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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석오(石吾) 이동녕(李東寧) 선생(先生)
개천 4326[1869]년 충남(忠南) 목천군(木川郡)[지금 천안군(天安郡)]에서 나셨다. 36세(歲)때부터 왜놈의 독한 손에 나라 운수가 기울어짐을 보고 분하게 일어나서 여러 동지들과 함께 구국운동을 힘껏 열으셨다. 그러나 개천 4362[1905]년 곧 을사(乙巳)해에 이 나라의 매국노(賣國奴)와 왜놈의 손에 이른바 보호조약(保護條約)이 이루어져가서 나라의 운명이 슬프게도 결정되었다.
선생은 광복운동의 멀고․큰 포부를 실현함에는 나라안에서 점점 어려워져 감을 깨닫고 이상설․정순만(鄭淳萬)씨들과 상해․아령의 여러 곳을 거쳐서 북간도 용정촌에 서전의숙(瑞甸義塾)을 차리시고 우선 우리 청소년의 교육에 힘을 다하시었다.
개천 4364[1907]년에 이상설․이 준(李儁)씨들이 화란(和蘭) 만국평화회의에서 밀사(密使)로 가게 되매 선생은 고국에 돌아오시어 안창호(安昌浩)․이회영(李會榮)․이동휘(李東輝)․양기탁(梁起鐸)씨들과 더불어 신생회(新生會)를 조직하고 나라의
안․밖으로 왜놈을 치기에 힘쓰시었다.
3년 뒤에 다시 이석영(李石榮)․이회영씨들과 함께 가족을 데리고 서간도로 가시어 우리의 나라 밖에 처음 있는 신흥학교(新興學校)를 새로 세우시고 피끓는 청년들에게 군사교육을 시켜서 우리 독립군의 줄거리가 되게 하시었다.
개천 4370[1913]년에 남만으로 옮겨서 3년 동안 모든 고난을 겪으시면서 각지에서 모여든 청년동지들을 데리고 힘껏 활동하셨으나 그때의 정세가 한 지방의 운동만으로는 기대하는 목적을 이루지 못할 것을 깨달은 선생은 여러 동지와 협의하신 결과 지도할만한 힘을 가진 동지들이 각기 지역을 나누니 맡기로 하고 이시영(李始榮)씨는 봉천(奉天)으로 이회영씨는 나라안으로, 선생은 해삼위(海蔘威)로 가시었다.
거기서 이상설씨와 같이 6년 동안 글자 그대로 주야분투(晝夜奮鬪)하셨고 또 이상설․이동휘씨들과 권업회(勸業會)를 새로 만드시어 우리 독립운동의 사업기관으로 하셨다. 그리고 대종교에 들어가시어 지교로 오르시고 조국의 본정신을 믿으시며 청년의 지도와 동지들의 수련(修練)함에 힘쓰셨다. 개천 4376[1919]년에 삼일운동이 일어나자 나라안․밖의 각지에서 우리 독립 투사(鬪士)들이 상해로 모여들 때, 선생도 거기로 가시어 여러 동지들과 함께 임시정부를 세우시고 임시의정원의장(臨時議政院議長)이 되셨으며 그 해 가을에 임시정부를 다시 만드매 내무총장이 되시어 4년 동안 복무하셨고 그 뒤에 총리가 되시어 1년동안 지내셨다.
개천 4384[1927]년에 국무위원에 뽑히시어 주석을 겸하시고 7년 동안 줄 곧 맡으시며 또 여러 동지와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시고 분투 노력하시어 우리 독립운동의 정통을 삼으시며 그 당의 이사장이 되시었다.
개천 4390[1933]년부터 3년 동안은 어떤 사정으로 말미암아 임시정부의 책임을 벗으시고 휴양하시던 중, 우리 독립운동계에 이상한 파문(波紋)이 일어나서 그 파문이 임시정부의 본체에까지 미치게 되매, 늙은 동지들과 다시 일어서서 국무위원에 뽑히시었다.
개천 4394[1937]년에 왜놈의 중국침략이 시작되어 상해․남경․광동․다른 요지들이 연이어 함락되매 선생은 우리 임시정부 및 요인들과 함께 중국 각지를 구울면서 악전고투하시다가 개천 4397[1940]년 3월 13일에 급성폐렴(急性肺炎)으로 돌아가시니 향년이 72세였다.
임시정부에서 국장을 거행하고 유해는 그곳에 매장되었다가 해방과 함께 조국에 돌아와서 봉안되시었다. 유족으로는 아드님 의식(義植)씨가 있다.
헌사(獻詞) 이동녕 선생 유방을 추모하여
허약해진 이조(李朝)의 병든 말엽(末葉)이 기우는 저녁해에 시들어 갈 제. 일제침략의 폭풍(暴風)이 휘불어 와서. 아- 임들의 몸부등치며 싸운 보람이. 나라를 팔고 사는 을사야합(乙巳野合)에 원한(怨恨)이 깊어.
△ 앞날의 기쁨을 기약하는 장한 그 뜻이. 뒷머리 끌리는 애수(哀愁)를 뿌리치고. 눈 덮인 북간도로 가시던 굳은 맹세여. 서전학숙(瑞典學塾)을 열어 젊은 전사들 지도하고. 만국회의밀사의 이 준 선생과 손을 중외로. 또다시 신민회의 기꽂고 악전고투!
△ 그러나 국내공기(國內空氣)에 가슴이 답답. 망명의 자유가 바람처럼 그리워서. 서간도 신흥학교로 독립군을 창건하고. 남만에 3년 유세(遊說) 해삼위에 6년 분투. 마침내 단군신통의 유구한 민족신앙. 대종교에 귀의하여 생사를 초월입명!
△ 어느덧 해외지사들의 성운(星雲)이 모이어서. 임시정부의 성좌(星座)를 이룬 상해시대에. 의장․총리․주석을 10여 년 역임하고. 또다시 독립당의 정통을 세운 공업이여.
△ 또 기억 새로운 중일전쟁 총불에. 상해가 타고 남경이 빠지고 몰리는 판에. 망명의 천지조차 좁아지던 유전(流轉)이여. 아-하늘이 6년의 수만 빌리었다면. 72년간 싸워서 원한 조국의 독립. 그 자유의 날을 정녕 보실 걸. 전화(戰火)의 이토(異土)에서 가진 객혼(客魂)이여. 해방 뒤의 무언개선(無言凱旋)으로 명목(暝目)하소서.
(나)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先生)
우리 나라 사학(史學)의 태두(泰斗) 단재 신채호 선생은 멀리 이조의 명유(名儒) 신숙주 선생의 피를 이어 개천 4337[1880]년에 충청도 청주산동(淸州山東)에서 나시다.
어려서부터 성질이 불과 같고 뛰어나게 총명하시어 시골에서 한문을 배우매 이에 따를 사람이 없었다. 20세 전에 벌써 이름이 높이 나시어 서울로 올라오시자 성균박사(成均博士)의 이름을 얻으셨다.
장지연(張志淵)․유 근(柳瑾)씨들이 주장하는 황성신문사(皇城新聞社)에 들어가시어
논설을 맡아서 경세(警世)의 종을 울리셨고 그 뒤에 양기탁씨가 주장하던 대한매일신보사(大韓每日新報社)에 들어가시어 역시 논설위원으로서 기우는 국운을 바로 잡으시려 애쓰셨다.
이때 안창호․이동녕․노백린(盧伯麟)씨 등 우국지사와 더불어 열렬히 나랏일을 의논하셨고 26세 때부터 안창호․이동녕씨들과 신민회(新民會)를 만드시어 활동한 일도 있다. 30세 때에 안창호․이 갑(李甲)씨들과 해삼위로 가시어 신성모(申性模)․안희제(安熙濟) 등과도 사귀셨다. 35세 때에 북경으로 가시어 천고(天鼓)라는 순한문 잡지를 발행하시어 우리 민족성을 드러냄과 우리 국체(國體)의 밝힘에 공로가 계시었다. 여기서 삼일운동을 만나시어 여러 동지들과 눈부신 활동을 하시었고 한편으로 중국신문 중화일보(中華日報)의 논설을 맡으시어 낙양(洛陽)의 종이값을 올리셨으니 선생의 논설이 날 때마다 거리에서 파는 중화일보의 부수는 뛰어 곱이 되었었다.
이 중화일보에 논설을 쓰실 때 한 일화(逸話)가 있다. 곧 어느 날 어떤 문구(文句) 끝에 갈 지(之)자 둘을 붙이셨는데 그것은 갈 지(지)자를 두 자 붙이나 한 자 붙이나 무방하므로 편집원이 한자만 붙이고 한 자는 떼었더니 선생은 그 뒤에 집필을 거절해 버리셨다.
신문사에서는 당황하여 선생께 몇 번 사과하였으나 선생은 듣지 않고 끝끝내 논설을 써주지 않으셨다. 이와 같이 선생은 자기의 쓰신 글에 남이 붓을 대는 것을 크게 싫어하셨다.
그 뒤에 정치운동을 떠나시어 몇 해동안 사학을 오로지 연구하시다가 다시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東方無政府主義者聯盟)에 가입하시어 활동하는데 왜놈에게 잡히시어 10년형을 받으시고 여순감옥(旅順監獄)에서 세상을 떠나셨으니 때는 개천 4393[19 36]년 병자(丙子) 음 2월 21일이요, 향년이 57세이시었다.
헌사 신채호 선생 유방을 추모하여
수려(秀麗)한 자연이 너무도 화애(和靄)롭고 순진(純眞)한 인성이 너무도 선량(善良)하다고 청풍명월(淸風明月) 은어(隱語)로 비웃는 자 누구냐. 남석교(南石橋)로 감도는 맑은 무심천(無心川)엔들. 나라를 애통하는 룡이 어찌 없으며. 송풍(松風)이 은은한 푸른 와우산(臥牛山)엔들. 겨레를 수호하는 범이 어찌 없으랴. 아-학문의 뿌리깊은 청주땅에서. 일편단심 불태우던 단재의 소년시대여.
△ 학위는 이미 약관으로 성균박사. 그 강철(鋼鐵)의 사상도 꿈은 오로지 하나. 그 열혈(熱血)의 문장도 노래는 오로지 하나. 붓을 한번 잡으면 우국(憂國)의 종이 되고. 사학을 논하면 춘추의 거울 밝히다.
△ 그러나 삼면의 바닷가 무서운 함정인 양. 삼천리가 감옥된 망국의 어둔 현실엔. 한낱 문화의 등잔조차 켤 수가 없어. 시베리아 해삼위로 망명의 전전(轉戰) 끝에 혁명지(革命誌)의「천고」를 북경에 울리고. 중화신문계에 논진(論陳)을 당당히 펴서. 우리 민족정기를 세계에 선양(宣揚)하매. 저 신라의 최고운이 당나라 문장되어. 황소(黃巢) 죄수에 추상같이 필주(筆誅) 내리던. 그 높은 명성같이 지가(紙價) 올리다.
△ 아-자유독립을 목숨 바쳐…. 인제야 실현된 조선혁명선언이. 적옥(敵獄)에서 이슬된 원혼을 위로하는. 스스로의 헌사되어 꽃다움을 반기소서.
(다)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 선생(先生)
개천 4335[1878]년 6월 23일에 경상도 안동군 천전동(川前洞)에서 나시었다. 본 이름은 긍식(肯植)인데 만주로 가신 뒤에 동삼이라 하셨다.
한학자로서 개천 4364[1907]년에 유인식(柳寅植)․김후병(金厚秉)씨들과 고향에서 협동중학교(協東中學校)를 새로 세우시어 많은 일꾼을 기르셨고 경술국치(庚戌國恥)가 이르매 분연히 서울로 올라오시어 남형우(南亨祐)씨 등과 구국운동을 하시다가 나라 안에서는 활동이 곤란함을 깨달으시고 이듬해 곧 개천 4368[1911]년에 만주로 가시었다.
봉천성 통화현에서 이시영․이동녕씨들을 만나시어 우리 동포의 실업과 교육을 위하여 노력하셨고 개천 4369[1912]년에 유인식씨와 같이 통화현에 중어학원(中語學院)을 차리시어 한․중 두 겨레의 친선을 꾀하셨으며 이듬해에 여 준(呂準)․이 탁(李 沰)씨들과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하시어 민생․교육․군사의 실제운동에 심혈(心血)을
기울이셨다.
그 해 섣달에 이 탁․김창무(金昌武)씨들과 청년동지를 많이 모아서 둔병제로 훈련코저 유하현경(柳河縣境) 깊은 숲 속에 백서농장(白西農場)을 차리시고 3년 동안 경영하셨으며, 개천 4372[1915]년에 이상룡(李相龍)․김형식(金衡植)씨 등과 한족회(韓族會)를 조직하시어 지방자치제로 동포를 훈련하시었다.
개천 4376[1919]년에 삼일운동이 일어나자 나라 안․밖 각지에서 소리를 마주치어 상해에 대한민족대표대회가 모이매 선생은 남만동포의 대표로서 출석하셨고, 그 해 6월에는 이상룡․이 탁씨 등과 더불어 유하현 삼원포(三源浦)에서 재만 한족 대표회의를 열어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조직하시고 선생은 참모총장으로 활약하셨으며 이듬해에 군정서를 길림성 화전현(樺甸縣)으로 옮겼다가 선생과 이청천(李靑天)씨는 그 소속군대를 거느리시고 안도현(安圖縣)에서 홍범도군(洪範圖軍)과 합세하여 아령으로 옮겨서 활동하셨다.
개천 4379[1922]년에는 연해주(沿海州)와 흑룡강성의 여러 곳을 둘러보시어 우리 광복운동의 책원지(策源地)를 구하시다가 그 해 7월에 상해에서 대한국민대표대회를 열게 되므로 선생은 또한 남만대표로서 참석하시어 의장으로 여섯 달을 지내셨다.
이듬해에 봉천성 흥경현(興京縣)에서 오동진(吳東振)․현정경(玄正卿)씨들과 통의부(統義府)를 조직하시어 총장으로 뽑히셨고, 개천 4381[1924]년에 다시 정의부(正義府)가 조직되니 위원장에 이상룡, 군사위원에 이청천, 행정위원에 선생이 각기 취임하셨다.
개천 4386[1929]년 11월에 한만합작(韓滿合作)의 국제운동으로 길림독군서에 교섭하시어 두 편 대표 각 60명으로 대표회의를 여는데 독군희흡(督軍熙洽)은 총재가 되고 선생은 의장이 되시었다. 그 회의에서 한인의용군 20만을 중국군대에 편입할 것과 한인교육은 그 자치회에서 실행하되 중국의 원조를 받을 것으로 결정하였고 또 상설기관을 길림에 두기로 하였다.
이듬해 9월에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선생은 할 수 없이 길림을 떠나시게 되고 희흡장군에게 신원증을 얻으셨다. 동지 이원일(李源一)씨와 함께 북만으로 향하시어 10월초에 하얼빈 정인호(鄭寅浩)의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시고 이튿날에 왜놈의 경찰에게 잡히셨다. 선생은 구금 중에서 끝끝내 항쟁(抗爭)하셨으며, 신의주를 거쳐 서울로 옮긴 뒤에 10년형을 받으시고 8년 동안 옥고를 겪으시다가 개천 4394[1937]년 3월 3일에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다. 유해는 곧 한용운(韓龍雲)씨 집으로 옮기고 동지장을 거행하는데 3일에 화장식을 행하여 남은 재를 한강(漢江) 위에 흩었으니 그 유언을 좇은 것이다. 선생의 유족은 아드님 정묵(定黙)군과 용묵(容黙)군이 있다.
[이 약전은 이원혁씨의 원고를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조금 수정한 곳이 있음을 미안하게 생각한다.]
헌사 김동삼 선생 유방을 추모하여
영남에 이름난 유림의 학자로서 신문명의 봉화를 고향에 올린 선구(先驅). 빼앗긴 국호를 찾으려고 싸우다. 손수 세운 학교의 애착(愛着)도 끊고. 압록강에 눈물뿌린 망명의 슬픈 결심.
△ 나라 없는 백성의 이역애수(異域哀愁)를 같이 울면서. 알아야하는 배움의 힘을 북돋우고. 싸워야 이기는 총칼을 마련케 하고 일해야 사는 도끼와 괭이 들려서. 곰이 뒤끓는 어둔 삼림(森林)을 털어 헤치고. 백서농장의 꽃을 곱게 피운 땀으로. 한중친선을 맺은 아름다운 열매여.
△ 서로군정서의 독립군을 이끌고. 흑룡강 넘어서 연해주로 장구한 위풍(威風). 통의부 정의부의 통솔력(統率力). 재만 한인대표로 상해에 울린 지사의 영명(令名). 아- 20만의 의용군도 꿈만은 아니었건만…
△ 경오사변(庚午事變)으로 정든 제2의 고향천지도 일제의 철제(鐵蹄)에 짓밟힌 동양비극(東洋悲劇)에 하얼빈으로 피하여 동포집에 숨어 있다가. 적경의 고랑으로 두 손의 자유를 잃고. 가던 때 한숨보다 가슴 더아픈. 욕스러운 피눈물에 압록강도 물들었으리.
△ 쓰라린 철창 10년은 어둔 날이 길어서. 그 하나만의 광복의 꿈까지도. 8개 성상의 독환으로 한 남기고 사라지매. 때는 어이 봄이 와서 3월 3진이런고. 아- 이 나라의 옛집을 못잊어서 찾아온. 강남의 제비들도 비에 젖어 울었으리.
(라)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 선생(先生)
개천 4342[1885]년 8월 4일에 경상도 의령군 부림면(富林面) 입산리(立山里)에서 나셨다. 스물 한 살 때 서울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하셨다가 이듬해 봄에 양정의숙 경제과로 옮기시어 스물 네 살에 마치셨다. 선생은 먼저 교육에 뜻을 두시고 영남 각지에 학교를 많이 세우셨는데 그 중에서도 동래 귀명학교와 의령의 의신(宜新)․창남(刱南) 학교들은 모두 선생의 힘으로 만드신 것이다.
개천 4366[1909]년에는 귀명학교장이 되시어 2년 동안 교편을 잡으시다가 개천 4368[1911]년에 다시 뜻을 세우시고 북간도․연해주를 거쳐 아경(俄京)까지 3년 동안 둘러보시면서 많은 지사․투사들과 깊이 사귀시었다. 그 뒤 부산(釜山)으로 돌아오시어 백산상회를 경영하시니 이것이 겉으로는 대규모로 된 무역상이나 안으로는 항일운동의 연락기관이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부산상업회의소의 부회두와 부산상업학교의 이사를 지내셨으며 또 서울에 계시어 중외일보 사장도 되시었다. 선생의 나이 마흔 아홉 살인 4266년에 다시 만주로 건너시어 발해 고도(渤海 古都)인 영안현 동경성(東京城)에 발해농장을 새로 차리시니 이것은 한갓 크고 넓은 만주벌판에 황지를 개간하고 농장을 경영하여 농리만을 얻고자 함이 아니라 우리 나라는 악독한 식민정책으로 말미암아 농촌경제가 전부 파멸됨을 따라서 해마다 남부여대하고 고향을 떠나서 압록강․두만강을 건너면 반드시 토인의 농노되기를 자원하는 빈농군의 안정책이 여기에 있으니 이 얼마나 큰 사업인가! 또 발해학교를 새로 세우시고 스스로 교장이 되시니 이것은 의무교육을 받을 수 없는 타국땅에서 학령을 잃기 쉬운 빈농민의 자제를 위하여 건전한 제2국민을 기르시려는 것이다. 일찍이 북간도에 가셨을 때 대종교를 믿으시니 이것은 우리 배달나라를 처음 세우신 단군한배검을 받들어서 온겨레가 한맘․한뜻으로 조국정신을 굳게 지키고 민족정기를 새롭게 살리려는 것이다.
선생이 개천 4391[1934]년부터 9년 동안 대종교에 많은 현로(賢勞)가 계셨는데, 교질로는 참교․지교․상교로 오르시고, 임직으로는 경의원 부원장․총본사 전강을 지내시며, 또 교적 간행회장과 천전건축주비회 총무부장으로 근무하셨다.
왜놈이 대종교를 박해함은 그 제국주의의 중대한 정책이었는데, 이른바 대동아전쟁이 발발하자 개천 4399[1942]년 11월에 대종교의 간부 21인을 한 때 검거하였다. 선생도 그 가운데 한사람이 되시어 목단강(牧丹江) 경무처(警務處)에서 구금된 지 9개월 동안 그놈들의 잔인한 고형을 겪으시다가 마침내 세상을 떠나셨으니 때는 개천 4400[1943]년 8월 3일(양 9월 3일)이오, 향년은 59세이시다. 유해는 곧 고향으로 반장하였고, 유족은 아드님 상록(相祿)․상훈(相勳)․상만(相萬)․상두(相斗)․상문(相文) 다섯 사람이 있다.
헌사 안희제 선생 유방을 추모하여
『나라와 함께 희망 잃은 겨레여. 슬기에 어둔 가슴 내손으로 헤치고. 마음의 창을 활짝 열고 배우라!』 귀명학교의 터를 다지고 부르며. 의신학교의 주춧돌 놓고 외치면 길 찾는 젊은이들 구름지어 모여들고.
△ 북간도로 연해주로 아경까지도. 독립지사들과 손잡은 즐거움에 찾았고. 부산항에 돌아와서 시작한 백산상회도. 큼직한 간판에는 표면으론 무역상. 비밀로는 내외항일의 연락기관이었고. 또다시 이역에 주린 동포를 못 잊어서. 발해의 고도에서 선조의 웅도를 사모하며. 농장의 꽃을 피우고 학원의 등을 밝히다.
△ 『나라와 함께 희망 잃은 겨레여. 현실에 헤매는 미로를 버리고. 단군님의 문을 두드리고 믿으라!』. 거룩한 개천절에 계시를 받고. 법열(法悅)을 참지 못해 부르짖은 순정(純情)과. 그 길로 대종교에 바친 빛나는 공헌이여. 그 반만년의 피로 이은 최고의 신앙. 배달정신의 원천(源泉)을 새롭게 길러서. 항일광복의 비원(悲願)을 무장한 투쟁이여.
△ 아-그러나 고국 하늘에는 때가 오지 않았고. 이역 땅에는 운이 얼음장에 얼어서. 개천 4399[1942]년의 목단강의 겨울날이여. 새벽녘 잠자리를 구둣발로 짓밟히고…. 9개월의 고문(拷問)으로 다죽은 몸을. 쓸쓸한 병원침대에 옮기우자마자. 석탄산수의 냄새도 모르고 그냥 가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