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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관 스님의 예술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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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장 대종사 연구 스크랩 시대의 高僧, 法頂 스님
진관 스님 추천 0 조회 189 13.05.28 13:2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법정스님 주요 연표

▲ 1932년 10월 8일 = 전남 해남군 문내면 선두리 출생

▲ 1954년 = 통영 미래사에서 효봉 선사를 은사로 입산 출가

▲ 1956년 7월 15일 = 효봉 선사를 은사로 사미계 수계

▲ 1959년 3월 15일 =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자운율사를 계사로 비구계 수계

▲ 1959년 4월 15일 = 해인사 전문강원에서 명봉화상을 강주로 대교과 졸업, 이후 지리산 쌍계사와 가야산 해인사, 조계산 송광사 등 선원에서 수선안거(修禪安居)

▲ 1960∼1961년 = '불교사전' 편찬 작업에 동참

▲ 1967년 동국역경원 편찬부장

▲ 1972년 첫 저서 '영혼의 모음' 출간

▲ 1973년 불교신문사 논설위원, 주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민주수호국민협의회와 유신 철폐 개헌 서명운동 참여

▲ 1975년 10월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충격, 송광사 불일암으로 돌아감

▲ 1976년 대표 저서인 '무소유' 출간

▲ 1984∼1987년 송광사 수련원 원장

▲ 1985년 경전공부 모임 법사

▲ 1987∼1990년 보조사상연구원 원장

▲ 1992년 강원도 산골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기고 홀로 수행정진

▲ 1993년 8월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 준비위원회 발족

▲ 1993년 10월 10일 프랑스 최초의 한국 사찰인 파리 길상사 개원

▲ 1994년 1월 1일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 창립

▲ 1994년 3월 26일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 창립 기념 첫 대중법문을 서울, 부산, 대구, 전주 등지에서 하며 지부 발족

▲ 1995년 김영한(법명 길상화)씨의 대원각 시주를 받아들여 송광사 말사 '대법사'로 조계종에 등록

▲ 1997년 1월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 이사장 취임

▲ 1997년 12월 14일 대법사를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바꾸고 창건 법회

▲ 1998년 2월 24일 명동성당 축석 100돌 기념 초청 강연

▲ 2003년 10월 '맑고 향기롭게' 창립 10주년 기념 강연, 파리 길상사 개원 10주년 기념 법문

▲ 2003년 12월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 회주에서 스스로 물러남

▲ 2010년 3월 11일 길상사에서 법랍 55세, 세수 78세로 입적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3/11/2010031101372.html?Dep0=chosunnews&Dep1=related&Dep2=related_all 입력 : 2010.03.11 15:41 / 수정 : 2010.03.11 15:46

? 법정 스님 입적

법정스님 "일체 장례의식 하지 말라"

(서울=연합뉴스) 조채희 기자 = 평생 '무소유'의 정신을 간직한 법정 스님은 입적하기 전 마지막 말도 무소유의 가르침이었다.

법정스님의 다비준비위원장을 맡은 진화스님(조계종 중앙종회의원)은 11일 오후 브리핑에서 법정스님은 입적하기 전날 밤 "모든 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내가 금생에 저지른 허물은 생사를 넘어 참회할 것이다.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해 사용해 달라. 이제 시간과 공간을 버려야겠다."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또 "법정스님은 머리맡에 남아 있던 책을 저서에서 약속한 대로 스님에게 신문을 배달한 사람에게 전해줄 것을 상좌에게 당부하셨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법정스님은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겠다.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주기를 간곡히 부탁한다."는 말도 남겼다고 전했다.

진화스님은 "법정스님은 평소에 번거롭고, 부질없으며, 많은 사람에게 수고만 끼치는 일체의 장례의식을 행하지 말고, 관과 수의를 따로 마련하지도 말며, 편리하고 이웃에 방해되지 않는 곳에서 지체 없이 평소의 승복을 입은 상태로 다비해주고, 사리를 찾으려고 하지 말며, 탑도 세우지 말라고 상좌들에게 당부해 오셨다"고 말했다.

실제로 법정스님은 산문집 '무소유'에 실은 1971년에 쓴 '미리 쓰는 유서'라는 글에서 "요즘은 중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한 술 더 떠 거창한 장례를 치르고 있는데, 그토록 번거롭고 부질없는 검은 의식이 만약 내 이름으로 행해진다면 나를 위로하기는커녕 몹시 화나게 할 것이다"라고 썼다.

또 "생명의 기능이 나가 버린 육신은 보기 흉하고 이웃에게 짐이 될 것이므로 조금도 지체할 것이 없이 없애 주었으면 고맙겠다. 그것은 내가 벗어버린 헌옷이니까. 물론 옮기기 편리하고 이웃에게 방해되지 않을 곳이라면 아무 데서나 다비해도 무방하다. 사리 같은 걸 남겨 이웃을 귀찮게 하는 일을 나는 절대로 절대로 하고 싶지 않다"는 말도 적었다.

조계종과 법정스님의 출가본사인 송광사, 스님이 회주로 있던 길상사 등은 이런 유지를 받들어 별도의 공식적인 장례위원회를 구성하지 않기로 했으며, 13일 오전 11시 송광사에서 다비식을 진행하는 것 이외에는 일체의 장례의식을 치르지 않기로 했다.

또 조화나 부의금도 접수하지 않기로 했으며 조문객을 위해 길상사와 송광사, 스님이 17년간 머물렀던 송광사 불일암 등 3곳에 간소한 분향소만 마련하기로 했다.

현재 길상사에 있는 스님의 법구가 언제 송광사로 운구 될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http://news.nate.com/view/20100311n17020?mid=n0410 연합뉴스 기사전송 chaehee@yna.co.kr 2010-03-11 16:31 최종수정 2010-03-11 16:59

'버리고 또 버렸던' 법정스님의 생애

11일 입적한 법정(法頂)스님은 탁월한 문장력을 바탕으로 한 산문집을 통해 일반 국민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은 ’스타’ 스님이다. 불자나 스님들 사이에서도 1993년 열반한 성철 스님에 이어 인지도가 높은 스님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평생 불교의 가르침을 지키는 출가수행자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았고, 산문집의 제목처럼 ’무소유’와 ’버리고 떠나기’를 끊임없이 보여줬다. 스님은 자신이 창건한 길상사의 회주를 한동안 맡았을 뿐, 그 흔한 사찰 주지 한 번 지내지 않았다.

법정스님은 1990년대 초반 “나는 아마 전생에도 출가수행자였을 것이다.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직관적인 인식만이 아니라 금생에 내가 익히면서 받아들이는 일들로 미루어 능히 짐작할 수 있다”고 한 적이 있다.

1932년 10월8일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목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법정 스님은 한 핏줄끼리 총부리를 겨눈 한국전쟁을 경험하면서 인간 존재에 대한 물음 앞에서 고민한다. 그는 대학 재학 중이던 1955년 마침내 입산 출가를 결심하고 싸락눈이 내리던 어느 날 집을 나선다.

고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오대산으로 가기 위해 밤차로 서울에 내린 스님은 눈이 많이 내려 길이 막히자 서울의 안국동 선학원에서 당대의 선승 효봉스님(1888-1966, 1962년 조계종 통합종단이 출범한 후 초대 종정)을 만나 대화한 후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깎는다.

“삭발하고 먹물 옷으로 갈아입고 나니 훨훨 날아갈 것 같았다.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나는 그길로 밖에 나가 종로통을 한 바퀴 돌았었다”

다음날 통영 미래사로 내려가 부목(負木.땔감을 담당하는 나무꾼)부터 시작해 행자 생활을 했다. 당시 환속하기 전의 고은 시인, 박완일 법사(전 조계종 전국신도회장) 등이 함께 공부했다.

법정스님은 이듬해 사미계를 받은 후 지리산 쌍계사에서 정진했다. 28세 되던 1959년 3월 양산 통도사에서 자운 율사를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고, 1959년 4월 해인사 전문강원에서 명봉스님을 강주로 대교과를 졸업했다.

1960년 봄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통도사에서 운허 스님과 함께 ’불교사전’ 편찬에 참여하다 4.19와 5.16을 겪은 스님은 1960년대 말 서울 봉은사 다래헌에서 운허 스님 등과 함께 동국역경원의 불교 경전 번역 작업에 참여했다.

이 시절 함석헌, 장준하, 김동길 등과 함께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결성과 유신 철폐운동에 참여했던 법정스님은 1975년 인혁당 사건으로 충격을 받은 후 반체제운동의 의미와 출가수행자로서의 자세를 고민하다 다시 걸망을 짊어진다.

출가 본사 송광사로 내려온 법정스님은 1975년 10월부터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을 짓고 홀로 살기 시작했다. 1976년 산문집 ’무소유’를 낸 후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지자 불일암 생활 17년째 되던 1992년 다시 출가하는 마음으로 불일암을 떠나 강원도 화전민이 살던 산골 오두막에서 지금까지 혼자 지내왔다.

스님은 건강이 나빠지면서 지난해 겨울은 제주도에서 보냈다가 건강상태가 악화하면서 삼성서울병원에 입원했지만, 의식을 또렷하게 유지하면서 “강원도 오두막에 가고 싶다”고 거듭 말했다는 것이 주변의 전언이다.

법정스님은 평소에는 강원도 산골에서 지냈지만 대중과의 소통도 계속했다. 특히 1996년 고급요정이던 성북동의 대원각을 시인 백석의 연인으로 유명했던 김영한 할머니(1999년 별세)로부터 아무 조건 없이 기부 받아 이듬해 12월 길상사로 탈바꿈시켜 창건한 후 회주로 주석하면서 1년에 여러 차례 정기 법문을 들려줬다.

법정스님은 2003년 12월에는 길상사 회주 자리도 내놓았다. 하지만 정기법문은 계속하면서 시대의 잘못은 날카롭게 꾸짖고, 세상살이의 번뇌를 호소하는 대중들을 위로했다.

산문인으로서 법정스님은 뛰어난 필력을 바탕으로 우리 출판계 역사에도 기록될 베스트셀러를 숱하게 남겼다.

스님은 해인사에 살 당시 팔만대장경이 있는 장경각을 가리켜 “빨래판같이 생긴 것이요?”라고 묻던 아주머니의 말을 듣고 아무리 뛰어난 지혜와 자비의 가르침이라도 알아볼 수 없는 글자로 남아있는 한 한낱 빨래판에 지나지 않으며, 부처의 가르침을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쉬운 말과 글로 옮겨 전할 방법을 고민했다.

또 “종교의 본질이 무엇인지 망각한 채 전통과 타성에 젖어 지극히 관념적이고 형식적이며 맹목적인 수도생활에 선뜻 용해되고 싶지 않았다”고 회고한 적도 있다.

스님의 이런 원력은 스님의 이름과 동의어처럼 불리는 산문집 ’무소유’의 모습으로 꽃을 피운다. ’무소유’는 1976년 4월 출간된 후 지금까지 34년간 약 180쇄를 찍은 우리 시대의 대표적 베스트셀러다.

법정스님은 다른 종교와도 벽을 허물었던 것으로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법정스님은 길상사 마당의 관음보살상을 독실한 천주교신자 조각가인 최종태 전 서울대교수에게 맡겨 화제를 모았고, 1997년 12월 길상사 개원법회에는 김수환 추기경이 방문했다. 법정스님은 이에 대한 화답으로 이듬해 명동성당에서 특별 강론을 하기도 했다.

법정스님은 이밖에 조계종단과 사회를 위한 활동도 활발히 했다. 법정스님은 대한불교 조계종 기관지인 불교신문 편집국장, 송광사 수련원장, 보조사상연구원장 등을 지냈고 1994년부터는 환경보호와 생명사랑을 실천하는 시민운동단체인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를 만들어 이끌어왔다. 연합뉴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3/11/2010031101365.html?Dep0=chosunnews&Dep1=related&Dep2=related_all 입력 : 2010.03.11 15:37

요정 대원각이 길상사가 된 사연

법정스님이 입적한 길상사는 본래 ‘밀실정치의 현장’ 요정 대원각이었다. 그러나 법정스님의 대표 산문집 ‘무소유’가 다리 역할을 해 이후 길상사가 됐다.

대원각 소유주였던 김영한(1916∼1999)씨는 16살 때 조선권번에서 궁중아악과 가무를 가르친 금하 하규일의 문하에 들어가 진향이라는 이름의 기생이 됐다. 월북시인 백석(1912∼1995)과 사랑에 빠져 백석으로부터 자야(子夜)라는 아명으로 불린 그는 한국전쟁 이후인 1953년 중앙대 영문과를 졸업해 ’백석, 내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내 사랑 백석’ 등의 책을 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가 지금의 길상사 자리를 사들여 운영하던 청암장이라는 한식당은 제3공화국 시절 대형 요정 대원각이 됐다.

▲ 예전 서울의 대표적 요정이었던 성북동 대원각. 현재는 승보종찰 송광사 서울분원 '길상사'/조선일보DB

김영한씨와 법정스님의 인연은 19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큰 감명을 받은 김씨는 1987년 미국에 체류할 당시 설법 차 로스앤젤레스에 들른 법정스님을 만나 대원각 7000여 평(당시 시가 1000억 원)을 시주하겠으니 절로 만들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법정스님은 줄곧 시주를 받을 수 없다고 사양하다가 1995년 마침내 청을 받아들여 법정스님의 출가본사인 송광사 말사로 조계종에 ‘대법사’를 등록한다. 이후 1997년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이름을 바꿔 12월14일 창건법회를 갖는다.

길상사 창건법회 날 김영한씨는 법정스님으로부터 염주 하나와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받았다. 당시 그는 수천 명의 대중 앞에서 “저는 죄 많은 여자입니다.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는 곳이었습니다. 저의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김씨는 세상을 떠나기 하루 전인 1999년 11월14일 목욕재계 후 절에 와서 참배하고 길상헌에서 마지막 밤을 보냈다. 유골은 49재 후 유언대로 길상헌 뒤쪽 언덕에 뿌려졌다. 길상사는 유골이 뿌려진 자리에 조그만 돌로 소박한 공덕비를 세우고 매년 음력 10월7일 기재를 지낸다. 길상사의 시민모임 ’맑고 향기롭게’는 ’맑고 향기롭게 길상화 장학금’을 만들어 매년 고교생들에게 학비를 지원하고 있다. 길상사는 현재 프랑스 파리에 분원을 두고 있고, 헝가리 원광사, 인도 천축선원, 호주 정혜사를 자매도량으로 삼고 있다.

법정스님은 길상사 창건 후 회주(법회를 이끄는 어른스님)를 맡아 정기법회에서 법문을 들려줬다. 2003년 12월 회주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도 법정스님은 길상사에서 열리는 대중법회에 참석해 법문을 해왔다. 이어 생의 마지막 시간도 길상사에서 보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3/11/2010031101398.html?Dep0=chosunnews&Dep1=related&Dep2=related_all 입력 : 2010.03.11 15:53

법정스님이 남긴 주요 어록

11일 입적한 법정스님은 ’무소유’, ’산에는 꽃이 피네’ 등 여러 권의 산문집과 법문을 통해 지친 사람들을 위로하고 깨달음을 전하는 주옥같은 말을 남겼다.

특히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라는 말은 스님이 설파하던 ’무소유’의 정신을 압축한다.

1997년 길상사 창건 당시 “길상사가 가난한 절이 되었으면 합니다.”로 시작하는 창건 법문도 이러한 무소유 정신과 맞물려 널리 회자됐다.

그런가 하면 말년인 지난 2008년 낸 산문집 ’아름다운 마무리’에서는 “아름다운 마무리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며 마지막 모습까지 귀감이 되기도 했다.

다음은 법정스님의 주요 어록.

▲ 우리는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마음을 쓰게 된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이는 것,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뜻이다.(‘무소유’ 중)

▲ 우리 곁에서 꽃이 피어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생명의 신비인가. 곱고 향기로운 우주가 문을 열고 있는 것이다. 잠잠하던 숲에서 새들이 맑은 목청으로 노래하는 것은 우리들 삶에 물기를 보태주는 가락이다.(‘산방한담’ 중)

▲ 빈 마음, 그것을 무심이라고 한다. 빈 마음이 곧 우리들의 본마음이다. 무엇인가 채워져 있으면 본마음이 아니다. 텅 비우고 있어야 거기 울림이 있다. 울림이 있어야 삶이 신선하고 활기 있는 것이다. (‘물소리 바람소리’ 중)

▲ 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영원한 것이 어디 있는가. 모두가 한때일 뿐, 그러나 그 한때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삶은 놀라운 신비요, 아름다움이다.(‘버리고 떠나기’ 중)

▲ 사람은 본질적으로 홀로일 수밖에 없는 존재다. 홀로 사는 사람들은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살려고 한다. 홀로 있다는 것은 물들지 않고 순진무구하고 자유롭고 전체적이고 부서지지 않음이다.(‘홀로 사는 즐거움’ 중)

▲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산에는 꽃이 피네’ 중)

▲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물으라. 자신의 속얼굴이 드러나 보일 때까지 묻고 묻고 물어야 한다. 건성으로 묻지 말고 목소리 속의 목소리로 귀속의 귀에 대고 간절하게 물어야 한다. 해답은 그 물음 속에 있다.(‘산에는 꽃이 피네’ 중)

▲ 내 소망은 단순하게 사는 일이다. 그리고 평범하게 사는 일이다. 느낌과 의지대로 자연스럽게 살고 싶다. 그 누구도, 내 삶을 대신해서 살아줄 수 없다. 나는 나답게 살고 싶다. (‘오두막 편지’ 중)

▲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전 존재를 기울여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면 이다음에는 더욱 많은 이웃들을 사랑할 수 있다. 다음 순간은 지금 이 순간에서 태어나기 때문이다. 지금이 바로 이때이지 시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봄여름가을겨울’ 중)

▲ 길상사가 가난한 절이 되었으면 합니다. 요즘은 어떤 절이나 교회를 물을 것 없이 신앙인의 분수를 망각한 채 호사스럽게 치장하고 흥청거리는 것이 이 시대의 유행처럼 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풍요 속에서는 사람이 병들기 쉽지만 맑은 가난은 우리에게 마음의 평화를 이루게 하고 올바른 정신을 지니게 합니다. 이 길상사가 가난한 절이면서 맑고 향기로운 도량이 되었으면 합니다. 불자들만이 아니라 누구나 부담없이 드나들면서 마음의 평안과 삶의 지혜를 나눌 수 있었으면 합니다.(1997년12월14일 길상사 창건 법문 중)

▲ 삶의 순간순간이 아름다운 마무리이며 새로운 시작이어야 한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지나간 모든 순간들과 기꺼이 작별하고 아직 오지 않은 순간들에 대해서는 미지 그대로 열어둔 채 지금 이 순간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낡은 생각, 낡은 습관을 미련 없이 떨쳐버리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마무리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아름다운 마무리’ 중)

▲ 행복할 때는 행복에 매달리지 말라. 불행할 때는 이를 피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받아들이라. 그러면서 자신의 삶을 순간순간 지켜보라. 맑은 정신으로 지켜보라. (‘아름다운 마무리’ 중)

▲ 모든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아야 한다. 모든 것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것도 되지 않아야 한다. 모든 것을 가지려면 어떤 것도 필요도 함 없이 그것을 가져야 한다. 버렸더라도 버렸다는 관념에서조차 벗어나라. 선한 일을 했다고 해서 그 일에 묶여있지 말라.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고 지나가듯 그렇게 지나가라. (‘일기일회’ 중) http://issue.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3/11/2010031101790.html 입력 : 2010.03.11 16:22 / 수정 : 2010.03.11 18:00

http://news.joins.com/article/421/4056421.html?mov_id=2010_0311_172626

산문집으로 되새기는 법정의 '무소유'

“우리는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마음을 쓰게 된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이는 것,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얽혀있다는 뜻이다”(‘무소유’ 중에서)

법정스님하면 떠오르는 단어 ‘무소유’. 법정스님이 1970년대 초반부터 쓴 글을 모아 1976년 펴낸 대표적인 산문집 ’무소유(범우사)’를 비롯해 수십 권의 책에서 한결같이 설파한 무소유의 정신은 무한경쟁과 탐욕의 시대에 우리가 지녀야 할 마음의 등불이다.

법정스님의 여러 산문집은 스님 특유의 담백하면서도 격조 있는 필치로 고된 일상에 지친 일반인을 위로했고, 불교의 가르침을 널리 알리는데도 크게 기여했다.

스님이 말한 ’무소유’는 불교의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즉 이 세상에 태어날 때 가지고 온 것도 없고 세상을 하직할 때 가져가는 것도 없다는 가르침에서 비롯됐다.

이런 청백가풍(淸白家風)의 무소유의 정신을 일상에서 실천하라고 권한 스님의 글은 종교를 불문하고 많은 사람에게 호응을 얻었다.

산문집 ‘무소유’에 수록된 1971년의 글 ‘무소유’에는 법정스님이 평생 수십 권의 책을 통해 반복해 강조했던 무소유의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당시 3년 째 난초 화분 둘을 애지중지 길렀다는 스님은 장마 후 쏟아지는 햇볕 아래 화분을 놓고 왔다는 생각에 허둥지둥 거처로 돌아간 일화를 소개하며 자신의 집착을 뉘우친다.

“나는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 난을 통해 무소유(無所有)의 의미 같은 걸 터득하게 됐다고나 할까. 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소유사(所有史)처럼 느껴진다. 보다 많은 자기네 몫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 소유욕에는 한정도 없고 휴일도 없다. 그저 하나라도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일념으로 출렁거리고 있다. 물건만으로는 성에 차질 않아 사람까지 소유하려 든다. 그 사람이 제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는 끔찍한 비극도 불사하면서. 제정신도 갖지 못한 처지에 남을 가지려 하는 것이다”

스님은 “나는 가난한 탁발승이오.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젖 한 깡통, 허름한 담요 여섯 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 이것뿐이요”라고 했던 마하트마 간디의 어록에서 크게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쓴다.

법정스님은 이에 대한 화답으로 이듬해 명동성당에서 특별 강론을 하기도 했다 1992년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한 번 출가하는 마음으로 강원도 화전민이 버리고 떠난 산골 오두막으로 들어간 스님은 1995년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에 이어 새천년을 앞둔 1999년 12월에 수상집 ’오두막 편지’를 내놓는다.

‘오두막 편지’에서 스님은 “현재 내가 몸담아 사는 산중 오두막은 여러 가지로 불편한 환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곳에서 단순하고 간소하게 내 식대로 살 수 있기 때문에 일곱 해째 기대고 있다. 어디를 가보아도 내 그릇과 분수로는 넘치는 것을 감당할 수 없어, 나는 이 오두막을 거처로 삼고 있다”고 썼다.

또 “‘소욕지족(少慾知足)’, 작은 것과 적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작은 것과 적은 것 속에 삶의 향기인 아름다움과 고마움이 깃들어 있다”고 가르치기도 했다.

▲ 1997년 12월 길상사 개원법회를 방문한 김수환 추기경과 인사를 나누는 모습

스님은 강원도 산골 생활 17년째가 되던 2008년 11월에는 길상사 소식지 ‘맑고 향기롭게’에 기고했던 수필을 모아 ‘아름다운 마무리’를 펴내 삶의 마지막에 선 노승의 마음을 담담하게 털어놓는다. 스님은 2007년 한차례 병으로 입원하면서 이미 많이 쇠약해진 상태였다.

“길상사를 드나들면서 나는 너무나 많은 것을 얻어간다. 그때마다 마음이 개운치 않고 아주 무겁다. 말로는 무소유를 떠벌리면서 얻어 가는 것이 너무 많아 부끄럽고 아주 부담스러웠다. 늙은 중이 욕심 사납게 주는 대로 꾸역꾸역 가지고 가는 꼴을 이만치서 바라보고 있으면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그러면서 스님은 “놓아두고 가기! 때가 되면, 삶의 종점인 섣달 그믐날이 되면, 누구나 자신이 지녔던 것을 모두 놓아두고 가게 마련이다. 우리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나그네이기 때문이다. 미리부터 이런 연습을 해두면 떠나는 길이 훨씬 홀가분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스님이 말하는 ‘아름다운 마무리’는 역시 “스스로 가난과 간소함을 선택해 소유의 비좁은 감옥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언제든 떠날 채비를 갖춘다. 그 어디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순례자나 여행자의 모습으로 산다. 우리 앞에 놓은 이 많은 우주의 선물도 그저 감사히 받아 쓸 뿐, 언제든 빈손으로 두고 떠날 수 있도록 준비한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낡은 생각, 낡은 습관을 미련 없이 떨쳐 버리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마무리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법정스님의 첫 법문집인 ‘일기일회(一期一會, 2009년 6월 출간)’에도 무소유의 마음이 잘 나타나있다. 스님은 2008년 5월24일 여름안거 결제를 맞아 했던 법문에서도 ’버리고 떠나기’를 강조했다.

“모든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아야한다. 모든 것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것도 되지 않아야한다. 모든 것을 가지려면 어떤 것도 필요로 함 없이 그것을 가져야한다. 버렸더라도 버렸다는 관념에서조차 벗어나라. 선한 일을 했다고 해서 그 일에 묶여 있지 말라.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고 지나가듯 그렇게 지나가라” 연합뉴스 http://book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3/11/2010031101337.html?b_main1 입력 : 2010.03.11 15:20

[사설] '無所有 스님'이 떠난 자리

법정(法頂) 스님이 걸어온 56년 불가(佛家)의 길은 비우고 비우고 또 비운 무소유(無所有)의 삶이었다. 스님은 떠나는 마지막 길목에 서서도 행여 '내 것'이 남을까 저어하며 두루 꼼꼼히 살폈다. 그래서 관(棺)과 수의를 따로 마련하지 말라 당부했다. "번거롭고 부질없으며 많은 사람에게 수고만 끼치는 장례 의식"도 하지 말라 했다.

이 시대 사람들에게 '비우고 살아가기'의 아름다움을 깨우쳐줬던 숱한 글들도 스님에겐 빚이었다.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生)으로 가져가지 않겠다. 내 이름으로 된 책들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법정 스님은 전란을 겪고 대학에 다니던 1954년 싸락눈 내리는 어느 날 집을 나선 그 순간부터 자유인이고자 했다. "휴전 후 포로 송환 때 남도 북도 마다하고 제3국을 선택해 한반도를 떠난 사람들의 심경"이었다. 서울에서 당대 선승 효봉 스님을 만난 뒤 그 자리에서 삭발하고 먹물 옷으로 갈아입고는 "훨훨 날아갈 것 같았다"고 했다.

스님은 그 길로 통영 미래사에 내려가 땔감 수발을 하는 부목(負木)에서부터 불가의 삶을 시작했다. 그 후 반세기 넘도록 스님은 사찰 주지 한 번 지내지 않았다. 아무 조건 없이 기부 받은 성북동 요정 대원각을 길상사로 탈바꿈해 창건하느라 한동안 회주를 맡았을 뿐이다.

법정 스님은 1970년대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가 3년 만에 다시 걸망을 짊어졌다. "민주화운동을 하며 박해를 받다 보니 증오심이 생기더라. 마음에 독(毒)을 품을 순 없어서 산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그러고는 '집착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려고 가진 것을 하루 한 가지씩 버리는 삶을 살기로 다짐했다.

지난 50년 산업화와 고도성장의 길을 내달려온 한국 사회는 너나없이 탐욕에 사로잡혀 돈과 물질을 좇는 사회였다. 이 시대에 법정 스님이 뭇사람들에게 이른 '무소유'는 분수를 알고 욕망을 다스리라며 내리치는 죽비 소리였다. 그것은 높고 어려운 불법(佛法)의 가르침을 뛰어넘는 부처의 마음 바로 그것이었다.

법정 스님은 1992년부터는 모든 일기와 메모, 사진까지 불태우고 강원도 산골 화전민 오두막을 빌려 시계도 라디오도 없는 삶을 살았다. 그랬기에 스님은 불자(佛子)들을 넘어 평범한 이들의 등불이 될 수 있었다.

법정 스님은 재작년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인생에서 무엇이 남느냐"고 스스로 물었다. "집? 예금? 명예? 아닙니다. 몸뚱이도 두고 갑니다. 죽고 난 후엔 덕(德)이 내 인생의 잔고(殘高)로 남도록 합시다." 스님이 비우고 버리고 나누던 길상사 마당에선 눈 속 매화 향(香)이 몸뚱이마저 버리고 떠나는 스님을 배웅하고 있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3/11/2010031102136.html 입력 : 2010.03.11 22:15 / 수정 : 2010.03.11 23:26

수행자가 가야 하는 길 보여주신 스님, 열반으로 가시는 발걸음 가벼우소서

[법정 스님 추도사] 소설가 정찬주

눈앞이 막막합니다. 무엇이 바빠 스님께서 좋아하시는 연둣빛 봄날을 마다하시고 가십니까. 영혼의 모음 같다던 뻐꾸기 소리를 더 듣지 않으시고 가십니까. 스님의 속가 외사촌 조카인 현장 스님께서 전화를 주셨습니다. 스님을 길상사로 모시고 있으니 상경한다고 말씀했습니다. 현장 스님도 목이 메고 저도 목이 멨습니다. 잠시 후 스님은 이승의 옷을 벗고 내생의 새 옷을 입으셨습니다.

스님.

찻물 올리고 향을 사르며 스님의 명복을 빕니다. 죽음은 생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생의 시작이라는 스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스님께서는 ‘온 몸으로 살고, 온 몸으로 죽어라’는 어느 중국 선사의 말씀을 참 좋아하셨습니다. 스님의 일생이 그러합니다.

스님은 초등학교 때 등대지기가 되겠다는 꿈도 꾸어 보고, 청년기에는 인간 실존에 대해서 괴로워합니다. 동족끼리 피 흘린 6ㆍ25전쟁은 스님을 더욱 고통스럽게 합니다. 세속은 스님이 살아야 하는 번지수가 아니었습니다. 스님은 출가하여 효봉 선사의 제자가 됩니다. 해인사 선방 시절에는 한 아주머니가 장경각의 고려대장경판을 ‘빨래판 같은 것’이라고 말하여 스님은 한글 역경의 중요성을 절감합니다. 이후 강원을 마치고 운허 스님을 도와 ‘불교사전’을 편찬합니다. 그 인연으로 서울에 올라와 봉은사 다래헌에서 사십니다. 현대문학에 ‘무소유’를 발표하시어 문명을 떨치시기도 하고, 장준하 함석헌 선생 등과 반독재투쟁에도 간여합니다. 그런데 인혁당 사건은 스님을 몇 달 동안 잠 못 이루게 합니다. 한 무리의 젊은이가 죄 없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만행을 보면서 증오심과 적개심을 품습니다. 그러면서도 수행자로서 깊이 자책합니다. 어떤 운동도 인격 형성의 길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무의미하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스님은 송광사로 내려가 불일암을 짓고 텅 빈 충만의 시절을 보냅니다. 그러나 불일암마저 번다해지자 강원도 산중 오두막으로 가 정진하시는 한편, ‘맑고 향기롭게 근본 도량’인 길상사를 창건하시어 가난하고 힘든 이들의 의지처가 되게 하였습니다.

스님.

저는 스님의 내면을 조금 보았습니다. 스님께서는 영화 ‘서편제’ 조조 프로를 보시면서 맑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스님께서는 소년기부터 감내할 수 없을 정도의 고독을 견디신 분입니다. 그러나 그 고독을 거름 삼아 깨달음의 꽃을 피우신 분입니다. 중학교 때 납부금을 내지 못하여 울면서 배를 타고 목포로 갔던 스님. 진도 쌍계사로 수학여행을 가서 절을 떠나기가 아쉬워 울었던 스님. 효봉 스님을 시봉할 때 고방 호롱불로 ‘주홍글씨’를 읽다가 야단맞고 유난히 좋아했던 책을 아궁이에 태워버렸던 스님.

사람들은 더러 스님을 수필 쓰는 문인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스님에게 글은 세상과 소통하는 수단일 뿐이라고 여깁니다. 세상 사람들은 스님께서 하루에 한두 시간 글 쓰고 나머지 모든 시간을 수행자로서 정진한다는 것을 모릅니다. 관념적이고 맹목적인 선(禪)을 거부하시고 선방 울타리를 벗어나 ‘내 손발이 상좌’라며 홀로 수행하신다는 것을 모릅니다. 저는 스님이야말로 한국의 수행자가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를 말없이 보여준 분이라고 믿습니다. 스님께서 보여주신 맑은 모습 속에 한국불교가 다시 태어나는 길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스님.

저는 스님의 부끄러운 제자입니다. 다만, 스님께서 원하시는 제자의 모습을 보여 스님의 가시는 발걸음이 가볍도록 발원하겠습니다. 그것이 스님을 떠나보내는 제자들의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스님께서 40대에 미리 써놓았던 유서 한 대목을 읽으며 기도하겠습니다. 스님께서는 내생에도 다시 한반도에 태어나 모국어를 더 사랑하고 출가 사문이 되어 못 다한 일들을 하고 싶다고 하십니다. 스님! 가시는 발걸음 부디 가벼우소서. 화엄경의 선재동자도 만나시고, 어린왕자가 사는 별나라에 가시어 원(願)을 이루소서. 한반도에 다시 오시어 못 다한 일들 이루소서. 정찬주 합장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1003/h2010031121543584330.htm 입력시간 : 2010/03/11 21:54:35

나 자신의 인간 가치를 결정짓는 것은 내가 얼마나 높은 사회적 지위나 명에 또는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나 자신의 영혼과 얼마나 일치되어 있는가이다.

- 홀로 사는 즐거움 中

우리 곁에서 꽃이 피어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생명의 신비인가.

곱고 향기로운 우주가 문을 열고 있는 것이다.

잠잠하던 숲에서 새들이 맑은 목청으로 노래하는 것은 우리들 삶에 물기를 보태주는 가락이다.

- 산방한담 中

행복은 결코 많고 큰 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작은 것을 가지고도 고마워하고 만족할 줄 안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여백과 공간의 아름다움은 단순함과 간소함에 있다.

- 홀로 사는 즐거움 中

가슴은 존재의 핵심이고 중심이다.

가슴 없이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다.

생명의 신비인 사람도, 다정한 눈빛도, 정겨운 음성도 가슴에서 싹이 튼다.

가슴은 이렇듯 생명의 중심이다.

- 오두막 편지에서 中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

- 산에서 꽃이 피네 中

버리고 비우는 일은 결코 소극적인 삶이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다.

버리고 비우지 않고는 새것이 들어설 수 없다.

공간이나 여백은 그저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과 여백이 본질과 실상을 떠받쳐주고 있다.

- 버리고 떠나기 中

사람은 본질적으로 홀로일 수밖에 없는 존재다.

홀로 사는 사람들은 진흙에 더렵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살려고 한다.

홀로 있다는 것은 물들지 않고 순진무구하고 자유롭고 전체적이고 부서지지 않음이다.

- 홀로 사는 즐거움 中

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영원한 것이 어디 있는가.

모두가 한때일 뿐.

그러나 그 한때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삶은 놀라운 신비요, 아름다움이다.

- 버리고 떠나기 中

내 소망은 단순하게 사는 일이다.

그리고 평범하게 사는 일이다.

느낌과 의지대로 자연스럽게 살고 싶다.

그 누구도, 내 삶을 대신해서 살아줄 수 없다.

나는 나답게 살고 싶다.

- 오두막 편지 中

빈 마음, 그것을 무심이라고 한다.

빈 마음이 곧 우리들의 본마음이다.

무엇인가 채워져 있으면 본마음이 아니다.

텅 비우고 있어야 거기 울림이 있다.

울림이 있어야 삶이 신선하고 활기 있는 것이다.

- 물소리 바람소리 中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물으라.

자신의 속 얼굴이 드러나 보일 때까지 묻고 묻고 물어야 한다.

건성으로 묻지 말고 목소리 속의 목소리로 귀 속의 귀에 대고 간절하게 물어야한다.

해답은 그 물음 속에 있다.

- 산에는 꽃이피네 中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전 존재를 기울여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면 이 다음에는 더욱 많은 이웃들을 사랑할 수 있다.

다음 순간은 지금 이 순간에서 태어나기 때문이다.

지금이 바로 이때이지 시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 봄여름가을겨울 中

“판권 가진 출판사들 동의·허락 받은 뒤 법정스님 글 인터넷서 누구나 보게 할 것”

상속인 ‘맑고 향기롭게’측 밝혀, 현실적으로 당장 절판은 어려워

법정 스님 입적법정 스님의 저서 전문이 인터넷에 무상 서비스되는 방안이 추진 중이다.

17일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는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서 법정 스님의 유언장 전문을 공개했다. 스님은 ‘유산에 대한 유언장’ ‘상좌들에게 보내는 유언장’ 두 가지를 남겼다. 스님은 유언장에서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으려 하니, 부디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달라”고 밝혔다.

법정 스님의 저서는 최근 서점에서 품귀 현상을 빚고 있다. ‘맑고 향기롭게’ 측은 “스님의 열반을 전후한 저서 품절 사태에 대해 독자 여러분께 미안하게 생각한다.”며 “스님의 유지를 존중해 스님의 책을 출판해온 모든 출판사에 더 이상 출판하지 말아줄 것을 정중히 부탁드린다.”고 요청했다. 아울러 “스님의 글을 언제든지 누구나 읽을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하도록 하겠다.”고 덧붙였다.

‘맑고 향기롭게’ 측은 스님의 책을 온라인상에서 무상 제공하는 방안을 강구 중이다. 그러나 이는 쉽게 풀릴 대목이 아니다. 출판권을 갖고 있는 개별 출판사의 동의, 혹은 허락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칫 저작권 침해 논란이 일 수 있다. ‘맑고 향기롭게’ 관계자는 “시간을 갖고 출판사들과 회합을 하기로 했다. 스님의 유지와 출판사의 입장을 고려해 협의토록 하겠다. 협의가 마무리되면 스님의 책을 누구나 인터넷에서 무상으로 읽을 수 있도록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스님의 유언이 공개됨에 따라 온·오프라인 서점 베스트셀러 목록을 휩쓸고 있는 스님의 저서가 어떻게 처리될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출판사들은 “기본적으로 스님의 뜻이 분명하다면 이에 따르겠지만, 절차상 시간이 필요하다”는 반응이다.

고세규 문학의 숲 대표는 “아직 공식 요청은 없었지만 스님의 뜻이 그렇다면 따를 계획”이라고 밝혔다. 김성구 샘터 대표도 “‘맑고 향기롭게’ 측과 협의해 절판하겠다.”고 밝혔다. 도의적으로 스님의 뜻을 어기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고석 도서출판 이레 대표는 “절판을 하더라도 ‘맑고 향기롭게’ 측과 정식으로 만나야 한다. 절차나 준비 과정에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현실적으로 당장 절판은 어려운 상황인 것이다. ‘맑고 향기롭게’ 측이 스님의 저작권을 승계한다고 해도 출판사에 따라 길게는 8~9년 남은 계약기간을 일방적으로 종료할 수 없기 때문이다. 김영철 변호사(KCL법무법인)는 “계약 내용은 출판사와 상속인(맑고 향기롭게)이 물려받게 된다. 이번 유언 공개는 계약해지의 뜻으로 보인다. 그러나 법적으로 출판사가 당장 절판을 해야 할 의무는 없다”고 말했다. http://news.joins.com/article/983/4065983.html?ctg=1700&cloc=home|list|list3 이은주 기자 julee@joongang.co.kr 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2010.03.18 03:01 입력 / 2010.03.18 03:01 수정

http://news20.busan.com/news/newsController.jsp?newsId=20100320000015

사진은 1981년 12월 17일 경남 합천 해인사 백련암에서 당시 조계종 제6대 종정이던 성철 스님(왼쪽)과 함께 자리한 법정 스님. 종정 추대식에도 참석하지 않은 채 백련암에서 수행하고 있던 성철 스님을 법정 스님이 찾아갔다. [장남원 사진전문위원 제공]

http://pic.joins.com/article/photo/article.asp?total_id=4070050&cloc=home|list|list2

▲ 본지 지난 20일자 A9면에 게재된‘ 법정 스님 제자들이 신문배달 소년을 찾고 있다’는 기사에 실린 삽화.‘ 1973년 영동대교 완공 전까지는 배 타고 한강을 건너가 봉은사에 배달했다’는 신문지국 증언에 기초한 것이나, 법정 스님이 지목한 소년은 이렇게 배달온 신문을 처소까지 가져다준 인물인 것으로 나타났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3/28/2010032801221.html?Dep1=news&Dep2=headline1&Dep3=h1_04 입력 : 2010.03.29 03:04 / 수정 : 2010.03.29 11:00

[핫이슈] ‘무소유’ 법정스님 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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