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無題)
김성동
천지를 삼킬 듯 눈은 내리고 개울물은 꽝꽝 얼어붙었다
배는 고프고 목은 타는데 눈보라는 또 휘몰아친다
나는 왜 또 이 산속으로 왔나 물통은 또 어디 있나
도끼로 짱짱 얼음장 깨면 퍼들껑 멧새 한 마리
천지를 삼킬 듯 눈은 내리는데 나한테는 반야(般若)가 없다
없는 반야가 올 리 없으니 번뇌(煩惱)를 나눌 동무도 없다
산속으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 같은 것은 더러워 버리는 것이라고
평안도 시인은 말했지만 내겐 버릴 세상도 없다
한번도 정식으로 살아보지 못한 세상이 그립다 사람들이 보고 싶다
배고픈 것보다 무서운 건 외로움이고 외로움보다 더 무서운 건 그리움이다
나는 또 하늘을 본다 눈이 내린다
* 시작 메모: 강원도 진부 오대산 자락 토굴에 머물 때 써보았던 것으로, 2002년 10월 31일자 <한국일보>의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에 실렸던 바, 그때에 편집자가 빠뜨린 부분을 채워넣은 것임.
- 출처: 『태양을 향한 편지』(계간 『시평』 제13호, 2003년 가을호)
첫댓글 배고픔보다 더 무서운 외로움....외로운 첩첩산중 이반된 외로움...
외로운 첩첩 산중의 외로움 보다 더 무서운 외로움은없겠지요,고맙습니다,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