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국의 차왈릿 용짜이윳(ชวลิต ยงใจยุทธ: 1932.5.15 출생) 장군은 국방부장관으로 정치에 입문하여, 1988-1991년 사이의 찻차이 춘하완(Chatichai Choonhavan) 총리 내각에서 부총리를 맡았고, 1992-1994년 사이에는 내무부장관, 1995-1996년 사이엔 다시금 부총리 겸 국방부장관을 맡았다. 이후 1996-1997년 사이에 태국의 제22대 총리로 재직한 라오스계 조상의 피가 섞인 화교계 태국인이다.(주1)
(사진) 1987년 1월 1일, 사망한 공산주의 반군들의 장례식에 참석한 차왈릿 대장의 모습.
[촬영] Robert Nickelsberg
1996년말 태국에서는 국회해산에 관한 국왕령이 선포되면서, 새로운 총선이 실시되었다. 차왈릿 용짜이윳이 이끈 "신열망당"(New Aspiration Party: 쾀왕마이 당)은 대부분의 의석을 휩쓸었고, 연립정부를 구성키로 한 그 외의 5개 정당(찬빠따나당[Chart Pattana], 사회행동당[Social Action], 태국시민당[Thai Citizen], 세리담마당[Seri Dhamma], 대중시민당[Mass Citizen])의 지지까지 받아, 차왈릿 용차이윳은 1996년 11월 25일 퇴임하는 반한 실빠-안짜(Banharn Silpa-Archa)에 이어 총리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재임 중 아시아경제위기에 따른 여러 정치운동들의 압력을 받아 1997년 11월 6일에 사임했다.
1997년 5월 14-15일 사이에 태국 바트화는 국제투기세력의 강력한 공격을 받았다. 1996년 6월 30일 차왈릿 총리는 바트화를 평가절하하지 않을 것이라 발표한 바 있다. 이러한 발언은 아시아금융위기를 촉발시키는 계기가 됐고, 정부는 국제투기세력에 대항해 바트화를 방어하는 데 실패했다. 왕성하던 태국의 경제는 금융, 부동산, 건설 부문의 냉각으로 정지하면서, 대규모의 노동자들이 해고되어 귀향해야만 했고, 60만명에 달하는 외국인 근로자들도 귀국해야만 했다. 바트화의 가치는 절반 이하로 폭락했다. 1997년 태국 주식시장 주가는 75%나 하락했다. 이러한 경제위기로 1997년 11월 차왈릿 총리는 사임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90년대 초 차왈릿 용짜이윳 장군은 군대에서 운영하는 126곳의 라디오 방송국과 국내 TV 방송국 5개사 중 2개사를 경영했다. 그는 군대가 운영하는 방송국들을 반-에이즈(AIDS) 캠페인에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에이즈 전염 예방을 위한 3년간의 대규모 홍보프로그램인 "메이차이 위라와이댜"(Meechai Viravaidya)를 돕는 데도 협조했다.

(사진) 2009년 10월 21일 캄보디아를 방문한 친-탁신계 정당인 "프어 타이 당" 차왈릿 용짜이윳 의장의 모습. 차왈릿 의장을 만난 훈 센 캄보디아 총리는 탁신 전 태국 총리에 대한 망명처 제공 의사를 밝혀 캄보디아-태국 간 마찰이 일고 있다. [촬영] 태국 MCOT 통신.
2008년 10월 7일, 당시 부총리를 맡고 있던 차왈릿 장군은 국민민주주의연대(PAD: 일명 노란셔츠)가 주도한 국회의사당 주변 시위에서 116명의 시위대가 부상하고 그 중 21명이 중상을 입자, 경찰의 최루탄 진압을 부분적으로 인정하고 사임했다. 그는 사임 성명에서 "이것은 내가 의도한 결과는 아니었지만, 이번 작전에 대한 본인의 책임을 표하고자 한다"고 발표했다.(주2)(주3)(주4) 하지만 해산됐던 시위대는 다시금 국회로 몰려들어 4곳의 출입문 모두를 봉쇄했다.(주5)(주6)(주7)
2009년 10월 2일, 차왈릿 장군은 새로운 친-탁신 계 정당인 "프어 타이 당"(Pheu Thai Party: 태국을 위하여 당)에 입당했다.(주8) 현재 그는 "프어 타이 당"의 의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