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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生)을 위한 시적 플라시보(placebo)의 두 양상(樣相)
-한영숙과 권정우의 시세계
인간의 마음은 ‘밀랍으로 만든 서판’과 같지는 않다. 서판의 경우 옛 것을 문질러 지우지 않고는 새로운 것을 쓸 수가 없지만, 마음의 경우 새로운 것에 쓰지 않고는 옛 것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 F. 베이컨
(백인덕)
1.
한 시인의 개성이란, 하나의 ‘언어-문화 공동체’의 ‘시사(詩史)’를 생각하면 얼마나 작고 가벼운 깃털일 뿐인가, 그 ‘시사’란 아무리 유구해도 종국에는 ‘시(poetry)’의 한 갈래에 지나지 않을 뿐이지 않은가, ‘시’와 ‘역사’는, ‘역사’와 ‘진화사’는…. 이런 점층적 사유는 형식상 무의미해 보이지만, 결국은 시인의 ‘개성’의 가치와 발원지를 찾는다는 점에서 충분히 ‘의미 생성’을 기도한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앞의 정의의 유비적 표현으로 “인간의 세계는 의미의 세계이다. 애매성, 모순, 광기 혹은 분규 따위는 허용하지만 의미의 결핍은 용납하지 않는다. 침묵조차도 기호로 가득 차 있다”는 옥타비오 파스의 말이 생각난다. ‘개성’과 ‘의미’라는 두 층위를 동시에(‘종합적으로’라고 쓰고 싶었지만) 고려한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개별 작품의 세계를 일반론으로, ‘자극에 대한 반응 양상’으로 읽는다는 의미도 된다. 이를 통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현 단계에서 한 시인이 드러내는 ‘시적 지향’이 된다. 그 나머지는 언제나 ‘유추’, ‘상상’에 의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시어는 언제나 일상어에서 비롯한다. 그러면 왜 굳이 ‘시적 -’이라고 붙여야 하는가? 일상어가 시어로 사용될 때, 언어는 그 본래의 뜻으로 되돌아간다. 다만, 그 되돌아감이 단순한 환원이 아니라 창조가 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김수영)는 시에서 ‘눈’은 이 표현이 이루어지기 이전에는 결코 존재한 적 없는, 그 이후로는 결코 존재할 수 없는 ‘유일한, 특별한’ 눈으로 창조된다. ‘플라시보(placebo)’의 사전적 의미는 ‘죽은 이를 위한 저녁 기도’, ‘가짜 약’, ‘일시적인 위안의 말’ 등 ‘실제로는 쓸모없음’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의학적으로 ‘플라시보 효과’는 “유효성분은 없고 심리적 효과만 있는 가짜 약”이라는 ‘긍정의 힘’의 의미로 사용된다.(역으로 ‘노시보(nocebo)’란 “진짜 약을 줘도 환자가 효과가 없다고 생각하면 약효가 나타나지 않는 현상”, 즉 부정의 힘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시적 플라시보’가 노리는 효과는 무엇인가? 단적으로 말하면, ‘증상의 완화거나 치유’가 아니라 ‘병인(病因)의 확인이거나 노출’이다. 무슨 병인가? 그가 ‘시인’으로 자신을 ‘정위(定位)’ 했을 때, 불가피하게 맞닥뜨리게 되는 ‘생(生)’의 모순들이다.
2. ‘위악(僞惡)’의 시적 플라시보 - 한영숙의 시 세계
언제나 새로움(시적 개성)을 추구하는 시인은 여러 방향의 압력에 시달리게 된다. 시인이 스스로 회의하게 되는 작품 내적인 ‘제재의 협소함’, ‘스타일의 완고성’ 등은 논외로 하더라도 시인은 ‘전통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한 비난’과 ‘기준의 모호성으로 인한 혼란’, ‘소통의 불연속에 의한 소외’ 등 시인의 내, 외부에서 가해지는 압력에 쉽게 짓눌리게 된다. 이번 기회에 접하게 된 한영숙의 작품들은 이런 양상의 단면을 드러낸다.
스무날 째 독감으로
목구멍에 약을 털어 넣었지만
목뼈까지 등마루를 이루고 있는 신물나는 알약들.
기어이 약봉지를 거실 벽에다 내동댕이쳤다
등뼈들이 튕겨져 나와 또르륵 구르고.
봄은 아직 멀었는지
잠시 피다만 4월의 벚나무들이 일제히 밭은기침을 한다.
1이라는 숫자는 1이어야 하고
2라는 숫자는 2여야 하는데
왜 4월의 저들은
1-2월 속 저리 분분한가
떼전으로 햇살 덤비던
어느 봄날,
사춘기 여자아이의 박수소리는 들리지 않았어.
마트로시카 인형처럼 방과 방 사이는
굵은 침묵이 새끼를 치고……,
약발도 받지 않은 침묵이
독약으로 돌변하자
손에 잡히는 분노들을 어딘가를 향해 와장창 내리치고 있었지.
얼마나 힘껏 내리쳤던지
제 발등에 핏물들이 시원하게 흐르고 있었지.
사기파편 더미에 벚꽃들이 환하게 반짝이고 있었지.
-「접시 깨기」전문
이 작품은 구조적인 안정감 위에 여러 이미지(이미지는 결국 상징으로 읽어야 한다)들이 순환적으로 배치되면서 시인의 ‘존재론적 진단’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1-12행 까지는 시, 공간적으로 ‘현재-지금’을 그린다. 반면에 14-22행 까지는 ‘있었을 법한 과거’, 그러니까 ‘일반화된 과거’의 ‘그때-거기’를 드러낸다. 전반부와 후반부의 연결은 “어느 봄날”이라는 13행의 상징을 통해 자연스럽게 결합된다. 작품의 전반부에서 화자가 분노하는 이유는 일차적으로 자연스런 계절의 순환에 따르면 ‘봄’이어야 하는데 꽃샘추위 때문에 봄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봄이 아닌 봄’을 앓는 화자의 의지가, 아니 치유의 수단(‘신물 나는 알약들’)이 아무 소용도 없다는 것(‘벽에다 내동댕이쳤다’)에 있다. ‘어느 봄날’의 상처는 곧 시인의 ‘존재론적 상처’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시적 진술’이 개인적 차원에 머무르고 만다면, 시인의 ‘개성적 면모’를 확인하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한영숙의 경우, “어느 봄날‘이라는 고리를 통해 개인적 차원을 존재 일반의 사건으로 심화, 확장한다. ’마트로시카‘는 러시아 목제인형이다. 뚜껑을 열 때마다 조금 더 작은 같은 모습의 인형이 나타난다. 시인은 왜 ’양파‘가 아닌 ’마트로시카‘를 연상했을까? 아마도 근원 없는 존재를 거부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모더니티‘란 그것이 아무리 위험하고, 불온하고, 광란과 일탈처럼 보일지라도 ’인간의 마음과 의미‘를 확고하게 믿고 있다. 그게 다가 아니라 ’거기서‘ 출발하자는 것이 ’모더니티 기획‘의 진정한 함의인 것이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약발도 받지 않는 침묵이/독약으로 돌변하자“라는 ’시적 진단‘을 통해 시인이 ’위악의 플라시보‘를 방법적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봄비가 저벅저벅 검은 장화발로 들어선다
피로에 젖은 하루들이 무릎과 무릎을 맞댄다
옆 좌석에 앉은
늙은 사내의 깊게 패인 미간에서
그간 군중고독 속 깊이 살라낸
니코틴 고뇌들이
밤늦은 전철 안
그 젖은 몸에서 빗발처럼 뿜어져 나오고 있다
무엇이 저리도 꽁초 비벼대도록 자욱한 하루들이었는지
내 온몸 용고뚜리로 쿨럭이고 있다
매캐하게 빠져나간 어느 역에서
중년 향수남이 이미 흠뻑 젖어버린 내 무릎을 타고
그 빈자리를 채운다
은은히 발효되지 않은 싸구려 향수들이
우산꼬챙이에서 빗물처럼 똑똑 떨어지고
순간순간 노출된 그의 사생활 일부가
봄비와 뒤섞여 철로에 간간이 뿌려진다.
연일 고된 하루 일과에 절어있는
나는,
‘잠시 어느 누군가의 기댈 어깨가…’
‘들어갈 집이 없다는…’
문자 한통을 서로 주고받는다.
-「집으로」부분
일반적으로 ‘위악(僞惡)’은 ‘주체-객체(대상/상황)’의 심리적 거리가 가까울 때 발생한다. 직접적 관여(關與)까지는 아니더라도, 모든 존재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았을 때, 그 강렬도는 더욱 커진다. 이 작품은 비 오는 늦은 밤 지하철 풍경을 그리고 있다. 작품 후반부에 등장하는 ‘요철(凹凸)’은 개별 작품에서마저 매끄러운 완결성에 거부하는 시인의 개인적 성향, 위트가 발휘된 것으로 보기로 한다. 남는 부분은 화자는 “연일 고된 하루 일과에 절어 있”다고 진술하고 있는데, “군중고독 속 깊이 살라낸/ 니코틴의 고뇌들”과 “은은히 발효되지 않은 싸구려 향수들”의 중년 ‘향수남’에 대하여 의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관찰’은 아니더라도, 시인은 외부의 자극에 대해 일상적인 반응 이상의 그 무엇을 시도한다. “ ‘잠시 어느 누군가의 기댈 어깨가…’/ ‘들어갈 집이 없다는…’”, 시인은 “문자 한통을 서로 주고받는다”고 했지만 전언(massage)의 발신자와 수신자가 불분명하다. 이런 불명확성(‘전언’의 의미를 포함한)은 ‘위악의 플라시보’(해롤드 블룸식으로 말하면 ‘자기기만’)를 강화한다. 그렇다면, 이런 ‘포즈’를 통해 시인이 진정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멀리서 보면 나무들이 가득 차 있는 숲
날리지 못하도록 새순을 돌돌 감으며
원심기 페달을 밟아대는,
가까이 가 보면 나무와 나무는
서로의 팔과 팔이 겹치지 않는다
동료의 팔이 길다면 다른 각도로 자신의 팔을 벌려
신록 반 스푼 넣고
헛둘 헛둘 여유롭게 페달을 돌리면
푸른 솜사탕들이 봉글봉글 가지마다 단내를 날린다
-「헐거움에 대하여」부분
‘숲/나무’를 곧바로 ‘집단/개인’으로 바꿔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쨌든 이 작품에는 한영숙 시인이 바라는 ‘시적 개성’의 자연스런 위상이 잘 드러난다. 더불어, 시인의 ‘위악적 플라시보’가 노리는 효과에 대한 ‘개연적’ 기대도 엿볼 수 있다. 철지난 유행가 가사처럼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냐”라면, “나의 악(惡)함은 악(樂)함을 위하여”라고 바꿔 읽을 수 있다.
3. ‘위선(僞善)’의 시적 플라시보 - 권정우의 시세계
누구나 자신의 ‘언어’를 만들 수는 있지만, 그것을 통해 의미를 생성하고, 자유롭게 소통시키고, 제 스스로 진화할 수 있도록 ‘기획’할 수는 없다. 우리는 누구나 태어나는 순간, ‘언어와 표현’의 압력 아래 놓이고, 관례(convention)를 배우고, 거부와 저항의 한계를 스스로에게 각인시킬 수 있을 뿐이다. 사족을 앞에 붙이면, ‘위선’이라는 어휘가 거느린 강력한 ‘언어-문화’적 함의에서 이 글은 자유롭고자 한다. 첫 째 이유는 이 글이 어떤 목표 아래, 전략적 의도를 찾는 것이지 개별 작품의 ‘진정성’을 따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는 이 글의 지향점이 ‘플라시보’에 있기 보다는 ‘시적’이라는 무거운 수식에 있기 때문이다. 셋째는 ‘언어’ 자체가 가지고 있는 모순성(동일성과 대립성)에 대한 작은 이해를 이 글이 기획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이 글의 ‘위선’은 ‘위선’이 아니다. 표면적 활자를 어떻게 ‘독해’할 것이냐는 온전히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
어머니의 집은 어디인가
자식들이 힘을 모아
아파트를 구해 드린 게 십년 전인데
이집이 당신 집이 아니라면
어머니의 집은 어디인가
한푼 두푼 모아서 장만했지만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해서 팔아야 했던
부천의 양옥집도 아니고
텃밭도 있고 우물도 있던
신정동 무허가 시멘트 벽돌집도 아니고
화장품 팔러 다니다 병을 얻었던
상도동 산동네 흙벽돌집도 아니라면
어머니의 집은 어디인가
아버지가 직장을 때려치우고
집 판 돈도 날린 뒤에
일곱이나 되는 식구들을 끌고 들어간
강원도 산골짝의 오두막도 아니고
자수성가한 외할아버지가
춘양목으로 번듯하게 지은 외갓집도 아니라면
어머니의 집은 어디인가
중풍으로 쓰러진 어머니
모르는 집에 맡겨진 아이처럼
우리집으로 가자고 애원하는데
어머니의 집은 어디인가
오래전부터 대문을 열어놓고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는데도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어머니의 집은
-「어머니의 집」전문
시의 놀라운 ‘힘’, 간혹 그것이 좁은 의미의 ‘서정시’에만 국한되기는 하지만, 어쨌든 시의 힘은 ‘공감(共感)’을 불러일으키는 ‘마술적 효과’에 있다. 이 작품의 경우, 체험의 사실성 여부를 떠나 ‘어머니’의 ‘집’이 됨으로써 이중의 효과를 환기한다. 그것이 ‘본향(本鄕)’이라는 점에서 읽는 이의 ‘회귀본능’을 자극하고, 나아가 ‘삶’이란 결국 긍정적으로는 ‘여행’, 부정적 어휘로는 ‘떠돎’의 연속이라는 것을 별다른 ‘기법(수사적 장치 이상)’의 사용 없이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집’은 그 본래적 속성인 ‘기거하는 곳(주거)’, ‘모두가 모일 수 있는 곳(회합)’, ‘타인의 간섭을 배제할 수 있는 곳(독립성)’ 등의 의미로 형성될 때, 하나의 ‘장소(場所)’로서 완벽한 형태를 갖추게 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것은 하이데거 식으로 ’존재의 거소‘는 되지 못한다. 권정우 시인은 이러한 사태를 “어머니의 집은 어디인가/ 오래전부터 대문을 열어놓고/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는데도/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어머니의 집은”으로 형상화 한다.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언어’를 잊는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곧바로 ‘표현’이 ‘의미’에 닿지 못하거나, 너머서거나, 비껴간다는 것을 함의한다. 앞에서 언급한 그대로 결국 우리는 ‘의미의 세계’에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바꿔야하는 것이 있다면, ‘언어’의 ‘사용법’이 아니라 ‘체계’ 일반이 된다.
대웅전 뒷마당
거미줄에 걸린 잠자리에게
거미가 고운 수의를 한 벌 해 입혔다
허공에 새로 생긴 봉분 앞을 지날 때마다
바람이 경을 읽는다
-「풍경」전문
누가 바람을 덧없다 했나
이슬의 생을 짧다고 했나
바람은 불 때마다
천 개도 넘는 나뭇잎을 어루만지고
이슬은 아침마다
만 포기도 넘는 풀잎을 씻어주는데
-「나를 위로하다」전문
시인의 ‘시적 지향’에는 반드시 ‘개별적’이라는 전제가 붙어야 한다. 그 이유는 그의 ‘유일함과 특별함’을 강조하는 동시에 그의 창조적 성과의 ‘위상과 위의(威儀)’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기 위해서다. 이번에 접하게 된 권정우 시인의 여러 작품들은 한결같이 ‘어휘’를 ‘시어’로 되던지는, 본래 형태 속에서 다른 ‘울림’을 자아내는 ‘창조’의 경로를 밟고 있다. 인용시의 ‘고운 수의’가 그렇고, 다음 작품의 ‘어루만지고’와 ‘씻어주는데’가 그렇다. ‘의미의 결핍’ 만큼이나 ‘의미의 과잉’도 오늘의 ‘시’를 갉아먹고 있다(순전히 필자의 판단에 지나지 않지만). 이때 ‘위선의 플라시보 효과’란 다른 말로 ‘시어의 적절성과 핍진성(逼眞性)’이 아닐까? 시는 언어에서 탄생하지만 이때 창조되는 ‘사물(事物 : event and matter)’은 ‘언어’를 뛰어 넘는다. ‘시어’가 되고, 다시 한 번 우리는 ‘공감(cross-sense)’의 ‘황홀경(catharsis)’에 몸서리칠 수 있게 된다.
[원문출처 - <계간예술가>]
http://cafe.daum.net/kueenstler2010/MSNs/34?docid=4049903082&q=%B1%C7%C1%A4%BF%EC%20%BD%C3%C0%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