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십이입처(十二入處), 나에게 펼쳐진 세상의 근거
- 윤제림 「겨울 아침」
우리는 세상 자체를 알려고 해도 세상 자체를 알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자체를 알았다고 하는 순간, 그것은 세상 자체가 아니라 나에게 알려진 세상, 나에게 이해된 세상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나에게 영향을 받은, 나의 분별로 펼쳐진 세상입니다. 즉 나의 의식 안에 펼쳐진 세상입니다. 이를 불교에서는 법(法)이라고 합니다.
이런 법의 근거로서 ‘십이입처(十二入處)’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연기를 설명하는 부처님의 방편 교설 가운데 하나입니다.
“고타마시여, 일체(一切)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합니까?”
“일체란 것은 이른바 십이처(十二處)이다. 안(眼)과 색(色), 이(耳)와 성(聲), 비(鼻)와 향(香), 설(舌)과 미(味), 신(身)과 촉(觸), 의(意)와 법(法)이니 이것을 일체라 이름한다. 이것을 떠나 달리 일체가 있다고 주장한다 해도 그것은 단지 말뿐이어서 물어도 알지 못하고 의혹만 더할 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 『잡아함경』 제13경, 「일체경(一切經)」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나에게 펼쳐진 세상뿐이고, 그것이 나에게 이렇게 펼쳐진 까닭은 오직 인식하는 주관인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와 인식되는 대상인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이라는 십이입처 외로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펼쳐진 세상은 이러한 인식 주관과 인식 대상이 근거가 되어 마음 작용이 일어나 나타난 것이지 그 자체가 아닙니다. 그러니 나에게 펼쳐진 세상은 나에게 보이는 것처럼 마음 밖에 참으로 그렇게 있지 않습니다. 마음 작용에 의해 펼쳐진 것[연기(緣起)된 것]이기에 무상(無常)하고 자성이 없고[무아(無我)] 공(空)한 것입니다.
- 목경찬 『연기법으로 읽는 불교』 93쪽-96쪽 발췌)
예로 다음 시를 읽어보겠습니다.
겨울 아침
- 윤제림
역전다방 창가에 붙어 앉아 내려다보는 정거장 마당.
신발가게 주인은 귀마개 위로 장갑 낀 손을 붙이고 섰고,
추운데 저러고 싶을까, 검은 삽사리와 누렁이가
눈 위에서 한바탕 붙어있다.
지금 막 계단을 내려간 다방처녀는 맨종아리가
더 안쓰러운데, 연신 코트 깃만 고쳐 세우며
이발소 앞을 걸어가고 있다.
정거장 마당 깨랑 콩이랑 말린 나물이랑
꼭 한 움큼씩 벌여놓은 여자는 무릎 새에
얼굴을 파묻고 있다.
어서 기차 시간이 되어 더러 팔렸으면 좋겠다.
객관적인 풍경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다 인식된 풍경입니다. 그 면면이 내 마음에서 그려진 풍경입니다. 이런 말이 가능하다면, 내 마음에 그려진 풍경이 밖에 나앉은 것입니다. 밖에 있는 풍경이 나에게 들어온 것이 아니라 딱 내 마음 작용만큼 드러난 풍경입니다. 그것들은 추운데도 삶을 바라고 있습니다. “신발가게 주인은 귀마개 위로 장갑 낀 손을 붙이고 섰고”, “정거장 마당 깨랑 콩이랑 말린 나물이랑/ 꼭 한 움큼씩 벌여놓은 여자는 무릎 새에/ 얼굴을 파묻고” 삶을 바랍니다. “추운데 저러고 싶을까, 검은 삽사리와 누렁이가/ 눈 위에서 한바탕 붙어” 있습니다. 추위에 묻혀버리지 않고 삶을 바라는 몸짓입니다. 추위 속의 풍경과 추위 속에서도 삶을 바라는 풍경이 하나의 마당을 이룹니다. 그 가운데 “지금 막 계단을 내려간 다방처녀는 맨종아리가/ 더 안쓰러운데, 연신 코트 깃만 고쳐” 세우는 그 장면이 있습니다. 날이 추운데 맨종아리라면 우선 다리를 가려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 바로 ‘그렇지 않을 수 있는 무엇’이 그 처자의 ‘코트 깃을 세우는’ 지금의 삶을 가능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통 겨울로 묻혀버리지 않는 삶이 거기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이런 바람이 겨울 “역전다방 창가에 붙어 앉아 내려다보는 정거장 마당”입니다. “어서 기차 시간이 되어 더러 팔렸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생기는 풍경입니다. 그런 마음이 ‘보는 시인’과 ‘보이는 풍경’을 만듭니다. 마음속의 두 계기, 인식하는 작용적 계기인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와 인식하는 대상적 계기인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이 만들어져 마음의 풍경을 펼치는 것입니다. 그 마음에 인식되고, 이해되고, 바램되고, 분별된 풍경으로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 풍경의 출처는 어딥니까?
- 십이입처(十二入處), 마음입니다.
이것이 “인간은 ‘여섯 가지 지각구조를 지닌 몸’을 가지고 살아간다. 이것이 ‘의식이 있고, 생각이 있는 한 길 몸’이다. 이 한 길 몸을 가지고 살면서 인식한 것이 그 사람의 세계다”(이중표 『붓다의 철학』 198쪽)입니다. 이렇게 십이입처의 마음 작용에 의해 그려진 풍경이니 실체 없는 것들로서, ‘무상(無常)하고, 무아(無我)이고, 고통[苦]이고 공(空)합니다’.
“중생들은 우리의 지각활동을 지각기관 속에 들어있는 자아의 활동으로 생각한다.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몸속에 머물고 있는 자아가 눈을 통해서 밖의 사물을 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보는 눈 속에는 자아라는 실체가 머물고 있고, 보이는 사물 속에는 보이는 것의 실체가 머물고 있는 셈이다. 즉 지각활동을 하는 지각기관 속에는 지각활동의 주체인 자아가 들어있고, 지각되는 대상 속에는 지각되는 실체가 들어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의 지각기관[眼耳鼻舌身意]과 지각대상[色聲香味觸法]을 실체가 머물고 있는 장소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십이입처는 지각기관과 지각대상 속에 인식하는 주관과 인식되는 대상이 들어있다는 중생들의 착각을 의미하며, 부처님은 이러한 중생들의 착각을 십이입처라고 부른 것이다.”(이중표 『니까야로 읽는 반야심경』 186쪽-187쪽)
-오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