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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심결의 핵심 개념은 돈오점수(頓悟漸修)와 정혜쌍수(定慧雙修)이다. 보조국사 지눌은 이 두 개념을 지지하여 수심결을 통해 설파한다. 지눌의 정혜쌍수와 같은 개념이면서도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이 주창하여 교종 위주의 입장을 밝힌 교관겸수(敎觀兼修)도 소개한다. 정혜쌍수는 조계종이 교관겸수는 천태종이 각각 자신들 위주로 선교(禪敎) 통합을 이루고자 주창한 개념이다. 그러나 우리 원불교는 이미 조계종도 천태종도 훨씬 넘어선 극 대승의 회상이자 아예 대승의 완성이자 완전함을 이룬 마지막 회상이다. 우리 회상은 선의 최고 경지인 무시선 무처선을 창안하여 교리의 핵심에 존치시킴으로써 조계종을 이미 압도하였다. 또한 계정혜 삼학의 조화병진을 통한 갖가지 실천적인 수행요법을 시행함으로써 교의 학습은 물론 그 실천적인 자세도 함양하여 천태종 내지 기존불교의 모든 단점들을 일거에 혁파하였다. 이는 우리 회상이 세계종교로써의 귀감이 되고도 남을 완전성과 합리성 그리고 보편성을 획득한 쾌거인 것이다. 아래의 글들은 우리나라의 선과 교의 종지가 걸어온 길을 소개하는 것이니 앞서 올린 보조국사의 소개글과 더불어 그냥 일독하면 좋을 줄 안다. 원종합장.
정혜쌍수(定慧雙修)
선정(禪定)과 지혜(智慧)를 함께 닦는 불교의 수행법.원래 계 (戒)·정(定)·혜(慧)의 3학으로, 선을 닦는 자는 선정에만 치우치고, 교를 공부하는 자는 혜학(慧學)에만 치우치는 폐단을 낳았다. 원래 교란 지식·이론문이고, 선은 실천문으로서 선정과 지혜는 병행하여 닦아야 한다. 고려의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은 선교상자(禪敎相資)의 정혜쌍수를 지도이념으로 하여 올바른 깨달음을 얻도록 하는 실천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이것을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이라 한다. 이는 보조국사 이후 한국 선종으로 대표되는 조계종의 중요한 수행법이 되어 왔다.
교관겸수(敎觀兼修)
불교에서 교리체계인 교(敎)와 실천수행법인 지관(止觀)을 함께 닦아야 한다는 사상. 교관병수(敎觀橙修)라고도 한다. 의천은 천태와 화엄의 양종을 통한 종합적인 불교관을 세워 교와 관을 함께 닦는 것이 불교 수행의 바른 길이라고 하였다. 교만 닦고 선을 없애거나 선만 주장하고 교를 버리는 것은 완전한 불교가 못된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와 같이 선종과 교종이 자기의 것만을 주장하는 폐단을 타파하고 모든 종파가 대동단결할 수 있는 이론적 체계를 담은 것이 교관겸수 사상이다. 그 뒤 교관겸수 사상은 고려 천태종을 중심으로 실천되었다.
요약하자면 교관겸수나 정혜쌍수 모두 교선의 통합을 강조하였지만 그 틀은 약간씩 다르다. 교관겸수는 교종 위주의 통합인 반면에
정혜쌍수는 선종 위주의 통합을 강조한 것이다.
돈오점수(頓悟漸修)와 돈오돈수(頓悟頓修)
돈오점수 [頓悟漸修]
불교에서 돈오(頓悟), 즉 문득 깨달음에 이르는 경지에 이르기까지에는 반드시 점진적 수행단계가 따른다는 말. 이에는 그 이전에 점수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과, 돈오 후에 점수한다[先悟後修]는 주장이 있다. 당(唐)나라 신회(神會)의 남종선(南宗禪) 계통은 후자를 강력하게 주장하여 이후의 선종은 주로 ‘선오후수(先悟後修)’의 입장을 취하였다. 고려시대 지눌(知訥)의 ‘돈오점수론’도 그의 영향을 받았는데, 그는 ‘오(悟)’를 햇빛과 같이 갑자기 만법이 밝아지는 것이고, ‘수(修)’는 거울을 닦는 것과 같이 점차 밝아지는 것과 같다는 비유를 들면서, 만일 깨우치지 못하고 수행만 한다면 그것은 참된 수행이 아니라 하여 선오후수의 입장을 강조하였다.
돈오돈수 [頓悟頓修]
불교에서 단박에 깨쳐서 더 이상 수행할 것이 없는 경지를 이르는 말이다. '단박에 깨치고 단박에 닦는다'라는 뜻으로, 단박에 깨쳐서 구경각(究竟覺;궁극적이고 완전한 지혜를 얻는 경지)에 이름으로써 더 이상 수행할 것이 없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는 중국 선종(禪宗)의 육조(六祖) 혜능(慧能)의 가르침 속에 언급되었으며, 한국 현대불교에 큰 자취를 남긴 성철(性徹)이 돈오점수(頓悟漸修)를 반박하며 제기함으로써 큰 논쟁을 일으켰다. 고려시대 지눌(知訥) 이래 한국불교 수행법의 주류로 이어져 온 돈오점수는 단박에 깨친다는 점에서는 돈오돈수와 같지만, 깨치고 나서도 점진적으로 수행하여야 깨침의 경지를 유지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에 대하여 돈오돈수는 깨치고 난 뒤에도 더 수행할 것이 남아 있다면 진정으로 깨치지 못한 것이라는 입장이다.
출처 : ⓒ 두산백과사전 EnCyber & EnCyber.com
더 쉽게 풀이하자면
돈오점수: 지눌- 돈오: 단번에 깨달음/ 점수: 점차로 닦아나감- 단번에 깨쳤다고 할지라도 아직 습기(과거의 잘못된 습관)의 지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함,따라서 보살행을 통한 점진적인 습기의 제거가 필요하다는 주장
돈오돈수: 성철- 지눌의 깨달음의 논리에 대한 반박: 깨달음은 그 자체로 궁극적인 경지이기 때문에 다시 더 닦아야할 이유가 없음. 만약 다시 더 닦아야 한다면 아직 덜 깨달은 것음.
돈오점수를 주장한 지눌의 입장은 이후 한국불교의 기본입장이었으나, 성철스님이
-선문정로-에서 돈오돈수를 주장하면서 지눌을 비판하는데, 이로 말미암아 돈오점수와 돈오돈수의 해결을 위한 방안을 찾기위한 노력이 현재 진행되고 있다.
위 개념에 대해 돈오점수를 지지하는 수필 한 편을 소개한다. (작자 미상 인터넷에서 퍼온글)
1. 대개 도道에 들어가는 문은 많지만, 요약해 말해본다면 ‘돈오’(頓悟, 단박 깨달음)와 ‘점수’(漸修, 차츰차츰 닦아감)라는 두 문에 불과하다. 비록 “돈오돈수(頓悟頓修, 단박에 깨치고 깨치자마자 더 이상 닦을 것이 없어짐)를 최상의 근기를 가진 사람들은 들어갈 수 있다”고 하나, 그 과거를 미루어 따져본다면 이미 수많은 생을 살면서 깨달음(돈오)에 의지해 닦으면서(점수) 차츰차츰 변화해오다가, 금생에 이르러 진리를 듣자마자 즉시 깨달아 한꺼번에 모든 일을 마친 것이다. 진실을 말해본다면 이것(돈오돈수) 또한 먼저 깨닫고 뒤에 닦은 근기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이 ‘돈오점수’의 2가지 문은 모든 성인聖人들께서 걸으신 길이니, 예전의 모든 성인들께서는 먼저 깨닫고 뒤에 닦으며, 그 닦은 바에 따라 경지를 증득하셨다. 이른바 ‘신통변화’라는 것은 깨달음에 의지해 닦아가는 중에 차츰차츰 변화하면서 나타나는 것이지, 깨닫는 즉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목우자 수심결)
▶ 한 명의 ‘참다운 인간’ 즉 ‘부처’가 탄생되는 과정을 살펴보자. 이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그는 우리네 중생과 동일하였을 것이니, 오감으로 감정으로 생각으로 부지런히 밖으로 치달려서 자신의 참 자아는 까마득히 잊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그가 어느 순간 쳇바퀴처럼 돌고 도는 이 현상계의 변화에 회의를 느끼고, 현상계를 넘어선 ‘영원한 진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한 관심은 날로 커지고, 진리를 찾아 나선 구도의 길은 끝이 없었을 것이다. “과연 내가 찾는 진리는 어디에 있는가?” 앞서 이 길을 걸었던 이들을 찾아 묻고 배우며(聞), 혼자서 연구하고(思), 무수한 명상법을 행하다가(修), 어느 날 문득 그는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그 영원한 진리가 자신의 ‘참 자아’였다는 사실을 확연히 알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감격스러운 ‘견성’의 순간이며, ‘돈오’의 순간이다.
그러나 아직 끝이 아니다. 그동안 무수한 생을 살아오면서 저지른 무수한 ‘생각 말 행위’의 결과물들이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있다. 자신의 ‘참 자아’는 분명 앞서간 부처님들의 그것과 동일하나, 자신의 업보나 습기는 여전히 나의 굴레가 된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점수漸修’가 시작된다.
‘무지(無知)와 아집(我執)의 때가 모두 지워지는 그날까지 닦고 또 닦아야 한다. ‘견성’ 즉 ‘돈오’의 단계가 1단에 해당하며, 쉬지 않고 차츰차츰 닦아감에 따라서 지워진 업보와 닦인 공덕만큼 그 단계는 자꾸 높아진다. 이러한 승단체계는 화엄경(華嚴經) 능엄경(楞嚴經)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등의 경전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이러한 경전들의 승단체계는 모두 ‘돈오점수’의 가르침에 근거를 둔 것이다.
‘돈오’를 체험한 1단의 경지가 ‘나’의 본성을 또렷이 아는 계기가 되었다면, 에고가 지니는 ‘나?내 것’에 집착하는 ‘아집’이 모두 정화되어 나와 남을 평등하게 보는 경지는 7단에 가서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그러나 이 경지는 에고의 ‘아집’은 정화되었으나 ‘무지’가 모두 정화되지는 못하였으니, 에고가 지닌 ‘무지’의 때가 모두 벗겨져서 한 점의 때도 없어지는 궁극의 경지는 12단에 가서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이것이 한 사람의 ‘부처’의 탄생이다. 부처가 걸어온 모든 길을 2가지로 요약하면 ‘돈오’와 ‘점수’일 뿐이다. 항간에서 말하는 ‘돈오돈수’는 ‘돈오점수’라는 장대한 수행 노정의 한 측면일 뿐인 것이다.
2.
‘차츰차츰 닦아감’(점수)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돈오를 하여) 비록 ‘본성’이 부처와 다를 것이 없음을 깨달았으나, 시작 없는 과거부터 익혀온 ‘습기’(習氣, 과거에 지은 업의 종자)를 단박에 제거할 수 없어서, 깨달음(돈오)에 의지해 닦으면서(점수) 차츰차츰 변화하여 공부를 이루는 것이니, ‘성인의 태아’(聖胎)를 잘 기르고 배양함이 오래된 뒤에야 진정한 ‘성인聖人’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이를 ‘점수’라고 한다. 비유하자면 아기가 처음 태어났을 때 모든 감각기관을 이미 갖추고 있는 것이 어른과 더불어 다를 바가 없지만, 아직 그 힘이 충분하지 못하여 세월이 제법 지난 뒤에야 비로소 사람 구실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 목우자 수심결 -
▶ 그대는 그대의 영원불멸한 ‘참 자아’를 각성함으로써, ‘부처의 세계’에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이것이 ‘부처의 태아’인 ‘성태聖胎’이다. 그러나 아직 ‘태아’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태아는 10달간 엄마 뱃속에서 배양되어야 하며, 10달 이후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곧장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른이 되기까지에는 다시 상당한 세월이 요구된다. 이것이 ‘돈오’ 이후 ‘점수’가 필요한 이유이다.
이것이 각종 대승경전들에서 ‘돈오’ 즉 ‘견성見性’을 ‘1지地-1단’으로 보는 이유이다. 태권도를 예로 들면 이제 막 검은 띠를 딴 것이다. 그러나 아직 ‘싹’의 단계이다. 온전한 한 그루의 나무로 거듭 나려면 아직 장구한 훈련이 요구된다. 사실 진정한 묵은 ‘때?업보’를 제거하는 공부는 이제 비로소 시작된 셈이다.
1지 이전의 경지에는 새로 쌓여가는 정신적 ‘때’를 지우는데도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1지의 경지에 도달한 이는 이제 본격적으로 묵은 때, 세세생생 내 마음속에 존재하며 우리를 괴롭혀 오던 일체의 ‘번뇌’를 끝장낼 수 있는 자격이 된 것이다. 우리에게 존재하는 모든 진리를 가리는 ‘무지’와 ‘나?나의 것’만을 부르짖는 ‘아집?욕망’을 한 점의 흔적 없이 모두 지울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정한 ‘부처’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물론 우리의 ‘참 자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항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니, 어찌 업의 굴레를 받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의 ‘에고’는 그렇지 않아서 ‘나 내 것’에 집착하여 구르고 굴러온 세월이 만만하지 않으며, 한없는 세월 동안 쌓아온 업력이 녹녹하지 않은바, 시간 공간 인과성에 의해 옥죄어 있다. 우리가 명상을 통해서 에고를 초월하는 동안은 자유로우나,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 다시 업의 굴레를 쓰게 된다. 이것이 돈오 견성한 이가 처한 처지이다.
그렇다면 “돈오하기 전이랑 무슨 차이냐?”라고 할런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는 엄연히 다르다. ‘돈오’하기 전에는 무엇이 ‘참 자아’인지도 몰랐었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의 안에 존재하는 ‘무한하고 신성한 영역’을 여실히 알았다. 이제 그는 자신이 영원한 존재라는 것에 대해 어떠한 의심도 없다.
다만 그는 현상계에서 살아감에 자신의 묵은 업보를 정화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묵은 업보는 매순간 우리를 ‘무지’와 ‘아집’으로 유도한다. 거기에는 다른 이유가 없다. 과거 우리가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우주의 인과법칙은 냉정하다.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다. 과거 저지른 업보가 하나도 어디로 가지 않는다. 설사 우리가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우리는 자신의 본성을 깨달았을 뿐, ‘전지전능’해진 것은 아니다.
우리가 닦은 만큼 우리는 성장해간다. 우리의 어두운 업보를 정화시킨 만큼, 우리가 나와 남을 위해 공덕을 쌓은 만큼, 무수한 닦음을 통해 우리가 얻은 ‘지혜와 자비’의 수준만큼, 우리는 한 계단 한 계단 진화해 나갈 것이다. 마침내 우리가 우리의 모든 업을 정화시키는 날, ‘참다운 인간’ 즉 ‘부처’가 될 것이다! 온 우주가 그대를 축복해줄 것이다.
★ 추가: 지리산 화엄사의 진진응 스님이 경허스님께 좋은 안주와 술을 올리면서, 스님꼐서 왜 이런 것들을 즐기시는지에 대해 묻자 경허스님께서 답한 시
단박에 깨달아 내 본성이 부처님과 동일한 줄은 알았으나
수많은 생애를 살면서 익힌 습기는 오히려 생생하구나.
바람은 고요해졌으나 파도는 여전히 솟구치듯
이치는 훤히 드러났으나 망상이 여전히 일어나는구나.
[천태종 (화엄종) 과 조계종의 공통점과 차이점 비교]
< 공통점 >
첫째, 천태종과 조계종 모두 교종과 선종을 통합하려 하였다. 이것은 고려 시대에 교종 세력과 선종 세력 사이에 그만큼 갈등과 대립이 심했음을 뜻한다.
둘째, 두 종파 모두 불교계의 정화 운동을 하였다. 천태종은 법상종의 사치성과 보수적, 귀족적 성격을 비판하였고, 조계종은 문벌귀족과 연결된 교종 세력의 타락성을 비판하는 신앙 결사 운동을 전개하였다.
< 차이점 >
첫째, 천태종은 교종의 입장에서 선종을 통합하려 하였고, 조게종은 선종을 바탕으로 교종을 통합하려 하였다. 따라서 천태종은 창시한 의천은 교관겸수 (敎觀兼修)를 제창하였고, 조계종을 창시한 지눌은 정혜쌍수(定慧雙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제창하였다.
둘째, 천태종의 화엄종 교선통합은 조직만을 통합한 불완전한 통합이었지만, 조계종의 선교 통합은 교종과의 조화를 주장하였기 때문에 선교 일치의 완성된 철학 체계를 이루었다.
교관겸수(敎觀兼修) : 불교의 교리체계인 교(敎)와 실천수행법인 지관(止觀)을 함께 닦아야 한다는 사상
지관(止觀) : 지(止)는 모든 번뇌의 끝냄이요, 관(觀)은 자기의 천진심(天眞心)을 관찰하는 것. 어지럽게 흐트러진 망령된 생각을 그치고 고요하고 맑은 지혜로 만법을 비추어 보는 일.
돈오점수(頓悟漸修) : 頓悟는 인간의 마음이 곧 부처의 마음임을 문득 깨닫는 것이고 漸修는 돈오하였더라도 오랜 악습을 제거하고 부처가 되기 위하여 그 뒤에도 깨달음을 꾸준히 실천하는 것. 비록 불심을 깨쳤다하더라도 점진적인 수도와 실천이 계속되지 않으면 이 깨달음은 사라진다.
정혜쌍수(定慧雙修) : 선정(참선하여 삼매경에 이 르는 것)과 지혜(미혹을 멀리하고 깨달음을 성취 하는 힘) 를 같이 닦아야 한다는 것으로 좌선을 제일로 하나 염불이나 경전도 중요시함