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 빌립보서 3장 7-9절.
제목 : 유에서 무으로.
우리들이 저번주에 살펴보고 은혜받았던 베드로와는 정반대의 인물이 오늘 우리들이 살펴보고 은혜받을 바울입니다. 한가지부터 열까지 모두가 정반대적인 인물이 바울입니다. 저번에 저는 베드로를 무식과 무대보의 대명사의 인물으로 소개했는데 반해, 바울은 엘리트 중의 최고의 엘리트인 사람입니다.
베드로의 직업은 그 당시 가장 천하다고 여기는 어부였으며, 아무 것도 배우지도 깨닫지도 못한 채, 그냥 하루하루를 고기를 잡아 사는 것이 그의 낙이었습니다. 고기가 많이 잡히면 굉장히 기분이 업되고 신나는 반면, 고기를 잡지 못하는 날이면 세상의 근심 걱정을 모두 안고 사는 사람처럼 모든 것을 자포자기할 정도로 그날의 고기를 잡은 숫자에 따라 기분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자였습니다. 베드로에게는 오로지 바다에 나가서 고기를 많이 잡는 것만이 그의 행복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도 주님으로부터 제자로 부름을 받았을 때에는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를 정도로 즉흥적인 면도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성령을 받기 직전까지는 자기의 모든 것을 그대로 가진채로 주님을 따랐기에 별다른 이적이나 기적들이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자기의 성질과 기질대로 하려고 하는 부분과, 그로 인하여 시행착오가 복음서 곳곳에서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2장에 성령강림 이후의 베드로의 삶은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깨로 감이라’처럼 주님이 이 땅에서 이루신 사역들을 그대로 하여 많은 무리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주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의 역할을 다한 사람이 베드로였는데, 베드로 역시 성령 받고 난 뒤의 삶이 성령 받기 전의 삶과는 완전히 달랐던 것을 성경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오늘 우리들이 살펴볼 바울은 그야말로 완벽하며 완전한 자였습니다. 어느 한 구석을 보아도 부족한 것이 한 군데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먼저 그는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였습니다. 그당시 로마 시민권 하나만 있어도 잡아가지도 못할뿐더러 체포는 더더욱 못할 정도로 대단한 지위와도 같은 것이었는데, 바울을 낳때부터 로마 시민권자였습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어느 누구도 어찌할 수 없었던 자였습니다. 또한 그는 당시 최고의 학문을 모두 마스터했을 뿐 아니라, 할례를 받았으며, 이스라엘 족속이요, 율법으로도 완전한 자라고 자기가 공인할 정도로 완벽한 자였습니다. 한마디로 베드로와는 상대가 안 될 정도로 높은 지위와 권력을 가진 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사도행전 전반부에 보면 복음을 전하던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데 앞장 섰으며, 어디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있으면 공회의 허락을 받아 그들을 잡아 옥에 가두는 일에 앞장섰던 그런 자였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서도 다메섹에 예수의 도를 따르는 자들이 모여 있다는 소문을 듣고 공문을 가지고 그들을 잡아 죽이려고 다메섹에 가는 도중이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음성으로 바울에게 나타나시어 ‘왜 나를 핍박하느냐?’는 한마디에 자기의 모든 것을 뉘우치는데 그치지 않고, 그들을 잡아 죽이는데에 앞장섰던 그가 반대로 그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바뀐 계기가 성령 받고 뉘우친 결과였습니다.
바울이 보기에 율법으로 보면 예수를 믿는 자들은 율법에 위배되고 종교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자들이었기에 스데반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잡는데 앞장섰던 그가, 이때껏 주님을 핍박한 적이 없었는데도 핍박하였다는 그 한마디에 자기의 모든 것이 잘못되었음을 뉘우치고 180도로 그의 인생이 바뀐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자기가 하는 모든 것이 옳다고 그것을 계속 따랐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에 빗대어보면 자기가 지금 하는 모든 것이 잘못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최절정인 사람인 비로 저였습니다. 내가 생각하고 행동하려는 모든 것이 옳다고 계속 고집하면서 살다가, 어느날 괴물이라는 한마디에 저는 바뀌어졌으며, 오늘날 우리 가정이 화목해져가고 있으며, 내가 요양원에서도 인정받고 오늘도 다니고 있는 것은 성령님께서 괴물이라는 한마디에 저의 모든 것은 죽고 다시 새로운 인생을 살았기에 오늘의 내가 있고, 가정이 있는 것인줄 믿습니다.
그렇게 완벽하였다고 모든것을 가진 바울도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은 마치 배설물로 여긴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들이 저번주에 살펴본 베드로가 이런 말을 했다면 좀 이해가 된다고 하지만, 바울이 이런 고백을 하기에는 무척 어려운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주님을 믿고 따르다 보니까,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모든 것은 마치 쉽게 없어질 안개와도 같으며, 이 땅에서만 유효하다는 알았기에 바울의 입에서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라는 고백이 나온 것입니다.
우리들은 바울에 비하면 비교되지도 못할 정도로 초라한 자들이 아닙니까? 하지만 우리들은 시시때대로 주님을 위해서 우리의 모든 것을 바리고 따르다고 고백을 하고 있지만, 어느 순간순간에 나의 욕심과 아집이 나를 사로잡아 고백을 무너뜨릴수도 있으며, 감빡 잊어버릴 때, 아니면 나의 욕심에 이끌려 내 생각과 뜻대로 나갈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들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처럼 나는 주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한 순간부터 나는 죽은 존재라는 것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마음가짐만 가진다면 우리들은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나에게 있는 모든 것을 베설물로 여기고 그리스도를 나에게 있어 가장 고상한 것으로 날마다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언제까지나 주님이 나의 전부이며, 니에게 있는 모든 것을 배설물에 불과하다는 고백으로 하루하루를 주님과 함께 승리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