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 順 慶
1940년 출생. 동아일보 기자. 「월간 자동차 생활」·「카 마스터」·「오토」·「경정비」 편집이사 역임. 저서로는 「베스트 드라이브코스 101선」, 「아름다운 그곳 언제 가면 딱 좋을까」, 「음식기행 사계절」, 「한국의 음식명가 1300집」 등이 있다.
李淸 소설가
「名家」를 찾아 30년
金順慶(김순경·63)씨는 대부분의 시간을 길에서 살고 있다. 「여행 전문가」, 「여행 칼럼니스트」, 「음식문화 전문가」에다 「음식문화 칼럼니스트」라는 직업이 말해주듯 그는 글의 소재를 찾아 대한민국의 땅 덩어리를 발길 닿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구석구석 톺으면서 살고 있다.
원래 직업은 동아일보 기자였던 그는 1970년대 중반 정치적인 혼란기에 직장을 잃었다. 직장을 잃고 심한 신경쇠약 증세에 시달리고 있을 때 가깝게 지내던 선배 한 사람의 권유로 여행을 시작했다. 노이로제도 고칠 겸 소일거리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때만 해도 귀한 존재였던 자동차 한 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행운이었다. 이 자동차로 「한국 연구」의 長征에 오른 것이 1970년대 말부터였다.
처음에는 서울 근교와 강원도, 충청도 등 당일로 오갈 수 있는 코스를 골라 시도 때도 없이 누비고 다녔다. 그냥 지나쳐 다닌 것이 아니었다. 찾아간 곳의 풍물과 인심, 계절별 작물과 전통문화 등, 이른바 사람 사는 모습들을 세심하게 살피다 보니 저절로 그 일에 관심이 붙게 되었다. 신문사에서 쫓겨났으나 결국 그는 기자였고, 아직도 기자인 셈이다.
그로부터 30여 년, 그에게는 많은 별명이 붙었다. 「음식점 문턱을 가장 많이 밟은 사람」, 「음식 사진을 3000점 넘게 찍은 사람」, 「음식 이야기를 가장 오래 연재한 사람」, 「정년이 없는 사람」, 그리고 「취미를 전문직으로 일궈 낸 사람」 등이다. 신경쇠약 증세를 달래기 위해 소일거리로 시작한 여행이 그를 「여행 전문가」로 만들었고, 나아가 「음식문화 전문가」로 만든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의 마음속에 내재해 있던 기자적인 관심이 어떤 현상이건 그냥 스쳐 보내지 않도록 했기 때문이었다.
인터넷에 2800집 소개
1980년대 초, 한국에 본격적인 자동차산업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마이카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는 자동차 잡지 만드는 일에 투신했다. 그동안 다니며 보고 익힌 풍물들을 잡지에 소개하여 좋은 호응을 얻었다. 그의 여행은 김삿갓 시대의 고전적인 풍류 여행이 아니라 마이카 시대의 레저 여행이었다.
그의 손을 거쳐 탄생한 잡지만 다섯 종, 1980년대 초부터 1990년대 초까지 10여 년 동안 「월간 자동차 생활」, 「월간 카 마스터」, 「월간 오토」, 「월간 경정비(Car tech)」, 「정비와 경영」 등을 창간하는 데 편집이사로서 산파역을 맡았다.
그의 음식 이야기도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신문과 잡지, 社報 등에 여행에 관한 글을 쓰면서 겸하여 음식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독자들의 호응을 얻으면서 장기 연재물로 자리를 잡았다.
두산그룹의 사외보인 「백년 이웃」(현재 휴간)에 5년간 음식 이야기를 연재한 것을 비롯, 주간지 「한겨레 21」에도 5년간 연재했다. 한국일보에는 여행 칼럼을 5년 간 연재하기도 해서 일단 한 매체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 못 해도 5년이라는 장기간 연재하는 저력을 보여 주었다.
그러고도 『앞으로 5년은 더 쓸 것이 있다』는 것이 金씨의 장담이다.
金씨가 전국을 돌며 문턱을 밟은 음식점의 수는 자그마치 3000집을 넘는다. 30년간 1년에 평균 100집 이상 방문하여 음식의 맛을 보고 경영하는 사람들의 내력을 들으며 자료를 정리해 왔다는 계산이다. 이렇게 정리해 둔 전국의 음식점에 대한 정보는 두산그룹이 운영하는 인터넷 사이트(Soju.co.kr)에 올리고 있는데 그 수가 현재 2800집이나 된다.
그동안 음식 맛이 변했거나 문을 닫아 버려 자료에서 털어내 버린 음식점의 수도 300집을 넘는다. 올해 안에 3000집을 달성하는 것이 金씨의 당면한 목표다. 金씨가 추정하는 전국의 음식점은 줄잡아 60만 집. 평균 2000집에 한 집 꼴로 추려 내면 3000집이 되는 셈이다. 이 목표는 올해 안에 무난하게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직접 맛을 본 3000집의 음식점 중에서 가히 「名家」라 할 만한 집을 추려 내어 2000년에 「한국의 음식명가 1300집」을 출판했다. 같은 책의 2002년판을 간행했는데 이 방대한 책이 꾸준히 스테디 셀러로 자리를 잡고 있다.
그가 맛본 한국 음식의 세계, 그가 만나본 음식점 주인들의 삶과 애증, 그리고 음식을 바르게 먹는 법을 들어 보았다.
食생활에서 음식文化로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와 지금은 사회적 인식이나 음식점 경영자 스스로의 자의식면에서나 모두 많이 달라졌지요.
『1970년대 초부터 음식점 문턱을 넘나들기 시작했는데…. 그때는 주방에 들어가 음식 만드는 할머니에게 이야기를 좀 듣자고 하면 멀쩡한 남자가 별 이상한 꼴 다 보겠다는 듯이 경원시하고, 어색해하고, 계면쩍어해서 도무지 말을 붙이기가 어려웠어요. 요즘은 내가 찾아가면 그쪽에서 오히려 음식에 관한 이야기를 이것저것 물어 옵니다. 전에는 음식문화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식생활이라고 했어요. 음식문화라는 말이 교과서에 실린 것은 고작 2~3년 전부터입니다』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약 30여 년 동안 음식에 대한 인식의 변화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무엇입니까.
『전에는 음식을 살기 위해 먹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먹는 것 자체를 즐기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무지한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마구 먹여서 엄청난 재앙이 닥쳤습니다. 서울 강남의 초등학교 학생들 4명 중 1명이 비만이라는 사실은 국가적인 재앙이에요』
―지금도 그렇지만 1970년대부터 시내와 변두리 곳곳에 대형 갈비집이 들어서서 자욱한 연기 속에서 고기를 포식하는 이상한 음식문화가 생겼는데, 그 원인이 과거 굶주렸던 세대들이 좀 허리를 펴고 살게 되자 과거에 대한 심리적 보상 차원에서 배가 터지도록 고기를 먹는 것이라고들 해석하는데 金선생님도 그렇게 보십니까.
『왕년의 가난과 굶주림에 대한 심리적 보상 차원이라는 분석도 일리가 있기는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은 우리나라가 일제의 피탈과 전쟁의 참화 속에서 우선 생존을 위한 음식 섭취에 급급하다가 1970년대 이후 살림이 풍족해지니 미국의 식품장사들이 몰려 들어와 미국 애들에게는 잘 먹이지 않는 유해한 음식들을 우리 아이들에게 마구 먹인 탓이에요.
그 덕택에 좀 있는 집 애들이 먼저 재앙을 당했고, 남북한을 싸잡아 살펴보면 북한보다 남한이 먼저 「음식의 재앙」에 노출되었어요. 북한은 김정일을 비롯한 지배층 몇 사람들만 빼고는 비만이 없잖아요.
일본도 사정이 비슷해서 사회 전체가 그 재앙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는 중인데 우리는 아직 그 위험성을 모르고 있어요. 우리가 그렇게 키운 아이들이 오늘날 30, 40代가 되어 있는데 비만과 조기 당뇨, 대장암의 발생 빈도가 노인들보다 높습니다.
이른바 생활습관병이라고 불리는 청소년성인병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고요. 그 원인을 아는 기업인, 공무원과 학자들은 자기 애들에게는 더 이상 그런 패스트 푸드나 미국서 집단 사육한 쇠고기와 유전자 변형한 식품들을 먹이지 않습니다. 라면공장 사장이 자기 애들에게는 라면을 먹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전국 3000집의 음식점을 돌면서 수천 가지의 음식을 맛보고 이를 소개해 온 金씨는 왜 그런 고단한 일을 해 왔을까. 분명한 이유가 여기 있었다. 좋은 음식을 권장하고 나쁜 음식을 가리기 위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여행 안내의 일환으로 좋은 음식점을 소개하는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동기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문제의 근본으로 들어가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고 한다.
한국은 음식점 천국… 60만개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외국에 나가보면 우리나라만큼 음식점이 많은 나라도 드물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는 곳마다, 골목마다 음식점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어, 외국 사람들이 보기에는 한국인들은 집에서 식사를 하지 않고 모두 외식을 하며 사는가 보다 하고 느낄 것 같습니다. 전국에 60만 개의 음식점이 있다면 인구 비례로 따져 70명당 하나 꼴인데 이건 좀 많은 것 아닙니까.
『많은 편이지요. 김포공항에서 내려 서울 시내의 호텔에 도착하기까지 길거리가 음식점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인상을 줄 정도로 우리나라는 음식점 천국입니다. 서울에서 춘천까지 수려한 경관의 경춘가도는 음식점으로 연결되어 있고, 양평과 미사리를 비롯하여 부산, 울산, 광주, 대전 등 전국 주요 도시의 외곽지역과 강변, 해안지대가 모두 비슷한 풍경들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음식점이 우후죽순격으로 들어서는 현상이 유발할지도 모르는 각종 환경문제 등을 일단 제쳐 놓고 음식점 그 자체만 보아서는 많아서 나쁠 것은 없습니다. 먹는 것이 풍족하다는 것은 축복이거든요. 음식점의 숫자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규모가 작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업형 대형 음식점들도 많이 늘어나고 있지만 대부분의 골목 안 음식점들은 테이블 두어 개 놓고 아주머니 혼자서 음식 만들어 파는 영세한 업소들입니다』
―왜 이렇게 길거리가 음식점으로 뒤덮이는 것일까요.
『1950년대의 전쟁 후에는 갑자기 집안 살림과 자녀 교육의 무거운 짐을 떠맡게 된 부녀자들이 생활전선으로 뛰어들면서 손쉽게 개업할 수 있는 업종이 음식점밖에 없었어요. 전국 곳곳에서 오랜 전통을 가지고 우리 음식의 격을 높여 주고 있는 「할머니 음식점」들의 대부분이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1997년의 IMF 경제위기 때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어요. 구조조정으로 직장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새로운 직업을 찾을 때 가장 순쉬운 것이 역시 음식점 개업이었습니다. 집안에서 살림을 해 온 주부라면 한두 가지 음식은 자신 있게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이 음식점 개업을 촉진하는 또 다른 요인이었고요. 이처럼 필요하면 당장이라도 음식점을 개업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 주부들의 음식 만드는 솜씨가 뛰어나다는 것 또한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라이프 사이클 짧다
―축복은 축복인데, 그만큼 음식이 과잉생산되어 자원의 낭비를 초래하고, 음식점 쪽에서 볼 때도 경쟁이 치열하여 도산의 위험이 높은 부작용도 있을 것 아닙니까.
『우리가 1년간 먹다 버리는 음식만 가지고도 북한 동포들을 다 먹여 살릴 수 있는 양이라고 합니다. 당연히 음식 쓰레기 처리 문제가 국가적인 과제로 떠올랐습니다. 음식 쓰레기 문제를 해결하는 기업이 나온다면 미래의 가장 큰 재벌이 될 것입니다.
음식점끼리의 경쟁도 치열해서 음식점의 라이프 사이클이 다른 어느 업종보다 짧습니다. 개업한 지 한 달도 안 되어 문을 닫는 업소도 부지기수입니다. 음식점 허가기관인 일선 시·군의 위생과 담당자들을 만나 보면 한결같이 「음식점 개업과 폐업에 따르는 지역경제적인 손실이 너무 크다」고들 걱정하고 있습니다.
망한 음식점을 인수하여 개업하는 사람은 「망한 집 것은 재수 없다」 하여 기존의 시설을 몽땅 버리고 새것을 들이느라 평생 모은 퇴직금을 털어넣고는 단기간에 수지를 맞추지 못하면 문을 닫아 버리고, 또 다음 사람이 같은 전철을 밟아 실패를 되풀이하고… 사회적 낭비가 큽니다. 그러나 이런 치열한 경쟁 속에서 음식의 맛과 품질이 계속 상승 발전되어 온 것만은 사실입니다』
―음식점의 사이클이 그렇게 짧은데도 40년, 50년 계속하면서 代를 물리는 음식점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음식점의 연륜과 음식의 품질에는 상관관계가 있습니까.
『물론 있습니다. 나는 최소한 3년 이상 연륜을 쌓지 않은 음식점은 소개하지 않습니다. 방금 개업해 놓고 나에게 초청장을 보내거나 직접 찾아와 소개를 부탁하는 경우도 더러 있으나 절대로 응하지 않습니다. 음식에 대한 평가는 내가 하기 이전에 음식점을 찾는 고객들이 먼저 합니다』
음식에는 만든 사람의 혼이 깃들어 있다
―金선생님의 음식에 관한 글을 보면 대개 음식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음식점의 내력과 주인의 인품 및 삶의 역정에 대한 소개가 나옵니다. 음식 맛만 좋으면 그만이지 그 주인의 인품이나 삶의 역정이 그 집 음식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모든 匠人(장인)의 작품이 다 그러하듯이 음식에도 만든 사람의 영혼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 때문에 저는 음식점을 소개하기 전에 그 집 주인을 먼저 봅니다. 음식의 맛이 좋으냐, 내용이 충실하냐를 결정하는 것은 주인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주인 성품의 바탕이 착해야만 자신의 일에 성실하고 고객에게 진심으로 봉사하려는 정신이 우러나옵니다.
돈벌이 이전에 자기 음식에 대한 애착과 자부심을 가져야만 좋은 음식이 나옵니다. 겉으로는 번지르르하게 꾸민 친절로 감싸고 있으나 안으로는 천박한 장사꾼 정신만 지니고 있는 사람이 만들어 내는 음식은 맛과 내용에서 큰 차이가 나고, 이런 차이는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면 대번에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음식을 실제로 만드는 사람은 주인이 아니라 주방장인데요.
『물론 주방장의 역할도 중요합니다. 주인이 직접 주방장 역할을 하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음식점 주인의 마음가짐이 주방장의 손끝에 고스란히 반영됩니다』
―「한국의 음식명가 1300집」에 등장하는 음식점 주인들은 선생님의 까다로운 내적 심사기준을 통과한 匠人들이 분명한데 그들 중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너무 많아서 일일이 예를 들기가 어려울 정도인데… 철원에서 45년째 「철원막국수」집을 경영하는 손남이(74) 할머니가 있습니다. 이분의 가게는 철원 시내에서 제일 중심지에 있는데 「철원시에서 현찰이 제일 많은 사람」이라는 소문이 결코 헛것이 아닙니다. 초등학교도 못 나온 여인이 45년 동안 한 그릇에 3500원하는 막국수를 팔아서 그렇게 된 겁니다.
할머니는 요즘도 새벽 5시 반에 일어나서 불을 지피는 등 하루 장사에 필요한 준비를 해놓은 다음 가족이 먹을 아침밥을 준비합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나서 일꾼들 밥 먹이고, 그런 다음 국수 장사를 시작하여 밤 12시까지 일을 합니다. 부자가 거저 되는 것 절대로 아닙니다.
할머니가 얼마나 유명하냐 하면 인근에 있는 군부대의 군단장(3성 장군)이 「모자를 벗고 인사하는 사람은 할머니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군단장이 국수를 먹고 부엌에 가서 모자를 벗고 「잘 먹고 갑니다」 인사를 한다는 데서 나온 얘기지요. 이 할머니의 자기 음식에 대한 자부심과 자긍심, 그리고 맛과 품질을 위해 기울이는 노력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그런 할머니들과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기가 쉽지는 않았을 텐데요.
『자부심만큼이나 고집도 세고 좀처럼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 것이 그분들의 특징입니다. 전북 고창의 「조양식당」 주인 최계월(78) 할머니는 음식점 문을 세 번이나 닫았는데, 그때마다 군수가 찾아와 「우리 고장의 명물인데 문을 닫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사정하는 바람에 늙어서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두지도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할머니가 어찌나 완고한지 두 번을 찾아가도 마음을 열어 주지 않아요. 세 번째 가서는 방 안의 손님들이 다 돌아갈 때까지 툇마루에 걸터앉아 그 집 마당의 등나무와 석류를 감상하면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할머니가 일을 다 마치고 나가다가 저를 보고는 「이 양반 아직도 이러고 있네」 하길래, 「할머니 뵙고 가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고 말했어요. 할머니가 기가 차서 「그럼 들어오라」고 해요. 방에 들어가자 할머니는 「밥 먹었어?」 물어요. 「아직 못 먹었습니다」 했더니 직접 밥상을 차려 내놓은 후 「뭘 물어보려고 그려?」 하고 마음을 열어 주었습니다.
지금도 「조양관」에 가면 할머니는 방석 몇 개를 포개어 그 위에 저를 앉혀 놓고 직접 음식을 차리면서 여러 이야기를 들려 줍니다. 음식이 나오면 「이건 내 음식이고 저건 그놈들(주방장) 맛이니 저건 먹지 말고 이걸 먹어라」고 일일이 일러 줍니다. 자신의 음식에 대한 사랑이 자식에 대한 사랑과 다름이 없어요』
음식점과 食資材 販賣業의 차이
―전통 깊은 음식점 주인들 중에는 할머니들만 있습니까? 할아버지는 없습니까.
『왜요. 나주 곰탕의 원조인 「하얀집」의 주인 길한수(69)씨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음식점을 하는 할머니 옆에 앉아 19공탄을 갈며 심부름을 하기 시작한 것이 평생 직업이 됐습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마치 업보처럼 곰탕을 끓이며 살아왔어요. 곰탕은 소뼈를 핏물을 빼고 밤새 우려 내는데 소금은 3년을 묵혀 간수를 뺀 것을 사용합니다. 조미료는 사용하지 않고 물로 조절해 맛을 내야만 달고 시원한 국물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길한수씨는 「이거 나밖에는 못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 정성을 들여 국물을 우려 낼 젊은 사람이 없다는 뜻입니다. 자신밖에 할 사람이 없으니 집을 떠날 수도 없습니다. 곰탕 국물에 볼모 잡힌 셈이지요.
체인점을 내라는 사람들이 있으나 「한 사람밖에 내지 못하는 맛을 어떻게 여러 곳에다 가게를 내느냐」고 반문합니다. 조금 이름이 나면 여기저기에 간판을 내걸고 체인점을 내는 음식점의 음식 맛이 진짜일 수 없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간판장사는 도둑」이라는 겁니다』
金씨의 「한국의 음식명가 1300집」에는 「○○○○ 소머리국밥」과 같은 이름난 체인점은 찾아볼 수 없다. 金씨에 의하면 그런 체인점은 음식점이 아니라 「식자재 판매업」이다. 규격화한 자재를 공급하여 돈을 버는 업종이기 때문에 한 푼이라도 더 벌려면 질이 낮고 값이 싼 재료를 이용하려는 유혹을 떨쳐버리기 어렵다는 분석이다. 맥도날드처럼 외국에서 음식 자재를 컨테이너로 수입하여 배급하는 시스템 속에서 맛과 품질을 논하는 자체가 넌센스라는 것이다.
金씨가 음식점 名家의 첫째 요건으로 주인의 인품과 오랜 경력을 드는 까닭이 여기 있다. 그러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평생 일구어 놓은 손맛을 정성과 세월을 들여 대물림할 사람들이 흔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북한에서 피난 내려온 1세대들에 의해 유명해진 황해도·평안도·함경도 음식들은 1세대들이 죽고 나면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어요. 전문대학의 식품학과에서 이를 체계적으로 전수하고 가르쳐야 하는데 지금처럼 교수들이 영양가만 따지고 있어서는 실질적인 음식문화의 전수는 이루어질 수 없어요.
얼마 전 춘천의 「평양냉면」집 할머니가 92세로 작고했는데 조리법을 전수받은 며느리도 벌써 78세의 할머니라 「나도 이제 더 못 만들겠다」고 합니다. 며느리마저 손을 놓으면 그 유명한 꿩 육수의 맛이 사라지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춘천에 있는 대학의 관련학과 학생들이 육수 만드는 비법을 배우려고 찾아왔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어요』
―가끔 대학을 나온 아들 딸들이 부모의 음식점을 대물림하여 경영한다는 미담 같은 이야기들을 신문에서 본 기억이 나는데요.
『그건 대개 음식점에서 번 돈으로 아들 딸들을 대학에 보내어 공부를 시켜 놓으니 그 아들 딸들이 대학을 나오고 유학을 갔다 와서 취직을 합니다. 그러나 월급쟁이로 살아 보니 수입이 부모가 경영하는 음식점 수입에 견주어 형편없거든요. 그러니 때려치우고 부모의 음식점을 이어받자고 돌아오는 겁니다. 그 중에는 음식의 조리법을 전수받으려고 다부지게 노력하는 젊은이들도 가끔은 있지만 많은 경우 카운터에 앉아 돈이나 헤는 것이 고작이지요』
「元祖」 경쟁의 희극
―음식의 맛이 평생 한 가지 음식에 바쳐 온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손끝에서 우러난다는 사실 때문에 웃지 못할 희극들이 생겨 나고 있습니다. 이른바 元祖 경쟁이 그것입니다. 가까운 예로 서울에서는 청량리 홍릉의 갈비집들이 서로 「원조」 간판을 걸어 놓고 손님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있고, 원효로의 복집들도 여러 집의 원조가 있습니다. 이런 시비는 왜 일어나는 것일까요. 그리고 진짜 원조를 가릴 수는 없을까요.
『춘천의 닭갈비 골목에는 수많은 「원조 춘천 닭갈비」집이 있습니다. 내장산 관광단지 안에만 전주비빔밥집이 10여 곳에 이르렀는데 저마다 「원조」, 「진짜 원조」, 「참 원조」, 「원조 할머니」, 「원조 중의 원조」 등 「원조」 앞에 여러 가지 수식어를 붙이고 경쟁하는 바람에 「원조」라는 말의 진실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 때문에 보다 못한 정읍市에서 중재에 나서서 본래 지니고 있던 이름으로 돌아가도록 권유하고 있습니다.
어느 집이 진짜 원조냐, 어쩌다 찾아가는 손님들은 알기 어려우나 제 경우에는 아주 쉬운 일입니다. 주인을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금방 드러나니까요. 바탕은 속이지 못합니다』
―우리는 흔히 음식의 옛맛을 그리워합니다. 사람의 입맛도 변하지만 음식 자체의 맛도 변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평양냉면과 함흥냉면은 피난 내려온 1세대들에 의해 훌륭하게 옛맛을 재현했다고 믿어 왔습니다만, 최근 북한 왕래가 잦아지면서 평양의 「옥류관」에서 본바닥 평양냉면을 먹을 기회도 많아지고 있어요. 서울을 비롯한 남한의 평양냉면과 평양 대동강변에서 먹는 평양냉면 중 어느 것이 더 옛맛을 지니고 있을까요.
『대표적인 예로 을지로 5가의 「우래옥」은 월남 1세대들이 만든 냉면집으로 평양냉면의 고유한 전통 위에 남한의 풍부한 재료를 활용하여 격조 있는 음식으로 발전시킨 것입니다. 이북 출신의 수많은 원로들이 「우래옥」에 모여 옛 고향의 정취를 맛보면서 잃어버린 세월을 어느 정도 보상 받고 있습니다.
굳이 비교하자면 남쪽에 있는 평양냉면이 북쪽 대동강변의 평양냉면보다 더 평양냉면답다고 하겠습니다. 실제로 근래에 평양을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옥류관」의 냉면에 큰 기대를 가지고 갔으나 맛을 보고는 실망했다는 사람들이 많아요. 특히 이북 출신의 원로들이 그렇습니다. 그분들은 평양에서 맛본 냉면에 대한 실망감을 씻어 내기 위해 을지로의 냉면집으로 가서 남쪽의 평양냉면을 먹고 나서야 「바로 이 맛」이라고 확인을 합니다. 북한의 냉면이 왜 변질되었느냐, 이유는 간단해요.
북한의 음식은 匠人의 작품이 아니라 黨의 음식이기 때문이에요. 金正日이 냉면에 쇠고기, 돼지고기, 닭고기를 다 집어넣으라고 하면 그대로 할 수밖에요. 고유한 맛이 이어질 수 없게 돼 있습니다』
6·25로 음식 격변
―같은 음식이라도 시대와 장소에 따라 변하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변합니다. 우선 재료가 변합니다. 우리 음식의 변화 요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밥의 재료인 쌀이 변했다는 것입니다. 쌀의 생산이 질 위주에서 量産 위주로 변했기 때문에 밥맛이 떨어졌어요. 요즘 밥맛이 예전만 못하다는 것은 단순히 입맛이 달라진 탓만이 아니라 재료인 쌀의 질이 낮아졌기 때문이에요.
애들이 밥을 멀리하고 패스트 푸드에 기울어지는 결정적인 이유 중의 하나가 밥맛이 떨어졌다는 점입니다. 계절에 상관없이 전천후로 온갖 야채가 쏟아져 나오는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본래 맛을 잃어버리는 손실도 간과할 수 없어요. 예를 들면 김치도 예전의 매콤하고 진한 맛을 찾을 수 없어졌습니다.
6·25 이전의 동해안 지방은 먹을 것이 별로 없는 동네였습니다. 전쟁이 나면서 평안도, 함경도의 피란민들이 몰려들면서 음식문화에 획기적인 발전이 이루어졌지요. 대구, 부산, 울산, 포항, 진해와 마산까지도 피란민이 내려와서 북한 지방의 음식은 물론이고 서울의 궁중음식까지 뒤섞여 8도의 음식이 경상도에 전해졌습니다.
부산에 가면 서울에서는 찾기 어려운 고유한 맛의 서울 깍두기가 살아 있고, 원산, 평양, 개성 등 북한의 음식들이 부산 고유의 음식과 섞여 있습니다. 부산의 경우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전국 모든 지역의 음식문화가 6·25라는 민족의 격변기를 맞아 뒤섞이면서 커다란 변화와 발전의 계기를 맞았던 것입니다.
경상도 내륙지방은 비교적 변화가 적었던 것으로 알고 있으나 풍기, 안동 등지에도 평안도 음식이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러한 현상은 전국적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풍기 고을에서 가장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음식점은 「서부냉면」이라는 평양냉면집이고, 영주의 「함흥냉면」도 40년의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천에서 유명한 냉면, 불고기집도 피란민이 개척한 집입니다』
질박한 강원도, 감춰진 경상도, 푸짐한 전라도 음식
―지역에 따라서 음식의 맛과 종류가 다르다는 것은 누구나 느낄 수 있습니다. 각 지방 음식의 특징을 어떻게 보십니까.
『강원도부터 얘기할까요? 강원도는 산간벽지가 많은 풍토 때문에 음식도 단순, 조악하면서 식물성 단백질과 섬유질이 풍부한 음식들이 많습니다. 막국수, 감자전, 산채, 동해안의 해산물 등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결핍되기 쉬운 것들을 풍부하게 함유하고 있는 음식들입니다. 마치 강원도의 때 묻지 않은 산천이 도시인들에게 생명의 활력을 불어넣고 있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강원도 사람들의 기질과 성품 또한 음식과 산천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경상도 역시 강원도처럼 음식이 대체로 조악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경상도는 영주, 의성, 예천, 상주, 안동, 대구 등 경상 내륙 지방과 밀양, 김해, 남해 등 남쪽의 하천과 바다를 끼고 있는 비옥한 지방으로 나뉩니다. 두 지방의 지리적 환경이 다른 만큼 음식문화의 성격도 달라요.
내륙지방은 보릿고개를 심하게 겪은 지방입니다. 가뭄이 들면 보리밥 한 끼도 제대로 얻어먹기 힘든 땅이었어요. 빈부 차도 심했지요. 서민들은 가난을 이겨 내기 위해 강인한 정신을 지녔고, 학구열이 높았습니다.
한편으로 문화 유씨, 안동 권씨 등 양반 세도가를 낳아 그런 집안의 대문 안에서는 가려진 독특한 음식문화가 형성되기도 했고요. 안동의 헛제사밥은 전주 비빔밥보다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음식인데 다만 잘 알려지지 않아 상품화가 안 되었을 뿐입니다. 콩잎 장아찌처럼 다른 지방에 없는 독특한 음식도 많아요.
반면에 낙동강을 따라 남쪽의 해안가로 내려가면 화려한 음식문화가 꽃을 피웁니다. 1년 내내 쌀밥을 먹는 지역으로 각종 떡과 탕, 포, 구이를 비롯하여 민물회 등 기호식품이 발달해 있습니다. 전국에서 초고추장을 가장 맛있게 만드는 곳도 이 지역입니다』
―호남지방은 국내에서 가장 음식문화가 발달한 지방으로 알려져 있는데 실상은 어떻습니까.
『사실 그대롭니다. 호남은 남북이 모두 드넓은 평야지대를 끼고 있는 축복받은 땅입니다. 북쪽의 김제, 만경 일대는 어렴시초가 풍부하여 굶는 이가 없다는 지방입니다. 산세도 고르고 하천이 많으며 바다까지 끼고 있어 다양한 음식 재료가 생산되는데다 갈무리 음식이 발달하니 상차림이 다채로워질 수밖에요. 남쪽의 해남, 강진, 영암 등지도 중앙으로 올라오는 곡물의 집산지이면서도 중앙과의 거리가 멀어 토호들이 나름대로 화려한 음식문화를 즐기며 살았던 흔적이 많습니다. 암행어사 출도가 가장 빈번했던 곳이지요. 연회음식, 잔치음식과 보신음식이 발달했고, 찬이 많은 한정식은 이 지방의 특징을 대변해 줍니다.
특히 전주는 변산반도, 김제 등 서쪽의 평야지대와 동쪽 산간지역의 중간에 위치하여 평야지대 및 해안지대 음식과 산간지역 음식이 만나는 집산지의 역할을 하면서 풍부한 음식문화가 생겨났습니다. 그런 면에서 경상도의 진주도 마찬가지 지리적 환경을 지니고 있었으나 임란 때 초토화되면서 맥이 끊겼습니다』
―전주 얘기를 조금 더 하고 지나가지요. 비빔밥 얘기인데 같은 전주 비빔밥이라도 왜 서울에서 먹는 것하고 전주에서 먹는 맛이 차이가 나는지 모르겠어요. 콩나물국밥도 그렇고.
『미리 만들어 둔 재료를 쓰느냐, 항상 새로 만든 신선한 재료를 쓰느냐에 따라 음식의 맛은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예를 들어 파 한 가지라도 음식을 만들 때 직접 썰어 넣는 것과 하루 전 또는 몇 시간 전부터 썰어 놓은 것을 집어 넣는 것과는 차이가 나지요. 서울에서 비빔밥이나 콩나물국밥을 먹기 위해 일부러 전주를 찾아가는 이유는 바로 그 싱싱하고 시원한 맛을 즐기기 위함입니다』
―충청도의 대표적인 음식은 무엇입니까.
『청국장, 묵 등 토속적인 음식이 골고루 발달돼 있고, 갈무리 음식도 풍부한 편입니다. 대체로 큰 특징은 없으나 궁핍하지 않게 살아온 지역입니다. 충청도는 해상교역이 발달한 지역이어서 예부터 전라도에서 안면도 등지를 거쳐 서울의 마포로 이어지는 교역의 중심에 놓여 있었습니다. 서울 양반들 부엌 살림을 뒷받침한다고 할 정도로 풍부한 음식 재료가 생산되거나 교역된 지역입니다. 수수하면서도 먹거리가 많고, 특히 젓갈, 건어물 같은 갈무리 음식이 발달해 있습니다』
비슷하면서도 집마다 맛이 다른 한국 음식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기호지방은 지리적, 정치적인 특징대로 음식문화도 좀 복잡하겠지요.
『사실입니다. 기호지방의 음식문화는 여러 복합적인 여건의 소산입니다. 고려 때부터 외국의 사신들이 오고 가면서 외국 음식문화가 유입되었고, 국내에서도 나라 전체의 음식 재료와 조리법이 모여들어 복합적인 음식문화의 꽃을 피운 곳입니다. 한편으로 서울 특유의 궁중음식과 양반문화가 거꾸로 지방으로 확산되기도 했고요. 서울의 전통적인 음식은 주로 궁중음식에서 유래한 것들인데 구절판, 신선로, 불고기, 만두, 전골, 죽, 조림, 국 등 맛깔스럽고 사치스러운 음식들이 많습니다. 그와 함께 서민들이 즐겨 먹는 설렁탕, 해장국도 발달해 왔고요.
경기도 역시 개성을 중심으로 한반도의 중심이다 보니 서울의 영향을 받아 떡과 전, 식혜와 수정과 등 주로 잔치음식이 발달했습니다. 특히 개성을 중심으로 아주 손이 많이 가는 잔치음식이 발달해 있어요』
―열거해 놓고 보니 제법 다양한 것 같기는 합니다만 사실은 땅 덩이가 좁아서 전국 어디를 가나 비슷한 음식을 먹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것 또한 우리 음식문화의 특징이자 자랑입니다. 다양하면서도 일관성이 있는 음식문화가 발달해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재료와 조리법의 기본이 비슷하기 때문인데 우리 음식은 찌고, 끓이고, 삶거나 지지고 볶는 방법이 비슷합니다. 재료면에서도 된장, 간장, 고추장 등 음식의 기본이 비슷하니 전국 어디를 가나 생소하지 않은 메뉴를 만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처럼 단순해 보이면서도 음식점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맛을 즐길 수 있는 까닭은 된장, 고추장 맛이 집마다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가정의 상차림을 보아도 그래요. 집집마다 밥, 국, 찌개에 김치와 장아찌가 오르는 상차림은 비슷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게 공장에서 생산된 것이 아니라 가정에서 주부들이 직접 만든 음식이라는 것이 자랑입니다.
「장이 대문 밖을 나가면 장맛이 뒤집어진다」는 속담이 있듯이 집마다 독특한 된장맛을 지니고 있고, 사람의 얼굴이 다른 만큼이나 다양한 김치 맛을 지니고 있는 것이 우리 음식입니다. 요즘은 전기밥솥이나 압력솥 때문에 상당히 규격화되었으면서도 집마다 밥맛이 다른 것은 먹을 때마다 직접 만들기 때문이고 물을 조절하고 시간을 재는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우리 음식의 특징이 규격화하지 않은 독창성과 현장완성식 조리법에 있다고 칩시다. 그러나 이것은 가정에서의 이야기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동일한 맛의 음식을 대접해야 하는 음식점에서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을까요. 맛의 일관성이 있어야 하고, 상품으로서의 표준화가 이루어져야 하는 등 독창성과 현장성에 배치되는 요건이 요구되는 곳이 음식점 아니겠습니까.
『그 두 가지 상반되는 요구를 모두 총족시키는 것이 바로 음식 장인들의 솜씨와 서비스정신입니다. 제가 음식점을 찾아다니며 주인의 품성과 삶을 먼저 들여다보는 까닭이 거기 있습니다』
朴正熙 단골집은 잘 망하지 않는다
―지방에 가 보면 유명인사들이 다녀 간 음식점 또는 단골집이었다는 표시로 그 유명인사의 사진을 내걸거나 신문기사를 확대하여 걸어 놓은 집들이 자주 눈에 띕니다. 요즘은 각 방송국의 무슨 프로그램에 나왔다는 플래카드를 펄럭이는 음식점도 늘어나서 식상한 느낌을 주기는 합니다만 유명인사들의 단골집은 음식맛이 좋아서 유명인사가 단골로 드나든 것일까요, 아니면 유명인사가 자주 찾았기 때문에 공연히 유명해진 것입니까.
『유명인사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사들이 역대 대통령들 아닙니까. 朴正熙, 全斗煥, 盧泰愚, 金泳三 등 역대 대통령이 다녀갔다는 표시로 사진을 걸어 놓은 음식점들이 많습니다. 물론 지방 행정의 수반들이 그 지방에서 가장 음식맛이 좋은 집을 골라서 모셨을 테니 솜씨 좋은 명가들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유명인사들의 단골집들에서 발견되는 한 가지 특징이 있어요. 朴正熙 대통령이 자주 다니던 음식점 중에서는 문을 닫는 집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朴대통령이 미식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고유한 한국 음식을 제대로 찾아다녔다는 증거라고 봅니다.
음식의 종류를 보면 한정식집 몇 개를 제외하면 주로 탕집과 민속, 토속음식집들인데 이들 음식점들이 모두 오랜 세월 명성을 유지하며 사업을 잘하고 있으니 朴대통령의 음식점 찾는 안목을 높이 평가하게 되는 겁니다.
朴대통령이 포천에서 부군단장을 할 때 자주 다녔던 한정식집이 있는데, 대통령이 된 뒤에도 자녀들과 함께 일부러 찾아오기도 했다고 합니다. 남해고속도로 공사 현장을 방문했을 때 현장 기술자들을 데리고 가서 함께 식사를 했던 장국밥집에도 나중에 운전기사와 단둘이 다시 찾았다고 해요. 2군 부사령관 재임 때 자주 찾았던 대구의 추탕전문 「상주집」에도 최고회의 의장 시절과 대통령 재임 때 다시 찾았지요.
한번은 강릉 경포대에서 운전기사와 단둘이 포장마차 횟집에서 회를 먹고는 주인에게 「고향이 어디냐」고 묻고는 「부산」이라고 대답하자 「횟집을 제대로 내려면 얼마나 드느냐」고 물었습니다. 「한 130만원 든다」고 하자 그 돈을 주고 횟집을 차리게 했습니다. 그렇게 차린 집이 지금 경포대에서 제일 큰 횟집이 되어 있습니다.
朴대통령이 다녔던 음식집 10여 곳을 다녀봤는데 저마다 대통령과의 독특한 일화를 지니고 있어요. 전주의 비빔밥 집 「삼백집」의 욕쟁이 할머니는 어느 날 새벽 대통령 朴正熙를 닮은 사람이 찾아오자 대뜸 「넌 이놈아, 어쩌면 생긴 것이 朴正熙를 빼닮았느냐. 朴正熙는 그래도 나라 발전시키느라 큰일이나 했지, 너는 이놈아 비슷한 상판을 하고도 이른 새벽에 해장국이나 찾으러 다니니 별볼일이 없는 놈이구나. 그래도 얼굴이 그 양반 닮았으니 달걀이나 하나 더 먹어라」고 했답니다. 달걀 하나를 더 얻어먹은 대통령과 그 집 욕쟁이 주인 할머니가 친해진 것은 물론입니다』
훌륭한 주방장보다 성실한 주인이 있는 집이 좋은 음식점
―음식점을 소개하기 위해서는 우선 좋은 음식점과 그렇지 못한 음식점을 가려내는 안목이 필요하고, 그 이전에 정보와 그것을 판별하는 기준이 있을 것입니다. 선생님이 높이 평가하는 음식점은 어떤 집들입니까.
『앞에서 말씀 드린 것처럼 훌륭한 주방장보다 성실한 주인이 있는 집을 높이 평가합니다. 음식에도 혼이 들어 있어야 하고, 혼은 주인의 장인정신, 서비스정신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음식이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신념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므로 아무거나 넣어서 돈이나 벌어 보자고 하는 천박한 상인정신과는 구별됩니다.
3000집 넘게 드나들면서 거의 주인들과 손을 잡고 살아온 내력과 음식 만들기의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인간적으로 친해진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길바닥에서 세월을 보낸 것 같지만 무형의 자산이 쌓인 것이지요』
―음식점을 소개하는 기사를 쓰다 보면 한쪽으로 치우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런 유혹이 아주 많습니다. 많은 음식 전문가들이 중도에 활동을 포기한 이유도 공정성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었어요. 저는 처음부터 명확한 기준을 세우고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선전을 목적으로 저를 초청하는 음식점에는 절대로 찾아가지 않는다는 것, 그러나 소개할 가치가 있는 음식점은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찾아가서 주인을 만나고 만다는 원칙입니다.
제 글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시비를 걸거나 내용을 의심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이런 원칙을 지켜 왔기 때문입니다. 자칫하면 장삿속에 놀아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처음부터 원칙을 세웠고, 지금까지 흔들림이 없었어요』
―하루에 여러 집을 방문하여 취재할 경우도 있을 텐데, 많이 먹는다는 것은 고통이 아닙니까.
『하루에 다섯 끼를 먹을 때도 있어요. 그러나 내장이 적응이 되어 다섯 끼 먹는 것은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정작 고통스러운 것은 조미료로 맛을 낸 나쁜 음식을 만날 때입니다. 그런 음식을 먹으면 당장 설사를 합니다.
횟집에 가면 수족관에 물고기들이 살아서 움직이고 있어 그것을 잡아서 회를 뜨니 싱싱한 횟감이라고들 생각하기 쉬우나 착각이에요. 수족관에 있는 고기들은 살아 있으나 죽은 놈과 다름없는 상태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런 놈으로 회를 뜨면 영락없이 설사를 해요』
―음식을 먹으면서 맛을 생각하고 내용을 생각하면 제대로 맛을 즐기기 어렵겠습니다.
『그게 제 불행입니다. 전국의 수많은 名家 음식들을 골고루 맛보았으나 제대로 즐긴 것은 아니니까요. 그러나 제대로 된 음식을 발견하는 즐거움도 미식가의 즐거움에 못지않아요』
『나는 잡식가』
―선생님은 미식가입니까.
『천만에요. 저는 잡식가입니다』
―요즘 쓰고 계시는 칼럼을 읽어 보니 「바른 음식 먹기」가 주된 관심사이던데, 좋은 음식이란 무엇이고 바르게 먹는다는 것은 또 어떻게 한다는 것입니까.
『조상들이 오랜 세월 정성 들여 만들어 먹던 지혜를 잘 살리는 것이 첩경입니다. 먹는 것과 사는 것은 동일한 것이기 때문에 먹는 것이 크게 왜곡된 세상은 병들게 마련이거든요. 조제된 식품, 상품화로 멍든 식품, 속임수 식품, 이런 것들이 만병의 근원이므로 저의 일련의 작업은 이런 것들을 가려내고 진짜 음식을 소개함으로써 음식의 순수성을 지키는 보루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음식의 맛을 볼 뿐만 아니라 사진을 찍기 위해 무거운 카메라를 짊어지고 다니시던데 이런 작업에 관심이 있는 젊은 사람과 함께 다니면 좀 수월할 것 아닙니까.
『음식점 대물림할 사람이 귀한 것처럼 이 일도 대물림할 젊은 사람이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간혹 뜻을 둔 사람이 있어 함께 취재를 다녀보면 한 달도 안 되어 도망치고 말아요. 매주 수요일에 출발하여 지방으로 내려가 음식점을 취재하고 주말이면 돌아와 저는 원고도 쓰고 마무리작업을 하느라 바쁜데 젊은 녀석은 화요일까지 퍼질러 자고 있다가 수요일에 「떠나자」고 하면 「피곤해서 이번 주일에는 쉬겠다」고 합니다. 데리고 다녀도 길에서 내가 젊은 놈의 시중을 들어야 할 판이니 혼자 다니는 게 속이 편해요』
―사전 정보가 전혀 없는 지방에서 좋은 음식점을 가리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음식점 앞에 자동차와 신발이 많은 곳이 일단 좋은 음식점이라고 보면 됩니다. 대중의 평판이란 거저 얻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러나 평판이 진짜인가 상업적인 속임수인가 하는 것은 주인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 보아야 합니다』
金씨는 나이보다 젊어 보였고 단단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와이셔츠의 목둘레가 10년 전 그대로』라고 했다. 비만의 재앙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고, 그러다 보니 병원에 간 기억이 아득하다고 했다. 혈당치와 혈압도 정상이어서 성인병의 염려도 없었다. 金씨는 자신의 건강이 「바른 음식 먹기」와 직접 관련이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고, 이 확신을 사회적으로 전파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전국의 음식점을 대상으로 직접 맛을 보고 주인을 면담하여 가려 뽑는 작업으로 탄생시킨 「한국의 음식명가 1300집」에 이어 앞으로 목표로 하는 명가 2000집이 완성될 경우 현대 한국의 음식문화는 일단 자료적으로 정리될 예정이다.
정부 기관이나 음식업 단체에서 한 일도 아니고 한 개인의 발품으로 이룬 작업이라는 데에 그 의미가 깊다고 하겠다. 먼 옛날 김정호가 혼자 발품으로 대동여지도를 만든 것도 이와 비슷한 작업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