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스페인 문학사에서 가장 중요하게 언급되는 작가 카밀로 호세 셀라의 『벌집』. 이 작품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경험한 1940년대 초 스페인을 배경으로, 내전의 상흔이 미처 아물지 않은 마드리드의 처절하고 황량한 일상을 담아낸다. 누구도 전쟁에 관해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지만, 그 끔찍하고 두려운 기억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인물들은 유령처럼 어두운 도시를 떠돈다. 하지만 가난과 절망에 몸부림치는 그들에게도 “잠깐일지라도 희망의 숨구멍을 열어 주는 바람”처럼 낭만과 유머가 머물다 가는 것을 작가는 놓치지 않고 묘사한다. 인물이 아니라 도시 전체가 주인공이라고 할 만큼, 총 300여 명에 달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유기적으로 얽혀 있는 『벌집』은 가난과 공포, 좌절과 탐욕, 사랑과 충동 등 마드리드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면면을 꼼꼼하게 보여 준다.
시대의 비극을 낱낱이 밝혀내는 이 작품은 독재정권의 엄혹한 검열 제도에 부딪치지만, 결국 아르헨티나에서 출간되고 불과 몇 달 만에 20세기의 기억할 만한 작품이라는 격찬을 이끌어 냈다. 소리 내어 우는 것도, 소리 내어 웃는 것도 금기시되던 시대에, 셀라는 이 작품으로 부조리한 세계 속에서 상처받고 소외당한 전 세계 독자들의 마음을 대변했을 뿐 아니라, 파편화되고 일그러진 사회를 보여 줌으로써 오히려 진정한 삶을 향한 대중의 열망에 불을 지핀 것이었다. 그리하여 냉전의 시대가 마침내 끝나고, 셀라는 이 작품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는 영광을 누렸다.
■ 무덤 같은 도시 위로 떠오르는 “영원히 반복되는” 태양
무수한 작은 방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벌집’처럼, 수많은 인간군상이 모여 사는 1940년대 초 마드리드. 이 작품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만들어 내는 춥고 황량한 도시의 공기를, 돋보기로 벌집 구멍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듯 세밀하게 묘사한다. 총 등장인물 수에 대해서만도 이견이 있을 정도로 무수한 사람들이 나오는 이 소설에서는, 작가 자신이 밝힌 바에 따르면 296명의 인물들이 무대에 오른다. 하지만 『벌집』은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집체극이 아니라 한두 명이 잠시 머물다가 사라지는 독백극에 가깝다.
스페인 외곽에 있는 델리시아 카페는 낮이나 밤이나 늘 사람들로 북적인다. 입이 거칠고 탐욕스러운 카페 여주인 도냐 로사는 커피 값을 내지 못하는 마르틴 마르코를 모질게 쫓아낸다. 거리로 내몰린 마르틴 마르코는 추운 겨울 도시를 정처 없이 떠돈다.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시인이지만, 실제로는 군밤 하나 마음껏 사먹을 수 없는 그는 친구나 누이, 돌아가신 어머니의 옛 친구 집을 전전하며 빵과 잠자리를 구걸하며 살아간다. 그가 도시에서 마주치는 사람들도 모두 그와 처지가 비슷하다.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리는 맹인, 소시지 샌드위치와 싸구려 빵을 으적으적 씹는 나이 어린 타이피스트, 암의 고통을 애써 참는 여자, 입을 반쯤 벌리고 침을 흘리는 바보 여인, 무릎 위에 쟁반을 올려놓은 방물장수” 등 모두가 의지할 데 없이 매서운 추위를 온몸으로 견뎌야 하는 불우한 이들이다.
가게 진열장을 들여다보던 마르틴은 대학 때 같은 서클에서 활동하던 나티를 만난다. 지적이고 열정적인 여성 운동가 나티는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여성으로 변했지만, 마르틴은 이내 그녀가 매춘 여성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티에게 10두로를 빌린 마르틴은 도냐 로사의 카페에 다시 들러 보란 듯이 돈을 갚고 승리감을 맛보지만, 남은 돈을 잃어버리자마자 다시 예전의 비굴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간다.
다른 이들도 마르틴처럼 힘겹게 쳇바퀴를 돌리듯 하루하루를 견뎌 간다. 아무리 노력해도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마르틴의 누이 필로, 도냐 로사가 죽어서 재산을 물려받을 날만 기다리는 난봉꾼 돈 로케, 니체를 마음속에 품고 살지만 실제로는 외상값을 떼일까 봐 전전긍긍하는 셀레스티노, 사업에 실패했지만 약자 앞에서는 거들먹거리는 돈 레오나르도, 어머니를 죽인 살인범으로 몰린 동성애자 수아레스 등……. 『벌집』은 겁먹은 표정으로 세상의 눈치를 보며 오늘도 무사히 지나간 것에 안도하는 이들의 무기력한 일상을 건조하게 묘사한다.
■ 헐벗고 굶주린 영혼들이 들려주는 ‘가난한 사랑의 노래’
기승전결이라는 소설의 전통적인 형식을 깬 『벌집』은, 뚜렷한 줄거리 없이 이야기 덩어리로 이어져 있다. 하지만 언뜻 무질서해 보이는 이야기 밑바닥에는 우리에게 긴장감을 불어넣어 주는 고유한 리듬이 흐른다. 그 리듬을 만들기 위해 셀라는 치밀하고도 정교하게 이 작품을 설계했다. 무수한 사람들을 서로 엮으면서도 각각 생생하게 살아 있는 인물로 탄생시켰던 이 작품에 대해 작가는 “솔직히 너무 힘든 작업이었다.”라고 고백한다. 5년에 걸친 끈질기고 고집스러운 그의 노력 끝에 인간의 잔인하고, 무자비하고, 천박하고, 위선적인 이면의 면모들이 능청스러우면서도 절묘하게 살아난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그들을 조롱하기 위해 『벌집』을 설계한 것이 아니다. 척박한 현실의 땅에서 어느 샌가 천연덕스럽게 피어오른 고귀함의 씨앗이 그가 전달하려는 핵심이다.
오, 하느님! 왜 이들이 속아 넘어가도록 그냥 놔두셨나요! 황금빛 찬란한 꿈은 허락하시고선…….
가정을 위해 언제나 뼈 빠지게 일하는 남편을 즐겁게 해 주려는 부인은 잠자리에서 옷을 벗는다. 방에 난방을 할 수 없는 처지인 남편은 아내가 감기 걸릴 것을 염려해 옷을 다 벗을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부인은 그것이 사랑하는 남편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안다. 모든 바람이 사치스럽게 다가오는 불우한 이들도 때로는 자신의 욕망을 충분히 채운다. 거기에도 생의 고단함이 비어져 나오지만, 그들은 그래도 사랑을 한다. 가난하지만, 고귀한 사랑을 한다. 마드리드 외곽의 카페에서, 음습한 사창가에서, 차가운 밤거리에서, 빈민가, 아파트, 공원 터, 지하철역, 도시 곳곳에서, 그러한 숭고한 사랑은 아침이 오기 전까지 계속된다며 작가는 우리를 위로한다.
■ 경계에 선 작가, 카밀로 호세 셀라
검열을 이유로 셀라의 데뷔작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의 서문 청탁을 거절했던 바로하마저도 이 작품을 두고서는 “마침내 우리도 소설을 갖게 되었다.”라고 격찬했을 정도로, 『벌집』은 셀라의 대표작일 뿐 아니라 스페인 현대 문학의 대표작으로 인정받은 작품이다. 하지만 그 문학적 가치를 떠나서 셀라는 아직까지도 뜨거운 논쟁의 중심에 있다.
그는 스페인 내전 당시 프랑코 군에 가담해 참전했을 정도로 보수적인 정치성을 과감하게 드러냈던 작가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발표하는 작품마다 프랑코 정권과 스페인 사회에 대한 준열한 비판을 담아냈다. 프랑코 정권의 검열관이기도 했던 그의 작품들이 검열에 수차례나 통과하지 못한 사실은 무척 아이러니하다.
『벌집』 역시 그의 다른 작품들처럼 전후 스페인 사회의 부조리와 독재 정권의 횡포, 전쟁터 같은 비정한 세상에 내동댕이쳐진 불우한 스페인 민중의 고통을 또렷이 묘사한 작품이다. “소설이 아니라 역사 그 자체”라고 평가받기도 하는 이 작품은, 단순히 과거의 죽은 역사가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 있는 오늘 이 순간의 역사를 살려 낸다. 광포한 사회의 폭력에 겁먹은 사람들, 밥 한 끼라도 얻기 위해 한없이 비굴해질 수 있는 속물들, 공허한 영혼을 채우기 위해 돈으로 사람의 온기를 사고파는 이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볼 수 있는 너무나 나약하고 너무나 인간적인 타락에 그는 집중한다.
하지만 셀라는 그 죄를 개인에게 묻지 않는다. 폐병에 걸린 남자 친구를 위해 순결을 버릴 수밖에 없는 한 여성의 현실이,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어린 소녀가 자신의 아기를 강물에 던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불완전하고 폭력적인 사회 구조에 책임이 있음을 분명하게 제시한다. “비도덕적이고 포르노 같으며 불경하다.”라는 명분을 앞세워 이 작품을 세상에 나오지 못하게 한 검열 당국이 두려워했던 실체가 바로 이것이다.
『벌집』은 1945년에 집필이 시작돼서 1948년, 1949년, 1950년 세 차례나 검열의 벽에 부딪쳤다. 1950년 완성된 다음까지도 끝내 정부의 허락을 받지 못한 이 불운의 작품은 결국 1951년 아르헨티나에서 처음 출간되었다. 하지만 완고한 독재정권의 의도와는 달리, 이 작품은 출간 후 단 몇 개월 만에 2차 대전의 불안정한 국제 정세 속에서 공포와 무기력에 휩싸여 있던 전 세계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 냈다. 또한 몇 년 뒤 스페인에서 정식으로 출간되기 전부터 많은 스페인 독자들은 알음알음으로 이 작품을 손에 넣었고, 지지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작가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떠나, 그가 남긴 작품들이 냉혹한 사회에 맞서 진지하게 항의했으며, 소외받고 학대당한 이들과 함께 아파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문학은 시대를 초월해 오늘날까지도 우리 사회를 되돌아보게 하는 거울 역할을 하는 것이다.
첫댓글 우리도 동족상잔의 비극을 경험했으면서 왜 대작이 않나오는지 문화계에서 안타까와하고 있다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