을 듣고는 목욕후 자결하였다고 한다.
익겸의 아들은 만기와만중이다.부인인해평윤씨(해남윤두수4대손)는만중을잉태한중이었으므로 따라죽지 못하고 큰아들 만기를 데리고 강화도를 빠져 나오던 중 배안에서 만중을 출산하였다. 그래서 유복자인 만중을 ‘선생(船生)’이라 아명했고, 서포(西浦)라는 호 도 이뜻을 기념해서 지은 것이다.
어머니의 모진 고생과 엄한 가르침 속에서 형제 모두 출세하였고, 그래서인지 효자로이름난 서포가 어머니를 위해서 구운몽을 지었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회자 되고 있다.병자호란이 끝난후 허주공과 나머지 아들 들이 강화도에 들어가 부인과아들 시신을 수습하여 경기도 교하(交河)의 강가에 임시로 장지를 마련하였고, 4년 뒤 이곳으로 이장했다.
이곳은 본래 회덕현에 속했던 정민역(貞民驛:전민의옛지명)이있던 역촌이었다.역이있었던곳이 장지로 바뀌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당시 허주공은 연산에 적을 두고 있어서 이곳에 연고가 없었을 것이다. 다만 오래 전부터 전민동 옆의 탑립동에 광김이 거주하였다고 전해지는 바, 입향조가 김치기(金恥其:여말선초)다. 그는 여흥후인(驪興后人)인 민심언(閔審言:그의부인인 여산송씨와 아들 민충원의 묘소가 유성 도룡동에 있음)의 사위가 되는 관계로 살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김치기의 사위가 또한 강문한(姜文翰:진주강씨 회덕입향조)으로진주강씨가 신탄진 석봉동에 거주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광김이 이곳에 오래전부터 거주했었기 때문에 정민역 부근에 명당이 있었음을 알고 있었을것이다. 사계종손인 김선원씨말에 의하면, 탑립동 후손 중에 김익재[호守拙軒,신독재문인]가 있었는데 그가 이 터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였다고 한다.
허주공의 둘째 사위였던 이후원(李厚源)이 당시 충청감사 였는데 장모와 처남을이곳에모시기 위해 정민역을 지금의 엑스포아파트 인근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역을 옮긴다는것은 쉽지않은 일인데 가능했던 것은 이들 집안이 국가를 위해 헌신한 부분이 감안되었을 것이고, 명당인 이곳에 대한 욕심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이곳은 태조산이 계룡산이요 소조산이 금병산이다. 그 한 가지가 뻗어서 이곳일대 의국(局)을 만들었다.
묘소 바로 위의 봉우리[穴星]에서 입수(入首)의 내룡(來龍)을 살펴보면 일절(一節) 뒤의 또 한 봉우리[부모산]에서 마치 자식을 잉태하듯 속기(束氣)해서 흘러오다가 살며시 고개를 드는 모습이 교과서 처럼 모양을 갖췄다.
혈성에 올라서면서 개면(開面)하고 혈장을 드넓게 만든 모습이 역시 명불허전이다. 주변의 사격(砂格) 역시 그림처럼 아름답다. 멀리로는 계족산이 혈을 비추고, 청룡과 백호가 겹겹이감싸고, 특히 백호 선궁(先弓)으로 이루어진 안산(案山)이마치옥대(玉帶)처럼 유정(有情)하게 혈을 감싼 모습이 보기 드문 대지(大地)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곳의 혈판은 특이하게두 갈래로 이루어져 있다. 지리에서는 쌍유혈(雙乳穴)이라 하는데 여자의젖가슴과같다는뜻이다. 유혈에서는 혈장이정중(鄭重)한가와 평탄한 곳인가를 살펴야 하는 바 바로 그런곳에 허주공 일족의 묘소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허주공은 슬하에 6남 5녀를 두었는데 모두 현달하여 아래로 대제학 7명 등 걸출한 인물들이 무수하게 쏟아져 나왔다.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고 말하지만 이같은 명문이 이루어진것이 어찌 지리만으로가능하겠는가? 무엇보다도 삼강의 가법(家法)이 광김문중에 대대로 익혀졌기 때문이리라.김익겸의 충신정표, 김만중의 효자정표, 연산서씨의 열녀정표.정문이 붉게 칠해진 것은 정신을 소중히 보호하려는 금문(禁門)의 뜻이기도 하거니와 단심(丹心)의 상징이기도하다.
삼강은 사람으로서 갖춰야 할 기본 덕목이다. 그래서 삼강의정려를 받는 것은 가문의무한의 영광이다.
그러나 삼강의 지극함은 죽음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일까? 허주공 묘역을 바라보면서 입정(立旌)의 영광 이면에 명암이 서려 있음을 생각해본다.
첫댓글 충,효,열 세가지 정표를 갖춘 '삼강정려'와 대전 유성의 광산 김씨 가문의 내력에 대하여 공부합니다.
사위가 장모와 처남을 좋은 곳에 모시기 위해 역을 옮겨가며 묘소를 잡았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삼강정려와 좋은 곳에 조상을 모신 허주공 일족을 보면서, 좋은 가문은 어느 한가지만 갖추어 진다고 되는 것이
아님을 절실히 느낍니다. 오늘도 큰 공부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몇년전에 답산하였습니다~열공 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