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용한점집 신명사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온 이후 우리 민족과 함께해 온 미륵 신앙은 오늘날까지도 여러 종교에 많은 영향을 끼치는 대표적인 민속 신앙이다. 미륵이란 석가모니가 구제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먼 훗날에 이 땅에 다시 출현하기로 되어 있는 미래의 부처이다. 불교 경전에 의하면 미륵 보살은 귀족 출신으로 석가모니의 설법을 듣고 불교에 귀의하게 된 비구니라고 한다. 귀의한 후 미륵은 석가모니로부터 미래에 성불할 것이라는 예언을 받게 되고 도솔천에 올라갔다. 도솔천이란 부처가 될 보살이 사는 장소로서, 미륵은 그곳에서 설법을 하며 성불할 시기를 기다린다.
미륵에 대한 신앙은 도솔천 상생 신앙과 미륵 하생 신앙, 두 가지의 신앙으로 나뉘게 된다. 도솔천 상생 신앙이란 미륵 보살을 믿고 받드는 사람이 오랜 세월을 기다릴 수 없을 경우 사후에 미륵이 상주하는 도솔천에 태어나서 그 곳에서 미륵과 함께 살다가, 미륵이 하생하게 될 때 미륵을 따라 이 땅에 돌아 와 미륵불의 묘법에 의해 구원을 받고자 하는 신앙이다. 미륵 하생 신앙이란 도솔천에 상생하는 것과는 관계없이 먼 미래의 언젠가 미륵불에 이 땅에 출현하여 그로 인해 해탈과 구원을 얻기를 기원하는 신앙이다.
삼국 시대의 초기 불교 수용에서부터 전래된 미륵신앙은 특히 신라와 백제에서 국가 통치 이념으로서 응용되었다. 백제의 성왕은 도읍을 사비로 옮기면서 불교를 크게 일으켰고, 신라에서는 미륵 신앙의 대표적인 예로 화랑도를 들 수 있다. 화랑은 다른 이름으로 ‘미륵선화’라 하였고 또한 화랑의 낭도를 용화향도라 부르는 것으로 미루어 화랑단체와 미륵 신앙의 인연을 알 수 있다.
이후 후삼국시대 궁예의 경우는 세기말적 민심을 이용하여 자신을 미륵으로 칭하면서 일시적인 대중의 호응을 얻기도 하는데 이는 역으로 당대의 서민들에게 미륵 하생 신앙이 갖고 있던 영향력을 반증해주는 역사적 사례다. 고려 태조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하고 어지러운 한반도 정세의 혼란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불교를 국교로 정하고 통치를 위한 정신적 기반으로 호국불교를 유지해 나갔다.
이처럼 불교는 국가적 지원을 받으며 우리 민족의 삶에 자리하게 되었고 서민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불교를 점차 민간 신앙화하면서 기복 신앙으로 변화시켰다. 미륵불을 향해 득남, 기복, 치병, 수호를 기원하면서 일상의 욕구를 표출하는 것으로 미륵 신앙의 기능이 변화된 것이다.
미륵 신앙이 본격적으로 서민의 신앙으로 변하게 된 원인은 조선 시대의 여러 정치적, 사회적 상황과 맞물려 있다. 조선 왕조는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적 이념으로 지배질서를 확립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 개국 직후부터 숭유억불 정책을 펴게 되었다. 따라서 상류 계급을 통한 불교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는 조건이었고 조선시대의 불교의 맥은 기층민을 통해 전승, 전개되었다. 또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전쟁과 반상 신분제의 제도적인 모순에 의한 정치적 사회적 혼란의 과정에서 미륵 신앙은 민중에게 난세의 도피처가 되었다.
사회적 혼란 속에서 불교는 기층민과 더욱 밀착되어 주술적 성격을 부가하게 되었고, 기층민들은 불상으로서 조형미를 갖추지 않은 입석이나 바위조차도 미륵으로 인식하여 종교행위를 하게 되었다. 미륵신앙은 큰 바위에 자기의 소원을 빌고 치성하며 복을 바라는 전통적인 민간 신앙의 형태로 변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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